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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 강탈에 내전 부추겨 무기장사까지
[유태영박사 연재73] 시에라리온 저주의 다이아몬드를 축복의 다이아몬로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1/09/04 [12:33]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미국과 영국에서 다이아몬드를 강탈하고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부추긴 내전의 희생양이 된 시에라리온 소년병, 네이버 검색     © 자주민보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서남부 대서양에 접한 나라이며 대서양 연안의 평야와 내륙 지방
의 고원으로 양분되어 있다. 대서양 해안의 길이는 340km에 달하며 국경선을 서로 마주하고 있는 나라는 기니와 라이베리아이다.

면적은 71,740km3이며 한반도의 1/3정도이다. 인구는 약 6백 30만으로 추산한다.


시에라리온의 종족은 18개의 원주민 종족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종족은 불롬족, 로코족, 템네족, 림바족, 수수족, 풀라니족, 멘데족 그리고 코노족들이다.

그런데 시에라리온에는 원주민 외에 18세기말에 외부에서 들어와 정착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공동체가 또 하나 있다.



이 흑인 공동체를 크리오인 또는 크리올족이라 부른다. 크리올족은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크리올족은 영국과 미국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흑인들인데 백인들이 이 해방된 노예들을 강제로 시에라리온으로 끌고 와 집단적으로 정착시킴으로써 형성되 해방된 흑인 노예들의 공동체이다.



1850년경에 영국이 시에라리온의 수도로 프리타운, Free Town을 새로 신설하고 해방노예인 크리오인 약 8만 명을 프리타운에 집단정착 시켰다. 집단정착을 당한 해방된 노예들의 자손들을 이른바 크리올족이라고 부른다. 크리올족은 주로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 Free Town에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시에라리온의 원주민과 프리타운에 살고 있는 크리올족 간에는 끝임 없는 분쟁과 고질적인 내전이 계속됐다. 원주민과 집단으로 정착한 해방노예 크리올족 사이에서 분쟁과 내전의 씨앗이 싹트고 발전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시에라리온의 고질적인 분쟁과 내전의 씨앗을 뿌린 자는 바로 영국과 미국이라는 사실을 시에라리온의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1. 시에라리온의 간추린 역사

시에라리온의 역사는 최소한 BC 500년경으로부터 원주민이 거주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최초의 불롬족과 멘데족, 템네족과 플라나족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원주민 부족들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AD 8-9세기에는 철기를 사용하는 시에라리온 원주민들이 빽빽한 밀림지대 속에서 외부의 침략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



1462년에 시에라리온을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은 포르투갈인 신드라였다. 그는 처음으로 <사자 산>을 뜻하는 <시에라리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495년에 포르투갈은 시에라리온에 요새를 구축하여 상아와 희귀한 생산품들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와 프랑스인이 들어왔고 유럽의 상선이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착취와 무역의 문호를 개방했다.

시에라리온은 15세기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대변천기에 영국이 빠질 리가 없었다, 영국은 시에라리온 무역에 뛰어 들어 제일 먼저 노예무역에 앞장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이 시에라리온 전역을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약삭빠르게 시에라리온뿐만 아니라 요르코 섬과 분드 섬까지 점령하여 주로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6-17세기에 영국은 2백만 명의 노예들을 미국으로 수출했는데 주로 미국의 Carolina와 Georgia 등지에서 쌀농사와 땅콩과 목화농사의 농노로 팔여 갔다.



그때 당시 영국의 국가수입의 1/3이 노예무역 수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의 양심가 윌리엄 버포스에 의하여 1807년 2월 23일에 노예무역이 법적으로 폐지됐다. 미국은 영국보다 56년 후인 1863년에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영국과 미국에서 노예제도의 폐지로 인하여 파생된 문제 중 하나가 해방된 노예들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영국은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 Free Town을 건설하여 이곳으로 해방된 흑인노예들을 집단적으로 정착시켰다.



영국 왕실은 1808년에 프리타운을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다. 그때 당시에 프리타운에는 해방된 노예 약 8만 명가량이 집단으로 정착했다고 추산한다.



1818년에 영국은 황금해안과 서아프리카 전역을 통치하는 <영국총독부>를 창설하고 총본부를 프리타운에 세웠다. 그리하여 서아프리카의 모든 영국령의 중심지로 삼고 최초의 서양식 교육을 위한 대학교를 프리타운에 세웠다. 시에라리온은 영국의 영구적인 보호령이 되고 말았다.



