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캐나다에 난민신청한 전 선양시 사법국장 한광성(1)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 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장 한광성(韓廣生)의 최근 사진(대기원)




(중문 대기원) 옌전(顔真), 야메이(亞梅)보도= 한광성(韓廣生)은 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장으로 그전에는 선양(瀋陽)시 공안국 부국장을 역임했었다. 2001년 9월 캐나다로 탈출하여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영사관의 정치 영사 천융린(陳用林)과 톈진시 610사무실의 하우펑쥔(郝鳳軍)이 중국을 탈출한 후 한광생은 공개적으로 중공내막을 폭로한 또 한명의 중공 관리이다. 며칠 전 대기원에서는 한광성과 단독인터뷰를 가졌으며 알려지지 않은 많은 내막들을 시리즈(3편)로 보도하려고 한다. 아래는 그 1편 내용.

기자:언제 캐나다에 왔으며 어떤 목적으로 왔는가?

한:나는 2001년 9월에 상무고찰의 목적으로 캐나다에 왔다. 이것은 나의 생명에서 막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중공을 이탈하게 된 것이다.

기자:캐나다에 온 지 3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공개적으로 입을 열게 된 이유는?

한:캐나다에 온 지 3년이 넘었고 캐나다에 오자 말자 나는 중공 선양시 위원회에 내가 선양시에서 맡았던 일체 당내, 당외 직무에서 사임하겠다고 제출하였다. 그러나 기타의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선양에 있는 나의 가족들을 박해하는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내도 많은 박해를 받았다. 이미 소환조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줄곧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그녀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아내와 작년에 이혼하였으나 그녀는 감시대상으로 되어 통제 받고 있으며 여권은 여전히 압수되었다.

최근 뉴스에서 호주 시드니주재 중국 영사관의 정치영사 천융린이 과감하게 일어나 중공을 이탈하였고, 동시에 톈진시 610사무실의 경찰 하오펑쥔도 일어섰고, 또 다른 관리 한 명도 일어섰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 몇 사람의 행동에 나는 아주 탄복하게 되었고 큰 고무를 얻어, 나도 일어나 그들을 성원하고 지지하며 아울러 중공의 일부 추악한 내막을 폭로하여 전 세계 사람, 특히 캐나다 국민들이 중공의 진실한 면모를 더 잘 인식하도록 하고 싶었다.

중공에 너무 실망하여 이탈을 결심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중공에 너무 실망하였으며 절망에 이르러, 중공을 이탈하고 중공과 고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또한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성명하는 바이다. 중국 공산당을 퇴출한다고. 아울러 내가 알고 있는 중공의 일부 추행을 폭로하려 하는 바, 이 역시 나 자신의 하나의 신념이고 사명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전 세계 사람, 특히 캐나다 국민들이 중공의 진실한 면모를 더 잘 인식하고 중국의 민주정치 건설의 추진과 중국 인민들에게 유리한 일이며 또한 나의 인생신념을 실현시키는데 유리한 것이다.


기자: 당신은 일찍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에 종사하여 사업 영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승진이 아주 빨랐고 중요 도시의 국장급 간부로 되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중공과 결렬하게 하고 그것을 폭로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나의 당령은 20여 년으로 1980년 3월 5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난카이(南開)대 77기 학생 중에서 나는 중공에 가입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때의 신념은 바로 공산당과 함께 인민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고 공산당과 함께 사회를 더 밝고 따뜻하게 개조하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런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졸업한 후 대 기관에 가지 않고 선양시 공안국에 몸 담아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면 바른 것을 세우고 악한 것을 다스리고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님을 점차 알게 되었고 중공은 속부터 썩기 시작한 사과처럼 점차 밖으로 썩어 이미 끝까지 부패해졌다고 본다.

6.4사건, 파룬궁으로부터 '9평공산당'까지

기자:어떤 큰 사건으로 이런 변화가 있게 된 것인가?

