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 유해 둘러싼 쟁투와 '왼팔 유골'의 행방 (모 종교신문에서)

나라가 기울고 외침이 있을 때면 구국의 선지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신흥종교를 통해 사직을 바로 세우고 갈 곳을 몰라 방황하는 민중을 인도하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다.  한국근대사에서는 처음으로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립한 이래, 1880년 일부 김항이 정역사상(正易思想)을, 1901년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이 증산교를, 1909년 홍암 나철이 대종교를, 1916년 소태산 박중빈이 원불교를 창립하였다.  이들 선지자들이 창립한 신흥종교는 유교 불교 선교 기독교 무속 도참 민간비결이 어느 정도 내포돼 있지만, 모두가 고유한 민족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많은 신흥종교 가운데 증산교는 동학과 함께 하나의 큰 산맥을 이룬다.  우리민족의 전통적 사상을 그대로 잇는 한편 그것을 새롭게 체계화시켜 인간이 신이나 그 밖의 어떠한 사물보다도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인존사상, 현실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앙은 선천시대에서 쌓여온 원한 때문이며, 후천세계가 열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원한들이 깨끗이 해소돼야 한다는 해원사상,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세계가 한 집안으로 통일될 것이라는 민족주체사상을 크게 내세웠다.
증산은 스스로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구천상제로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세계상등국(世界上等國)이 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밝힐 진법(眞法)이 여기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특히 인간은 지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 보다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인간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과거에는 "인간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成事在天)"는 사상이 지배했지만, 후천에는 "하늘이 일을 꾸미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다 (謀事在天成事在人)"는 사상으로 변화된다고 주장했다.  강일순의 인존사상에는 계급타파 사상과 남녀평등 사상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 증산의 신비로운 탄생과 생애
증산은 1871년 9월 19일 전북 고부군 서산리에서 출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운 일이 많았다.  부친은 가문이 미천한 사람으로 방랑하여 나이 30이 넘도록 자식이 없더니 부인과 함께 두성산(斗星山)에 올라가 치성을 드리고 내려왔다.  그때 홀연히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고 뇌성이 진동하여 부인이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라지며 그 속에서 큰 불덩이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더니 그 불덩이가 자기 앞에까지 굴러오는 동안 점점 작아져 동이만 하더니 더 작아져 계란만하게 되자 입 속으로 들어가므로 그 알을 꿀꺽 삼켰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뒤로 태기가 있어 13달 만에 아기를 낳으니 이가 강증산이다 (<조선도교사> 이능화 지음).
그리고 출산 때는 그의 아버지가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의 2남1녀 중 맏이로 태어난 증산의 집안은 그의 선조들이 이조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몰락한 양반 후예였다.  빈한한 가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머슴살이를 하고, 21세에 결혼한 후에는 처가에서 훈장생활도 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따라다니며 혁명의 진행과정을 보았다.  그러나 직접 혁명에 참가하지는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지켜보면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됐다.  증산은 이러한 혼란을 벗어나는 길은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해 유 불 선 등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 풍수 복서 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와 미래를 알수 있는 공부를 시작했다.
이무렵 세상을 널리 알기위해 3년동안 전국을 순회하고 충청도 비인 출신인 김경흔에게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에서는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正易)>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증산은 1901년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던중 그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인간의 욕심과 음란 성냄 어리석음을 극복함으로써 도(道)를 깨치게 되었다.  득도한 증산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 모악산 근방에서 포교활동을 했으며, 신도 20여명과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포교 당시 증산은 자신의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 불렀고, 증산교라는 명칭은 후일 그의 호를 따서 얻게 되었다.