프리타운에 집단으로 정착한 해방노예들인 크리올족 공동체는 시에라리온에서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여 영어와 서방식 생활풍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 하지만 크리올족 공동체는 원주민과 자연히 매사에 있어 구별되어 충돌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식 생활풍습에 익숙해진 크리올족은 자연히 본토의 원주민들과 이질감을 느끼게 됐다.



1840-1908년에 이르는 68연간 시에라리온에 대한 영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는 극에 달하여 이른바 <가옥세 전쟁>이 발생하였다.

원주민 부족들이 단결하여 영국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처음 발생했다.



하지만 원주민의 항의와 공격은 조직적이지 못해 원주민 지도자 96명이 집단으로 비참하게 교수형을 당하였으며 그것으로서 항의와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가혹한 식민통치는 무조건 평탄하지는 못했다. 시에라리온 독립운동을 원주민뿐만 아니라 해방노예 크리올족의 공동체도 시에라리온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5년에 시에라리온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 놀라운 사건은 영국이 시에라리온에서 세계 최대의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건이었다.



영국은 시에라리온에서 처음 발견된 다이아몬드의 채굴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게 영국의 거대한 다이아몬드 기업체인 <드비어스>에게 98년간 다이아몬드를 채굴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해 주었다.



영국은 시에라리온이 독립을 하건 말건 관심은 오직 다이아몬드 채굴권 독점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영국은 시에라리온 독립 후에 정권을 여당이 잡던, 혹은 야당이 잡게 되던 아무과계가 없었다.

다만 영국의 유일한 관심은 다이아몬드의 채굴권을 독점하고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35년에 크리올족 공동체 출신인 윌리스 존슨과 크리올족 공동체의 후손이며 2세인 브라이트 두 사람이 공동으로 <시에라리온민족회의, SLNC>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창설한 SLNC는 크리올족으로 구성된 프리타운의 크리올족 공동체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한편 1951년에는 원주민 출신인 시아카 스티븐스와 밀턴 마르가이 두 사람이 공동으로 보수경향의 <시에라리온인민당, SLPP>를 창설했다. SLPP는 당연히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리타운 크리올족 공동체의 SLNC와 또 원주민 진영의 SLPP는 서로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그대 당시 영국의 보호령 밑에 있는 상황에서 시에라리온의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함께 전개하고 있었다.



1955년에 시에라리온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여 독립운동의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주민 출신인 시아카 스티븐스와 그리고 크리올족 공동체 출신인 밀톤 마르가이는 전체 국민의 절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하여 정치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두 진영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58년에 힘을 서로 합하여 투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두 진영의 운동단체를 모두 다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조직으로 <인민국가당, PNP>을 새로 창설했다.

원주민 진영과 크리올족 진영의 PNP로 통합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되었다.



1961년 4월 27일에 PNP의 승리로 시에라리온은 드디어 영국으로부터 자유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다.



PNP의 밀턴 마르가이가 독립한 시에라리온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앨버트 마르가이가 재무장관이 되여 국립은행을 처음 창설했다.

프리타운, Free Town의 크리오 공동체 출신인 마르가이 형제가 새로 독립한 새 나라의 주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위하여 함께 PNP 창설하고 공동으로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한 원주민 진영의 시아카 스티븐스는 웬일인지 갑자기 PNP와 결별을 선언하였다.

독립의 기쁨과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할 중요한 시점에 갑자기 터진 시아카 스티븐스의 PNP 결별의 선언은 양편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시아카 스티븐스는 PNP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북부 지역의 자신의 지지 세력인 원주민 부족들을 결합하여 <전인민회의, APC>를 따로 창설하여 독자적 길을 선택했다.

어렵게 독립을 쟁취한 후에 새나라 건국의 초기부터 원주민 세력과 프리타운에 집결된 해방노예 크리올족 공동체 사이에 분규가 벌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에 독립하여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한 밀턴 마르가이가 1964년에 돌연 사망했다. 그의 동생인 앨버트 마르가이가 후임으로 1964년 4월에 제2대 국총리로 취임했다.