한:시작은 6.4사건이었다. 그때 중공이 말한 일체는 모두 가짜로서 인민의 이익이 일체보다 높다는 것도 가짜라는 것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인민과 중공의 충돌이 발생할 때면 중공은 아무 거리낌 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잔혹하게 인민에게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중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아울러 줄곧 파룬궁 사건까지 점차 중공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나온 후 중공에 사표를 썼고 실제로 결렬을 했다. 나온 후 나는 많은 현상을 보았는데 특히 최근의 이런 일들이다.

나는 대기원시보에서 발표한 '9평 공산당'을 보았고 아주 상세하게 읽었다. 아주 투철하게 썼는데, 모든 중공관리들이 보고 나서 스스로 중공에 대하여 하나의 청성한 인식을 가지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9평'은 중공의 본질을 투철하게 파헤쳤고 비록 나는 50이 넘었지만 중공이 통치하는 현 상황을 개변시켜 일당독재를 끝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려 한다.

중공은 첫째로 일당독재를 끝내고, 둘째로 진정한 여론의 자유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 사법독립을 실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중공이 이 세 가지를 해내지 못한다면 어느 날에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멸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모든 중공관리들이 형세를 똑똑히 알고 역사의 각도에서 역사발전의 흐름속에서 인류 진보의 규칙으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기를 바란다.

중국 공안 사법기관은 반인류 기관

기자: 비교적 첨예한 문제를 묻겠는데, 당신이 이번에 나올 것을 결정하는 데는 어떤 개인적인 원인이 있었는가?

한: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라면 캐나다에 왔을 때 나는 캐나다의 보호를 응당 받아야 한다고 여겼고 또한 룩셈부르크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들은 문제가 없다면서 응당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 나온 후에 캐나다에 정치망명을 신청했는가?

한: 그렇다.

기자: 캐나다에서 왜 당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한: 왜냐하면 나는 그런 독재체제 중에서 도망친 것으로서 독재를 반대하며 반인류를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유도 모르게 한 법관으로부터 거절 통지를 받았는데, 그는 내가 일했던 부서와 직책은 반인류적이라고 말했다.

기자: 당신을 거절한 이유는 당신이 사법국에 있었고, 또한 주요 책임자였기 때문인가?

한: 나는 공안국과 사법국에 모두 있었다. 그는 이런 부서가 바로 반인류적인 부서라고 여겼다.

기자: 그가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캐나다에 이런 법률이 있는 것인지? 중국의 사법계통- 공안국과 사법국 이런 부서에 일했던 사람은 반인류죄의 혐의가 있다고 보는 것인지?

한: 아마 캐나다 이민법 중에 이런 규정이 있거나 또는 그들의 국제난민공약의 구체적인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중국의 공안이든 사법이든 감옥이든 그것은 확실히 중공의 통치기구에서 중공과 인민들의 충동이 발생할 때 잔혹하게 인민을 탄압한 일면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전 세계 경찰과 같은 기능이 있는데, 바로 일반적인 형사범죄를 다스리고 사회치안과 국민들의 생명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공안기관의 감옥과 같은 것을 국가기관에서 건립한 목적은 바로 인권을 탄압하고 반인류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비록 이런 부서에서 일했지만, 하나의 개인적인 태도가 있지 않은가? 개인의 표현에서 적극적이었는가? 아니면 소극적이었는가? 적극적으로 중공을 따라 인권을 짓밟고 인민을 박해했는가? 아니면 힘 닿는데까지 일부 보호를 했는가? 이는 응당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자: 한 개인의 생명으로서 중국의 대환경에서 그런 대열에 합류하였고, 많은 부분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

기자: 당신이 발언한 사실에 대해 결과를 고려해 보았는가?

한: 물론 고려하였다.

기자: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한: 나는 이미 중공에게 반당, 반국가 분자로 낙인 찍혔다. 2002년 전국 사법청 청·국장회의에서와 선양시 정법공작회의에서 나는 투항하여 도망간 것으로 통보되었다. 이 죄명은 이미 아주 크다. 내가 어느 때에 중공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엄중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나서는 것은 나에게는 죄를 더 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전 세계의 더욱 많은 사람들이 중공의 진실한 면모를 이해하고 중국 사람들이 하루 빨리 중공의 암흑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또한 캐나다 국민들이 중국의 진실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 개인 또한 반백(半百)이 지났으므로 죽어도 두렵지 않다.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은 노동자 생활

기자: 현재 토론토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한: 나는 생존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포함하여 택시운전도 했고, 일부 장사도 해보았다.

