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저자는 송희식씨 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구소련의 해체를 주장해서 정신나간 놈으로 지탄받다가 정말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던 사람이지요. 문명사와 경제, 세계체제분야의 독특한 시각과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월러스틴 보다 낫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돌 던질 사회과학자들이 많은 관계로 그냥 한국의 월러스틴 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한 글이지만 한번 읽어보세요 많은 걸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21세기 인류문명


21세기 전망

서론 : 근대문명의 장래?



I.시대적 경향

1.적의 소멸, 폭력(군사력)의 약화
2.세계시장의 형성
3.근대국가의 쇠퇴
4.지식의 정보화
5.근대의 종착역



II.세기말의 딜렘마

1.세계시장과 근대국가의 딜렘마
2.지식정보사회와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딜렘마
3.물질주의와 환경문제의 딜렘마
4.불평등의 세계화 : 전세계를 횡단하는 계급화



III.문명의 쇠퇴/붕괴

1.역사의 선례

1)그리이스 문명의 종말
2)로마 문명의 종말

2.서구문명의 전도: 쇠퇴/붕괴 3.낙관주의의 허구



IV.문명적 비젼

1.새로운 비젼 : 문명적 비젼
2.문명전환의 의미

V. 보편정신에로의 회귀

1.탐욕에의 반역
2.보편정신(universal spirit)
3.개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를 넘어서



VI.국가의 분화와 공동체의 재창조

1.근대국가와 새로운 질서의 원리
2.문화공동체, 경제공동체, 정치공동체
3.자본주의시장체제의 변혁--부의 정보화


결론 : 신인류--시간과의 싸움


서론 : 근대문명의 장래?

지금부터 백년 전, 20세기를 5년 앞둔 1895년, 당시 유럽인들 중에 서 불과 20년 후에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20세기가 두차례의 세계대전, 혁명과 내전 등에 의한 대학살의 세기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그 당시는 소위 백년평화(1815 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 후 1914년까지)의 무드 속에 있었으며, 세계대전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도 불과 20년 전, 월남이 공 산화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제 자본주의가 전성기에 있는 이 시 점에, 현재의 일반적인 무드(세계화가 마치 번영과 평화를 약속할 것으 로 생각하는 무드)와는 다른 견해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한 세 대의 기간 내에 우리는 자본주의와 근대서구문명의 붕괴를 보게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장래는 새로운 체제와 문명이 창조될 수 있는가 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I. 시대적 경향
냉전의 종식 이후 오늘의 세계는 몇가지 현저한 시대적 경향을 보이 고 있다. 이것들은 세기말의 현재를 특징지우는 것이다.


1. 적의 소멸, 폭력(군사력)의 약화
이제까지 세계를 변화시킨 근원적인 추진력은 과학과 산업에 의하여 뒷받침된 근대적 폭력(군사력)이었다. 근대사는 근대적 폭력(군사력)이 전세계를 휩쓴 과정이었다. 이제 냉전을 끝으로 미국을 단일 정점으로 하는 세계군사질서가 성립되었다. 서구에 대항하는 적은 사라졌다. 미국 은 세계의 군사적 패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서구문명의 변경(frontier) 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대초기에는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가 서구문명의 변경이었고 적이었다. 서구문명은 변경을 약탈 함으로써 탄생했다. 이어서 제국주의시대에 서구는 이 변경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2차 대전은 서구문명 내부의 적대였다. 뒤이어 냉전이 시 작되자 공산주의권이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였다. 현재 이 모든 적들이 소멸하였다. 서구사회를 내부적으로 단결시켜주는 적이 소멸하고, 서구 문명의 물질적 확장에 영양을 제공하는 변경이 소멸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근대적 폭력(군사력) 자체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적과 변경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군사력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쏘련제국이 순식간에 붕괴하였듯이, 미국의 절대적인 군사력도 과거와 달리 별로 유용하지 못하다. 실제로 미국은 유고내전, 소말리아, 르완다, 북한 등에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군사력 을 사용할 수 없었다. 폭력이란 폭력의 위협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을 때 유용하다. 1명을 죽임으로써 100명을 복종시킬 수 있을 때 폭력은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폭력(군사력)은 죽여야 할 대상이 없거나, 너무 많이 죽여 복종시킬 사람조차 남길 수 없거나, 남은 사람 들도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정보화의 진척에 따라 대량 화한 커뮤니케이션을 폭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폭력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근대적 폭력의 기능이 약화된 것이 다.

압도적인 미국의 군사력도 세계의 분쟁을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것이 군사력에 대하여 경제력이 우위에 서 게 된 이유이다. 나아가 민주주의가 보편화하고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 이다. (독재권력도 폭력으로 대중의 커뮤니케이션을 억압할 수 없게 되 었기 때문이다)




2. 세계시장의 형성
흔히 경제가 세계화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단일세계시장 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열심히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주의권이 시장경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보기술에 의하여 전세계를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로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전세계를 무대로 하는 다국적기업(또 는 초국적자본)이 세계시장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각국이 이를 현실화하 고 있다.

이것은 국가시장(국내시장)과 국가간의 무역이라는 이제까지의 근대 적 구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원래 인류의 경제는 시장보다 원거 리교역이 먼저 발전하였다. 그것이 지방시장 국가시장을 형성하게 하고, 국가간에는 국가가 조절하는 무역관계(과거의 원거리교역)가 성립한 것 이 근대였다. 그런데 이제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고 있고, 원거 리교역(무역)은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던 전세계가 하나의 자본주의시장으로 편입된 것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3. 근대국가의 쇠퇴
근대국가는 근대사에서 역사의 주체이고 단위였다. 근대사는 바로 국가의 역사이고 국가와 국가의 관계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국 가가 점차로 그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근대국가는 지금 두개의 차원으 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효과적으로 대 응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방화의 추세에 의하여 국가가 약화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개별국가를 초월하는 유럽전체의 차원에서 결정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가 그만큼 약화되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국가를 뒷받침한 것은 세가지 기둥이었다. 군대와 관료체제 그 리고 화폐통제권(가령 貨幣鑄造權)이다. 그런데 위와같이 군사력(폭력) 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국가가 경찰이나 군대를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심지어 사회질서나 안전마저 지키 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위계구조를 하고 관료체제는 정보기술의 충격에 의하여 무능력을 드러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전 통적인 관료체제로는 증대하는 복잡성과 지식화하는 사회경제를 효과적 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화폐에 대한 통제권은 정부에서 독 립하고 있다. 근대국가의 권력과 정치로는 경제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시장과 지식정보화의 충격에 의하여 근대국가는 이제 기능적으로 무력화하고 있다.




4. 지식의 정보화
근대서구문명에서 과거의 종교적 교리를 대체하여 인간의 의식을 지 배한 것은 합리적 지식이었다. 합리적 지식은 중세적 미신을 타파하고 인간에게 진리의 등불을 밝혀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리하여 지식은 신념의 근원이기도 했다. 종교를 대신하여 이데올로기(즉 지식에 기초한 신념)가 냉전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식정보혁명에 의해서 지금 지식이 엄청나게 폭발하고 있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1980년까지 축적한 지식 전부가 한권의 책이라면, 1987년에는 두권, 1994년에는 4권 의 분량이 된다.(Journal of Creatia(=creation and Utopia) 성평건발 행 Michael Ray (스탠포드 경영학 교수)가 그 결과가 인간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신념으로 믿었던 많은 진리들이 이제보니 사실은 상대적인 가치를 가진 지식정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중 세시대에 신학교리(지식)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였다. 근대사회 에서도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었고 어떤 지식들은 진리로 생각되 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은 이러한 근대적 믿음에 충격을 가했다. 냉 전의 종식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었다. 중세의 종교적 교리를 대체하여 들어선 절대적인 지식--진리의 이름을 가진 지식--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와 등가의 수많은 지식들이 폭발하고 있다. 이제 지식은 진리 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것에 적용되는 정보이다.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인간과 사회에 충격을 가하고 있다. 하나는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이 지식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지식은 이익이 되고, 힘이 되고, 사회적 헤게모니가 되고 있다. 이 것은 이제까지 근대서구문명을 형성한 물질적 경제적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 경제적 경쟁은 지식의 경쟁으로 대체되고 있다.