◇ 증산의 왼팔 유골의 행방
증산이 의병모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의 권능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다.  신도들 중에는 그가 평소 말하던 천지개벽이 늦음을 원망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증산은 1909년 3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신도들은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실망한 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 사람만이 장례식을 치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여년 후부터 신도들 사이에 유골을 차지하려는 기이한 싸움이 시작됐다.  '유골 빼앗기' 싸움은 증산이 민족종교의 창시자로서 민중 속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를 추종했던 제자와 혈족 그리고 계시를 받아 종교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서로 유골을 차지하려고 벌인 것이다.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증산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의 유품을 서로 차지하려고 야밤에 묘소를 도굴하는 일이 거듭되었다.  증산의 유골 중 왼쪽 팔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같은 연유에서였다.
1909년 8월 9일 사망한지 3일 후에 증산은 부친의 주선으로 전북 금산군 금산면 구릿골 대나무밭에 가매장되었다가 9월 25일 제자 김형렬 등이 마을근처 구릿골 큰골 솔개봉 아래 장탯날에 초빈 묘를 썼다.  12년 후, 무극도의 교주 조철제가 초빈을 파헤치고 증산의 유골을 가져갔다.  '성묘도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김형렬이 경찰에 고발하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철제가 증산의 성골을 모시면서 수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신도들에게 번져갔다.
증산 생존시 제자인 문공신은 1922년 1월 돌격대를 조직하여 유골을 지키고 있던 무극도 신도들을 때려눕히고 유골을 빼앗아 갔다.  이런 와중에 '유골의 왼쪽 팔뼈'가 부러져 나가게 되었다.  조철제는 부러진 유골을 다른 곳에 숨겨놓고 거처를 옮겼다.
문공신은 증산의 유골을 탈취당할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방안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일제는 문공신에게 7년 징역을 선고하고 증산의 유골을 정읍경찰서에 이송시켰다.  이 무렵 증산의 제자로 세력을 키운 보천교주 차경석이 유골 인도 로비를 벌여 대흥리앞 냇가에 빈실을 지어 유골을 보관케 하고 관리를 보천교가 맡았다.
그러나 조철제는 자신이 증산 상제의 왼팔 유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우주의 신비와 천지의 도수가 모두 왼손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왼팔 유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순창 회문산 기슭에 묻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27년 조철제는 증산 첫 부인의 딸 강순임의 이름으로 보천교에 '유골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차경석 일파는 증산의 유골을 대흥리 뒷산 중턱에 암매장했다.  재판은 조철제의 패소로 끝나고 10여년 후 문정삼이 증산 유족들과 증산의 묘소를 이장시키고자 경찰 입회하에 파묘를 했으나 유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골시비는 해방 후에도 몇 차례나 재연되었다.  1974년 법원은 증산 제자들이 60여년간 분묘를 수호 관리해 왔다면서 관리권이 증산교 측에 귀속한다고 선고했다 (문일석 <증산 왼팔 유골 어디로 갔나>).  그러나 증산의 왼팔 유골은 여전히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민족종교의 큰 산맥을 이룬 증산의 인존사상과 해원사상 그리고 천지공사는 날이 갈수록 신도와 연구자가 늘고 명실상부한 대표적 민족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일부 추종세력이 그의 신앙과 사상보다 유골에 더 집착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불도들이 성불득도보다 부처님 사리에 더 집착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  증산의 정체성 문제 소고
위의 원문은 모 종교신문에서 옮겨 온 글인데, 증산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증산에 관한 내용은 뭐든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가져왔다.  증산을 혹자는 미륵이다 하고, 혹자는 아니고 그냥 도통한 존재다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모 교수는 증산을 은하계의 대장(?)이다 라고 까지 주장하는데, 이 경우는 지구영단 및 그 이상의 체계와 비교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먼저 미륵설 문제를 크리슈나무르티의 경우와 대비하면, 증산 사후 몇 년 안되어 미륵이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 출세하려 하였다는 것은 앞 뒤가 잘 안 맞는 경우이다.  미륵이 맞다면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 출세하려 했다는 경우가 거짓이 되며, 크리슈나무르티의 경우가 맞다면 미륵이라는 게 진실이 아니게 된다.  다른 경우는 나중에... (우상단 그림은 증산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