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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붓다의 에너지가 이 나라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때입니다.

팔정도를 확실한 안내에 따라 제대로 수행하면, 본인의 의식의 파동이 점점 높아집니다.

붓다의 팔정도와 그것의 실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다음의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1. 광명에의 길.

코스타니야등이 떠난 지 이틀째 밤을 맞이하였다.

어제부터 대자연을 벗 삼아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반성을 시작했지만 6년 동안이나 고락을 함께 해온 다섯 명의 동료 생각을 하니 역시 걱정이 되었다.

그들 다섯은 지금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 우직스러운 육체고행에 매달리고 있을까.

지금 자신은 지나간 30여년을 뒤돌아보면서 겪어온 인생을 샅샅이 반성하고 있다.

먹을 때는 먹고,  잠잘 때는 잠도 잔다. 깨달을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마음도 버렸고, 비린내 나는 음식물은 먹지 않겠다던 고집도 깡그리 없앴다.

그리고 생사(生死)의 사념마저 버리고 나니 마음은 그지없이 편안하고 가벼웠다.

집착을 떠난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지리라고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먹을 것도 먹지 않는 참선 외길의 육체고행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컸다.

그들 다섯에게 어젯밤 이후의 자신의 변화를 설명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마하 나만이 이렇게 물어왔다.

“고타마님, 육체를 멸망시키면서까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면 애당초 태어난 것이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 고타마 자신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잘못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디가 잘못인지 설명하려고 하니 모호해졌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육체에는 육체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을 무시한 채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도(邪道)이며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은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에서 얻을 수 있다. 병약하고 의식이 흐릿한 자가 어떻게 신불(神佛)의 마음에 접근할 수가 있겠는가.

대자연의 설계를 보아라, 태양의 빛과 열은 언제나 건강하지 않은가. 고함도 지르지 않고, 성내지도 않는다.

신불의 마음은 저 태양처럼 건전한 마음과 육체에 있을 것이다. 마음을 보다 넓게 보다 크게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한 육체가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과 육체의 조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하 나만은 육체 고행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모금의 우유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고 말았다.

지금은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그 때 그들을 붙들고 중도(中道)의 마음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했어야 옳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타마는 조용히 명상에 들어갔다. 명상에 드니 현실의 바깥 어둠과는 달리 의식계의 황금빛 둥근 태양이 부드러운 광명을 쏟아 고타마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

흡사 대낮처럼 환하게 밝다. 그런데 그 밝음에는 대낮의 밝음과는 다른, 한없이 부드러운 부피와 평안함이 있었다. 그 태양의 햇빛을 받으면서 자연의 풍경이 싱싱하게 숨 쉬고 있었다.

비스듬히 펼쳐지는 광대한 구릉(丘陵)에는 신록의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고타마에게 무엇인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고타마는 저도 몰래 미소로 답례하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평화로 충만한 언덕은 환하게 끝없이 뻗었으며 영원한 실재계(實在界)란 바로 지금 자기가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이곳이 아니겠는가.

하고 고타마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육신의 자신으로 돌아와 눈을 떠보면 캄캄한 밤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을 뿐이었다. 고타마는 명상중의 밝은 내면의 세계와 눈을 떴을 때의 어두운 현실의 세계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명상중의 현상은 현실의 어둠을 비추어내는 차원이 다른 실재의 세계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대로 명(明)과 암(暗)이라는 마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명(明)의 실재와 암(暗)의 현실은 그대로 마음의 선악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선악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본질에 접근하는 길이라고 고타마는 알아차렸다.

고타마의 두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 내렸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닦아 내고 고타마는 밝음과 어둠의 마음에 대해서 추궁해 나갔다.

우선 두 가지 태양이 있다. 현실의 태양과 의식계의 태양이 그것이다.

현실의 태양은 크고 둥글다. 그 열과 빛은 만생만물(萬生萬物)을 평등하게 비추고 있다.

황금빛 마음의 세계를 비추고 있는 실재계의 태양도 자애의 빛을 아낌없이 쏟아주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의 태양이 어찌하여 어둡게 되는 것일까. 하늘에 구름이 덮이면 태양의 빛이 가려지듯이 마음의 태양도 자신의 마음의 구름 때문에 빛이 가려지는 것이리라.