그런데 제2대 국무총리로 취임한 앨버트 마르가이 국무총리는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집권 초기부터 고질적인 정권의 부패를 방지하지 못하고 통치력의 무능으로 반정부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독립초기부터 나라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을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시에라리온의 본토의 부족세력들은 프리타운의 크리올족 공동체의 집권세력을 용납하지도 않고 정권으로 인정지도 않고 관망하고 있었다.



1967년에 앨버트 마르가이 국무총리는 정국의 불안에 대한 긴급수습책으로 총선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앨버트 마르가이 총리는 총선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가운데서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의 결과로 원주민 부족을 대표하는 시아카 스티븐스의 <전인민회의, APC>가 66석 가운데 32석을 차지하여 대승리를 했으며 크리올족 공동체의 앨버트 마르가이 현직 총리는 겨우 28석을 차지했다.

앨버트 마르가이 총리는 총선에서 완전히 실패하여 집권 3년 만에 퇴진하고 말았다.



영국은 여전히 시에라리온의 내정에 관여하여 다수당의 총재가 된 원주민 세력의 시아카 스티븐스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를 총리로 임명할 뿐만 아니라 프리타운, Free Town의 시장으로까지 임명했다.



시아카 스티븐스는 영국 종주국 전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1967년에 국무총리로 취임을 했으며 1971년에는 <시에라리온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직위를 변경, 시아카 스티븐스는 시에라리온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영국이 어찌하여 시아카 스티븐스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1935년에 시에라리온의 무진장한 다이아몬드 광산의 채굴권을 드비어스에게 98년간 부여했는데 그 채독점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시아카 스티븐스를 지원해 주고 높이 추겨 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 문화에 동화된 크리올족 흑인 해방노예 공동체 보다는 차라리 순박하고 무지한 원주민 세력이 정권을 잡는 편이 영국에게는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은 그의 재임 기간 18년 동안에 시에라리온뿐만 아니라 서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지역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독재자로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영국은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을 시종 적극 지원했다.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은 림바 부족의 출신으로서 림바 부족과 동맹관계를 맺은 템네 부족 오직 이 두개의 부족에게만 특권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시에라리온의 18개의 주요부족들 중에서 오직 두개의 부족을 제외한 모든 부족에 속한 민중들은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의 18년간 독재에 대하여 분노의 이를 갈고 있었다.



그는 대영제국의 든든한 배경을 업고 1985년 11월까지 18년 동안의 무섭고도 잔인한 독재 정권을 끄떡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은퇴를 하면서 지명한 후임자 조셉 모모(Joseph Momoh)를 같은 달인 11월에 형식적인 선거를 실시하여 당선 되게 했다. 그리고 당선된 모모를 후임자로 대통령에 취임하도록 모든 절차를 관리했다.



조셉 모모, Joseph Momoh 대통령을 시에라리온의 제2대 대통령 취임은 모든 절차를 관리한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의 그 유명한 독재 기술 덕이었다.



몰론 그의 독재적 수단뿐만 아니라 다이몬드 채굴권의 98년 간의 보장을 튼튼히 하기 위한 영국의 속셈도 한 몫 단단히 한 결과임은 두말하면 잔말이다.



2. 시에라리온에 등장한 불안한 원주민 정권

조셉 모모 대통령이 1986년 1월에 시에라리온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새로운 평화로운 통치력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희망이 원주민 민중들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조셉 모모 대통령에게는 넘기 어려운 너무나 높은 장해물이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첫째는 전임자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이 저질러 놓은 부족들 간에 조성되어 있는 반목과 적대감을 해결해야 하는 큰 과제가 있었다.

스티븐스는 오직 2개의 부족에게만 특권과 막대한 혜택을 주는 불공정한 정책을 18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정치 행태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부족 간에 불신의 골이 너무나도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모모 대통령도 스티븐스 대통령이 창당한 오직 2개의 부족당인 PNP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후임 대통령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부족에 속한 전체 민중들이 쉽게 모모 대통령의 통치를 무조건 따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종주국 영국의 간섭과 압력을 이겨내는데 모모 대통령은 힘이 부족했다.

전임자 스티븐스 대통령은 시에라리온의 막대한 다이아몬드를 헐값으로 영국에게 몽땅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영국의 다이아몬드 재벌인 드비어스는 시에라리온에서 생산한 다이아몬드를 최저의 헐값으로 갈취하고 최고의 값진 상품으로 런던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보급 하고 있었다.

