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한국은행이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맞게 10만 원 권 화폐를 발행하기로 결정하면서, 10만 원 권 도안의 인물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정부 당국도 여론 수렴을 거쳐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김구 선생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로서는 김구 선생도 좋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존경해 마땅한 독립 운동가이지만,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어필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필연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가 일제 강점기의 그림자를 지워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사적이며 보편 타당한 시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정약용 선생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 어느 곳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위인이라고 믿는다. 다산은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동 시대에 동아시아 사회를 통틀어 정약용을 능가할 학자와 지식인은 없었다고 나는 감히 자부한다.

베트남과의 교류가 많아지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 사그라 들면서 베트남의 독립 영웅 호치민과 관련한 많은 일화들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일화는 호치민이 죽으면서 가슴에 품고 무덤까지 가져간 책이 바로 다산의 '목민심서'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베트남이 영웅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사실 호치민은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평생 동안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후에도 공산주의 국가 지도부에 참여하지 않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오로지 베트남 국민들이 독립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기만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러니 스탈린 보다는 레닌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마오쩌둥 보다는 저우언라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왜 목민심서를 가슴에 품었는지 우리는 반문해 보아야 한다. 목민심서 속에 백성을 받들고 편안하게 하는 지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국가의 발전과 백성의 행복을 추구한 정약용의 고뇌와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하면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떠올리고, 목민심서와 관련해, 일개 관리(官吏)로서의 정약용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곤 한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奎章閣)에서 학문을 하고, 거중기(擧重機)를 만들어 수원 화성(水源城)을 축성(築城)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라는 정도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정약용에 대한 인상이다. 게다가 그의 형인 정약전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위 두 사람이 단지 한 때 성공했다가 좌절한 학자로서, 또는 그런 자의 형으로만 기억된다면 우리 역사에서 그들이 참된 지식인으로서 가지는 의미는 미미할 것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정약용이 관직을 놓고 유배 생활이라는 시련을 통해 걸었던 길을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정약용이 겪어야 했건 시련이야말로 정약용이란 인물의 위대함이 탄생한 배경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약용과 정약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과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정조를 보필하던 형제였다. 유능한 관리로서 정조의 신임도 함께 얻고 있었다. 그러던 두 형제에게 시련이 닥친 계기가 신유박해(申猶迫害)였다. 물론 신유박해는 정씨 가문의 또 다른 형제인 약종이 천주교 신자로 밝혀지고, 그들의 형제도 연루된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은 탕평책을 실시하던 영조 사후(死後) 격화된 당쟁과 간신배들의 출세욕이 신유사화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정조를 대왕의 호칭으로 부르기를 원한다. (내가 수원 출신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 역시 정조를 대왕으로 부르고 싶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있게 들여다 본다면 정약용이라는 인물과 정조라는 인물의 삶의 궤적이 묘하게 겹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부패하고 부조리한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했던 정조 대왕과 다산 정약용이 정신적 동반자였음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지식인 사회의 아집과 보수성과 폐쇄성은 정조의 꿈도 다산의 꿈도 모두 꺾어 버렸다.

다산 정약용이 그 위대함에 비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의 비상이 중도에 꺾여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인물은 어떠했는가? 평생동안 그의 재능과 위대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지식과 예술을 팔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를 원망하며 후학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서양 사회가 다빈치의 위대함을 평가 절하 하는가? 행동하는 지식인, 이름을 떨친 지식인, 성공한 지식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지식인 상에만 빠져있었다. 우리가 살아 온 시대의 격동이, 파고가 이러한 것들을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나약하게 역사의 한 켠으로 물러나는 책상물림들, 무엇인가에 저항하지 않는 샌님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 유약자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상이 아니고 될 수도 없다고 믿었다.

격앙되고 혼돈에 빠진, 미쳐버린 근대의 역사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거리로 나서게 했고, 어떠한 목표에 대해 맹목으로 치닫게 했으며, 무엇엔가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정약용과 같은 지식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고 믿는다.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며, 누가 뭐라던 자신의 갈 길을 가며, 무조건 따르지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아니하는 자,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바로 중용을 갖춘 지식인 말이다. 그러면서도 다산에게는, 목숨을 걸고 천주교를 받들고자 하는 용기가 있었다. (세계에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거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점은 카톨릭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는 점이다.) 지금의 386 세대들이 과거 훌륭한 실천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받는 이유 역시 정약용을 통해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거리로 나서는 용기와 실천력을 갖고 있었지만 냉철한 이성이 부족했다. 정약용처럼 미래를 대비하고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386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유배를 떠난 이후, 정약용의 학문은 조선시대 유학의 깊이와 폭을 한층 향상시킨 새로운 철학적인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또한 그의 형 약용도 수많은 저서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현대 과학으로도 놀랄 만한 연구서로 평가 받는다. 그런데 환경과 권력자들이 그들에게 던져 주었을 시련을 생각해 보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버림받은 처지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역량과 경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세상을 탓하기에 바쁘리라.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지식인의 모습을 ‘슈바이쳐’에게서 찾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물어 보자. 그는 박사로서 오지에서 생활한다는 이유만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도 그의 활약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그가 어땠을지 한 번은 되묻고 싶다. 그래도 그는 정말로 위대한 인물로서 살 수 있었을까. 또한 슈바이처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배경과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정약전, 약용 형제는 어떠했는가. 아무도 그들을 구해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이려고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거나 반역을 하려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왜 억울하지 않겠으며 슬프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담당해야할 사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이루어야 할 것이 학문과 양심이었기에 당대의 평가와 억압은 부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학문적, 철학적 성과가 더욱 존경스러운 이유이다. 우리가 지금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가아길 원한다면,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원한다면, 실천적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지혜로 무장한 지식인을 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좀 더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대한민국을 꿈꾼다면 우리는 10만원 지폐에 다산을 그려넣고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꿈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