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낱 쿠마라

김지하와 여호와의 증인 똥퍼 장씨



박정희 와 김지하

70년대 유신시절 이들의 관계를...
어느 역사 다큐메타리는 라이벌 관계??
로 설정하여 방영하였던 기억이 있다.

서슬이 퍼런 이 시절 양심수 김지하에게 비쳐지었던
여호와의 증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장씨..
"여호와의 증인 장씨"라는 제목의 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 장씨"

똥퍼

장씨는 여호와 증인인데

똥퍼

장씨는 별 두 개 짜리

똥퍼

징집거부 삼 년 징역에 또 징역 삼년

똥퍼

장씨는 편한 자리 간 병부를 지례 마다하고 제일

후진 똥퍼를 지원한 청년

똥퍼

내게 파수대 이바구는 파자도 아예없고

똥퍼

세상소식만 소식만 들려주다 빈대먹방 일주일에 나와서도

다시 통방, 싱글 벙글, 매일 통방

똥퍼 똥퍼 똥퍼

왈 운동한다는 내가 장씨 만할까

똥퍼

장씨 믿음만 할까

똥퍼

장씨 항심만할까

똥퍼

장씨 부드러움만 할까

똥퍼

장씨 우애스러움만 할까

똥퍼

못하다면

분명 못하다면 한참 동안은 그저

똥퍼 똥퍼

똥만퍼


김지하의 시집에서
그의 동료 재소자였던 여호와의증인인 장씨,
그는 병역거부 두번에 전과 2범인데...
편한 간병부(교도소내 병원 의무 보조원-> 알려진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들은 교도소내에서도 신뢰할 만한 재소자로 분류되어, 대체복무 아닌
대체복무를 한다.
그가운데 간병부는 의무 보조원으로 일하는데 편한 보직에 해당한다)
마다하고 똥퍼를 자원한 청년으로 소개된다.

김지하는 이 시에서
"왈운동하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 장씨 믿음만할까?" 라는 질문을 한다.
김지하에게 세상소식만 알려주다, "빈대먹방"(독방의 징역용어)에서
일주일 살고 나와서도, 이에 게의치 않고 다시 "통방"(사방과 사방
사이에서 재소자끼리 이야기하는 일의 징역용어)하는 여호와의 증인
장씨의 의연함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나역시 15년전,
이민이나 유학을 가라던 믿지않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방위병 판정을 받아, 동연배가 많아 영장을 받고도 마냥기다리던 그
시절..
동사무소 방위에게 몇십만원 주고 군대 안가도 된다는 유혹도 있었지만
이런 생각
절대 안한 기억이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여, 교도소에서 똥퍼를 했다.
교도소 소장까지 했던 교정직 공무원 형님이 있었지만 당시 편한 보직
마다하고
똥퍼를 자원해서, 내내 똥만 펐던적이 있다.
교도소 잡범들에게 이유없이 무참히 맞으면서도...
다치고, 휴일없이 힘든 일에 손이 마비가 되어 간병부을
들락거리면서도..
그땐 마음은 평온하고 다른 재소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그 20살
청년이었다.

이제 결혼을 하여 처와 아장 아장 걸어다니는 아들이 있는 내게 "징역"이
기억은 어느 영화속이야기 처럼 동화속 이야기도..
더더군다나 영웅담도 아니다..
지난 15년이란 기간동안 이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갈려고
노력하였다.
정말 "잘 살아왔다고" 얘기하고 싶다.
특히, 재판을 받기 위해 군영창에서 감금되어 있을때
군검사(군법무관)에게 불려가 (지금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군검찰조사과정에서 아마 지금의
임종인 혹은 김두식 변호사같은 군법무관에게서
"한해에도 수백명씩 전과자를 만드는 현실이 안타갑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 힘든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총을 들지는 않지만 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후배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부탁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연히 들어온 이런 사이트에 사회운동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이런 글을 올리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양심적병역거부자는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주어진
현실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최선을 다한 또다른 구성원이다.

미국 유학가서 박사학위받고, 군대 문제때문에 귀국하여,
4주 군사훈련 -> 특례받으면 되는데.. 3년 징역사신 여호와의 증인선배를
보았다.