인간의 고통, 슬픔은 바로 이 마음의 구름이 만들어 내고 있다. 호수(湖水)의 수면에 비치는 달은 아름답다. 그러나 한 번 파문(波紋)이 일면 그 달 그림자는 무참하게 깨어진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다. 파문이라는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대자연의 은총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명경지수의 호면에 비치는 달 그림자가 그 둥글고 풍부한 시정(詩情)을 잃지 않는 것처럼 ,,,

어머니 무릎에서 철없이 노는 아기는 귀엽다. 고통도 슬픔도 없다. 그러나 그 순진무구한 아기가 세월따라 성장해 갈수록  가정환경, 교육, 동무 등의 영향을 받아 자아(自我)가 발생하여 순일한 마음에 그늘을 지어간다.

드디어 주위의 여러 가지 영향에 의해서 자기라는 의식(意識)이 확립되고 자기보존의 생각 가운데 심신이 형성되어 간다. 고통의 원인은 이러한 자기본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

자아의 의식은 온갖 파문을 지어낸다.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감정적이 되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우쭐해진다. 왜 그렇게 되는가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캐보지도 않고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수놓고 있는 온갖 색채며 산천초목은 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투쟁과 이기주의, 계급제도, 바라문종의 우월감 등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았을 텐데.’

라고도 생각하지만 태어난 이상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목적과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사명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왕도 수드라(奴隸)도 발가숭이로 태어난다.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

죽을 때는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몽땅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욕망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른다.

오관(五官)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현상세계는 무상(無常). 바로 그것이다.

무상이라고 알면서도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안고 있다. 인생은 필경 고뇌의 연속이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과의 타협이거나 도피이거나 아니면 자기만족일 것이다.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는 말을 아무리 해보아야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듯이 인간의 영혼도 윤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욕심을 품고 괴로움 속에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 괴로움은 다시 되풀이될 것이 뻔하다.

괴로움의 반복은 인간에게 최대의 불행이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괴로움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백이면 백사람 모두 바라는 바는 죽을 때까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해탈(解脫)이야말로 행복이다.

그 해탈의 길은 무엇일까.

만인에게 공통되는 해방, 해탈의 길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인간은 눈 뜨고 있을 동안에는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일단 잠들어 버리면 일체를 모르게 된다. 귀, 코. 위장, 심장, 등은 눈 뜨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활동하고 있는데 잠이 들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기억조차도 사라진다. 눈을 뜨고 비로소 어제의 일, 아침의 현실을 확인하고,  다시금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안게 된다.

바로 이 점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가 된다. 생각하고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이 온갖 괴로움과 고통을 지어낸다.

괴로움은 육체의 눈과 머리의 지식으로 미(美), 추(醜), 선(善), 악(惡) 등을 판단하고 있는 자기 독단(獨斷)의 산물이다.

어느 날 전쟁에 패한 두 사람의 무사가 산중에 도망쳐 왔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두 사람은 큰 망고, 작은 망고 두 개의 망고가 달린 나무를 발견하였다.한 사람의 무사가 재빨리 큰 망고를 따려고 손을 뻗치자 다른 무사가 그것은 자기가 발견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가로채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망고까지도 차지해 버렸다.

두 무사는 입씨름을 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망고를 차지한 무사는 체력과 무술이 뛰어났으므로 망고를 빼앗긴 무사는 여지없이 땅바닥에 짓밟히고 말았다. 싸움에 진 무사는 원망과 노여움의 눈으로, 망고를 독식하고 있는 무사를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둘의 싸움은 욕심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에 조화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두 개의 망고는 두 조각으로 나누어져 둘 다 허기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서로가 먼저 망고를 차지하려고 하는 아욕 탓에 마침내 싸움이 돼 버렸던 것이다.

‘가야금 소리는 줄을 알맞게 조여야 소리가 좋아...’ 라는 중도의 마음이 이 두 무사에게 있었다면 부조화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살기 위한 아욕(我慾)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으며 중도라는 올바른 견해가 없었기 때문에 불평등이란 모순을 낳고 말았다.