모모 대통령은 전임자 시아카 스티븐스처럼 지독한 독재자가 못되기 때문에 당면한 여러 가지 악조건의 문제에 대하여 진퇴양난에 빠져서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셋째, 모모 대통령의 무기력한 통치방식에 반항하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모모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강경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은 오히려 이웃 나라 라이베리아를 거점으로 하여 <혁명연합전선, RUF>을 창설하여 모모 대통령을 축출하는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 무장투쟁의 총지휘자가 포데이 산코(Foday Sankoh)였다.

포데이 산코가 지휘하는 <혁명연합전선, RUF>은 1991년 3월 23일에 라이베리아의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 동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의 개시가 앞으로 11년 동안 계속되는 다이아몬드의 <피 튀기는 내전>의 시작이 될 줄을 당시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혁명연합전선, RUF>은 반정부 투쟁의 슬로건을 힘차게 외쳤다.

“노예도 주인도 없다”

“부귀와 권력은 인민에게”



RUF는 반정부 투쟁을 개시한지 한 달만에 곧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광산 지역인 이스턴 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물론 당연히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주를 RUF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더 염려한 것은 바로 영국 정부와 다이아몬드의 채굴권을 소유하고 있는 드비어스 기업체였다.

드비어스는 세계 다이아몬드 보급의 80%를 장악하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원석을 주로 시에라리온에서 획득하여 보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누가 점령하고 있는가?

하지만 이 질문은 영국이나 드비어스에게 하등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다이아몬드 광산을 정부군이 지키고 있든, 반군세력이 점령하고 있든, 드비어스에게는 관계 없었다.

무슨 뜻인가?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손에 쥐고 있는 세력을 무조건으로 친구로 삼고 또 아군으로 만든다. 누구든 아무 상관 없다. 서방 진영이든 사회주의 진영이든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비어스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 다이아몬드 광산을 장악하고 있는 그 세력에게 “돈의 뇌물”, “무기구입 알선”, “용병제공”, “비밀정보 제공”, “비밀보장” 등 온갖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제공해 준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사실상 항상 드비어스가 손에 쥐고 보유하여 장악하고 있기만 하면 어느 정권이나 어떤 사상적 분파라도 돈으로 매수하고 무기를 제공해 줌으로서 통제하고 있다.


그 드비어스의 정체를 알아본다.

드비어스 (DeBeers)는 세계에서 다이아몬드 85-90%를 독점하고 판매하고 있는 독보적인 대기업체이다. 드비어스의 창업자는 세실 로즈(1853-1902)이다.

세실 로즈는 영국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70년에 남아프리카로 왔다.

세실 로즈는 어느 날 <니콜라스 드비어>라고 하는 한 농부가 소유하고 있는 땅에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농부는 자기 땅에 엄청난 다이아몬드가 묻혀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열심히 농사만 짓고 있었다.



니콜라스 드비어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활한 세실 로즈에게 아주 헐값에 땅을 팔았다. 세실 로즈는 이 땅을 소유하고 유명한 다이아몬드 광산 기업체를 창설했다.

세실 로즈는 그 광산 기업체의 명칭을 본래 땅 주인의 이름인 “니콜라스 드비어”에서 “드비어스” 라는 광산 기업체의 칭호를 만들어 냈다.



대기업가로 성공한 세실 로즈는 막강한 권력으로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의 총리가 되였다. 그는 수천년 동안 잠들었던 검은 대륙을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강점하여 대영제국이 아프리카 대륙을 능히 지배할 수 있도록 거대한 자본을 확보했다.

세실 로즈는 북쪽으로 림포포강을 넘어 짐바브웨와 잠비아 등 <광맥이 있는 땅>을 탐험하여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원주민들의 땅을 닥치는 대로 헐값으로 사들였다. 세실 로즈가 사들인 땅을 <로즈 랜드>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다이아몬드를 취급하는 드비어스는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기업체로 발전했다.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생산을 장악한 세실 로즈는 런던을 중심하여 다이아몬드 판매상을 125개로 확장했다.