기자: 국내에서 높은 관직으로 있다가 현재 토론토에서 노동, 아주 힘든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전락되었는데 이런 차이는 아주 크다고 본다. 당신이 고위 관직을 버리고 앞으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현재 이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6.4사건 때문이었고, 최후에 결심하게 된 동기는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 기간 10년의 세월이 경과하였고 이 10년간 인식이 점차 바뀌었으며 중공을 똑똑히 인식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왜 일찍 나오지 않았는가? 기회가 많았을텐데"라고 말한다. 확실히 많은 기회가 있었다. 94년 나는 처음 미국에 갔고, 97년 또 한 번 갔으며 그때는 미국에서 3개월간 체류하였는데,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공무로 출국하였기 때문에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의 출국을 허가한 사람들은 죄를 받게 되기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나 나의 행동 때문에 상처주기 싫어서 생각 끝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 후 또 기회를 기다렸다. 98년에 캐나다 비자가 나왔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가려는 염두는 갈수록 강해졌다.

이유는 우선 중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어기고 가면을 쓰고 행동을 할 수 없었고 또 양심을 어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일종 치욕이라 여겼고, 내가 평생 추구한 것은 사회의 공평함과 정의였다.

내가 태산에 오른 후 쓴 문장 한편이 있다. 난카이 대학 신문에 발표하였는데, 문장 맨 끝에 쓴 글은 바로 “천지가 더욱 광명하고 인간세상이 더 따뜻해지기를 원한다” 이다. 이는 나의 신념이자 나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중공을 따라간다면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며 아울러 거꾸로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근본 원인이다.

두 번째로는 중공의 부패를 보았고 개인적으로 말하면 관직에서 그런 체제 속에서는 ‘강호에 몸을 담으니 스스로 어찌할 수가 없구나’하는 상태였다. 내가 나온 후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분분했고, 그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고, 또한 많은 추측을 불러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왜 높은 벼슬자리를 포기했고 상당히 좋은 생활을 포기했는지 미래의 앞길을 포기했는지? 우선 나는 말한 바와 같이 신념의 문제로서 정치적인 신념은 공산당과 이미 격이 달랐다. 그렇게 많은 부패를 보고서 나도 관직에 있으면서 이런 관직에서 자신을 파악하기가 아주 힘들었고, 내가 그 물결에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른 부류로 여겨져 아마 죄인으로 되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다 가능한 것이다. 내가 여러 방면에서 고려했는데 사직보고서에 관리계층이 너무나 어둡고 잔혹하여 급류에서 과감하게 물러난다고 썼다.

기자: 당신의 이 사직보고서는 출국 후에 쓴 것인가?

한: 내가 베이징에서 쓴 이 보고서는 여기에 온 이튿날 즉 2001년 9월 18일 나의 한 친구에게 부탁하여 팩스로 중국에 보냈다. 나는 나의 당내외 일체 직무를 사임하였는데 이는 아주 오랜 고려끝에 내린 것으로서 이 몇 년간 관리계층의 암흑과 잔혹함을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하게 민주와 법치를 실행하는 나라에 가서 생활하고 싶었고 생활하는 법을 바꾸고 싶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탐관오리가 결코 아니다

경력에서 볼 때 나는 탐관오리가 아니다. 나는 직권을 남용하여 누구에게나 어떠한 금전과 재물을 요구한 적이 없다. 여기에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나온 시간으로 볼 때 랴오닝성에서 발생한 ‘목마사건’은 이미 사건을 종결한 상태였고, 제 10기 당대표대회는 2001년 7월 25일 열렸고, 그 회의에서 나는 중공 선양시 규율검사위원의 574표에서 567표를 얻었다. 랴오닝성 사법청장은 나에게 전화하여 내가 높은 득표율로 규율검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하였다. 규율검사위원회 위원은 우선 랴오닝성 규율검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사직보고서에서 제기하였다. 일찍부터 나가려 하였으나 이 사건이 결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떤 경제문제에 관련되어 의심받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이 사건은 종결되었고 당 대회 역시 끝났으며 나 또한 규율검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7월 31일 당선되어 8월 1일 공포하였다. 8월 12일 나는 미국에 시찰을 갔고, 9월 6일 중국에 갔다가, 9월 16일 중국을 떠나 캐나다로 왔다. 바로 이런 하나의 과정이 나의 배경이다.

