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그리스도 사상의 흐름을 만들어 낸 존재로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 사상이라 할 때, 여러분은 예수로부터 전해진 여러 가르침을 전제로 한 종교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이전부터 유대인들에게 구전되어온 신의 가르침, 탈무드, 경전 등과 같은 것을 통해 지구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유대교에는 메시아 사상과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는,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후에는 한층 더, "예수가 부활하고, 죄를 범한 인간을 모두 용서하여, 마침내 참된 평화가 지구에 방문한다"는 것이 이후의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그리스도 사상은,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직접 신에 연결되고, 신의 생각을 구현하는 것에 그 참뜻이 있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신과 직접 연결된다. 그를 위해 신과 계약을 한다." 그것은 신과 확실히 연결된다고 하는 증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신으로서 생활한다." 이것은 곧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올바른 일을 하며, 사람들과 즐겁게 함께 나누고, 지구에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서 노력한다." 라는 신과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결코 자신과 계약한 인간을 아래로 보거나,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작하는 것은 전혀 생각치 않았습니다. "신과 계약한 인간은 그대로 곧 신이며, 신의 생각을 단지 육체를 걸친 인간이 행해 가는 것이다." 라는 의미의 계약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그리스도 사상은 "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이 지상에서 역할을 행한다. 인간이 그것을 신과 약속함에 따라, 확실히 신의 에너지를 지상에 흘려 간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형편에 좋게 해석하여, 지배권을 가진 자는 어떻게 하면 그 사상을 이용해서 민중을 지배할 수 있을지, 힘이 있는 자는 어떻게 하면 그 힘을 이용해서 인간을 조종할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되었고, 결국 그리스도 사상은 그러한 도구로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시기부터 그리스도 사상은 신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라는 테두리 속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의식과 인간이 만들어 낸 그리스도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예수를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예수나 그리스도가 찾아올 뿐이며, 진정한 우주의 예수나 그리스도가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전혀 연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요구했을 때, 십자가를 업고, 채찍질을 받는 예수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예수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동료로서 존재하는 예수는 이미 그러한 인간적인 에너지를 놓아버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지구에 가져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참된 그리스도 의식을 지구에 가져오기 위해서 앞으로 어떠한 역할을 행할 수 있을지,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형편에 유리하도록 밖에, 예수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사정에 편하도록 예수를 이용하려 합니다. 때문에 그곳에 나타나는 예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예수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진실한 예수가 아닙니다. 진실한 예수는 인간의 욕구를 조장하는 것과 같은 활동은 일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인간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놓아버릴 수 있을지,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빨리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일깨우는 방향으로 인간을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 의식, 이것이 지구에 불러와 졌을 때, 확실히 많은 지구의 인간은 혼란 속에 있었고, 슬픔에 잠겨, 구원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 자유가 없다,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괴로움 가운데에서 고통스럽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구원을 요구하는 에너지가 그리스도 의식을 지구에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의식은 다만 그러한 고뇌를 없애주기 위해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고뇌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왜 그러한 괴로움을 맛보게 된 것인가? 각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현상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 남을 지배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자유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 남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각자의 고뇌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의식은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 의식과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고뇌로부터 빠져 나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래 동양에서도 그리스도 의식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에서 전해진 그리스도 의식과는 전혀 그 현상이 다릅니다. 서양에서의 그리스도 의식은 "누군가가 나타나 구해 준다. 멋있는 영웅, 슈퍼맨과 같은 존재가 와서 모두를 구해 준다. 자신은 그 영웅을 부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바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서양에서 그리스도를 부르는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동양에 있어서는, 곤란에 빠졌을 때, 모두가 협력해서 서로 도와가는, 모두가 착실하게 힘을 모아 개선해 나가는, 아이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서로 협력해 나간다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한사람의 위대한 인간이 모두를 구한다고 하는 생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적인 에너지가 동양에 들어옴에 따라, 이른바 '영웅이나 구세주'와 같은 에너지가 점점 동양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 믿고 도와간다, 모두가 함께 협력해 나간다" 고 하는 에너지가 점점 희미해지게 되었고, "누군가 힘 있는 사람에게 전부 맡겨 버린다,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양도해 버린" 라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동양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의식은 "모두가 함께 협력한다, 모두가 함께 열심히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적합한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람을 꾸짖는다, 대충하고 있는 사람을 비난한다" 라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두와 함께 하지 않은 것을 배제한다, 모두와 같지 않은 것을 부정한다" 고 하는 에너지가 잠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에너지와 그리스도 의식의 에너지가 합쳐져, 대단히 특수한 형태의 그리스도 의식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순수하게 서로 도와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하고 있는 사람,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용서하지 않는다." 와 같은 흐름도 동시에 만들어져 버렸습니다.