둘째,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식의 정보화는 가치관의 준거(準據)를 파 괴시키고 있다. 이성의 밝은 빛이 밝혀낸 지식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 게 공통되는 신념과 가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당신에게 옳은 것이라 해도 나에게는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당신이 그것을 옳다고 믿고 있다>는 정보일 뿐이다. 서구에서 옳은 것이 라하고 아랍권 에서도 옳은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 옳은 것이란 서구사회에 대한 정보 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정신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까지 근대적 사회 와 문명을 받쳐왔던 정신적 기반(서구근대정신)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근대적 이념들은 사회와 세계를 통합하는 설득력을 상실 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이 제 공통의 정신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으며, 인류는 정신적으로 보편적 기반(즉 근대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5.근대의 종착역
이 모든 변화는 근대서구문명의 화려한 성공이 가져온 것이다. 다 시 말하면 근대서구문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완전하게 성공한 결과인 것이다.<<다시 말하면 서구문명은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다.>>>>

근대서구문명이 가장 급속하게 추진한 것은 폭력의 우월성을 확보하 기 위한 무기의 발전이었다. 그리고 폭력의 우월성이 서구문명을 세계화 시켰다. 근대서구문명을 낳은 것은 화약무기였다. 무기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핵무기, 세균무기, 화학무기, 우주무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절 대적인 무기가 바로 폭력을 무력하게 만든 것이다. 서구문명이 발명한 절대무기들은 폭력으로 사용하기--1명을 죽여 100명을 위협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폭력(군사력)의 무력화(無力 化)는 바로 근대서구문명이 일관되게 추진해 온 것이 완전하게 성공한 결과이다.

한편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처 음에는 노예무역에서 시작하여 약탈을 통해 시장을 확장했고, 이어서 제 국주의적 방식으로, 그리고 세계분할로 시장을 확장했으며, 마침내 냉전 이 종식됨으로써 전세계를 하나의 단일시장을 완성하였다. 징기스칸도 폭력으로 서로 다른 문명권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었다. 그러나 근대서구 문명은 폭력만이 아니라, 시장의 확장이라는 경제적 방법을 통하여 전세 계를 하나의 문명권을 묶었던 것이다. 이제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의하여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은 국가의 발전과정이었다. 이제 국가는 인류역사상 최 강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같은 국가를 창출했다. 또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를 완성했다. 혹자는 민주주 의에 대한 관념적 이상(理想)의 기준을 세우고 현실의 민주주의를 비판 하지만, 그것은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 {The Future of Democracy})의 지적과 같이 현실성을 벗어난 관념적 유희일 뿐이다. 이 제 어떠한 국가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도 없다. 오늘의 국가는 근 대의 종착역이다. 그런데 그 완성된 국가가 무력한 국가로 되어버린 것 이다.

지식의 정보화도 역시 근대서구문명의 완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이루어진 지적 발전의 극점에 이르러 이제는 지식의 폭발현상 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의 폭발이 바로 지식을 정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이 위대한 진리의 지위를 차지고 있 었던 것은 지식의 희소성 내지 독점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희소한 지식 이 진리의 외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의 희소성 내지 독점성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이것 역시 근대서구문명이 극적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결국 근대서구문명은 이제 그 성공에 의하여 종착역에 이른 것이다. 그 다음 역은 어디인가? 이러한 시대--이제까지 타고 온 열차의 종착역 --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재이다.

이제 우리의 주제는 이 종착역이 안전한지, 이 종착역이 낙원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역이 있는지, 우리는 이제 비행기 로 갈아타야 할 것인지, 갈아탈 수 있는 비행기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II. 세기말의 딜렘마
현대의 비극은 근대서구문명이 완성됨으로 인하여 이제까지의 내부적 정합성(整合性)이 붕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은 다음과 같은 내부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자본주의시장체제는 근대국 가에 의하여 보호되고 조절되는 것이었다. 근대국가 내부의 계급갈등, 외부의 국가간의 갈등은 폭력(경찰력, 군사력)에 의하여 해결되는 구조 였다. 한편 이성에 바탕을 둔 지식의 발전은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고, 지식의 상식화로 개인을 국가로 통합하는 공통의 신념을 제공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체제의 내부적 정합성이 붕괴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기말의 딜렘마>를 생성하고 있다.


1.세계시장과 근대국가의 딜렘마
근대문명의 경제적 구조는 <국가가 보호하고 조정하는> 시장체제였 다. 그런데 이제 세계시장이 형성됨으로써 국가가 시장을 조절할 수 없 게 되었다. 국가가 조절하기에는 시장이 너무나 커져버렸다.오늘날 어 떠한 국가도--미국이라고 할지라도--세계시장을 조절할 수 없다. 미국 은 2차대전 직후 자본주의 세계생산의 거의 50%의 생산을 차지하고 있었 다. 따라서 미국이 자국의 시장을 조정하면 그로 인하여 자본주의 전체 의 경제를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레스터 더로우(Lester Thurow:{Head to Head})는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기관차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경제 적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시장체제가 자기완결(또는 자동조절)적이 아니라는 것은 경 제학적 상식이고,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신고전파경제학이 지배 할 동안에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자동조절된다고 믿고 있 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대공황은 이러한 믿음을 여지없이 파괴하였다. 케인즈는 국가가 보정(補正)하지 않는 시장은 투자수요의 불안정성에 의 하여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없고 공황에 빠져든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즈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장을 (국가가 보정하지 않고) 그 대로 내버려 둘 때, 공황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진실로 믿는 경제학자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이점은 더욱 명확하다. 서구 각국의 국내시장은 항상 국가가 앞장서서 비서구지역을 약탈하거나 식민지로 지 배하거나 함으로써 성장해 왔던 것이다. 2차 대전 후에 미국은 거대한 생산력과 국내시장을 배경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케인즈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결국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안고, 마침 내 세계시장을 보정하려는 정책을 버렸다. 이제 미국은 작은 국가를 노 골적으로 억압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개별국가로 전환하 였다. 결국 오늘의 딜렘마는 경제는 세계화하였는데, 국가는 여전히 지역국가라는 것이다. 세계시장을 보정할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간의 협조로 또는 선진국간의 협조로 세계시장에 임시로 대응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같이 지역경제공동체를 형성하여 국가를 초 월한 시장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단일 국가로서도 국내시장을 조절하기 어려웠는데, 국가간의 협조나 경제공동체의 경제기구로 세계시장을 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첨예한 예가 세계금융체제의 불안정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실물부문에 비하여 금융부문이 너무나 비대해졌다. 투기적 금융거래가 시장에 실물거래에 관련된 금융거래의 37배 내지 120 배에 달하고 있다.(1995년 런던시장 120배, 동경시장 37배, 뉴욕시장 38 배). 이 금융부문은 어느 국가도 보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최근 달러폭락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은행이 동경외환시장에 3월 <한달> 에 1백억 달러를 투입했으나 동경외환시장의 <하루> 평균거래량이 2천억 달러 규모이다).

이러한 실상이기 때문에 오늘날 경제체제는 다국적 기업의 한 직원 의 투기실패가 세계경제 전체에 충격을 가할 수 있는 매카니즘이 되어 버렸다(베어링사의 경우). 또한 한 국가의 경제전체가 몇몇 투기가들의 행동에 의하여 공황상태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최근 멕시코의 경우). 환율과 주가의 급격한 변동도 국가들은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 세계경 제는 그 화려한 표면의 바닥에 공황의 함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는 힘을 가진 경제주체(가령 세계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근대서구문명의 가장 중대한 기반--경제체제--가 심각한 딜 렘마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시장과 지역국가(근대국가)는 조화될 수 없다. 근대체제는 이제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체제이다.<< <<세계시장이 국가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거나 국가가 세계시장을 파괴할 수 밖에 없다>>>>



2. 지식정보사회와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딜렘마

사이비 예언가들은 지식정보혁명에 의하여 인류의 미래가 장미빛인 것처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정보화가 사회에 미치는 가장 큰 영 향은 고용구조와 분배구조의 악화이다. 지식정보화는 전통적인 산업부문 (제조업 등)의 고용을 급속하게 감소시키고 있다.(가령 세계 500대의 거 대기업은 지난 1980년에서 1993년 사이에 440만명을 해고했다. 그럼에도 같은 기간에 매상은 1.4배 자산은 2.3배로 증가했다). 지식정보화는 분 명히 산업사회의 종언을 고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산업부문에서 배출되는 고용인구를 흡수할 산업분야가 없다.