둥근 달이 뜰 때면 가족이 많이 보고싶어

캐나다에 온 후 정말로 너무 차이가 컸다. 고독하였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의 차를 운전해 주었지만, 여기서 나는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해야 했고, 국내에서는 방4개 거실 하나짜리 45평 아파트에 살았지만 여기서는 몇 평밖에 안되는 지하실에서 살아야 했다. 생활의 간고함과 고독, 여러 가지의 시련 특히 둥근 달이 뜰 때면 나는 가족들이 아주 보고 싶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나의 선택은 막중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나는 믿는다. 매 하나의 정직하고 양심이 있고 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려면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함을, 그러므로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 또한 더 많은 사람이 각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 당신의 말처럼 캐나다에서는 중국의 많은 공(公), 검(檢), 법(法)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반인류죄의 공범으로 여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

한: 캐나다 정부는 국제난민공약을 어떻게 집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응당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정법부서의 직책 중에서 역시 평범하고도 통용되는 직책이 있다. 이런 부서 중의 사람들은 표현 또한 같지 않으므로 마땅히 구별해서 대해야 한다. 나치 통치 중에서도 예외가 있듯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쉰들러는 바로 나치 독일체제의 일원이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천여 명의 유태인을 지킬 수 있었다.

캐나다 정부는 나의 정치보호 요청을 인정하지 않는데, 나 한 개인의 마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회에는 정의가 없다고 느끼게 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방의 문명사회로 감히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기살기로 중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할 것이며, 절망을 느끼게 하고 광명과 밝음을 볼 수 없음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캐나다 정부에서 이 정책을 검토하기를 희망하며 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광명한 미래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중공의 순장품(殉葬品)이 되지 말라

기자: 토론토에만 수십만 명의 화교들이 살고 있고, 당신이 탈출한 사건으로 중공은 이미 당신을 반당, 반국가범으로 정했는데, 이것은 이쪽 화교들의 당신에 대한 인식과 관점에 영향을 줄 것이다. 당신이 해외의 화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 나를 잘 아는 사람들과는 개인 관계에서 말한다면 아주 좋은 우호적인 관계이다. 하지만 정치 신념에서는 나를 꼭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 후 아마 나를 멀리 할 것인데, 그들이 하나의 모호한 개념이 있거나 또는 하나의 틀린 인식이 있어 나의 행동에 대해 중공에서 말한 반당 반국가에 속한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중공은 현재 중국을 통치하는 한 정권으로서 그것은 중국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것은 현재 중국을 통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생명력은 제한된 것이지만 한 국가 한 민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내가 중국 공산당을 이탈하고 배반하였다고 해서 중국을 배반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중화민족을 배반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나는 나의 조국을 아주 사랑하고, 나의 국민들을 아주 사랑하며, 나는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한 점을 이해하고 인식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단독인터뷰] 전 선양시 사법국장 한광성, '610' 내막 폭로 (2)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 한광성(韓廣生)의 선양시 공안국 부국장과 선양시 사법국장 임명증서 (대기원)  

(중문 대기원) 옌전(顔真), 야메이(亞梅)보도= 한광성(韓廣生)은 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장으로 그전에는 선양(瀋陽)시 공안국 부국장을 역임했었다. 2001년 9월 캐나다로 탈출하여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영사관의 정치 영사 천융린(陳用林)과 톈진시 610사무실의 하우펑쥔(郝鳳軍)이 중국을 탈출한 후 한광성은 공개적으로 중공내막을 폭로한 또 한명의 중공 관리이다. 며칠 전 대기원에서는 한광성과 단독인터뷰를 가졌으며 알려지지 않은 많은 내막들을 시리즈(3편)로 보도하려고 한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내용.