동양에 있어서의 이러한 그리스도 의식의 현상은, 그 영향력이 조금씩 강해지고, 또한 구세주와 같은 존재를 바라는 에너지와도 혼합되어, 매우 이상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무관심해지는 에너지, 모든 것을 완수한다고 하는 에너지, 게으름 피우고 사람이나 적당하게 대충 하고 있는 사람을 배제하는 에너지, 이러한 에너지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지금의 동양의 그리스도 의식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지금 자신의 그리스도 의식은 어떠한 현상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은 어떠한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찾아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한사람에게 내어 맡기려는 에너지가 강한 것인지, 모두와 함께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강한 것인지…. 누군가에게 맡긴다고 할 때, 자신이 그것을 솔선해서 맡으려고 하는 에너지가 강한 것인지,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남에게 떠맡기는 경향이 강한 것인지…. 모두와 함께 해 나갈 때,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이미지하고 있는지,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자신은 어떠한 판단을 취하고 있는지…. 각자의 마음 속의 그리스도 의식을 찾아내 주시기 바랍니다.


동양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의식은 지금부터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 것일까요? 지금의 흐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무관심, 무책임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맡는다. 자신이 솔선해서 육체를 제공하여 역할을 행한다." 이러한 파동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은 안락함을 누린다." 그러한 에너지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협력한다." 이 생각은 아직 강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게으름 피우면 자신도 게으름 피운다. 모두가 쉬면 자신도 쉰다." 그러한 경향이 강해져, "모두 일체가 되어서 진행한다. 모두가 함께 완성시켜 나간다" 고 하는 에너지는 그렇게 강하지 않은 실정입니다.


모두가 모이면 모일 만큼, 자신의 힘이 약해집니다. "열심히 최후까지 노력하여, 완수한다" 고 하는 에너지가 약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인 특유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가 많으면 많을 만큼, 적당하게 한다. 자신이 눈에 띄지 않게 되면, 속여 버린다." 이와 같은 심리인 것입니다. 동양의 문화권에서 그리스도 의식은 항상 태만함이나 달콤함, 적당함과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그리스도 의식은 타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최후의 최후까지 완수해 나간다는 에너지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한번 일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을 완전히 끝낼 때 까지는,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의식입니다. 도중에 멈춘다거나,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 의식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는 되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최후까지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최선을 다해서 실현시키고자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사용한다. 주어진 조건을 모두 활용한다. 자신의 주변의 환경을 모두 이용한다."  그것에 의해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달성하지 않는 한, 되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동양의 문화권에 이 그리스도 의식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최후까지 완수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몇 번이라도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중에 단념하거나 포기한다" 이러한 체험만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의식이 자신의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그 종착점이 아무리 멀게 보인다 하더라도, 아무리 귀찮다 하더라도, 어쨌든 최후까지 해 본다. 어쨌든 완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 본다."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 의식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 속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고 했을 때, 최후까지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과연 얼만큼 있었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중도에 포기해서 그만둔 것이 얼만큼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의식은 스스로의 의사의 강함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약한 사람,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그리스도 의식을 몸에 익히는 것이 어렵겠지요.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상냥하고,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가져오는 것, 그리스도 의식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엄격한 에너지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엄격함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이 그리스도의 파동을 지구에 가져오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 과연 무엇이 지구에 남게 되었을까요? 예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정작 자신들은 달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모두를 속죄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단지 기도와 감사를 바치면 된다." 그것으로 예수가 정말로 만족하고 있을까요?


