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사실처럼 여기며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만약, 작가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했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필경,그 이야기의 내용이나 교훈 등 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 진위여부에만
  몰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많은 곳에 응용되고, 여전히 읽히며
  사람들 서로가 나눌 수 있는 이유는 [허구]라고 모두
  믿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진실]을 찾기 위해 열망하는 사람이,
  허구라고 널리 알려진 것에서는 교훈을 얻고,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는, 진위여부를 따지고
  편을 가르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모든지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내세우는 것에 있어
  이러한 [소설]이 활용되지는 않죠.
  사람들은, 이럴 때, [검증된 그 무엇]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곳에 와서 느끼는 것은,
  삶의 [환상]을 깨치기 위해, 우주의 영적인 경이로움을 하나 둘
  건드려 가고 있는 사람들이, 도리어 과거의 것에 몰입하려는
  경향입니다.

  위대한 진리는 [삶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환상이죠.
  그렇다고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환상으로 보는 시각이 삶의 더욱 놀라운 교훈과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사실은 심각하지만 환상은 진지합니다.
  사실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우리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주에서는 어떠한 것도 무가치 한 것은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곧 어떠한 [거짓]도 없다는 것이죠.
  아니면 어떠한 [사실]도 없다던지요.

  영혼의 입장에서, 지금 여기의 삶을 보는 연습이 우리에게
  보다 필요합니다.
  또한, 메시지를 대할 때, 그 내용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
  보다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말과 글이라는 것은 다차원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동시성을 표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만약 이것이 음악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떻겠습니까.
  바흐의 대위법처럼 다차원적인 하모니를 듣고 있다면요.
  누구도, 이 음악은 거짓인가 사실인가, 하고 고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전쟁에 대한 [사실]적인 행동은  
  이렇습니다.

  슬픈 전쟁의 광경을 바라보며, 땅을 치며 울부짖으며
  삶을 비관하고, 전쟁을 일으킨 세력을 증오하며,
  반전을 외치며, 메스콤을 주시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과거 삶의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도 없었고,
  어떠한 영적인 서적 한 권 없었다면,
  다른 시각,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있다고 해도,
  우리의 너무나 고독했던, [전설]의 눈사태에 깔려버린
  가엾은 [성자]처럼 됐겠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쇠보다 견고했던 두려움과 비관의 고체가 터지면서
  기억하게 된, 영혼과 희망의 아름다운 빛은,
  그러한 [정상]이라고 믿었던 태도를 바꾸어 놓았고,
  그러한 태도는, 빛을 창조하기 위한 요소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여기에 계신 분이라면,
  전쟁을 보면서, 증오와 절망을 느끼는 일은 중단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만을 낳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전쟁과 사건을 더욱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더욱 다차원적 시각으로 메시지를 접하고, 사건을
  관찰하며, 모든 것은 [빛]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가슴 속의 진리로 증명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스 관련 책에 실린 글인데, 참 멋있는 말이죠.
  이것을 끝으로 두서없는 글을 마치겠습니다.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