2.  610 조직의 어두운 내막을 폭로

기자:하오펑쥔(郝凤軍)은 많은 610 내막 문건과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에서 박해받는 상황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610 조직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데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밝혀주기 바란다.

한:610 조직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다.

기자:왜 610 이라고 부르는가?

한:이는 그 조직이 성립된 시간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중앙의 610 사무실은 1999년 6월 10일에 성립되었고 각지에서 부르는 것도 약간은 차이가 있고 일부 구별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610'이라 부르고 또 '611'사무실이라 부르는 곳도 있으며 '621'사무실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즉 그것이 성립된 시간적인 차이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상 그것의 임무와 구성은 모두 동일하다.

구성은 모두 당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으며 공안국, 검찰원, 법원, 사법국이 주요 구성 기관이다. 구성원은 전문 파룬궁을 탄압하는 조직으로서 이 조직은 법률을 초월하며 매개 지역 각 부문의 모든 기관을 통치하고 지도하며 지휘한다.

기자:선양시를 예로 들 때 610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한: 선양시의 610은 611사무실이라고 부르며 핵심 책임자는 시위원회 정법 주관인 부서기이다. 그 다음은 시위원회 판공청, 시위원회 정법위원회 몇몇 사업일꾼이 상무적으로 일을 보며 그 다음은 공안국, 검찰원, 법원, 안전국이며 민정국도 포함하는 조직기구이다.

이들은 항상 상급의 지시를 전달하여 해당 지역에 임무를 배치한다. 주로는 이런 몇개 방면의 사무를 포함한다. 첫째는 북경에 청원하러 가는 파룬궁 인원을 체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감금하고 강제 전향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일부 파룬궁 수련생들을 강제 노동교양 시키거나 판결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그들의 직무이다.

기자: 선양시에 있을 때 610회의에 몇 차례나 참석했으며 당신에게는 어떤 방면의 일을 배치했는지 한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는가?

한:이런 회의는 늘 열렸고 구성 단위에서 참가하는 외에도 각 현위원회 정부에서도 참가한다. 그 때 가장 큰 임무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북경에 청원하러 가는 것을 막는 일이었고 이 문제 때문에 중앙에서부터 지방까지 모두 통제수치를 하달하였다.

관리들의 상벌 기준은 청원자들의 숫자에 따라

기자: 통제 숫자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 예를 들어 선양시에서 만약 한달기간 내에 3명 또는 3명 이상의 파룬궁 수련생이 북경에 청원하러 갔다면, 그럼 시위원회 주요담당 부서기 또는 서기가 성(省)에 가서 보고해야 한다.

기자: 그렇다면 중앙에서 매일 각지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북경에 청원하러 갔기 때문에 아래로 숫자를 내려 보냈다는 것인가? 해당 지역에서 파룬궁 수련생이 북경에 가서 청원하는 사람수는 몇 명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이런 뜻인가?

한: 각 시에서는 직책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성에 가서 보고하기 싫어서 많은 경찰력을 동원하고 많은 재력을 쏟아 부어 북경에 청원하러 가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막았다.

기자:선양시에서 하달받은 숫자는 얼마였는가?

한: 선양시의 숫자는 보통 한 달에 3명이었다.

기자: 청원하러 북경에 가는 파룬궁 수련생이 3명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한:선양시의 어느 한 진장(鎭長)은 그 진에서 파룬궁 수련생 한 명이 반복해서 북경에 청원하러 갔기에 해직 당하였다.

천안문 파출소는 크게 횡재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북경에 청원하러 갔는가는 천안문 파출소에서 보고한다. 그러므로 각지에서는 스스로 많은 경찰력과 재력을 들여 북경에 청원하러 가는 것을 막는 것 외에 천안문 파출소에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주어 그들이 자기 지역에서 청원하러간 파룬궁 수련생들을 체포한 후 위에 보고하지 않고 조용히 돌려보내게 하는 것이었다. 들리는 후문으로는 그 기간내에 천안문 파출소는 큰 횡재를 하였다고 한다.