근대의 산업사회는 한마디로 말하여 농업고용인구의 비중이 70--80% 수준에서 20-5%의 수준으로 변화한 것이다. 근대문명이란 결국 공업문명 (산업문명)이다. 그런데 이제 그 공업(제조업 등)의 고용인구의 비중이 과거의 농업과 같은 처지로 가고 있다. 현재 미국의 제조업의 고용인구 는 전체의 18% 정도이고, 2010년에 이르면 물건을 제조하고 운반하는 노 동자는 10%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Peter F. Drucker : {Post-Capitalist Society}). 문제는 현재의 자본주의시장체제에서는 이렇게 공업에서 배출되는 인구를 흡수할 수 있는 산업이 없다는 것이 다. 흔히 말하는 지식정보산업은 결코 많은 인구를 고용할 수 없다. 전 통산업(제조업 등)에서 배출된 고용인구는 대부분 그 보다 수입이 적은 하층 서어비스업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충분한 것이 아니 다. 그 결과가 실업의 증대와 분배의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은 지 금 스페인의 25%를 비롯하여 평균 10%대의 실업률이 일반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실업률은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 다. 자본주의시장체제에서 지식정보혁명의 결과는 결국 실업과 분배의 악화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시장체제는 본질적으로 지식정보사회와 어울리지 않 는다. 자본주의시장체제는 물질적 재화와 같이 배제성(排除性 excludability:한 사람이 소유하면 다른 모두 사람은 소유할 수 없는 성 질)을 가진 상품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은 비배제성(非排 除性)을 본질로 한다. 그리하여 현재는 법률적 조작에 의해 인위적으로 배제성을 창출한다. 그러나 지적문화적 상품의 비중이 증대할수록 이러 한 인위적 조작은 분쟁을 증대시킬 것이고, 경제적 분배가 법률적 투쟁 의 문제로 되어버릴 것이다.

한편 정보가 이윤의 원천이 될 때에 경제는 결국 생산보다는 정보를 가진 사람이 돈을 벌게 된다. 이러한 성격은 금융부문 비중의 증대와 함 께 경제를 투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투기하는 자 가 더 많은 돈을 벌고, 다수가 투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자본주의는 카지노 자본주의이다(Susan Strange:{Casino Capitalism}). 이것은 결국 우리가 공황의 위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 다.

지식정보혁명은 산업혁명과는 그 성격이 다른 변혁이다(지식정보기술 은 산업기술적인 성격이라기 보다는 사회조직기술 내지 문화적 기술이 다) 제3의 물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식정보산업이 과거의 공업과 같이 고용을 대량으로 흡수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지식정보혁명은 분명히 근대서구문명의 기반이었던 산업사회를 끝 장내고 있다. 우리는 탈산업사회로 가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시장체 제가 이 새로운 사회에 맞지 않다. 지식정보혁명이 자본주의시장체제를 파괴하든지, 아니면 자본주의시장체제가 지식정보혁명을 (문명의 쇠퇴를 통하여) 중지시킬 것이다.



3.물질주의와 환경문제의 딜렘마
<<<<중국과 인도의 24억 인구(미국의 12배)가 서구식의 산업화를 하 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구를 환경재난에 빠뜨릴 것이다. 그렇다 고 서구식의 방식이 아닌 산업화---오염없는 산업화가 가능한 것도 아니 다>>>>>>>

서구 중세의 종교적 세계를 벗어난 근대서구문명의 본질은 세속적 물질적 발전이었다. 이제 그 물질문명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까 지 부(富)는 무조건 좋은 것이었고, 이를 향하여 진보의 신화, 경제개 발의 신화가 우리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물질주의는 더 이 상 선진국 국민들의 기대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현대는 기대체감의 시 대라고 말해지기도 한다(Paul Krugman:{The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 물질적 풍요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 가 물질적 풍요의 한계효용 그 자체가 체감하고 있다. 오늘날 개개인에 게 풍요를 실감하게 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한다. 그에 비해 물질적 풍요의 진전은 대단찮은 것이 되었다. 이미 풍요의 찬 가는 사라졌다. 우리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부유한 자들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금융자산의 축적을 추구한다.

여기에 환경문제가 물질적 발전의 신화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했 다. 환경문제는 자유재(自由財: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재 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오염없는 생산과 소비는 없다. 물질적 생산소비는 동시에 오염의 생산과 축적이다. 진보와 개발은 쾌락만이 아 니라 고통도 함께 야기한다. 현실적으로 실감할 수 없는 경제성장의 수 치(數値)보다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고통의 증대가 더욱 현저한 것이 되 었다. 환경문제는 무제한한 물질적 진보의 신념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 리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더 높은 성장(수치적 성장)을 포기해서라도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장되고 있다.

근대서구문명은 환경문제를 논외로 삼았다. 영국이나 미국이 경제성 장을 할 때에는 누구도 환경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연이 물 질적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것이다. 말하자면 근대서구문명은 이 제 <자연의 적대>에 부딪친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의 원동력이 물질적 성 장인데도,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면, 근대서구문명자체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근대서구문명이 부딪친 또 하나의 딜렘마이다. 서 구인에게 문명이란 자연의 정복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속에 사는 것이지, 자연의 시체 속에 사는 것이 아니다.


4. 불평등의 세계화 : 전세계를 횡단하는 계급화

1992년 세계 인류의 20%가 세계 부(富)의 82.7%를 차지하고 있으 며, 가난한 20%의 사람들이 세계 부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상층부 20%의 사람들의 소득합계는 하층부의 20%의 사람들의 소득합계의 60배에 이른다. 이것은 1950년대에 비하면 그 격차가 2배나 벌어진 것이다(그 때는 30배였다: UNDP 1992년 판 <인간개발보고서>). 유엔개발회의는 이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세계의 분배구조가 <샴페인 잔>과 같이 생겼 다고 한다.

이러한 인류의 불평등과 계급화는 다음 세가지 원인에 기인한다. 첫 째, 경제의 세계화에 의하여 부유한 자는 전세계를 무대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의 약화는 재분배정책(내지 복지정책)을 불가능하 게 만들고 있다. 재분배정책을 감행하면 세계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둘 째, 자본주의시장체제에서 지식정보혁명은 인간을 또 하나의 측면에서 불평등하게 만든다. 과거에는 자본소유가 유일한 불평등의 주요한 원인 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에 더하여 또 하나의 요소 즉, 지식정보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사이에 분배격차가 야기되고 있다. 이제 가난하 고 무식한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 천한 서어비스업에 종사해야 한다. 세 째, 이러한 불평등구조가 세계전체를 무대로 국가간의 불평등,각국 내부 의 불평등이라는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불평등이 세계화하고 있는 것이 다.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지적대로 자본주의시장체제는 불평등 을 본질로 한다(불평등은 시장의 본질에 속한다). 근대문명에서 이러한 불평등과 계급화는 국가에 의하여 제어(制御)되었다. 국가는 세가지 방 식으로 계급화를 제어해 왔다. 첫째, 복지정책과 같이 재분배정책으로 불평등을 완화했다. 둘째, 폭력(군대)에 의하여 가난한 계급의 무장행동 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즉 노동자 계급은 굶어죽을지라도 무장행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째, 부유한 국가는 가난한 국가(과거의 비서 구국가)를 폭력에 의해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가령 약탈을 하고 식민지 로 만들어도 그것이 서구문명을 파괴하지는 않았다(오히려 서구문명을 발전시키는 영양을 제공했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되 었고, 역전되고 있다. 우선 국가는 재분배정책 내지 복지정책을 포기해 버렸다. 가난한 계급은 범죄라는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약 과 범죄의 증가는 선진국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선 진국은 후진국을 폭력(군대)으로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왜 우리시대에 세계의 주변부에 내전이 빈발하고 난민의 문제가 중 대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시장체제가 생존을 보장 할 수 없는 지역의 불가피한 반응인 것이다. 근대사는 중심부가 주변부 와는 상관없이 또는 주변부의 착취를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온 시기였다. 주변부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것이 문명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못했 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역전되고 있다. 주변부의 황폐화가 중심부를 위 협하고 있는 것이다. 승자의 역사가 끝나고 패자(敗者)의 역사가 시작되 고 있는 것이다.

세계시장과 근대국가의 딜렘마, 지식정보혁명과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딜렘마, 물질주의와 환경문제의 딜렘마, 전세계를 횡단하는 계급화, 이 러한 세기말의 딜렘마는 근대서구문명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 은 단순한 부작용인가? 아니면 문명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근원적인 문제인가?



III.문명의 쇠퇴/붕괴


1.역사의 선례

오늘날 인류문명(근대서구문명)이 부딪치고 있는 딜렘마는 문명자체 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근대서구문명을 이끌어온 기 본적 장치--근대국가, 자본주의시장체제--가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하여 역사적 선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 다. 그리이스 문명의 종말은 세계화한 시장과 지역국가간의 딜렘마를 해 결하지 못함으로써 붕괴한 예이다. 로마문명의 종말은 적이 사라진 상황 에서 문명권 전체를 횡단하는 계급화의 딜렘마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문명이 붕괴한 예이다.

