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홉킨스 저서  <호모스피리투스>중 발췌



56 페이지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실을 독점하는 조직은 단 한개도 없습니다.

....

영적으로 헌신적이며 최상의 진실에 이르는 길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에게는 많은 것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크리슈나는 의도가 순수하고진정으로헌신적인 이들은 똑같이 신성의 사랑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진정으로 신을 열망하는 이들은 모든 종교를 넘어서 존재하는 무한한 현존(Infinite Presence)의 포옹을 받습니다.


58
마음의 길은 사랑을 무장시켜 진실과 진실의 각성을 향한 헌신으로 이끕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연(즉, 창조)을 '드러나지 않은 것의 드러남'의 표현으로 인식한다.

영성과 진실은 하나로 합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거짓은 파벌주의와 갈등을 낳습니다.


60
자칭 메시아는 대개 조울증의 조증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메시아적 성격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류는 정치 지도자들인데 이들은 그 과대망상적 자만심으로 최면에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영적망상을 분별하는 데는 비교적 능숙하지만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지극히 맹목적입니다.


63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스승의 참나입니다. 비유하자면, 배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등대가 아니라 등대에서 비추는 불빛과 같은 것이지요. 그 빛을 따를 것인지 말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빛이나 등대는 그 문제에 있어서 어떤 이해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들은 그 빛보다는 등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지요.


스승에게는 어떤 빚이 있나요?

-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듣는(배우는) 사람의 관심으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단 하나 감사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스승이 가르친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에고를 초월하고자 애쓰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되 숭배는 오로지 신을 위해 남겨 두십시오.


66

지성이 더 이상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장애라는 사실을 각성할 때, 구도자는 가슴의 길을 통해서든 혹은 의식의 길을 통해서든 마음을 초월함으로써 신에 이르는 길을 가는데 필요한 성숙함에 도달합니다.


의식의 큰 도약은 신에게 자기를 아주깊이 내맡기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의식수준의 측정치가 크게 뛰어 오르는 것 확인됩니다.


74
큰나무는 작은 나무보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식 수준은 의식 진화의 학습곡선과 의식 진화의 단계상에서 어느 한 지점을 나타냅니다.

삶의 기쁨은 어떤 수준에서든 그 수준에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서 옵니다.

매 수준마다 그에 따른 보상이 있고, 그래서 의식 수준들은 사실상 각자에게 똑같이 느껴집니다.


77
모든 것은 저절로 움직이고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우주의 조화로운 춤입니다.


83
제대로만 본다면 쓰레기통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아름답고 완벽합니다.

사랑을 가로박는 모든 장애는 제거되기 위하여 표면으로 떠오릅니다.

마음은 낡은 쓰레기통을 혐오스러운 것으로보는 유일한 이유가 마음의 고유한 프로그래밍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훈련받아야 합니다.

스리게통에 대해 명상하면, 우리는 실상에 '쓰레기'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은 쓰레기가 아니라 수박 껍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식탁위에 놓여있는 동안 그것은 음식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쓰레기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불현듯, 신비스럽게 무슨영문인지 '쓰레기'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사실 그것은 아직도 수바껍질에 불과합니다. 무고한 수박껍질 옆에 깨진 계란껍질이 있습니다. ....


내적으로 만물의 사랑스러움을 보려는 의도를 갖게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완전하고 독특하며, 그 모든 것은 인류에대한 봉사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각성이 떠오릅니다.


92
사랑의 실제적 근원을 찾아 내면을 응시하면 참나를 바견하기에 이릅니다. 태양과 마찬가지로 참나는 항상 존재하고, 무조건적이며, 생각이나 주장이나 태도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참나는 오직 사랑할 수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참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주관적 앎입니다.

나중에는 존재조차도 참나에는 불필요하다는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것은 모든 이원성을 넘어서 있습니다.....

사랑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은 주체도 객체도 필요없습니다. 사랑은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 실상의 성질입니다.


23
인체는 마음이 느끼는 두려움에 영향 받기 쉬운데, 두려움은 마음이 두려운 생각을 품고 그것에 에너지를 부여할 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면역계를 억제하는 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두려움은 경락과 자율신경계통의 기능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성적 기능장애는 실제 질병이나 기능부전으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의학정보라는 것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고 그저 은폐된 정치적 혹은 경제적 목표를 반영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기적 위치성이지만 순진한 대중들은 그것이 객관적인 '과학적'보고를 반영한다고 믿습니다.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습니다.


124
오류가 많은 임상연구들이 학술지에 발표되는데..... 그래서, 부정적인 것에 촛점을 맞추고 치료의 부작용을 강조하는 많은 의사들은, 의식 수준이 더 높고 따라서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는 의사들에 비해 부작용의 발생빈도수가 더욱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 맥락의 악영향이 치료의 이로운 효과보다 그 결과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칩니다.


125 정신과 건강관계
흥미롭게도, 질환의 대다수가 최면상태에서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정신분석의의 환자는 종이 장미에대한 반응으로 천식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그 환자는 최면 상태에서는 진짜 장미에 대해서도 어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지요.