기자:각지에서 청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각 지역에서는 모두 뇌물로 숫자를 감소시켜 관리들이 처벌받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인가?

한:그렇다.

610은 구두로 문건을 전달

기자:중공 당국은 610 조직을 부인한다. 파룬궁을 다루는 문제에서 비밀문건이 있는지, 예를 들자면 610은 문건을 구두로 전달하는지 아니면 일부 내부 문건이 있는 건지?

한:내 기억으로는 공식적인 공개 문건은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지도자가 이야기하면 바로 문건이고 지도자의 강연고(講演稿), 나아가 일부 상황 통보 내용에는 상황도 있고 지시도 있다. 많게는 구두로 말하고 구두로 전달하는 것이다.

기자:회의에서 누가 이런 것을 배치하는가?

한: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한 개 부분은 시위원회에서 이런 일을 배치하고 요구를 제출한다. 또 업무 부문은 랴오닝(遼寧)성 사법청에서 요구를 제출하고 임무를 배치하며 ‘경험’을 교류한다. 즉 지도자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런 일을 배치한다.

3. 사법계통에서 파룬궁 박해에 참여

기자: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가 있었는가?

한: 나에게는 여러 가지 업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법률제도를 만들고 법률을 보급하며 변호사를 관리하였는데 그중에는 선양시 감옥과 교양소(강제수용소)관리도 포함되었다. 교양소가 4개였는데 그중 3개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감금하였다.

기자:가장 많을 때 파룬궁 수련생들을 얼마나 감금했는가?

한: 가장 많을 때는 약 4-5백 명 정도 된다.

기자:대략 언제부터 감금하기 시작했는가?

한 : 1999년 연말에 가까웠을 때부터 줄곧 지금까지...

기자:이 과정에서 당신은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 내가 알기로는 노동교양소는 법을 경하게 위반한 사람들을 감금하는 걸로 아는데 파룬궁 수련생들은 왜 다른 곳에 보내지 않고 노동교양소에 보내는지?

한:이것은 중앙의 명령이라고 봐야 한다. 제일 처음에 파룬궁을 탄압한 것은 공안경찰이었고 사법계통은 개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안의 수용소, 구치소에서는 더 이상 감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내 기억으로 시위원회 부서기가 이 방면의 일을 주로 책임졌는데 나를 찾아왔다. 노동교양소를 하나 개척하여 파룬궁 수련생을 감금하라는 요구였다.

선양시의 4개 노동 교양소에는 원래 여성 노동교양인원을 감금한 적이 없었고 여성은 통일적으로 성으로 보내졌다. 그때 나더러 여성 파룬궁 수련생을 감금하라고 요구하자 처음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유는 노동교양소는 경한 범법자들을 감금하는 곳으로서 파룬궁을 감금하는 곳이 아니었고 법률적으로 말하면 파룬궁은 어떤 죄목도 없었기에 감금할 수 없었다.

기자:당신이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한:동조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 그 서기는 책상을 치면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 당신은 명령을 집행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법청에 청구해 보자고 했다. 업무적으로 상급기관에서 시위원회를 눌러야겠다고 생각한 후 랴오닝성 사법청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 청장은 그때 감금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말했고, 파룬궁 수련생을 노동교양소에 감금할 수 없다는 태도를 표시했다.

그렇게 며칠 끌다가 결국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사법청에서는 태도를 바꾸었다. 우리더러 회의를 소집하여 장소를 만들어 파룬궁 수련생을 감금하도록 요구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더 버틸 수 없었다. 만약 계속 버티다가는 당내의 이단자로 되어 강력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룽산(龍山)노동교양소에 그들을 감금했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업무 권한 범위 내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배려하려고 하였다.