예수는 이 그리스도 의식을 넓히고자, 육체를 제공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의식이 지구에 정착되지 않는 한, 예수의 역할은 완료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의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수하지 않는 한,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그리스도 의식이 확실하게 정착한다. 예수에게 떠맡기거나, 신에게 돌려서, 스스로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 의식으로서 행동해 나간다." 그것에 의해서 처음으로 예수의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이 종료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의 역할을 이제는 종료 시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자신만은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 우리들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이 예수의 재림을 믿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의 시점에는 그것을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는 예수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것에 의해서 자신이 구제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의식이 완전히 지구인의 마음에 뿌리내리지 않는 한, 역할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하려고 하면, 지구인이 만들어 낸 메시아라고 하는 에너지로 밖에, 나타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정말로 얄궂은 상황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여러분 쪽에서 확실하게 그리스도 의식을 지구에 가져와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역할이 완료됩니다. 메시아로서 나타날 필요가 없고, 예수로서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의 역할이 완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부터, 그리스도 의식을 정착시키고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만큼 있을까요? 여러분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을 꾸짖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완수 시킬 책임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의 이 지구의 인간들의 마음을 보았을 때에, 그리스도 의식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착 시킬 수 있는 인간의 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후보의 하나로서, 지금 자리 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의식, 예수, 메시아, 그러한 세계 속에서 여러분은 어떠한 역할을 행해 가는 것일까요? 우리들은 매우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선언했을 경우, 어떠한 역할이 찾아 오는 것일까? 일상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한다는 것은,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누군가에게 맡겨버린다" 라든가, "자신은 방관자로서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솔선해서 행동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특유의 "모두가 함께 즐겁고 신명나게 해 나간다. 게으름 피우고 있는 사람이나, 좀 늦장 부리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엄하게 추궁하지 않고, 조화롭게 이끌어 간다" 는 정신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함으로써 충분히 그리스도 의식은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정착되면, 예수의 역할은 종료됩니다. 한사람 한사람은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해 나가면 충분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의식과 연결된다



나는 예수의 파동의 동료로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로서 지상에 내려오고, 육체를 걸쳐, 행동을 취한 인간, 그는 지구를 떠날 때, 자신의 역할이 불충분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희생이 되어, 사람들 앞에서 항상 진실을 말하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이 지구에 가져오고 싶었던 에너지,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전혀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무책임함, 흥미반의 호기심, 그리고 정말로 신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바람 뿐이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예수를 도우려고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원래 그리스도 의식은 누군가가 예수를 돕고자 할 때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나타나, 지구에 남을 예정이었습니다. 예수를 구하려는 사람, 예수를 도우려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 지구에 그리스도 의식이 남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예수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역주:여기서 '예수를 구한다'는 의미는 십자가에 못박혀 곤경에 처한 예수를 물리적으로 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의식을 자신의 마음속에 가져와, 그리스도로서 자각을 가지고 스스로 행동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을 이해하고,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의식은 지구에 정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지구를 떠날 때, 자신의 그리스도 의식이 어디에 남는 것인가? 어떠한 형태로 그리스도 의식이 퍼져 가는 것인가?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함,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의 중요함을 느낀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이웃의 사람을 허락한다, 죄인을 용서한다, 이러한 이웃 사랑과 용서는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 의식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야흐르 새로운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으며, 지구인에게는 또다시 테스트가 행하여질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재림을 본다고 한들,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 의식을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인지….예수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 의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지…. 그리스도 의식은 정말로 자신으로부터 행동하고,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사람에게 머무르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속이는 버릇이 있는 사람, 적당하게 때우려는 사람, 무책임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 의식은 정착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한 행동을 하며, 그리스도 의식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며, 폭력을 당해도, 예수는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의식을 받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결코 책임을 회피하는 일 없이, 정정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강함이 필요하겠지요.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 속에 평온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한, 평온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한, 평온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였을 때, 평안이 흐트러지고, 마음 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갈등이나 불안은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 시키면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한, 정직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서로 진실하게 대화를 나누는 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가져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하는 한, 여러분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정직하게 살아가고, 올바른 말을 발할 때마다 항상 평온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의식을 구현해 간다." 그것을 위해서는, "항상 스스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간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이것이 제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의식으로서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고, 교회를 통한 낡은 이미지로 밖에 인식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이야기된 것처럼 "완수한다, 자신부터 솔선해서 진행시켜 나간다, 열심히 노력한다, 반드시 최후까지 해낸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의 현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 그것을 구현해 나갑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항상 다양한 측면으로서 한사람 한사람과 접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각자가 이 그리스도 의식을 완전하게 손에 넣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여러분에게는 그다지 정감이 가지 않고, 별로 바람직한 말은 아닐 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부터 솔선수범 해간다는 기분, 최후까지 달성한다는 기분, 철저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기분, 모두와 사이 좋게 함께 협력하여 완수한다는 기분..." 이러한 것을 그리스도 의식의 현상이라고 이해하며, 마음 속에 정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영원히 배울 수 있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