이와 같은 발견들이 정신신체의학 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정신신체의학에서는 억압된 갈등이 증상이나 질환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연구에서, 긍정의 치료효과가 입증되었습니다. 긍정은 특정한 경혈, 근육, 경락과 연결될 수 있는데, 경락은 흉선 기능의 억제와 관련된 기능을 갖는 면역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30
오늘날의 가장 가난한 시민조차도 비교적 가까운 과거 시대에 살았던 가장 부유한 계급에게도 가능하지 않았던 편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다면, 어떠한 인간 조건에 대해서도 대비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131
우리는 운동역학 연구를 통해 비난에 의존하는 것이 의식 수준의 현저한 약화와 힘의 상실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책임전가는 또한 적개심과 분노를 불러와서 계급 갈등과 전쟁은 물론 범죄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12단계 영성 그룹의 지혜로운 기본 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정당한 분노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132 합법적 사회개혁에 대해

힘은 온전성에서, 그리고 자신의 행동과 선택과ㅏ 결정의 결과를 책임지는 자세에서 나옵니다. 모든 선택에는 고유한 위험이 따릅니다.



137 운동역학 실험의 조건

사람이 정직하지 않고 목적이 선하지 않다면, 이 간단한 테스트는 것짓에 헌신하는 이들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 테스트는 이기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인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141 삶과 인생, 그리고 사회는

의식의 진화를 위해서는 폭넓은 기회가 필요하고 또 발전을 위해 거의 무제한적인 선택지를 수용할 수 있는 운동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이 학습과정을 나타낸다면, 사회는 수많은 의식수준들이 보다 굵직한 교훈을 배우는 것은 물론 무한히 미세한 구별을 발전시키고, 밝혀내고, 이해하고, 이와 동일시 할 수 있도록 지극히 광범위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이상적인 학교입니다.

161: 이세계는 과거에 저지른 실수의 결과들을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는 영적 학교로 볼 수 있습니다.





147 혼돈은

'혼돈'은 한계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지각으로는 실상을 다 알 수 없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지요. 혼돈보다 더 나은 용어로 '측량 불가능한', '예측 불가능한'이 있고,. 혹은 논리적 이해와 통계적 분석과 논리적 가능성을 넘어섰다는 말이 있습니다.


148 진화

진화는 지각에 창조의 펼쳐짐으로 나타나며 창조와 진화는 사실상 같은 것


151 종교의 기반

종교는 그 종교를 창시한 신비주의자, 현인 혹은 화신의 깨달음이라는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에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한다는 점입니다. 엄격한 종교적 전통주의자가 그러한 주관의 사실성을 부정한다면 모든 종교는 기반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 붓다. 그리슈나, 그리고 힌두교의 모든 깨달은 현인들은 스스로를 각성했는데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주관적인 현존의 실상/신의 신성에 의해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
156 삶의 목적

문:삶의 모든 것이 실질적으로 의식 수준의 진보에 달려 있다면, 단순한 생존의 요구를 제외하고 그러한 의식 수준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 어떤 노력보다 더 중요할듯 합니다.

답: 삶에 영성을 불어넣기 위하여서는 동기를 바꿀 필요가 있을 뿐이지요. 자신의 진짜 동기를 끊임없이 의식하면 위치성과 함께 반대되는 것들의 짝, 즉 이익 대 봉사나 사랑 대 탐욕과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게 되어 영적 노력에 활용될 수 있지요. ....  과거의 포로로 잡혀 있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 순간이라는 짜릿한 칼날 위에서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습니다.

삶의 목표가 존재가 펼쳐지는 매 순간에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 영적 노력을 통해 사람은 이미 고통의 첫 번째 원인을 벗어난 것입니다.


158 카르마 연구의 가치

사람들은 흔히 이번 생에 벌어지느 일이 과거 생에서 자신이 타인에게 행한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므로서 현재를 원망하거나 불공평하다는 인식을 덜게 된다. ... 카르마 연구는 영적 진보와 이해를 크게 뒷받침하는 치유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2 지구에서의 삶

영은 일시적 시간으로 이루어진 장구한 세월 동안에 진화합니다.

성장과 교정을 위해 지구라는 영적 학교로 주기적으로 환생해서 말입니다. 교정을 마쳤을 때, 지구에서의 삶은 그 가치와 매력을 잃어버리고 인간계로의 재탄생은 그칩니다.


162 카르마란

카르마의 패턴 중에 '나쁜 카르마'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업'이라 일컬어지는 '좋은' 카르마의 쌓임이 있을 뿐이지요. 선업이 없었다면 이번 생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붓다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커다란 행운이며 낭비해선 안될 기회라고 가르쳤습니다. .... 사람들은 이번생에 전생에서 타인에게 저지른 일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그 파문은 이번 생의 물결로 되돌아 오고 있을 뿐입니다.


165 에고는 카르마의 근원

에고는 카르마의 근원이자 저장창고입니다. 에고와 카르마는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167 예수

예수가 카르마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이유?

