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인격은 지금 "자신의 사적인 모습" 에서 거의다 들어나며
공부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오히려 정직하게 스스로를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자신의 실체를 들어내며,
자신의 사적인 문제를 푸는게 오히려 공부라고
말한 인도의 스승들의 글이나 얘기들처럼

공부란 따로 있는게 아니고, 휘앙찬란한 새로운 덧붙임이나 새로운 지식도 아니고,
이미 그대가 가진 문제들을 들여다 보는 행위가 공부의 기본이라는 설법을 많이 듣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모르겠다면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으로 가장 설득력있는 존재가
자신의 부모님으로
부모님 둘다에게 제3자가 자신의 문제를 물었을때 어떤 답이 나올지에 대해 생각도 하고
직접 만나서 자신에 대해 부모님들이 객관적으로 그간 어찌 보고있었는지도 물어보고, 죄송하다고도 해보며, 여쭈어 보는 방편도 좋고
다음으로 스승을 만들어서 그 스승의 제자의 기간동안(짧게 한 2년 만이라도 제자가 되보는것도 좋을꺼에요.) 물어보는것도 좋다고 해요.

우리에겐 스승이 필요 없다고 생각들도 많이 하지만 우리가 사실은 엄청난 세상의 전문가들에게 상담과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아프면 병원가고 차 박살나면 수리공에게 맡기고 맛있는음식도 요리사에게 배우고 등등등..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전문가들을 무시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최근 저는 하게되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다른 우리삶의 실체의 일화로
일단 의처증 정신미숙 남성의 일화를 들어보겠습다.
(그 다음으로 의처증 여자, 그리고 정신미숙여자, 감수성과여성질환 등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글은 나의 글로 나를 설명한 글임으로 오해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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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어른’이란 멀쩡한 어른의 허우대 안에 애의 마음이 들어앉아서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골치 아픈 짓을 연발하는, 피곤한 스타일을 말한다.
이를테면 다섯 살배기 아이가 시장 가는 엄마에게서 떨어지기를 싫어한다면 그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십대의 남자가 시장 가는 마누라에게서 떨어지기를 싫어한다면, 혹시 못미덥거나 의처증이라도 일으켜서 마누라를 항상 옆에 두고 감시해야 한다면, 그것은 ‘애어른’의 커다란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즉 애어른 안에 든 다섯 살배기 아이의 마음은 허우대 멀쩡한 어른을 정신에 이상이 있는 자로 만든다.

다섯 살배기는 억울함이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엄마나 아빠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그러면 센 아이의 침해로부터 보호받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자기보호 대책이다. 막강한 침해자를 부모의 힘을 빌리어 제어함은 어린애로서는 당연한 행위다.
그런데 애어른이 -다섯 살배기, 그 유치한 마음에 고착되어 있어서- 아내를 못미더워하는 나머지, 시장 가는 아내를 의심하거나 남편 몰래 무슨 짓을 했느냐고 심문하면서 숨통을 조인다면, 그것은 이만저만한 과잉방어가 아니다.

과잉방어란 지나친 피해망상에서 나온다.
애어른 속의 다섯 살배기는 극단적으로 과민하여, 애어른으로 하여금 엄마, 아니 아내로부터 속고 배신 당한 상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다 보면 대응 전략(부모의 힘을 빌림) 또한 피해 량에 비례하여 지나치게 증폭된 공격성을 띠게 마련이다. 즉 취약성을 보호하려는 수단의 문명적 효능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증폭된 폭력을 초래한다.
이를테면 취약한 어린애가 혼자 집을 보다가 수상한 사람이 침입 하려는 듯한 의심이 들고 겁이 나면, 가만히 전화기를 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할 수 있다. 그러면 무장경찰이 출동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괴한으로 오해받은 사람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의 겁쟁이 외삼촌임이 판명되었다. 그 외삼촌은 졸지에 무장경찰의 손아귀에 잡히는 바람에 초주검이 되었고.
그때 신고 행위자가 아이가 아니고, 체력이 당당한 성년이었다면 그렇게 과잉방어의 결과를 초래하는 수단에 호소(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처증을 가진 남자는 자기 속의 아이의 취약성에 기인한 피해의식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기의 방어수단이 얼마나 막강한 치명타를 상대방(아내)에게 가하는지 모른다.
즉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한다는 자각이 없으므로, 그 단순한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매우 잔혹한 행위를 초래한다. 즉 의식적으로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일 수 없는 사람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지장애로 인하여- 애무한 아내를 의심하고 들볶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의 숨통을 막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애어른 증후군 중의 하나가 의처증이다.
애는 자신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불안에 노출되면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자기의 불안을 아내의 부당한 행위, 즉 양심불량의 탓으로 돌린 증후를 나타낸다.
자아확립이 되지 못한 애어른은 타인에게 휘둘리고, 그 피해의식은 의처증후군이 되기 쉽다. 그리고 피해의식은 질투심 및 보복심에 의한 피학성과 가학성으로 나타난다.