아직도 꿈에서 그 시절 악몽이 떠오를 때가 있다.
교도소의 체험은 평생에 짐이 될수 있다.
한편 평화주의나 또다른 신념으로 교도소에 있는 이분들이 몸과 마음,
정신 모두 건강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무사히 사회에 복귀하길 바란다.

인터넷 서핑하다 ..
김지하의 회고록을 읽었다.

교도소 완전히 사회와 고립되었던 그 시절에 그에게 독방 감수하고
세상 소식을 들려 주었던 몇 몇 사람들이 언급되었다.
그 가운데 그 똥퍼 장씨가 있어
반가와서 이렇게 퍼올린다.

몇년전 여호와의 증인 장씨를 직접 만난 기억이 있다.
옆집 아저씨같이 보이는 여호와의 증인 장씨,
당시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 장로로서
이주노동자, 베트남어 집단 있는 회중에서 베트남인 선교를
돕는 마련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하는 김지하의 회고록 관련 내용이다)

228. 소리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미치지 않고 견뎌 냈느냐?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나왔느냐?
그렇게 긴 시간 인간 접촉이 끊어지면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이냐? 에잇! 무슨 얘기가 또 있겠지! 물론 있다.
이제부터 얘기하겠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람은 ‘문화상품권’으로 유명한 김준묵 아우다.
김준묵 아우는 성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준묵 아우는 그때 내가 있는 사방의 아래층에 있었는데 그렇게
사방팔방이 차단당한(허허허, 내 방 창문만 아니라 내가 있는 한 사동
전체의 모든 방의 창문에 철판을 때려붙여 막아버렸다. 일본 적군파가
주일한국대사관에 서대문감옥을 습격해 나를 해방하겠다는 삐라를 뿌린
것에 대한 대응이라 한다. 허허허허!) 내 귀에 들리라고 일부러 저녁만
되면 매일 일과삼아서(아아! 그 성의가 놀랍고 놀랍다!) 건너편 사동의
친구를 불러내어 그 무렵 밖에서 일어난 일들과 여러 소문들, 각오들,
생각들을 주욱하니 큰소리로 연설하듯 늘어놓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속내를 다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것도
들통났는지 저녁에 준묵 아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또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똥퍼 장씨’다. 병역거부로 들어와 똥푸는 징역을 살고
있던 장씨가 그쪽으로만 오면 큰소리로 주어 목적어 등을 모호하게 하고
호칭 없이 내용만 상징적으로 떠들어댄다. 나는 그 방면에는 이미 도사가
되어 앉은 자리에서 다 해석하고 만다. 어찌 세상에 대해 접촉 단절이라고
하랴? 참새와 쥐와 개미까지 협조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나를
그대로 내팽개쳐 두겠는가.


(이하는 한양대 국문과 사이버 강의실에서 퍼옴)

1. 똥퍼  


똥퍼

장씨는 여호와 증인인데

똥퍼

장씨는 별 두 개 짜리

똥퍼

징집거부 삼 년 징역에 또 징역 삼년

똥퍼

장씨는 편한 자리 간 병부를 지례 마다하고 제일

후진 똥퍼를 지원한 청년

똥퍼

내게 파수대 이바구는 파자도 아예없고

똥퍼

세상소식만 소식만 들려주다 빈대먹방 일주일에 나와서도

다시 통방, 싱글 벙글, 매일 통방

똥퍼 똥퍼 똥퍼

왈 운동한다는 내가 장씨 만할까

똥퍼

장씨 믿음만 할까

똥퍼

장씨 항심만할까

똥퍼

장씨 부드러움만 할까

똥퍼

장씨 우애스러움만 할까

똥퍼

못하다면

분명 못하다면 한참 동안은 그저

똥퍼 똥퍼

똥만퍼





  이 시는 김지하 시인이 징역 살이를 할 때에 만났던 ‘장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병역거부 두 번에 전과 2범인데 편한 간병부(교도소내 병원 의무 보조원.) 자리를 마다하고 똥퍼를 자원한 청년이다.1) 김지하 시인의 장씨가 편한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것, 통방을 해주는 것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며 그의 너그러움과 의연함을 칭송한다.





