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환경은 자신의 집중력일 것입니다.

집중한 상태에서 암기한 것은 산만한 상태에서 암기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오랫동안 갑니다.

또한 이해도도 집중된 상태에서는 엄청나게 잘되지만, 산만한 상태에서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 처럼 공부에서는 성패의 갈림길이 되는 집중력이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왜 나는 산만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왜 다른 사람은 몇시간씩 공부를 해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데, 나는 몇분공부해도 머리가 아픈 것일까요?

엠씨스퀘어라는 것이 있어 그 파동을 통해서 집중력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 있더군요. 잘 팔리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집중력이 필요함을 느낄 것으로 봅니다.

이 글을 읽음으로써, 학생분들이 집중력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고도의 집중력으로 한발한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집중과 산만이란 것은 마치 깊은 스폰지와 얇은 금박지와 같아서, 지식을 흡수하고 모금는 정도가 엄청 차이가 납니다. 집중력을 훈련을 통해서 고칠 수 있을 까요? 타고 나는 것일까요?

집중과 산만이란 그 원리를 안다면 누구나 다소의 개선됨을 볼 수 있고, 노력에 의해서는 궁극의 집중도로 나아갈 수 있고, 궁극의 집중력이란 초능력과 연관되는데, 그 입구까지 저의 글이 인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학생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기 전에 믿음론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신념의 마력이나 최면을 실행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본적인 지식이 습득되었음을 믿고, 글을 써내려 가겠습니다. (읽지 않으셨으면,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체는 믿음이며 이 믿음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근본체라고 합니다. 근본체인 믿음이 창조해내는 것이 영혼계와 물질계입니다. 그래서 영혼계도 물질계도 모두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믿음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인에 다 그 불성이 있음을 싯달타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든 생명체가 믿음으로 구성되어져 있기에 근본체와 원래 하나이고, 언제든지 근본체로 돌아 갈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수행을 거쳐야 겠지요.

우리 생명체는 이렇게 믿음에서 나왔지만, 그래서 믿음의 성질을 가졌지만, 불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육체와 영혼으로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수믿음인 잠재의식뿐만이 아니라 확인과 인과에 의지하는 의식마져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이 의식에 의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전체의 믿음체 속에서 불완전한 믿음체로써 우리가 존재합니다. 믿음을 이루려고 하지만, 불신을 하는 관계로 대상과 확인에 의지해서 믿음을 얻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대상이 필요하고, 그 확인이 필요함을 믿음-욕망과 그 욕망의 성공을 확인함(5감각으로)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믿음이란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기의 근원이고 영혼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불완전한 믿음체라서 믿음스스로에 의지하지 못하고, 대상들에 의지합니다.

그 대상하나하나가 곧 욕망의 꺼리가 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만족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없으며, 필요한 것이 없기에 걱정이 없고, 욕심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기에 생각이 없고, 무념무상의 상태입니다.

무아지경의 상태입니다. 무의식의 상태이며, 잠재의식의 상태입니다. 곧 믿음과 잠재의식은 같은 차원을 말함을 아실 것입니다.

불가의 수행에는 참선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랫배의 움직임에 집중함으로써 걱정을 없애고, 망념을 없애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즉 고도의 집중상태도 무념무상의 상태로 무의식의 상태고, 무아지경의 상태며, 잠재의식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즉 고도의 집중과 믿음은 같은 차원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집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 믿음으로써 걱정이 없고, 생각이 없고, 무념무상의 맑은 상태가 되고, 그럼으로써 하나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 인간은 의지하는 대상이 너무도 많아서 욕망이 너무도 많습니다. 음식에도 의지하고, 잠에도 의지하고, 이성에게도 의지하고, 쾌락에도 의지하고, 쾌락을 주는 모든 것에 의지하다 보니 스스로 믿음에 이르지를 못하고, 그 대상에 대한 성공의 확인을 거쳐야 잠시나마 우리는 믿음의 상태에 만족의 상태에 이릅니다.

하지만 믿음정론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확인에 의한 믿음(욕망의 충족)은 근본이 불신에서 출발하여 의심해서 확인한 것으로 믿음이라기 보다는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만족의 상태가 계속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곧 다시 불신상태가 되어서 대상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욕구가 일어 납니다.

그 욕구들 그렇게 일어 나는 욕구들때문에 망념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라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과정을 스스로 그려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욕구를 이루는 과정에서 방해 요인이 있다면, 그 망념은 더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상태에 이르러야 집중을 얻을 것인데, 수많은 것에 의지하다 보니, 그로인해 생겨나는 수많은 망념들로 욕구들로 한시도 믿음의 상태에 이를 수가 없어 지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이 상태가 더 심해지는데, 주기적으로 담배생각이 나서, 오랫동안 수능을 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1시간이상을 앉아 있으면 담배생각으로 집중이 안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만한 상태란 욕망이 많은 상태를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믿음의 자체적인 힘을 믿지 못하기에 다른 대상을 찾고, 의지하고, 그 대상의 성공을 확인하려는 상태가 한번 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다른 대상들을 찾고, 의지하고, 욕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음식에 많이 의지하는 사람은 담배에 의지할 확률이 높으며, 담배의 의지하는 사람은 술에 의지할 확률이 높아지며, 이렇게 단계를 서서히 넓혀 가게 됩니다.

이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스타크래프트같은 게임도 마찬가지고, 당구나 농구,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도 마찬가지구요. 의지하면 그것으로 인해 욕구가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망념이 많이 생기고 그로써 산만한 상태가 되는 시간이 많아 지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 눈을 감고 고요히 명상을 해본 경험이 적을 것입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곧 잘들고 다시 똑같은 하루를 보낼 확률이높은 현실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상태면 공부에 그렇게 많이 방해를 받지를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양심과 의무감 체면, 공포, 두려움 등으로 스스로의 믿음 시스템이 복잡해 진상태에서의 근원을 알기 힘든 산만함이 문제입니다. 이 것을 치료해 가기는 엄청 힘이 듭니다.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믿음의 방해요인과 기존의 욕망과의 팽팽한 대립상에 놓이는 것입니다. 갈등상태라고 해야 할텐데요. 이런 상태에 놓이면, 필요한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방향이 정반대라서,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하고, 망상만이 일어 나며, 그 속에서 욕망 즉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는 더 힘들게 됩니다.

최대의 산만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산만함의 정도가 깊어지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 치료는 진리가 해줘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모든 문제를 일시에 통하게 하는 묘법이 있습니다. 왜냐 모두 근원은 하나이며, 원래 궁구하는 목적인 생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두 기어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잎을 더먹으려고 노력하지만 애벌래의 궁구의 목적은 그런것에 있지 않고, 조용히 고치속에서 변태를 거쳐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니는 것에 있듯이 말입니다.

집중력의 원리에 대해서 길다면길고 짧다면 짧은 글을 썼는데요.

앞으로는 이 원리로써 어떻게 하면 조금씩 더 깊은 집중력으로 나아 갈 수 있을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 성현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