대개의 경우 육체의 눈을 통해서 얻어 들인 체험과 지식이라는 것은 아욕이 전제가 된 편견일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인간사회는 온갖 모순과 당착에 빠져 자연이 가리키는 중도의 마음에서 이탈하고 있다. 진실이 흐려지고 말았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국가 간의 싸움도 그 뿌리를 찾아보면 욕망에 있다. 자국(自國)의 이익이다.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他國)을 침략한다. 그래서 승리와 패배의 되풀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다

승리와 패배의 윤회는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영원히 되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괴로움의 윤회는 그 괴로움 속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한, 영원히 되풀이 될 것이다.

중도에 따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거머쥘 수 없다.

우선 인간은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아욕을 버리고 조화로운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올바름을 구할 수 있다.

올바름의 척도(尺度)는
남녀, 노약, 지위, 명예 등의 구별심을 버리고,
한 개의 인간으로서,
대자연속의 개인으로서,
평등한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를 보며 현실을 관찰하는데 있을 것이다.

조화의 기본은 우선 무엇보다도 ‘보는 것’ 의 올바른 평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타난 현상의 배후에는 반드시 그 현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우선 자기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체의 눈을 가지고 외계(外界)의 현상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그 육안(肉眼)속에 있는 심안(心眼)을 깨끗이 닦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육안에 비친 여러 현상도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은 거울이다.

상념이라는 거울을 항상 청소해 두어야 한다. 청소는 반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정견(正見)’에 이어 생각하는 면에서도 중도의 척도는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正思)’도 자기중심이 되면 남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구상화(具象化)되기 때문이다.

음식도 식기도 옷도 책상도 다리(橋)도 모두가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발명된 것이다. 따라서 생각한다는 것이 자기중심이 되면 대인 관계의 조화를 깨뜨리고 시비의 씨를 뿌리게 된다.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도 친절하게 응해 올 것이다.

  
‘말(正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농담이 진담이라는 속담은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다. 상대를 깔보는 말, 야비한 말을 쓰고 있으면 어느 틈에 그 말에 자신의 마음까지 물들어 상대의 기분을 자극해서 싸움의 원인을 만든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며 살아 있는 파동(波動)이다.

겸손한 말, 자비로운 말, 친절한 말, 용기있는 말, 다정한 말, 등 올바르게 말해야 할 중요성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건(要件)의 하나이다.


고타마는 밝음과 어둠의 마음에 대해서 단숨에 여기까지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정도(正道)에 이르는 세 가지 척도를 발견하고, 정도의 척도는 이것뿐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더욱 생각의 깊이를 더해갔다. 생각에 잠기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외에
‘일’
‘생활’
‘정진(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라는 다섯 가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전까지의 고타마는 한 가지 문제를 풀어 가는데, 며칠 몇 개월씩 걸렸다. 하지만 그저께 밤부터는 사고(思考)의 초점이 바뀌었고 한 문제를 추궁하면 해답이 절로 샘물처럼 솟아나서 의문이 환하게 풀리는 것이었다.

지혜의 주머니가 자신의 육체안의 어딘가에 있어서 그 주머니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참으로 놀랍고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어 ‘정업(正業)’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일’은 자신의 생활에 윤기를 더해주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의 은혜요, 사회의 협력의 덕택이다.

올바르게 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의 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은 보은이라는 보시(布施)의 행위가 되어 결실하는 것이다.

지상의 조화는 이 ‘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된다.감사와 보은을 축으로 삼고, 용기, 노력, 지혜가 삼위일체로 작용할 때 이 지상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올바른 생활(正命)’이란 인생의 목적과 의의를 알고 있는 생활이다.

인간의 생활은 대자연이 조화되어 있듯이 조화돼 있어야 한다. 서로 돕고 보충하며 웃음이 넘치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자신의 조화부터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인격이 원만해지면 주위도 원만해 질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엄한 태도가 없으면 올바른 생활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도(道)에 정진(精進)한다는 것’은

부모, 형제자매, 친구, 이웃 등과의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대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자신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대자연도 없고, 자기 이외의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는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재료이며,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불가결의 교재들이다.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닦아나갈 수 있는 현상계는 바로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비인 것이다.

