사람들은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남에게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글이라도 그 주장이 어떻든, 내용이 어떻든,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글에 자신이 배워야할 것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침묵은 드러냄을 위해 있습니다.
   드러냄이 없다면 침묵이란 존재의미가 없어지지요.
   음악이란 소리를 엮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침묵을 만들어가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당신과 나)가 이해하는 완전한 고요는
   드러냄을 의식한 침묵의 개념이라 볼 수는 없겠지요.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표현한단 말인가.
   하는 분들을 자주 봅니다.
   그 침묵, 무한한 깨달음의 경지와 오만을 그치기 위해 행하는
   표현의 절제가 깊어지려면,
   지금, 알게 된 것들을, 베토벤의 말처럼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야]
   할 것입니다.

   글이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각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생각을 관찰한다는 것이 가능하지요.
    
   실천에 강박관념을 갖지 마십시오.
   지금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영원히 자격없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격없음은 아무런 발전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두려움이나 비관, 절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지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다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는,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미래가 그 모습과 동시에 엮어지고 있습니다.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여, 자격없음으로 지금을 남기고,
   자격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는 생각은
   직선적 시간의식에 지배받기 마련입니다.

   지금 깨달은 바를, 말로, 글로 표현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을 확인하십시오.
   예의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중함과 조심성을 가지고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협화음 투성이의 합창곡이나 악기연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연주회를 찾았는데, 연주 내내, 첼로 주자가 기침을 하면서 연주한다면
   심한 사람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던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바른 말과 고운 말, 남의 가슴을 안아프게 하고, 충고를 할 수 있는 방법,
   등도 얼마든지 있는데,
   위 첼로 주자보다 더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니 말입니다.  

   글이든 말이든, 모든 것은 파장을 지닌 소리입니다.
   특히 가슴을 진동시키며, 목을 타고 울러퍼지는 목소리는
   그 어떤 악기보다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악기이지요.

   악기를 연습하듯
   심각하고 치열하게 목소리나 글을 연습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기표현에 있어, 조율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이 조율이라는 두 글자에,
   우리와 사랑과 배려와 조화가.

   조율을 위해서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드러내십시오.
   궁금증도 깨달음의 글도 드러내어
   남겨진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드십시오.

   완전한 깨달음을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그 과정을 표현과 고민으로 즐깁니다.
   [나는 누구인가]의 단 하나의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닌,
   여러 해답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깊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남에게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또한

   우리는 남과 다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래도 다른데,
   굳이 다르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