1)그리이스 문명의 종말

근대서구문명에 대한 전망함에 있어 이를 그리이스문명과 비교하는 토인비(Arnold Toynbee:{Civilization on Trial})의 혜안은 지금도 여 전히 유효하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근대서구문명은 그리이스문명을 붕 괴시킨 것과 동일한 딜렘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이스는 수백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 세기 경에 중대한 경제혁명이 일어났다. 그리이스가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국가를 건설하면서 그리이스 경제가 세계화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 라 그리이스는 과거의 자립적인 혼합농업을 포기하고 포도와 올리브 등 특화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세계화된 경제>에 대하여 수백개의 <도시국가체제>는 정합성(整合性)이 없는 것이었다. 공통의 교역질서와 합리적인 세계분업체제, 해상의 안전 등 모든 면에서 그리이스는 도시 국가체제를 초월해서 전체를 통합해야 하는 시대적 도전에 직면했던 것 이다. 그리이스 전체가 하나의 <영토국가>로 통일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국가 단위의 민주주의 체제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리고 그리이스 전체를 포괄하는 영토국가의 민주주의 는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전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포괄하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리이스는 한동안 델로스 동맹에 기초하여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아테네제국주의(또는 동맹체제)로 이에 대처하려고 하였다(오늘날 미국 이 세계경제질서에 패권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러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가 전쟁 을 야기하였고,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일시 스파르타가 맹주 가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다시 테베-아테네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테베는 패권은 이미 그리이스문명의 종말이었다. 그리이스는 도시국가체 제를 초월하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다. 교역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에 옮겨지고 그리이스문명은 종언을 고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시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공황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는) 세계국가가 건설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이스 전체의 영토국가가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국가는 불가능하다. 근대의 자 유민주주의 국민국가는 그리이스 도시국가의 민주주의(지배계급의 민주 주의)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적용될 수 없다. 이제 자유민주주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질곡이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다수의 국가가 평 화적으로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같은 문명권에 속한 유럽인들도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절하지 못하게 두차례나 세계대전 을 일으킨 것이 근대사이다. 러시아, 중국, 일본, 아랍, 유럽 어느 문명 권이 아테네(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스파르타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세계시장과 근대국가의 구조에서는 평화란 없다. 그리고 새 로운 전쟁은 문명의 붕괴인 것이다.

2)로마 문명의 종말

로마문명은 적이 있을 때, 번성하였다. 적은 내부를 단결시키고 갈 등을 억압한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정복사업을 중지하 였다. 더 이상의 정복은 비용이 많이 들고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이것 은 오늘날 폭력의 기능이 약화된 것과 같다). 그렇다고 주변부(가령 蠻 族)가 로마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하는 상황도 아니었다(이것은 오늘날 냉전종식과 함께 대적구도가 소멸된 상황과 같다). 그리하여 정복사업 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정복사업의 중단과 함께 로마는 쇠퇴하기 시작 하였다. 로마의 지배계층, 또는 중심부의 부유한 자들은 적이 없어진 상 황에서 타락으로 빠져들었다. 지배계급은 목적을 상실하였다. 네로는 시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로마를 불태웠고, 대중에게는 콜롯세움에서 잔인한 오락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번영 이면에는 속주(屬州)의 인민과 하층계급 그리고 이주(移住)한 만족(蠻族)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 위대한 로마가 내적 외적 프로레타리아트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그 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생존하기 위한 몸부 림은 기존의 세계에 무질서를 증대시켰다.



점차 로마제국 중심부와 지배계급도 충분한 부를 확보할 수 없게 되 었다. 기존의 공납제도 및 시장체제가 국가와 지배계급, 로마시민을 위 한 부(富)를 충분히 조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개혁조치가 시행되었다. 로마시민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필품에 대한 가 격을 고정시키고, 세금징수를 증대시키고, 농민의 도망을 금지하여 농민 을 토지에 결박(結縛)하고, 하층계급이 직업을 바꾸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의 시장체제를 파괴되었다. 고정 가격으로 채산성을 상실한 속주(屬州)들은 판매를 위한 생산을 중지하고 지역적 자립경제체제로 변화되었다. 농민은 토지에 결박되어 농노로 되 어 갔다. 질서는 붕괴하고, 도시는 약탈당하고, 경제는 자립화하고, 농 민은 농노화하여 중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의 경제는 고사(枯死)하여갔고 그와 함께 로마문명도 쇠퇴해갔다. 게르만의 용병이 로마의 권력조직을 와해시킨 것은 이미 그전에 죽어버린 시체(로마)를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혁명이 문명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 러나 문명 전체를 횡단하는 불평등(계급화)은 결국 <야만과 종교의 승 리>(Edward Gibbon)를 통하여 문명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적이 없어지고 부유한 자가 안심하고 전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부유하고 만족(滿足) 하는 계급이 가난한 자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자신들의 부의 기반은 세계적이고 국내의 가난한 자와는 상관없는 상태--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의 생존의 몸부림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 게 만든다. 그들은 범죄자, 약탈자, 폭동자,난민이 되어 생존의 몸부림 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자(敗者)들의 몸부림이 질서와 문명을 파 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敗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갈브레이드는 만족계급(滿足階級)이 지배하는 미국은 결국 경제적 파탄, 군사행동, 하 층계급의 반란과 같은 길을 걸을 것이며, 유감스럽지만 미국에 <희망이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J.K.Galbraith: {The Culture of Contentment}) 이것은 로마가 걸었던 길이고, 미국만이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의 운명이 기도 하다. 질서를 파괴하는 패자(敗者)의 폭력이 마침내 과학기술의 발 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사회간접자본을 보수할 수 없게 만들 때, 새로 운 중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이스 로마문명이 붕괴한 선례는 그 후예인 근대서구문명(오늘 의 인류문명)의 장래를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근대서구문명을 극복하 지 못한다면 그것이 인류의 문명을 붕괴시킬 것이다.


2.서구문명의 전도 : 쇠퇴/붕괴

우리가 현실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경향을 파악한다면 근대서구문 명의 전도는 명백하다. 근대서구문명은 붕괴/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 세계화한 경제에 대하여 근대국가는 낡았다. 그것은 마치 그리이스 의 도시국가와 같다.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도 그리이스의 민주주의와 같다. 만인이 찬양하고 있는 자본주의시장체제도 낡은 것이 되었다. 국 내적 국제적 계급화(불평등화)를 폭력(경찰, 군대)이 제어하지 못할 때, 그리고 국가가 시장을 조절하지 못할 때, 자본주의시장체제는 재앙의 원 천일 뿐이다. 나아가 지식정보혁명에 의하여 산업사회가 종언에 이르고 있으며 그것은 근대문명의 종언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도 세계 다수의 국가는 여전히 산업화의 도정에 있다. 그러나 그 산업화는 과거의 산업 화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환경의 압력, 지식정보화의 압력과 함께 진행 되어야 하는 산업화인 것이다. 그러한 산업화의 과정은 성공이나 실패와 상관없이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킬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근대 국민국가, 자본주의시장체제 등은 우리에게는 너 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너무나도 당연한 실체들이 진부화하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당연한 것의 진부화(陳腐化)---이것이 문명 의 쇠퇴이다.

세계시장과 근대국가의 딜렘마, 지식정보사회와 자본주의시장체제의 딜렘마, 전세계를 횡단하는 계급화의 딜렘마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류 문명은 붕괴하거나 쇠퇴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 딜 렘마를 해결한다는 것은 서구문명 자체가 변혁된다는 의미이다>>> 그 시 나리오는 그리이스문명과 같이 급격한 것일 수 있다. 즉,환경재난, 공 황, 폭동, 주변부의 내전, 중심부의 타락, 전쟁과 같은 급격한 것일 수 도 있다. 이것은 노스트라다무스나 기타 많은 예언가들이 그리는 지구 종말의 시나리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직관적 인식이 이성적 분석에 선행하는 법이다).

다른 방식으로 로마문명과 같이 오늘날 인류문명이 천천히 고사(枯 死)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시장체제는 이론적으로는 파괴될 수 없는 것 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어도 여전히 경제적 교환과 시장은 존 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시장체제는 파괴되는 것이 아 니라 새로운 것에 의해 대체(代替)될 수 있을 뿐이다. 기능이 쇠퇴하여 재앙을 야기할 뿐인데도 대체되지 못할 때, 바로 문명이 고사(枯死)하고 쇠퇴하는 과정에 빠지는 것이다. 문명이 붕괴하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 한다. 막을 능력이 있는 자(부유한 자, 중심국가)는 동기를 가지지 않 고, 동기를 가진 자(가난한 자, 주변국가)는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 다.

