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의 시간


존 버거(John Berger, 영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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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는 극작가, 소설가, 미술 및 사진 비평가, 그리고 농부이다. 작가로서 그는 여러 번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었고 비평가로서의 그는 현란한 이론과 수사에서 멀리 떨어져 응축적이면서도 명료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사태의 진상을 드러낸다. 아래 글은 82년에 씌어졌고 2001년에 나온 에세이 선집(Selected Essays)에 실려있는 'The Hour of Poetry'을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가 번역해 한 문예지에 실은 것 중에서 시론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타이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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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와 19세기에는 사회적 불의에 반대하는 많은 항의가 산문으로 씌어졌다. 이런 글들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에 접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역사는 이성의 편에 서 있다는 믿음에서 씌어진 이성적 논쟁들이었다. 오늘날 이것은 결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결과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과거의 고통이 미래에 올 보편적인 행복으로 거의 보상되지 않는다. 또한 악은 항상 근절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은 삶에 주어진 의미를 따르겠다는 결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다. 미래란 믿을 수 없다. 진실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그리고 점점 더 산문보다는 바로 시가 이런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산문이 시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하지만,시는 지금 당장의 상처에 말을 건다.


언어의 축복은 부드러움이 아니다. 언어는 그만치 엄정하고 연민이 없어야 한다. 애정의 용어조차도 그렇다. 용어는 중립적이고 맥락이 전부다. 언어의 축복은 '잠재적으로' 언어가 완전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말 속에 총체적 인간경험을 담아낼 잠재성을 지닌다. 일어났고, 일어날 모든 일들이 담겨 있다. 심지어 언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한 공간도 허용된다. 이런 점에서 언어란 잠재적으로 유일한 인간의 보금자리이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 없는 유일한 삶의 터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문의 경우 이 보금자리는 오솔길, 도로, 큰 길의 그믈망을 교차하는 광활한 지역이지만, 시의 경우는 이 보금자리가 한 개의 중심, 한 개의 목소리로 응축된다.


언어에 관해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언어는 어떤 침묵이나 신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운 청자이다. 하지만 언어의 이런 개방성이 가끔 언어의 무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게시물과 법률기록들, 성명서와 서류에서는 언어의 무심함이 계속 권장되고 적용된다. 시는 언어의 이런 무심을 차단하고 돌봄을 진작하기 위한 방식으로 언어에 다가간다. 어떻게 시가 이런 돌봄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시의 노동이란 무엇일까?


이 말은 시를 쓰는데 드는 작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씌어진 시 자체의 작업을 말한다. 모든 진정한 시는 시의 노동에 기여한다. 삶과 분리되고 폭력이 찢어놓은 것들을 함께 불러오는데 이 쉴 새 없는 노동의 과제가 있다. 육체적 고통은 보통 어떤 행동을 취하면 가벼워지거나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모든 고통은 이런저런 유형의 분리에 기인한다. 이 경우 고통의 완화는 덜 직접적이다. 시는 상실에 대해 어떤 보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는 분리시키는 공간에 맞선다. 시는 흩어진 것을 다시 모으려는 지속적인 노동으로 이런 일을 한다.


오, 나의 사랑이여
얼마나 감미로운가
당신이 보는 앞에서
욕조에 내려와
몸을 담그는 것은
젖은 린넨 드레스가
내 아름다운 몸에 붙는 것을
당신이 보게끔 하는 것은.
와서, 나를 들여다 보라.

-기원전 1500년 이집트의 한 조각에 새겨진 시-


유사점을 찾아내고, 은유를 사용하려는 시의 충동은 비교를 위한 것도(이런 비교는 언제나 위계적이기마련이다) 어느 하나의 특수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총합이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의 총체성을 증명해줄 상응들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시는 이런 총체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시의 이런 호소는 감상적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감상적인 것은 언제나 분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면제해달라고 간청한다.


시는 은유를 통해 재조립하는 일 외에도 시가 미치는 범위를 통해 재결합시킨다. 시는 감정의 범위와 우주의 범위를 서로 같은 것으로 본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거기에 뒤따른 극단이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정도가 문제된다. 다만 정도에 따라 극단이 온다.


나 그대와 마찬가지로 견디리라
이 영원한 어둠의 분리를
그대여, 왜 우는가? 차라리 내게
그대의 손을 주오,
그리고 꿈 속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주오.
그대와 나는 비탄에 잠긴 산이다.
그대와 나는 이 땅에서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밤이면 그대가 내게 보내줄 수 있기를,
별들 사이로 안부 인사를.

-안나 아흐마또바-


이 시에서 주관과 객관이 혼재되어 있다는 식의 논쟁은 경험적 관점으로 회귀하는 것인데, 현재의 고통의 정도는 그런 관점에 도전한다. 이것은 너무 이상하게 올바르지 못한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는 모든 것에 친밀성을 부여함으로써 언어가 돌보도록 만든다. 이런 친밀성은 모든 행위와 명사, 사건과 시가 말하는 관점을 서로 친밀하게 엮으려는 시의 노동에 따른 것이다. 세상의 무관심과 잔인함에 맞서는 데 시의 이런 돌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의 없다.


고통은 어디서부터 우리에게 오는가?
고통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고통은 태고 적부터
우리 상상력의 형제였고
우리 시의 길잡이였다.


라고 이라크 시인 나지크 알-말라카는 적었다.


사건에 대해 침묵을 깨는 것, 아무리 쓰리고 괴로워도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을 언어로 적는 것은 이런 말을 누가 들을 지도 모르고, 듣게 된다면 그 사건에 대해 심판을 내려줄 거라는 희망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런 희망은 물론 기도의 근원이기도 하다. 시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아마 기도도 언어 그 자체의 근원에 존재할 것이다. 언어의 모든 사용법가운데 그런 근원의 기억을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이 바로 시이다.


시로서 활동하는 한, 모든 시는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후 모든 것이 생겨나게 된 처음, 즉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예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 시 속에서, 오직 시 속에서만 두 가지 인식이 더 이상 상충되지 않는 채 결합하게 된다.


그렇지만 시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다. 심지어 종교적 시들조차도 오로지 배타적으로 신에게로만 향하지 못한다. 시는 언어 그 자체에게로 향한다. 그 소리가 흐릿하면(비탄을 생각해보라) 거기서 시는 언어에 대한 상실을 슬퍼한다. 시는 유사하나 더 폭넓은 방식으로 언어에게로 향한다.


글로 적는다는 것은 누군가 이 글을 읽을 것이고, 글에 그려진 사건들이 심판을 받게될 거라는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신의 심판이건 역사의 심판이건 간에, 어느 쪽이건 심판은 멀리 있다. 그러나 즉각적이고, 때때로 도구로만 잘못 인식되어온 언어는 시로 읊어질 때 완고하고도 신비롭게 그 심판을 내려준다. 이 심판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심판은 자기가 들은 것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선과 악의 구별을 명시한다. 비록 언어 그 자체는 이런 구별을 유지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이런 이유로 시는 이 세상 다른 어떤 힘보다 훨씬 더 '절대적으로' 오늘날 자신들의 부당한 힘을 옹호하는 어둠의 지배자들의 야만적 잔인성에 반대한다. 또한 이런 이유로 용광로의 시간은 바로 시의 시간이 된다.
                                                                      칼도님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