도(道)에의 정진은 인간의 특권이며 신의 자비이다. 동물에서는 볼 수 없는 위대한 요소를 지닌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타마는 ‘정진(精進)’에 대해서 사색을 더듬어 가다가 ‘깜짝’ 벽에 부딪혔다.

그 벽이란 곧 카필라에 두고온 처자(妻子), 노부(老父), 친척들이었다. 깨닫기 위해서 출가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자신의 영혼을 닦는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자신은 지금 처자를 버리고 카필라 성을 도망쳐 나와 이렇게 혼자 선정삼매에 잠겨 있지 않은가.

정도(正道)의 한가지인 ‘정진’에 비추어 보니 지금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지 아닌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타마는 카필라의 생활, 출가의 동기, 현재의 자신 등에 대해서 이 기회에 깊이 반성해 보리라고 작정하였다.

정도(正道)의 척도를 안 이상, 그 척도에 자기 자신의 상념과 행위가 부합되지 않는다면 사물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오늘 밤은 ‘정념(正念)’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염(念)은 원(願)이다. 염원이 없는 인생, 염원이 없는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오늘보다 내일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며 내일이 없는 인생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오늘에 사는 자는 강자(强者)임에는 틀림없지만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도 희망을 걸고 생활하고 있다.

그 희망이 자기중심이 되면 대인 관계의 조화가 무너지고 자기 자신도 넘어진다.

염원도 조화라는 중도에 따른 것이어야 하며 ‘올바른 염’은 무제한으로 커가는 욕심을 억제하여 족함을 아는 염원, 인생의 목적을 자각한 염원이어야 한다.

여기서 염(念)과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염원도 기도도 다 같이 에너지의 작용에서 생겨난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 안에 그러한 창조능력(創造能力)을 낳는 에너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면 중에는 이러한 능력은 작용하지 않는다. 수면은 에너지의 휴식이며  동시에 에너지의 보급을 위해서 차원이 다른 세계로 올라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영혼이 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영혼이란 개성을 지닌 의식(意識)을 말한다.

수면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며  이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면 코를 만져도 지진이 일어나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는 행위는 육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형성하고 있는 에너지의 작용이 하는 행위다. 염원도 기도도 개성을 지닌 영혼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염원은 인간의 목적의식(目的意識)을 나타낸 작용이다.

누구누구와 결혼하고 싶다.
출세하고 싶다.
사업을 확장하고 싶다.
노후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싶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 는 등으로 말이다.

인간으로서 이와 같은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목적의식이 있으므로 문명과 문화가 발달되고 사회생활이 즐거워진다.

그런데 인간이 육체를 지니게 되면 육체에 따른 상념(想念)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자기 본위가 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남을 생각하면 내가 살 수 없다. 는 식이다.

인간끼리의 시비는 이러한 자기중심의 상념, 즉 자기중심의 목적의식을 가진 염원이 작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의 목적은 조화에 있다. 조화란 서로 돕고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목적의식도 이 조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정념(正念)은 이러한 조화라는 척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정념의 차원은 굉장히 높은 것이다.


직업에 대해서 살펴보자.

직업은 사회, 직장, 가정에 대해서 그 생활을 보장해주고 윤기를 더해주는 것이다. 직업에 충실하다는 것은 정념(正念)의 태도에도 부합된다.

이것은 주의, 주장, 사회제도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직업에 충실하게 땀
흘리는 태도는 그러한 제도와는 원래 무관한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생겨난 이익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각자 염원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즉 자기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익을 가정, 직장,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한 것인가 말이다.

족함을 아는 염원의 태도는 정념(正念)을 살리는 한 가지 척도로써 매우 중요한 것이다.왜냐하면 인간은 자칫 자기중심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정념의 본질, 정념을 살리는 길은 이러한 족함을 아는 생활태도를 토대로 해서 승화해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면 기도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그 감사의 마음으로 생활을 영위해가는 사념(思念)을 말한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살고 있다. 내일의 일을 모른다. 언제 재난이 덮치고 언제 기쁜 일이 쏟아질지 모른다. 이웃집이 지금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건강하고 밝고 즐거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올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기도의 참모습인데 세상 사람들은 기도를 소원으로 알고 있다. 신전이나 사원에 가서 이렇게 해주시오, 저렇게 되게 해주시오, 하면서 합장하고 있다. 그것은 구걸이지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올바른 생활행위. 즉 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때에는 그 소원과 기도는 대개 달성된다.