우리의 결론은 간결한 것이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시장체제를 극복 하지 못한다면 인류문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근대국가 는 과거의 근대적 기능을 상실하고 지역적 전쟁의 단위일 뿐이다. 자본 주의시장체제는 과거의 물질적 성장의 기제가 아니라 불평등과 공황의 기제일 뿐이다. 이제 자유민주주의는 과거의 자유와 인권의 기제가 아 니라 초국가적 연대를 질곡하는 기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체제가 야기시키는 비극적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중진국이나 선진국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결론이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중심부의 화 려한 외관은 우리를 기만한다(로마시도 제국의 멸망할 때까지 화려한 외 관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고 상상해 보라. 화려한 중심부는 대양의 섬에 불과할 뿐이다. 진보는 중심부에서 시작하지만 쇠퇴는 변경에서 시작하는 법이다(그래서 중심부의 사람들은 끝까지--파멸이 자신들에게 직접 다가오기까지--쇠퇴를 믿지 않는 법이 다.)(拙著: {자본주의 우물을 벗어난 문명사}참조)


3.낙관주의의 허구

문명이 고사(枯死)하고 쇠퇴하는 동안 현체제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세계의 부유한 사람들)은 여전히 장미빛 미래를 이데올로기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나중에 죽을 사람들이고, 그들의 눈에 는 세계는 아름답고 미래는 밝게 보이며, 그 밝은 이데올로기가 불만자 들을 마비시킴으로써 그들을 안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많은 서구주의자들은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시장체제가 제공하는 장미 빛 미래를 노래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역사의 종언론이다. 후꾸야마 (Fransis Fukuyama:{The end of History})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역사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탈역사지역에서는 더 이상 체제적 개선의 여 지가 없고, 오직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체제에 이르지 못한 지역에서만 역사가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체제와 정치체제간의 모 순을 간과한 낙관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세계시 장은 평화와 번영이 아니라 파멸의 기제이다.

드락카는 2,010년에는 오늘날 제3세계의 4분의 3이 선진국으로 변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비역사적인 상상이다. 근대사 이후로 비서구국가로서 선진국에 오른 나라는 일본뿐이다. 경제 적 선진국에 이르는 길은 약 100년간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 다. 많은 나라들이 가능성을 보였지만 중도에 탈락했다. 1960년대에 강 력한 후보였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리코, 칠레, 뉴질랜드 등 모든 국가들이 30년 이상의 성장을 지속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어떤 학 자들은 한국이나 아시아의 용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Paul Krugman: {Peddling prosperity}등). 자본주의는 만인을 승자로 만드는 장치가 아 니다. 세계의 다수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성장을 이룩하고 그리하여 서구문명이 계속 번영할 것이라는 주장은 환상이다.

또 다른 낙관주의는 아시아의 국가들이 세계자본주의와 서구문명을 힘차게 이끌어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국/미국에 이어 일본/중국을 중 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지역이 자본주의의 중심국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도 틀린 것이다.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근대 서구문명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근대서 구문명(서구근대체제)이 유지되는 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라고 하여 앞 에서 말한 <세기말의 딜렘마>를 해결하는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 다. 여전히 서구근대체제가 유지되고 동북아시아지역이 강화된다면 헌 팅턴(Samuel Huntington)의 예견과 같이 같은 서구문명의 주도권을 놓고 유교문명권과 서구문명권의 충돌이 야기될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의 성 격이 유지된다면, 패권의 이동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A.F.K.Organski : {World Politics}). 그러나 그 전쟁은 아마도 인류 를 전멸시키는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서구문명에 대한 가장 광범한 낙관주의는 소위 정보사회론이다. 그 러나 정보사회의 장미빛 미래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근대국가-자본 주의시장체제를 무의식적인 전제로 하고 있다(그들은 체제에 관해서 논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체제와 문명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간 주하고 정보기술의 가능성만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식 정보혁명이 어떠한 딜렘마를 창출하고 있는지를 논의하였다. 그것은 근 대체제를 전제로 하면 고용문제, 분배의 악화, 카지노자본주의를 야기 시키고,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국가와 폭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오히려 근대서구문명을 파멸시킬 것이다.

또 다른 서구주의자들은 시민사회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제 국가 가 약화되고 시민사회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를 초월 하는 시민사회의 연대에 의하여 새로운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 은 아름다운 환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선진국에서부터 시민사회 가 붕괴되고 있다. 현재는 중산층의 시민사회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계 급화(불평등화)의 시대이다. 지식정보혁명의 충격은 중산층을 분해시킴 으로서 시민사회를 와해하고 있는 것이다(중산층이란 산업사회에 존재하 는 것이다. 클린턴은 95년 연두교서에서 (파괴되고 있는) 시민사회의 재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근대적 도덕이 붕괴하고 근대적 시민의식 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 다니엘 벨(Daniel Bell) 브레진스키 (Zbigniew Brezinski) 등은 이미 미국의 정신이 붕괴했으며 다른 문명 권에 호소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통제불능의 사회}). 결국 시민사회론 은 서구인의 레토릭(rhetoric)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 지방화가 마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처럼 여 기고 있다. 이것은 중간에 있는 근대국가를 협공하여 변화시킨다는 의미 에서 새로운 시대에의 경향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계화/지 방화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여 자본이 국가와 권력을 초월하였다는 것, 전인류와 모든 지방이 인간적 삶에 대한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경쟁이 작열하는 세계시장에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 결과 세계경쟁 에서의 승자는 항상 극소수이다. 다만 몇개의 지방(또는 도시)만이 섬처 럼 번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섬도 결국은 대양의 파도에 휩쓸려 잠기게 될 것이다. 로마가 그랬다. 서구적 이념의 마술에 빠져 지방화 는 무조건 좋은 것처럼 생각하고, 세계화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생 각하는 것으로, 오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 미 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결론은 서구근대체제--근대국가, 자본주의시장체제 --를 전제로 하는 한 구원의 길은 없다는 것이다. 문명의 전환은 최종적 으로 이러한 서구근대체제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21세기 인류문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그리하여 우리의 과제는 근대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 이다. 그것은 참으로 거대한 일일지 모르나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IV.문명적 비젼


1. 새로운 비젼 : 문명적 비젼

세기말의 현실은 인류에게 변혁과 창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 리의 인식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요구하는 변혁에 대 한 우리의 인식,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비젼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근대적 비젼(modern vision)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세계를 선 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비젼이다. 이러한 구분은 후진국이 선진국을 비젼으로 하여 선진국을 모방하는 것이 발전 이라는 이미지를 내포하는 것이다. 모든 낙관론이 이러한 근대적 비젼을 지지한다. 그러나 세기말의 딜렘마는 과거의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함께 부딪치고 있는 딜렘마이다. 선진국이라고 하여 이러한 딜렘마에 예외가 아니며, 선진국이라고 하여 쇠퇴/붕괴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 니다. 수많은 서구추종주의자들이 여전히 근대적 비젼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세기말의 딜렘마가 의미하는 것은 근대적 비젼이 파산하였다는 것이다. 세계시장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불평등을 세계화하고 심화 시키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며, 국가의 제어능력을 약화시켜 세계적 불황 과 공황의 함정을 다함께 파는 길이다. 지식정보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역시 불평등과 실업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투기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경제개발의 신화와 세계경쟁의 매카니즘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 은 지구환경을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넘게할 것이다. 이제 근대적 비젼 은 더 이상 비젼이 아니다. 이제 전세계는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역사적 동시대에 서 있다. 선진국은 이제 더 이상 후진국의 비젼이 아니다.(옥 타비오 파쓰). 근대적 비젼은 바로 문명의 쇠퇴/붕괴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선진국과 근대적 비젼에 매몰되어 있다. 역사적 필연성--붕괴/쇠퇴의 필연성--은 바로 이러한 서구근대적 창조성 의 네메시스(nemesis)에 있는 것이다.