[독점인터뷰]전 선양시 사법국장, 중공 관리 사회의 검은 내막 폭로 (3)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 전 선양시 사법국장 한광성의 신분증  

(대기원) 옌전(顔眞), 야메이(亞梅) 기자 = 한광성(韓廣生.53)은 전 랴오닝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장으로 그전에는 선양시 공안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2001년 9월 캐나다로 탈출하여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호주 시드니 영사관의 정치 영사 천융린(陳用林)과 톈진시 610사무실의 하오펑쥔(郝鳳軍)이 중국을 탈출한 후 한광성은 공개적으로 중공내막을 폭로한 또 한명의 중공 관리이다. 며칠 전 대기원에서는 한광성과 단독인터뷰를 가졌으며 알려지지 않은 많은 내막들을 시리즈(3편)로 보도하려고 한다. 아래는 그 3편 내용으로 중공 관리들의 내막에 관한 이야기이다.

5. 중공 관리 사회의 내막

** 중공 관리들의 심태

기자: 당신은 서양인들이 중국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는데 현재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는가? 현재 모두 중국 경제가 번영하고 있고 대중국 투자열풍이 일고 있다고 말하는데 중국의 실제상황은 어떠하며 중국 관리들의 심태는 또 어떠한가?

한: 나는 서양인들이 중국의 진실한 면모를 알기가 아주 어렵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본 것은 중국의 일부 표면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다. 중국의 이런 젊은 경제는 확실히 발전이 있고 도시의 기초건설도 확실히 많이 늘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많은 경제적, 사회적 모순도 존재한다. 빈부격차라든가 분배불균형이라든가, 더욱이 중공은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개혁이 거의 없었다. 국제 여론의 압력 앞에서 가끔 반체제인사를 하나씩 석방해 일부 태도를 밝히는데 근본적으로 볼 때 진보라고는 전혀 없다.

현재 중국은 어떤 상태인가? 내가 있을 때의 체험으로는 우선 중공 내부, 특히 중공내부 각급 관리들은 이미 인심이 흩어져 한마음 한뜻이 아니며 중공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중공체제 속에 몸담은 이상 어쩔 수 없기에 사람마다 가면을 쓰고 이중 성격으로 살아간다. 회의에서나 공개적으로 태도를 표명할 때와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대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서 이는 중공 관리들의 일상 상태이다.

이런 통일된 사상과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현실적인 혜택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정부패가 성행하고 그칠 줄 몰랐다. 많은 관리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들은 부패를 막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당이 망한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로 부패한가? 백성들은 아주 형상적으로 표현했다. 만약 이런 관리들을 일렬로 세워 모두 총살한다면 억울한 자가 있을 수 있으나 두 명에 하나씩 끌어내 살려준다면 반드시 탐관오리가 섞여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런 정도로 부패가 심하다는 뜻이다.

현재 중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도시를 조사하기만 하면 그 도시의 시위원회, 시정부와 관련된 영도 단체는 흙더미가 무너지는 것처럼 전부 붕괴될 것이다.

내가 선양시에서 나오기 전에 ‘목마사건’을 조사했다. 정 국장급이상 간부들, 줄곧 성 일급까지 20여명이나 모두 체포되어 사형, 무기징역, 유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도시를 조사하기만 하면 그 도시의 영도 단체는 모두 붕괴될 것이며 선양시 뿐만이 아니다. 다만 다른 도시는 조사하지 않았을 뿐이며 어디든 조사만 하면 무너진다. 현재는 조사 대상과 적발된 사람들만 곤욕을 치를 뿐이다. 아직 조사를 하지 않아 그렇지 기타 도시 간부들도 모두 선양시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부패행위가 드러난 간부들은 '재수없어' '억울'하게 당하지만 아직 부패행위가 드러나지 않은 간부들은 계속 관직을 지키고 있으면서 즉시 서둘러 조사에서 걸린 간부들을 비판하고 처벌하며 선을 긋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똑같은 길을 걷곤한다.

** 중공당국, 고위층 관리 전화까지 도청

기자: 이런 것은 어떻게 적발하는가? 어떤 방식을 통해 하나를 적발하기만 하면 한무리씩 적발하는지?