세실 로즈는 영국에게는 아프리카 식민지 100만평을 개척한 식민지 개척의 영웅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허위계약과 불정직한 매매행위로 온갖 보화들을 가로채간 희대의 사기꾼으로서 악명 높은 침략자로 저주받고 있다.



세실 로즈는 1902년에 49세 때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영국은 세실 로즈가 남긴 유산으로 그동안 미국인 30여명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5,300명이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에 빌 클린턴, 오바마 대통령, 영국 블레어 총리, 수전 라이스 그리고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과 수없이 많은 침략군의 군 장성들이 세실 로즈 장학금의 수혜자들이다.

세실 로즈 장학금에 대하여 비평의 말을 하고 있는 양심적 지성인들 소리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피비린내가 나는 다이아몬드의 돈으로 장학금을 제공하는 것은 신의 존재마저 의심스럽게 한다>


세실 로즈 사망 후에 드비어스 다이아몬 기업체를 인수한 사람은 오펜하이머이다.

오펜하이머가 인수한 드비어스는 시에라리온에서 10여 년 동안 계속된 비참한 내전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3. 피튀기는 내전 10여년과 오늘의 시에라리온

시아카 스티븐스의 18년 동안의 독재자 후임으로 제2대 대통령으로 1986년에 조셉 모모 대통령이 취임했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의 대다수의 부족들이 조셉 모모 대통령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다.



조셉 모모 대통령은 집권을 시작하면서 정권에 정면으로 저항하면 포데이 산코가 지휘하고 있는 RUF 내전에 대하여 도대체 무방비 무대책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포데이 산코 RUF가 점령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이권 때문에 오히려 포데이 산코의 RUF를 실질적으로 옹호하고 비밀로 드비어스를 통하여 무기까지 지원해 주고 있는 요상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 조셉 모모 대통령은 1992년 4월 29일에 육군 대위 스트라서, Valentine Strasser가 이르킨 군사 쿠테타에 의하여 축출되어 기니아로 망명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APC는 시에라리온 독립 후에 시아카 스티븐스가 독자적으로 림비 부족과 템네 부족을 중심하여 창설한 정당이였는데 APC 창설 후 31년만에 조셉 모모 대통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쿠테타에 성공한 스트라소 대위는 곧 <국가임시평의회, NPRC>를 조직했는데 그는 유일하게 프리타운 해방노예 공동체 후손인 크리올족 공동 출신으로 국가수반이 됐을 뿐만 아니라 최연소자로 시에라리온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크리올족 출신이며 또 최연소자로서 시에라리온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한 스트라소는 전임 대통령들인 스티븐스와 그리고 조셉 모모 대통령보다 훨씬 더한 독재자가 되여 헌법을 정지시키고 언론과 출판도 제한하는 극악한 독재통치를 했다.



하지만 포데이 산코의 RUF와의 내전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취약하여 남부 지역에 있는 중요한 다이이몬드 광산도 모두 다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해방 노예 후손들인 크리올족 공동체의 아성이며 동시에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도 역시 RUF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위기에 처한 스트라소 대통령은 외국에서 용병을 사들이는 최악의 방법을 취했다.

외국의 용병을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스, Executive Outcones>라 부르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스트라소 대통령이 사들인 용병은 친영국의 나라인 남아공이 제공하는 용병들이다. 이 용병들은 영국과 무관하지 않는 요상한 용병들이다.



스트라소 대통령은 국방비의 1/3에 해당하는 3,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용병을 끌어 들였다.

남아공과 영국이 뒤에서 제공하고 지원하는 용병은 막강한 화력을 갖춘 군사력으로 포데이 산코의 RUF를 격파했다. 장갑차, 헬기 등으로 무장한 용병에게 RUF는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내전은 장기전 국면에 들어갔다.

이 내전의 장기화로 인하여 시에라리온 민중들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10여 년 동안의 싸움의 희생자들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인구는 겨우 5백만 조금 넘는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20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2000명이 손과 발이 절단되는 불구자가 됐으며 25만 명의 여성이 유린당했다. 그리고 7000명의 소년들이 총을 들어야 했으며 집을 잃은 200만 명이 떠돌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UN의 다른 통계에 의하면 이 보다 더 많은 수가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스트라소 국가수반은 할 수 없이 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와 휴전협정 교섭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 소용돌이와 국내의 위기 상황 속에서 스트라소 국가 수반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협정 교섭을 반대하는 비오 준장이 이끄는 쿠테타가 1996년 1월에 또 다시 발생하여 크리올 공동체 출신인 스트라소 대통령을 또 축출하고 말았다.