1-2. [똥퍼] 속에 담긴 이야기들



① 통방



  통방은 사방과 사방 사이에서 재소자끼리 이야기하는 것의 징역용어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통방에 대해서 김지하 시인의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감방의 뒤편 변기 바깥쪽 창문으로 다른 감방의 벗들과 소통하는 것이 통방이다. 감방에서의 유일한 낙은 면회, 즉 접견(接見)과 통방일 터이다.



혹간 가다 구치소 간부에게라도 걸리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서자마자 그 일을 가지고 또 통방! 그렇다. 통방으로 해가 떠서 통방으로 해가 지는 통방 징역이었다. 통방! 그것은 유신 시절의 메스컴이었던 `유비통신`(유언비어를 그렇게 불렀다.)처럼 우리의 서대문 통신이었다.



  이처럼 통방은 세상과 사회에서 단절되어 심지어는 사람과의 접촉 마저도 단절 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김지하 시인은 독방에 갇혀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안팎]이란 시를 썼는데 그 시에서 그는 교도소 벽돌담 위 풀꽃님, 방 창살 사이 가죽나무님, 참새님, 쥐님, 빈대 모기 파리 구더기님도 계시니 괜찮다고 말한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경이로움을 찾는 김지하에게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까지 들을 수 있는 통방은 그가 절망적인 독방 생활에서 살아남은 이유일 것이다. 통방은 단절된 사람과 사람간의 접촉이며 그것이 곧 살아있음이고 생명이다.





② 똥



김지하 시인은 "똥은 밥의 변화된 물건이다. 똥은 흙으로 돌아가고 여기서 거름이 되어 다시 밥이 된다. 이 때 밥은 먹는 즐거움뿐 아니라 스스로 똥이 됨으로써 남에게 밥을 주게 된다." 라고 말한다.

김지하가 생각하는 ‘똥’은 순환이며 생명이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똥은 흙으로 돌아가며 그것은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거름과 영양소가 되어 다시 사람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③장씨



  이 시에 등장하는 장씨는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청년이다. 김지하의 회고록에 장씨에 대한 언급이 있다.



머리를 박박 깎았고 맨처음 먹방에 배방되었다. 먹방이란 글자 그대로 새카만 방이니 밥그릇 들어오는 식구통만 열려 있고 나머지는 0.78평의 폐쇄된 방, 징벌방이었다...(중략)



어떻게 미치지 않고 견뎌 냈느냐?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나왔느냐? 그렇게 긴 시간 인간 접촉이 끊어지면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이냐? 에잇! 무슨 얘기가 또 있겠지! 물론 있다...(중략)



여호와의 증인의 `똥퍼 장씨`다. 병역거부로 들어와 똥푸는 징역을 살고 있던 장씨가 그쪽으로만 오면 큰소리로 주어 목적어 등을 모호하게 하고 호칭 없이 내용만 상징적으로 떠들어댄다. 나는 그 방면에는 이미 도사가 되어 앉은 자리에서 다 해석하고 만다. 어찌 세상에 대해 접촉 단절이라고 하랴? 참새와 쥐와 개미까지 협조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나를 그대로 내팽개쳐 두겠는가.



  장씨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병역 거부를 하고 대신 옥살이를 하는 청년이다. 그는 간병부와 같이 편한 일자리 대신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똥 푸는 일을 선택한다. 장씨는 김지하 시인을 위해 통방을 하다가 빈대먹방2)에 일주일이나 다녀왔으면서도 다시 통방을 시도한다. 그것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김지하 시인은 ‘왈 운동한다는 내가 장씨만할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병역거부를 하고 옥살이를 자처할 만큼 자신의 종교에 대한 장씨의 믿음, 힘든 일을 자원해서 하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장씨의 항심3),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장씨의 부드러움. 자신도 처벌을 받으면서 까지 김지하 시인을 위해 통방을 하는 장씨의 우애스러움. 김지하 시인은 장씨의 의연함에 겸허히 존경을 표한다.



  이 시에서 장씨는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낸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해야 하는 옥살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너그러운 모습, 그리고 동료를 위하는 마음. 이것은 자신의 상황에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겸허하고 의연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장씨의 강인한 생명력인 것이다.



  생명, 그것은 혹독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로소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