둘째, 소위 탈근대적 비젼(post-modern vision)이다. 오늘날 많은 사 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탈근대적 비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원한다. 정보사회론을 비롯한 모든 낙관론이 자신들의 비젼을 탈근대적 비젼이라 고 주장한다. 또한 환경문제와 같이 인류적 문제를 제기하는 앞선 사람 들도 자신들의 시야가 탈근대적이라고 자부한다. 이러한 탈근대적 비젼 은 한가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수많은 비젼들이 조각 조각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선의와 시민운동이 있지 만 그것들은 모두 분리된(서로 연결될 수 없는) 의식과 관점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비젼이 조각조각 해체되어 버렸다는 것이 소위 탈근대적 비젼의 특징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위 탈근대 적 비젼이라는 것은 사실은 근대적 비젼이거나 근대적 비젼의 부작용에 대한 분리된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 한가지 단순한 사실에서 명 백하다. 스스로 어떠한 철학과 정신을 주창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체제는 여전히 근대적 비젼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근대국가체제, 자본주의시 장체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더나은 근대국가, 더 나은 시장체제, 더 나은 자유민주주의도 여전히 근대국가이고 시장체 제이며 자유민주주의임에는 변함이 없다. 가령 지방화가 강화된다고 하 는 것은 근대국가체제를 변혁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지방화를 강화 시키는 것은 사실은 세계시장을 강화하고 근대국가체제를 여전히 유지하 는 방식이다. 그것은 여전히 근대체제인 것이다. 환경문제를 인류적 차 원에서 해결하자는 시민적 노력 역시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과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데 조력하는 것이다. 모든 탈근대적 비젼은 주관적 목표와 객관적 결과가 불일치하는 딜렘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 성의 간지야말로 붕괴/쇠퇴의 역사적 필연성을 만드는 매카니즘인 것이 다.



세째, 문명적 비젼(vision of new civilization)이다. 문명적 비젼은 이 세계의 현실을 문명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며, 오늘날 모든 문제 는 문명적 차원의 원인이 있고 문명적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우리 의 문제와 과제는 더 이상 선후진국의 문제, 발전의 문제, 근대화 서구 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지향은 더 이상 조각난 많은 사회문제와 그에 대한 저항을 지향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다. 오늘날 모든 문제들은 단 한가지 통합된 원인을 가지고 있고, 통합 된 지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문명적 현상들이며 문명적 비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환경문제, 범죄의 만연과 질서의 붕 괴, 내전과 난민, 정치행정의 무력화, 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정,.......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문제이다. 그것은 근대서구문명이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쳤으며,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문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다. 문명적 비젼은 그 정체성으로서 궁극적으로 근대서구체제를 변혁하 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이념이나 정신은 다양할 수 있으며, 이념과 정 신으로 문명적 비젼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다. 모든 탈근대적 비젼들 이 사실은 그 이념과 정신에 있어서는 문명적 비젼의 맹아들이다. 왜냐 하면 모든 탈근대적 비젼들이 그 관점을 계속 밀고 나가 근원적 지점에 이르면 결국 우리는 문명의 문제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문명적 비젼의 현실적 의미는 서구근대체제에 대한 태도이다. 그것이 비록 미지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근대국가-자본주의시 장체제라는 근대체제를 넘어서야 하고, 넘어설 수 있으며, 이제 그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신념이 문명적 비젼의 출발점이다.


2..문명전환의 의미

인류는 21세기에 문명의 쇠퇴나 붕괴를 이겨내고 새로운 문명에 이를 수 있을까? 21세기에는 쇠퇴하는 근대서구문명(또는 붕괴하기 前의 근 대서구문명)을 대체하는 새로운 문명이 부활하여, 마침내 문명의 거대한 전환이 일어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현재가 격변기이고 문명의 거대한 전환이 일어날 것이 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대체 문명의 전환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유럽과 오늘의 서구는 문화가 다르다. 또한 오늘의 미국/유럽과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문화가 다르다. 그처럼 21세기에는 다른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문명의 전환인 가? 아니다. 17세기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현재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모두다 하나의 문명인 것이다. 문명이 달라진다는 것은 시간적 으로 17세기에서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서구와 비서구 전체와 질적으로 다른 21세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보고속도로가 형성되 고, 재택근무가 실현되고, 인간들의 관계가 사이버스페이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문화적 상품이 더 많아진다고 하여 문명이 전환한 것은 아 니다. 그래도 여전히 근대국가체제이고 자본주의시장체제이며 물질문명 이고 근대서구문명인 것이다.<<<<문명의 전환과 문화의 변화는 다른 것 이다. 문화가 변했다고 하여 문명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문명이 전환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 적으로 말하면 사회체제가 변화하고, 인간의 정신이 변화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생활양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국가--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시장체제>가 변혁되고, <개 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가 변혁되는 것이다. 문명이 전환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신, 새로운 사회체제, 새로운 생활양식이 형성된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과제는 새로운 문명(정신-체제-생활양식)을 창조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역사의 법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 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또는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 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창조--구체적으로는 비서구문명의 부활과 재창 조--일 것이다. 그 과정은 먼저 새로운 정신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회체 제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생활양식이 보편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우선 문명전환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정신의 문제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서구근대정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V. 보편적 정신에로의 회귀


근대서구의 정신--개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는 참으로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새로운 문명의 전망에서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편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짓이다.

1.탐욕에의 반역(叛逆)
개인주의, 합리주의, 번영, 자유, 민주주의 등 근대서구문명을 수식 하는 이러한 화려한 이념의 이면에는 추악한 현실이 있다. 그 화려한 외 피를 벗기고 보면 그곳에는 오직 하나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 이기주의>이다. 근대문명은 인간을 개인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문명의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을 개 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흔히 <개인의 발견>으로 찬양되고 있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합리주의로 포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수식을 하든 상관없이 근대의 모든 이념(정신)의 본질은 개인적 이기주의인 것 이다.

근대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개인적 이기주의를 정당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몰가치적인 과학을 표방하 고 있지만 사실은 근대정신의 본질인 개인적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이 다. 경제학은 근대이전까지의 모든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 대해 두가지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첫째, 인간에게 사랑과 선과 도덕을 훈계할 필 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탐욕적인 이기주의야말로 공동선을 창조하고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경제학은 그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설명했다. 소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 기적 행동을 공동선과 발전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 정신사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인간은 이제 사랑의 도덕에 얽 매일 필요가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 선이고 발전을 가져온다는 이 계명이야말로 근대정신이었다. 둘째, 경제학은 인간사회의 물질적 부를 증진시키고 그럼으로써 개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을 상식화시켰다. 우리에게 물질적 부가 증진되는 것--즉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 러나 근대이전에 이것은 결코 상식이 아니었다. 근대이전의 모든 정신 들--저 위대한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등 성인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물질적 발전에 의하여 가난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을 말하지 못했다. 그 성인들--그리고 근대이전의 모든 정신들--은 다만 물질적 욕망보다 더 위대하고 중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 다. 경제학(즉 근대정신)은 바로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 정면도 전했다. 그리고 성공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정신적 반역이야말로 근대정신이다. 이러한 근대정신에 의하여 근대인(현대인)의 행동은 단 하나의 동기에 의하여 지배된다. 그것은 바로 화폐를 추구하는 정신, 화폐애(貨幣愛)이다. 인간이 화폐에 대한 탐욕을 기준으로 행동함으로써 공동선이 이룩되고 물질적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근대정신의 마지막 사도(使徒) 케인즈는 "우리는 탐욕을 신으로 숭배해야 한다" 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경제가 충분히 발전되면--더 이상 투자가 필요없고, 자본의 희소성이 사라지고, 이자 생활자가 안락사하는 자신의 손자(孫子)대에 이르면---"인류는 마침내 이익보다 선(善)을 택하리라"고 했다( J.M.Keynes{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이것이 바로 근대정신의 핵심 이다.

우리가 숭상하는 근대의 위대한 이념들--근대서구정신--이란 무엇인 가? 그것들은 모두 위와 같은 개인적 이기주의의 정당화이다. 자유주의 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률의 한계 내에서 모든 인간은 마음대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이 좋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시장체제란 무엇 인가? 탐욕의 신(神)이 공동선을 창조한다고 신화화한 매카니즘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탐욕을 정당화하는 개인들의 공동체이다(다시 말하면 사랑을 강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합리주의란 무엇인가? 신 을 대체하여 개인적 탐욕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간정신의 사용방식이다. 물질주의란 무엇인가? 탐욕을 긍정하고 그것을 더 많이 충족시키는 것이 야말로 문명이라는 것, 바로 탐욕의 문명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비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근대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비 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 연한 근대서구정신은 실로 인류의 보편적 정신사에서 중대한 일탈(逸 脫)이고 예외이고 타락이고 반역이다. 어떻게 탐욕이 정당화되고 사랑이 경멸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탐욕이 아니라 사랑이 진리인 것이다. 우리 는 오랫동안 저 서구의 위대한 문명에 압도당하여 보편적 진리를 잃어버 린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신적 혼동상태, 저 위대한 미국의 정신이 더 이상 호소력 을 상실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서구근대정신의 진리에 대한 왜곡이 드 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근대정신의 이러한 왜곡은 (케인즈 정책의 결과로서) 소비만능주의에 의하여 폭로되었다. 그에 의하여 노골화한 합 리적 탐욕주의(개인적 이기주의)다 이제까지 실제로 미국을 이끌어왔던 청교도정신을 파괴시면서 미국의 메세지가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이다. 새 로운 문명을 창조한다는 것은 바로 이제까지 배척되었던 인간의 올바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마비된 온전한 인간정신 을 회복하는 것이다.

