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에 갇힌 인간 강태공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태공하면 낚시꾼의 대명사로 밖에 알고 있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중국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책략가였으며, 최초로 인본주의를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BC11세기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3100여 년 전에 태어난 인물로서 은주역성혁명의 중심에서 활동한 사람이고 동시에 은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그는 유목민족인 강족 출신으로 태공망이라는 그의 이름은 주나라 문왕이 위수에서 그를 만나고자신의 아버지 태공이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의 성은 강, 이름은 상이다. 그리고 여상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가 강족 중에서도 여씨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씨를 따라서 강태공이라고도 하며 그의 어릴 적 이름은 강자아였다고 한다.
강태공은 전설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된 인물이다. 그것에 일조를 한 것이 󰡐봉신연의󰡑라는 기서인데 이 책에서 강태공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온갖 마술을 부린다.  이 책이 지어진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신무기들과 온갖 묘약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람의 흥미를 끄는 내용들은 그들로 하여금 태공망에 대한 여러 환상을 심어 주었으며, 결국 실제 태공망과는 다른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상을 주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속의 태공망은 사라지고 소설속의 강태공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태공망은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서 오히려 당시 가장 실증적인 사람이었으며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중국 민중들의 상상 속에 있는 그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다 시피 그는 강족으로서 기주출신이라고 한다. 기주에서 태어난 태공망은 은나라 주왕의 폭정을 피해서 요동으로 가 40년 동안 은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나라로 가서 역시 은거하며 위수에서 낚시를 한다. 3년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고 하는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낚시를 하여 문왕이라는 대어를 얻었다고 한다. 주나라 문왕은 여상에 관한 소식을 듣고, 위수로 가서 그를 재상으로 맞이하였으며 강태공은 문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주나라가 은나라를 토벌하게끔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주나라 성립이후 강태공은 제나라를 하사받아 훗날 제나라가 춘추시대의 첫 패자가 탄생하게끔 하는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이부분에서 강태공이 문왕-당시 서백제후였던 희창-을 만난 것이 그가 70살이었다는 설과 30대였다는 설 두 가지가 있으며, 그가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이유도 그의 낚시 바늘이 곧은 일자여서였다는 설과 낚시 대를 강물 속에 넣지 않고 물위에 간격을 두고 띄어놨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 실존했던 인물이었으며 은주역성혁명을 주도해 나간 훌륭한 책략가였다는 것이다.

중국 최초의 인본주의자

앞서 글의 첫머리에 강태공을 중국인 최초로 인본주의를 실천한 인물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은나라는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하는 제정일치의 국가였다. 은나라 왕들은 이민족을 사로잡아 제사의 산 제물로 사용했으며, 전쟁에 임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신과 이민족의 신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투에 투입된 무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은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 가장 앞에 세운 것은 보병도 기병도 아닌 무녀였다. 여자들의 얼굴에 요란한 치장을 시키고 그녀들을 앞세워 군대는 전진하였는데, 이유는 무녀들로 인해 상대방의 군사에 저주를 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황당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으나 3100여년전이라는 시대상을 봤을 때 그렇게 이해 못할만한 행동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에 태어난 강태공은 동시대인들이 너무도 당연시 했던 그러한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쟁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며 작전과 계책을 통해서 더 효율적인 전투를 할 수 있다는 시대를 앞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삼국지 같은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책 중에 하나가 양쪽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싸움에 져 퇴각하는 척 하다가 우리 군사가 매복해 있는 곳까지 유인한 후 포위공격을 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작전은 너무나 흔해 삼국시대 당시만 하더라도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강태공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한 계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 누구도 일부러라도 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에 임함에 있어 일부러라도 패한다는 것은 그 부족에 있어서 수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주나라를 세우는 대업을 달성한 그는 진정 훌륭한 책략가이며 인본주위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다.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

주나라를 창업한 후 강태공은 제나라를 분봉 받게 된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과 그 서북부 일원에 터를 잡은 나라로서 중원에서는 유일하게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였다고 한다. 그곳은 농업을 하기에 적당치 않아 강태공이 그곳의 분봉을 원하자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바다를 끼고 있다는 이점을 살려 농업대신 어업을 장려하였으며, 철과 함께 소금을 국가에서 전매하였다고 한다. 또한 상공업을 일으켜 후에 부강한 국가가 되는데 초석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민족인 강족 이외에도 이민족들을 흡수함으로써 다민족 국가를 건설했는데 그의 이런 열린 세계관은 후대에 관중 등의 이민족 출신이 중용됨으로서 제나라가 춘추시대에 첫 번째이자 완전한 패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마치며

강태공은 그의 업적에 비해 상당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지금 우리가 󰡐중국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사는 누구인가󰡑 라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제갈공명이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유명한 책사일망정 가장 훌륭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가 내정을 함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는 했지만 삼국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그는 그가 모시는 주군으로 하여금 나라를 통일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강태공이 이처럼 과소평가된 대에는 공자의 영향이 크다는 설이 많다. 예의를 중시하는 공자는 실증주의자였던 강태공을 평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던 인물은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었던 주공단 이었다. 예의를 중시하는 주공단은 실익을 챙기려는 태공망과 잦은 의견 충돌을 보였고, 대부분 태공망의 의견이 존중되어 주나라는 창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둘 사이의 사이가 나빴다거나 주공단이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주공단으로 인해 주나라는 예의와 법도를 정비할 수 있었고, 봉건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주공단의 후손이 경영하였으며 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나라인 노나라는 세월이 지날수록 약소국이 되어가는 반면 실리를 가장 우선시하는 제나라는 점점 강대해 졌는데, 이것이 예를 숭상하는 공자에게는 자신의 논리를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을 배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그의 여러 제자들에게 까지 이어져 지금까지 강태공은 그저 낚시하는 늙은이로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강태공은 다시 한번 되짚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의 시대를 앞서나간 선구자적인 정신이나 실증적인 통치사상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본받을 만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