스트리소 대통령이 축출당하고 그의 후임으로 1996년 3월에 처음으로 다당제 대선을 치러 야마드 카바(Kabba)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쿠테타를 이르킨 비오 준장은 대선에서 승리한 야마드 카바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해 주었다.

야마드 카바 대통령은 UN에서 20여 년을 근무한 경력을 가진 자로서 친 서방 성향이 매우 강한 시에라리온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야마드 카바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한 3년 동안에 포데이 산코의 RUF 반정부 투쟁은 전보다 더 치열하여 양편에서 사상자기 속출하여 6,000명 이상이 또 다시 사망하고 방화와 약탈이 계속됐다.

하지만 1999년 7월 7일에 UN의 중재로 토고에서 카바 대통령과 산코의 RUF사이에 거국내각을 조직하는데 합의하고 포데이 산코를 부통령으로 그리고 RUF 중에서 2-3명을 거국정부 내각에 임명 할 것을 합의했다.


토고에서 UN의 중재로 합의한 거국내각 조직은 분명히 영, 미가 합작한 사기극이었다.

UN은 포데이 산코 RUF의 무장해제를 감시하기 위하여 13,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UN은 다이아몬드 광산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UN군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감시하고 있었다.

2000년 5월에 이에 분개한 RUF 포데이 산코는 영국과 미국에게 기만을 당한 것을 깨닫고 UN 감시병 500명을 인질로 붙잡고 UN의 불공정한 처사에 항의를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영국의 Tony Blair는 즉시 공수부대를 급파하여 포데이 산코를 체포하였다.

포데이 산코가 체포되자 친 영국 성향의 야마드 카바 대통령 진영에서는 큰 축제 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이 UN을 앞세워 전개한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탈취 작전은 이렇게 그들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2002년 1월 18일에 야마드 카바 대통령은 11년 동안의 <내전의 종식>을 선포했다. 2002년 5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마드 카바 대통령은 5년 임기에 또 다시 재선됐다.

2002연년 7월 28일에 영국은 105명의 군사훈련 고문단을 남겨놓고 모든 영국의 병력을 시에라리온에서 철수했다.




위에 기술한 시에라리온 내전의 역사에 대하여 그것은 <다이아몬드 잔혹사>라고 세계의 양심적 언론들은 일제히 비판한다.

시에라리온에서 영국에 수출한 다이아몬드는 조셉 모모 대통령 당시 33만 9,000캐럿으로 추산한다. 그리고 11년간 내전당시 민중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밀수로 벌어들이는 돈은 1년에 1억 2,500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 막대한 달러는 시에라리온 민중의 삶의 복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군도 없고 적군도 없는 오직 서방 강대국들의 다이아몬드를 위한 대리전에 소모됐다.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는 일단 밀수 상인의 손을 통하여 영국 런던으로 갔다가 최종지인 벨기에와 파리 그리고 뉴욕으로 와서 세공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이 거대한 달러가 민중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뿐이고 무기를 사들이는데 몽땅 지출된다고 한다.

서방제국주의자들은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를 헐값에 강탈하면서 무기까지 비싸게 팔아먹는 일거양득의 노다지를 캤던 것이다.



다이아몬드로 사들이는 무기는 누구를 위한 무기인가?

그 무기들은 강대국들이 부추기는 약소 민족들 간의 전쟁, 제 동족끼리 싸우는 분쟁,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 부족들 간의 권력다툼에 보급되는 무기들이다. 강대국들의 부추김이 없이는 이와 같은 전쟁과 분쟁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뉴욕에서 9.11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던 바로 그날에 런던에서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재벌 드비어스의 공보 담당자와 공교롭게도 아랍 알카에다 조직이 시에라리온에서 3년 동안 수백만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였다는 사실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시에라리온의 야마드 카바 대통령은 1996년에 집권을 시작했으며 2007년 8월에 은퇴했는데 그는 11년 동안 시에라리온의 <다이라몬드 잔혹사>의 한 복판에 서서 영국과 미국을 편드는 정책으로 시종 일관하게 집권을 하다가 은퇴했다.