- 인도나 극동처럼 영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 카르마는 이미 받아 들여진 개념이고 사람들에게 상당히 친숙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당시의 그곳 주민들은 그러한 주제를 이질적인 것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는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돌아오리라고 말했을 때 환생을 인정했습니다(마태복음11:7~14, 17:10~13) 운동역학을 이용한 영적 연구에 따르면 예수는 그 이전에 인간의 삶을 받은 적이 없으며, 사실상 하늘나라에서 곧장 내려왔습니다. 예수의 목적은 신과 하늘나라의 실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임무는 인류의 구원이었습니다.


171 영의 증명

'증명가능'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지각과 정신활동일 뿐입니다. 실상은 주관적이며 오직 대상과의 동일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72 각성

각성은 점차적인 과정입니다. 영적 진보는 에고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함으로써 촉진됩니다. 에고는 무찌르거나 패배시켜야 할 적이 아니고, 정복해야 할 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연민어린 이해에 의해 해소됩니다.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지의 소치이거나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  신은 누구를 편애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173 구도자가 갖어야 할 자세

자신에 대한 의심이나 소심함 대신에 확신과 안심을 갖고 시작하십시오. 자신이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신에 대한 진실에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기겟'다고 굳게 결심하십시오.


177 에고는

에고는 '결정하는 지각'이라는 습관적인 모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제는 지성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이러한 생존패턴의 기본적 형태는 동물의 세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육조차도 일차적으로 생존과 성공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고의 근본 동기는 생존과 이익이고, 이는 한결같이 두려움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  에고는 초월될 수 있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에고의 본성이 아니라 에고를  '나' 혹은 '자기'로 동일시 하는 문제입니다. ...  이러한 에고의 개인의 차이는 에고 자체에 있는 것보다 에고의 프로그램에 노예화된 정도입니다.


180
에고의 영향력을 약회시키는 것은 수용, 친숙해지기, 그리고 연민어린 이해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에고를 강화시키는 것은 자책, 비난, 두려움, 부끄러움입니다.


183 겸손

진정한 겸손이란 한계와 범위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평가와 앎을 뜻합니다.

겸손함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명백백한 사실-인간의 마음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193 참나-존재-

참나는 근본적으로 내재적입니다. 그것은 궁극의 '고향'이며 실상과 앎의 핵입니다. 그것은 있는 전부, 혹은 과거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전체적이고 완전한 '나'이며, 모든 시간과 장소와 조건을 넘어서 있습니다.

궁극적 실상은 일체의 이름 너머에 있습니다. '나'는 각성 상태의 근본적 주관성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실상에 대한 완벽한 진술입니다.


197 신이란

전통적으로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즉, '하늘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라는 것이지요.

붓다는 신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그릇된 개념이 만연했던 까닭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고 합니다.

앎으로서의 참나는 말 그대로 빛으로 지칭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것은 처음에 빛으로 드러난 것이 되었는데, 이 빛은 우주로서의 형상을 위한 신의 에너지의 광휘였습니다.


198 참나

참나라는 용어는 또한 사람이 신과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적 개념을 뛰어 넘습니다.

깨달음이란 분리된 자기라는 환상이 제거될 때의 참나의 드러남입니다.



실상은 근본적 주관성입니다. 분리된 '자기'라는 허구적 '실상'을 포함하는 이원성의 환상이 무너지면, 오로지 참나로서 드러나지 않은 것의 드러남인 무한한 나의 상태만 남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없습니다. 무한한 공간처럼 거기에는 거리, 시간, 기간, 국소성이 없습니다. 일체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일체가 자명하고,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를 드러내며, 전체적입니다.


? 200 지각?

지각은 앎과 마찬가지로 비개인적인 의식의 성질입니다.

절대적 실상이 의식의 기초입니다. ...  의식은 앎의 능력이 있는 무한한 공간과 같습니다. 의식적 앎은 신성한 본질의 성질입니다.

실상에는 주관도 객관도 없습니다.


나.

나I라는 진술은 그것으로 절대적 진실이 정확히 묘사될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하고 정확한 문장입니다. 있다, 없다의 분별조차 필요없는 절대적 실상입니다.


206
고귀한 진실을 접하게 되면 정신 속에서 어떤 갈망이 일어납니다. 붓다는 그것을 꿰뚫어보고, 사람이 일단 깨달음의 진실을 듣게 되면 그보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무수한 생을 거치더라도 결국 그것에 이르게 된다고 설했습니다.



어떤특성이 이해와 변형을 촉진할까요?

- 그것은 헌신, 귀의, 믿음, 기도, 내맡김, 그리고 영감입니다. 장벽이 무너지면, 진실은 저럴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209 참나

참나는 중심적이고, 견고하고, 심오하고, 움직임이 없으며, 변치않고, 비국소적이고, 확산되어 있고,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으며, 평화롭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안정되고, 감정없는 기쁨이며, 무한한 사랑, 보호, 친밀함, 안전, 완전한 충족, 지극히 친숙한 느낌입니다. ... 그것은 눈부시게 명료하고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신성의 성질입니다. 신의사랑과 힘은 하나이며 같은 것입니다.

출처 : Tong - 和而不同님의 책소개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