애어른은 과민하게 신경질(짜증)을 부리기 쉬우며,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는 멍청이가 되는 수가 있다. 얌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애정불만이나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하거나 위기에 봉착하면 쉽게 우둔해지는 수가 있다.
우둔성이란 일종의 자기 마비현상이다. 그는 자기를 마비시킴으로써 과민성의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당혹감이 들면 쉽게 우둔한 멍청이가 된다.
그 멍청이, 우둔성은 당사자를 뱃속편한 경지, 즉 명상적 도피증후군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도피성 명상주의자는 아내가 터무니없이 과소비를 하였을 때, 이를테면 의논 없이 사치품을 사들였을 경우, 그 시위에 대처할 바를 모르면 멍청해진다. 그러므로 얼핏 보면 그는 아내에게 무한히 너그럽거나 방심한 남편으로 보일 수 있다.
또 그는 아내가 심히 바가지를 긁어대는데도 그저 한참 기다렸다가 은근히 아내를 잠자리로 이끌어 들이려 든다. 그렇게 마이동풍 격이 되면 그의 아내가 고분고분 할 리 없다. 울화통이 터진 아내가 이혼이라도 불사할 듯이 앙칼지게 대들면 얼른 사과한다.
문제는 자기가 기껏 사과를 했는데도 아내가 얼른 활짝 웃어주지 않으면 금시 삐지는 남편, 그는 자기가 아내의 정서를 마음대로 쉽게 조종하는 마술사라도 된 줄 착각한다. 그리고 마술 솜씨가 당장 발휘되지 않는다고 아이의 심정으로 엄마, 아니 마누라에게 투정부린다.

이를테면 애어른이 쉽게 사과하는 경우, 그것은 단순히 상대방을 조종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과를 한답시고 한갓 조종수단을 쓰는 것이지, 정말 사과할 마음이 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애어른이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은 그것이 적응수단이기 때문이지, 그에게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애어른은 잘못을 사과할 줄 모르고, 겸양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른다. 즉 그의 성숙도는 애처럼 형편없이 낮다.
사랑의 성숙도가 낮은 애어른은 자기의 처가 멋진 숙녀의 외모를 가지게 한다. 소유주인 자기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물, 즉 가축이나 자동차를 살지고 빛나게 손질 해 놓는 격이다.
그러니까 축산업자는 가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즉 축산업에 열중하는 것은 가축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직업(돈벌이 수단)에 익은 것이다.
즉 그 마음은 애인 채 육덕만 어른이다.

마음은 애인 채 육덕만 어른인 남자, 그 폭군이 그의 아내를 밉게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폭군의 생리에는 아내에 대한 연민이 누꿉만큼도 없다. 마치 정신에 이상이 생겨 아기에 대한 연민심이 없어진 엄마라면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아이를 굶겨 죽이고 마는 격이다. 이상이 생긴 엄마는 손수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존적인 아기를 굶겨 죽이게 마련이다.

한 아이가 말했다. “엄마. 아빠와 이혼하더라도 엄마는 날 버리면 안 돼. 응? 이렇게 날 꼭 안고 지내야 돼. 응? 언제까지나 이렇게 서로 안고 자내야 돼. 일하러 나가지도 말고.”
아이의 말이니까 읽는 이의 동정심을 자아낸다.

그런데 그 아이의 낭만을 성인(애어른)의 다짐으로 간주해보자.
엄마가 아이를 안고 누에고치 안에 들어 앉아 있는 모습을 바꾸어 애어른과 그 마누라가 부둥켜안고 두문불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그 폐쇄성 유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치정적인 동반자살 상이 아닐 수 없다. 끔직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애어른의 낭만은 살기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