2.보편적 정신
그러면 새로운 정신은 무엇인가? 누구도 그것을 규정할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의 준거기준, 명확한 준거기 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성인들이 제시한 준거이다. 근대의 계몽사상가들이나 마르크스 케인즈에 이르는 근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들(聖人)을 능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무 지한 근대인들의 오만에 불과하다(계몽사상가들은 20세기 종교가 소멸할 것으로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했다.) 오늘날 우리가 준거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계몽사상가들이나 그 이후의 모 든 사상가나 지식인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위대한 봉우리, 바로 마호메 트, 예수, 공자, 석가이다.



<<<<<<<<<새로운 정신은 마르크스나 케인즈의 정신이 아니라 예수와 석가의 정신이다>>>>>>>



예수와 석가가 한결같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신神이라는 바다의 물 방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서양 모든 신비주의(합리주의자가 진리 에 대하여 붙인 이름)의 기본명제이다. 석가 예수 이전의 인도의 한 신 비주의자는 이를 간단히 요약했다. "내가 존재했을 때에는 신이 존재하 지 않았다. 이제 신이 존재하고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 서 중세의 왜곡을 제거하고 나면 바로 이러한 진수(眞髓)가 남는다. "이 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 디아서 2:20)" 인간이 평소에 자아(自我)라고 생각하고 있던 의식을 넘 어서면 바로 그곳에 참으로 진정한 자아를 만난다. 그리고 그 진정한 자 아(眞我)는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참으로 위대한 자아(이름붙여 하느님, 神, 空, 道, 眞我)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전하는 예수의 말 씀은 복음(福音 기쁜 소식)이고, 불교의 화엄경은 그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으며, 선종(禪宗)의 공안은 그러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질문 이다. 기독교의 중세전통은 이러한 진아(眞我)를 의인화(擬人化)했고, 그리이스철학은 이러한 진아(眞我)를 실재화 또는 이데아화했다. 그러나 진아(眞我)는 자연(그 하나로서 인간)을 떠나서 독립해 있는 것은 아니 다(諸法實相).

근대의 개인주의-합리주의-물질주의(세속주의)는 바로 이러한 진리 로부터의 일탈이었다. 신을 분리해버린 후 세계를 존재론(또는 실재론)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무엇이 실재냐 하는 것이 아니 라, 신과 나, 신과 자연, 자연과 나의 연대성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 중의 하나가 진리(실재)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연대성)가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연대성에 입각하여 보면 진리는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데 있고, 가치는 물질주의를 넘어서는 데 있고, 역사의 의미는 세속주의를 넘어서 는 데 있다. 진리는 합리적 자아의식을 넘어서는 데 있고, 가치는 물질 적 탐욕을 넘어서는데 있고, 역사의 의미는 인간정신의 발전에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근대서구정신에 의하여 배척되었 던 인류의 <보편적 정신>에로의 회귀이다. 하지만 그 회귀는 서구 중세 와 근대의 오랜 왜곡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이다.(拙著 {존재로부터의 해방}참조)

이러한 인류역사의 보편적 정신에서 보면, 근대서구정신의 산물인 모든 사회과학은 재해석되어야 하고, 모든 자연과학은 재평가되어야 한 다. 가령 우리의 역사관은 직선적 시간의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직선 적 시간이란 허구이다. (직선적 시간이란 존재론적 관점이고, 신의 관점 (연대성의 관점)에서 시간이란 생성이다.) 자유, 민주주의, 소유, 경 쟁, 권리, 의무, 계약, 성장, 발전, 경제, 진보,등등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개념들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공자(孔子)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공 자가 가르친 것은 삶 그리고 인간사회가 의미가 있으려면, 결코 상업사 회(물질주의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상업사회는 인간을 물질화하고 세속화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상인을 억압했다고 하여--봉건 계급을 옹호했다고 하여--비판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자야말로 그 시 대의 한계 내에서 인간정신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찬양받아야 한 다. 동양문명, 특히 유교문명권 자체를 재평가해야 한다. 유교문명을 정 체된 봉건사회로서가 아니라(그 당시에는 모든 사회가 정체된 봉건사회 였다), 효과적으로 폭력을 억압하고(평화를 유지하고) 인간의 탐욕을 체제적으로 순화시켰던 문명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 도 예수, 석가가 제시한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는 교회 앞에서 환전상을 채찍으로 내리쳤으며, 인간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다. 석가는 욕망과 번뇌의 불길을 불어꺼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가르쳤다. 근대서구문명은 바로 공자, 예수, 석가가 가르친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일탈한 것이었다. 우리는 저 위대한 성 인들을 복권해야 한다. 근대라는 일탈의 기간 동안 화폐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신(神)과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현실은 이미 우리의 의식을 앞서가고 있다. 지식정보혁명이 이미 상 업사회(물질문명)에서 지식사회(문화사회, 정신문명)에로의 전환을 재촉 하고 있다. 어떤 도정을 거치든 21세기는 상업사회(경제사회)가 아니라 지식사회(문화사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경향에 맞추어 위대한 성인들의 정신을 서구중세나 서구근대적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 (실로 인류정신의 보편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되살리고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정신이다.




3. 개인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를 넘어서
근대서구문명을 추진해온 합리주의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합 리적 지식이 삶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사회 적 연대로 묶어들이는 공통의 가치관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실제로 삶의 주요한 문제들은 합리적 지식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고 신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무엇인 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대답한다고 해도 서로 대립하는 개념체계만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과 사회적 연대에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질문(이성이 대답할 수 없는 질 문)의 대답들인 것이다.

이성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성은 개념(결국 언어)과 상상 력에 의하여 규정된다. 우리는 한때 인류의 거의 반수를 지배했던 신 념(마르크스주의)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념은 합리적 인 것이었고,그 이념을 믿었던 사람들도 충분히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성이라는 것은 결국 개념의 체계(마르크스주의의 제 이론들)에 의 하여 규정된 것이지, 항상 진리와 허위를 가르는 지고한 능력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념이라는 것이 결국 교육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합리적으로 주장되는 진리도 중세의 종교적 진리와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두 가지다 결국은 증명할 수 없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지 식정보혁명이 이러한 사실을 각성하게 했다. 우리는 폭발하는 지식의 환경 속에 놓이게 되면서 그것들 모두다 다만 하나의 정보로 취급하게 바뀌어져 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인간정신은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 이외에 감성과 직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문화 의 부흥, 경제보다 문화가 중요시되는 상황이야말로 이성에 한정되었던 근대의 왜곡을 뚫고 인간정신이 확장되어 제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것은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것 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여는 것이다.

근대서구문명의 물질주의는 신중심의 세계관에서 탈출한 세속주의였 다. 그것은 물질적 발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여질 때의 환상이었다. 물질 적 발전이 주는 만족은 모든 인간에게 자극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그것 은 이 세상을 고통의 여정으로 보는 종교적 세계관을 내던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그 물질적 만족이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것은 결코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허 감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실 근대서구문명의 물질주의를 추진한 것은 물질적 부가 제공하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근대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이 물질적 만족이라는 당근 때문에 그렇게 부의 축적에 광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근대서구문명을 추진한 것은 기아 (饑餓)와 도태(淘汰)의 위협이었다. 노동자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당 하지 않기 위하여--경쟁에서 지는 것은 곧 파멸인 것이다--미친듯이 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잔인한 기제가 근대의 물질문명을 추진한 힘 이었다. 경제적 발전은 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이 잔인한 문명이 인 간에게 제공한 대가는 무엇인가? 부는 행복을 보장하는가? 오늘날 인류 는 그것을 반성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인간이 빵과 부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은 오랜 진리이 다. 물질주의는 바로 이것을 부정하는 정신이었다. 모든 인간으로 하여 금 이러한 저속한 상태에 얽어매어 놓고 있는 장치가 이제 그 수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 환경의 파괴가 이러한 인간들에게 반성의 계 기를 주고 있다.