한: 보통 신고를 받아서 한다. 국민들의 신고는 확실히 끊이지 않는다. 이는 일반적인 부패정보의 출처이긴 하나 이런 정보 출처는 비교적 쓸 만한 것이 없는데 국민들은 전반적인 상황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같은 틀 안의 사람이 적발하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면도 있는데 바로 중공이 간부들을 대처하는 일부 특수 수단으로서 감시 통제하는 것이다. 사무실 전화, 휴대폰, 집 전화를 포함해 부국장급이상 간부는 모두 도청을 당하고 있다.

일부 사람은 휴대폰을 두 개씩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직장에서 나눠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산 비밀전화로 도청을 막기 위해서다. 내가 랴오닝성 전 성위서기 집에 상황을 보고하러 갔던 적이 있었다. 이 구(顧)씨 성을 가진 성위서기는 감히 전화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중공은 특히 그런 성급이상의 고위층 간부들에 대해서는 비밀리에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 부패적발 방지는 장쩌민과 일치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한: 일반적으로  말하면 뇌물수수라든가 부패, 또는 생활 태도 문제 등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오직 정치태도만 보는데 당 중앙과 뜻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일컽는 당중앙이란 누구인가? 장쩌민이다. 만약 당신이 장쩌민을 지지한다면 이번 일은 아무 문제 없는 것이고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그럼 이 문제로 꼬투리를 잡고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기자: 이단적인 경향을 본다는 것 같은데

한: 맞다. 베이징 시위서기 천시퉁(陳希同)은 사례가 전형적이다. 그도 일부 뇌물을 받았으나 처벌 받지 않는 고위층들보다 아주 청렴한 관리라고 나는 본다. 하지만 장쩌민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16년형을 판결 받았다. 이는 명조 때의 동창, 서창이란 특무기구와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부인이나 내부 관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 절반이상의 중공 관리들이 해외로 도피할 것

한: 또 예를 들자면 관리들이 변절하여 도망가는 것이 두려워 부처장급이상 간부들은 임시여권만 소유하도록 규정했다. 여권은 공민의 신분증명으로서 무슨 근거로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가질 수 없으며 만약 공무원이 출국하면 여권 유효기간을 5년에서 2년으로 줄일 뿐만 아니라 출국하기 직전에 나누어 주고한 사람이 관리를 했다가 귀국한 이후에는 반납해야 한다.

기자: 내가 알기로는 많은 중공 관리들이 여권을 몇 개씩 갖고 있는데 심지어 외국여권도 있다고 많은 보도에서 들었다. 이는 정말인가?

한: 이런 상황이 있다. 마샹둥(馬向東)을 포함해 여러 개의 여권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시로 도망가려고 시도했다.

기자: 만약 중공이 현재 누구나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정책이 있다면 중공 관리들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한: 만약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면 절반이상은 해외로 떠날 것이라고 본다.

** 막대한 대가 치렀지만 전혀 후회 안해

기자: 그럼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는 것은 그들의 통제수단이 두려워서일 뿐 아니라 아마 일부 쉽게 얻는 이익 때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한: 물론 이익이 있다. 바로 중공이 관리들에게 준 이익은 아주 풍성하다. 중공은 전심전력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할 마음이 사실상 전혀 없다. 이미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었다. 국가소유의 주택도 현재는 아주 적은 돈을 주고 개인 소유로 할 수 있으며 승용차도 국가에서 준 것이고 밥 한끼 먹어도 자기 돈을 내지 않는다. 의식주는 모두 국가의 것이다.

한번은 미국의 한 여시장이 중국에 방문 왔는데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당신들 중국 관리들은 모두 자기 돈을 쓰지 않지만 나는 미국의 시장이라도 무엇이나 모두 나의 돈으로 쓴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나는 독일 총리가 그처럼 가난한 것을 보고 아주 탄복했다. 중국에서는 작은 과장도 자기 스스로 천막을 씌운 트럭은 운전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일부 사람은 마음으로는 이미 중공을 떠났지만 중공의 통제가 무섭고 아울러 쉽게 얻는 이익에 대한 미련 때문에 중공과의 결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기자: 당신과 같은 용기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한: 나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기자: 우리의 인터뷰에 응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의 일이 순조롭기를 바란다.

한: 감사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