▲ 시에라리온의 소년병들, 네이버 검색     © 자주민보


2007년 9월 17일에 어니스트 코로마, Ernest B. Koroma 대통령이 시에라리온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코로마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의미 깊은 언명을 했다.


<나는 시에라리온의 “귀중한 자원”을 지금까지 잘못 처리해 망쳐 놓은 과거의 역사를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다. 우리는 너무 오랜 동안 수난의 역사를 참았다>



그가 언명한 “귀중한 자원”은 물론 다이아몬드를 뜻하며 “수난의 역사”는 영국과 미국의 다이아몬드 착취를 뜻한다.

코로마 대통령이 과거에 영국이 망쳐 놓은 시에라리온의 <저주의 다이아몬드>를 앞으로는 시에라리온 민중을 위한 <축복의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국제 뉴스 보도에 의하면 코로마 대통령의 집권 3년 후에 약간의 변화를 볼 수 있다.

ㄱ) 하루 $1.25로 살아가는 최 빈민이 79%로 세계 꼴찌에서 7번째 나라였는데 최 빈민이 50%정도로 감소됐다고 한다.

ㄴ) 생활수준 UN 평가점이 최저수준의 158점이었는데 3년 후에는 12점이나 상향조정됐다고 한다.

ㄷ) 국민의 2/3가량이 식량 자급해결을 위해 농업 전심전력하여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시에라리온 비옥한 농토가 풍부하여 원래 쌀을 수출하는 나라였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다이아몬드 광산에 집결하여 불법으로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자갈을 씼는 데 매달렸다. 시에라리온은 그래서 쌀을 수입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농민들이 자갈을 씻어 찾은 다이아몬드는 드비어스의 검은 손으로 헐값에 들어가 영국 런던으로 빼돌린다. 런던에서는 드비어스를 통하여 고가로 세계 다이아몬드 판매망으로 연결된다.



해방노예들의 자유에 의하여 처음 창설된 나라가 바로 시에라리온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독재와 차별, 분쟁과 폭력 그리고 또 다시 외세의 착취와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시에라리온의 참된 해방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이 글을 끝 맺으며

2011년 4월27에 시에라리온이 독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시에라리온의 독립 50주년에 즈음하여 그때 당시 런던 시장 Livingstone은 영국이 잘못한 과거사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시에라리온에게 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Livingstone 시장의 요청에 대하여 영국 수상 Tony Blair는 즉각 거절했다.

Tony Blair는 영국의 국가적 사과는 거절하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담화로 사과는 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행정 비서가 작성한 장문의 사과문을 잘라버리고 아주 간단한 문구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Livingstone 런던 시장은 Blair 총리의 비열한 행태에 대하여 “더러운 짓”이라고 맹비난했다.

영국의 “더러운 짓”을 그대로 묘사한 “블러드 다이아몬드, The Blood Diamond” 명작 영화가 2007년에 제작됐다.

이 명작 영화의 감독인 에드워드 즈윅은 시에라리온에서 생산되는 최고의 보석이 사실은 내전, 강제 노동, 소년병, 밀수 무기, 돈 세탁, 강간과 학살 등 온갖 참혹한 악행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내전은 대부분 종족 갈등의 싸움이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의 내전의 양상은 그렇지 않다.

시에라리온의 비참한 내전은 다이아몬드를 두고 벌리는 내전이며 강대국이 다이아몬드의 이권을 계속 확보하기 위하여 부추긴 내전이다.

하기에 시에라리온의 내전은 적군과 아군 구별이 없으며, 자유와 독재의 구별도 없는 내전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희귀한 보석이 발견된 나라이며, 987캐럿이라는 믿기지 않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의 별”이 되기 때문에 힘없는 민중들이 참혹하게 죽어 간 내전이다.



2003년 1월에 세계 40개 이른바 강대국들이 분쟁지역의 다이아몬드의 불법 유통을 방지하기 위한 “킹벌리 협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불법적 유통의 선구자인 영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드비어스는 여전히 런던과 뉴욕에서 암시장을 버젓이 벌리고 있는 것이 변함없는 실정이다.



이 지구상에서 하루 속히 미, 영 제국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의 피 튀기는 역사는 계속되고 여전히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고 외치는 드비어스 회사의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질 것이다. (8/27/11.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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