<<<물질주의와 예수 석가 공자의 대립, 물질주의의 반역 성>>


VI. 국가의 분화와 공동체의 재창조


1. 자율적 질서---공시와 신뢰의 원리
근대적 질서의 원리는 <타율적 질서>를 부과하는 <법과 관료제>의 원 리였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유롭고 다만 법이 규정하는 범위에서는 타 율적으로 규제되었다. 이러한 타율적 질서를 형성하는 방법은 법이 규 정되고 관료(권력)에 의하여 그 법이 시행되는 것이었다. 소유와 자유는 바로 이러한 법과 관료제의 원리의 반면이었다. 법과 관료가 개입하는 권역(權力의 圈域) 이외에는 바로 소유와 자유의 영역이었다. 실로 근대 서구문명은 바로 로마의 법률문명의 재판이다. 로마라는 그 광대한 제국 을 하나로 묶은 것은 바로 로마법이었다. 모든 이질성과 차이에도 불구 하고 로마법은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의 기반이었다. 근대서구 문명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자유였고 오직 법만이 공통의 질서를 형성 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국가사는 한편으로는 법과 권력이 개입하는 권역 을 끊임없이 확장되는 역사였으며, 반대로 국가(권력)의 능률과 성과는 저하하는 역사였다. 오늘날 국가는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끊임 없이 확장되었지만 반대로 국가는 민중의 기대에 거의 보답하지 못하고 있다. 증대하는 복잡성과 지식화는 이제 법과 관료만으로서는 사회질서 를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많은 법과 관료와 기구들이 이제 진부화 되었다. 새로운 시대와 문명은 새로운 질서의 원리를 요구하고 있다. 법 으로서는 인간의 사회적 통합으로 유도할 수 없게 되었고, 관료로서는 모든 것을 규제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원리는 <자율의 질서>이고, 그것을 형성하는 <공시와 신뢰의 원리>이다. 공시란 어떠한 규범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 는 상태, 정보가 제공될 수 있는 상태에 두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질서를 내용으로 하는 지식정보가 공시되고, 사람들은 그러한 공시 된 지식정보를 신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에 자율적 질서의 사회적 기반이 있다. 오늘날 어떠한 분야에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내용에는 반드시 규범적 지 식이 있다. 가령 택시운전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자동차의 구조와 성능 과 운전법만이 아니라, 교통규칙이다. 이러한 교통규칙이 바로 규범적 지식인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산업이나 직업이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 지이다. 새로운 질서는 모든 개개인들이 스스로 이러한 규범적 지식을 알거나 도달할 수 있는 상태(공시상태)에 이르게 하고, 그들로부터 그에 기초한 자율적 질서를 형성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매카니즘이 되어야 한 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사회에서 질서는 유지되지 못한다. 이러한 자 율적 질서는 규범적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준수하리라는 신뢰를 바탕으 로 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는 이러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반은 바로 공시이다. 새로운 사회에서 자율의 영역은 더욱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이제까지 확장되었던 국가의 영역--관료적 규제와 감독의 영역--이 점차로 자율의 영역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렇게 하지 않으면 법적 관료적 규제만으로 어떠한 것도 이룰 수 없는 상 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와 문명의 기반은 신뢰이 다. 어떠한 국가도 이러한 신뢰를 확보하는데 실패하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공자는 정치의 요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병(군사), 식(경 제), 신(신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국가가 다른 것을 포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신뢰라고 했다. 왜냐하면 부국강병한 국가 도 신뢰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군대나 경 찰과 같은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사회이다. 또한 자본과 소유 는 공동체의 무질서를 야기시키는 원천이 되었다(자본과 소유의 질서에 생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폭력이 증대되는 시대이다). 공시와 신뢰에 기초하는 자율적 질서, 이것이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형성하는 원리이 다. 자율적 질서의 세계가 바로 사랑과 연대의 정신이 피어나는 기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원리를 구현하도록 근대체제는 변혁되어 야 한다.


2. 국가의 분화 : 문화공동체, 경제공동 체, 국가공동체
<<<유럽연합--유럽공동체--를 새로운 문명의 맹아로 규정한 다>>>>>>>>

우선 근대국가가 변혁되어야 한다. 근대체제는 국가(국민국가)라는 공동체로 전인류를 평면적으로 분할하였다. 근대이전에 존재하였던 다양 한 공동체와 기독교 보편체제는 시장에 의하여 해체되고, 오직 하나의 공동체, 즉 국가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근대국가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경제의 세계화에 대응하여 국가연합의 형태를 추구 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국가를 초월하는 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 나 그 배경에는 여전히 근대국가적 이념이 있을 뿐이다. 유럽연합이 완 전하게 성공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미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미 국 자체가 진부한 근대체제이고 기능이 저하한 체제인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국가연합이 아니다.<<<유럽연합이 성공하려면 국가를 초월하는 경제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딜렘마의 해결은 국가의 질적인 변혁이다. 국가라는 근대적 공동체 의 기능을 분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날의 국가는 경제를 조절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경제조절의 권한이 정치적 민주주의로 정당화 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민주주의는 지배와 복종의 정당화 절차이지 경제적 배분의 정당화 절차는 아니다). 그리하여 선진국의 중앙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해 있다. 이것은 경제적 기능이 정부로부터 독립하고 있 다는 것이다. 베네룩스 삼국은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고 하나의 중앙은행 을 가지고 있다. 즉 베네룩스 삼국은 세개의 정치공동체(국가)와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의 경제적 권력이 분화되어 경 제공동체와 정치공동체(국가)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문명에로의 길이다.

한편 지식정보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해진 부문이 있다면 교육문화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 역시 국가(정부)로부터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독 립된 문화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오늘날 교육문화부문은 과거의 경제 부문 이상으로 중대한 부문이 되었으며, 이것 역시 근대국가나 민주주의 로 해결할 수 없는 부문이다. 근대국가로부터 문화공동체를 분화시켜 근대(국가)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처럼 근대국가를 초월하는 길이 있다면 근대국가를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 그리고 잔여(殘餘)로서 정치공동체(새로운 국가)로 분화시 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영역을 달리하여 형성될 수 있다. 가 령 동북아 지역 전체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 의 문화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국가공동체는 그대로 분립되어 있더라 도). 이것은 근대서구문명의 기본적 구조를 변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 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위대한 이상인 것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 주의란 결국 한 종류의 공동체, 즉 정치공동체(국가)에만 의미가 있는 이념이다. 그것은 그리이스문명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치공동체(근대국 가)를 초월할 수 있는 제도도 이념도 아니다.

근대로 전환하면서 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분화시킨 것 은 인류의 역사에서 거대한 변혁이었다. 새로운 문명에서는 권력이 아니 라 헤게모니(사회적 영향력)를 정치적 헤게모니(권력), 경제적 헤게모니 (자본의 힘) 문화적 헤게모니(지식/정당성의 힘)를 분화시키고, 이를 서로 다른 공동체로 재구조화하는 문제가 새로운 문명창조의 중심이 된 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세계구조에서는 정치, 권력투쟁, 인권탄압, 독재, 내전, 전쟁 등은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가령 전쟁에 관해서 보자. 국가기능이 분화하여 여러개의 국가를 포괄하는 경제공동체 문화 공동체가 성립한다면, 국가간의 투쟁인 전쟁이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 이다(유럽연합 구성국가 상호간의 전쟁이나 미연방의 주정부간의 전쟁 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근대서구문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의 정치적 구조이다. 그리고 인류는 전혀 새로운 역사를 시 작하게 될 것이다. 현실은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拙著 {자본주의 우물을 벗어난 문명사} 참조)

자본주의시장체제도 변혁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변혁은 오랫동안 사회주의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진부한 관점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자본주의시장체제에 대해서 변혁을 가해야 한다. 그것은 지식정보혁명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고, 경제가 아니라 문화의 시대(21세기)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체제의 문 제는 문화체제의 일부, 또는 문화체제의 종속체제로 보아야 한다.

지식정보혁명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보다도 지적 문화적 가치 의 생산과 향유가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근대서구문명에서 는 경제가 문화를 좌우하였다. 간단히 말하여 문화는 경제의 부산물이었 다. 이것이 역전되고 있다. 문화(의식과 커뮤니케이션의 차원, 지식, 교 육, 예술...)가 경제를 좌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