올바른 기도는 차원이 다른 저 세상의 천사의 마음을 움직여 그 소원을 달성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천사와의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기적은 이러한 기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으며 어떠한 독재자도 인간이 기도하는 사념을 억누르지 못한다.

다만 일반적인 기도는 아욕(我慾)의 수단으로 쓰여, 빌면 떡이 생긴다는 식으로 무엇이든지 소원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주문을 외면 공덕이 있고, 기도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부당 만부당 한 일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염원’은 목적의식이요. 창조활동의 원천(源泉)인데 비해서 ‘기도’는 생명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마음이요 나아가서는 신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다 같이 에너지라는 힘의 파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끝으로 ‘정정(正定)에 대해서 고타마는 생각하였다.

정정의 근본은 반성이다. 반성은 광명세계에 이르는 사닥다리다.

시기. 질투, 노여움, 비난, 험담. 등의 마음을 버리고  집착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성하는 길밖에 없다.

반성을 거듭함으로서 마음과 육체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마음과 대우주의 마음과의 합일(合一)이 이루어진다.

반성을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면 마라(魔).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나가(뱀)등에 지배되어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정정(正定)은 바로 반성이라는 지관(止觀)의 행위인 것이다.

고타마는 지나간 36년간의 과거를 이상의 여덟가지 규범에 비추어 훑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팔정도(八正道)라는 불법에 비추어 자신의 인생을 반성해 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팔정도란 중도의 규범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날이 밝았다.

짐승이 다가오는 기미를 느꼈다. 한 마리의 새끼사슴이 까만 코를 고타마의 귓가에 대고 콧김을 뿜었다.

이따금 그 부드러운 코끝이 고타마의 귓불을 건드렸다. 감미롭고 따뜻한 콧김이 간지러웠다.

고타마는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이번에는 작은 산새 한 마리가 내려와 고타마의 어깨 위에 앉았다. 다시 머리위로 올라가 조잘대다가 이내 날아가기도 했다.

짐승들의 악의 없는 행동은  고타마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하룻밤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고타마의 사색(思索)은 낮보다는 밤중에, 그것도 사람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시간으로 말하면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였다.

사람도 짐승도 산천초목도 낮 동안의 피로를 풀며 코를 골고 있을 시간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대기도 잠잠해지고 땅과 별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 대화 시간인지 모르겠다.

사색에 잠기면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밖에서 해답이 흘러나와 절로 정리되어 갔다. 잡념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께 밤부터 참선과 사색의 시간을 이 시간대에 집중시킴으로써 고타마는 마음속에 숨은 마(魔)를 몰아내고 이틀 만에 팔정도(八正道)를 밝혀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품어왔던 의문덩어리가 차례차례 풀려나가게 되니 밤의 사색이 즐겁기 그지없었으며 오래도록 갈구해 온 반야(지혜=智慧)에 도달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인간석가.-다카하시 신지- 김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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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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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2011.04.20
22:55:20
(*.52.141.104)

수행이란 현실을 제대로 응시하여 그에 비추어진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그 안에 숨겨진 영혼 혹은 신의 의지를 깨달아가면서 그것과 자신을 점점 일치시켜 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의 강함과 엄격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견지로 볼 때 상당히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큰 사건을 겪지 않고서는 좀처럼 마음에 의식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관해 붓다는 각 인간이 겪는 괴로움을 인간 자신의 마음이 낳고 있으며, 본인이 스스로의 마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도구로서 <팔정도를 통한 반성의 지관>을 가르쳤습니다.

 

기존의 불교에서도 팔정도를 가르칩니다만, 시대를 거쳐 오면서 형이상학적, 관념적으로 변하여 그 진정한 가치가 퇴색되고,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고 있습니다.

 

팔정도의 반성의 지관을 확실히 몸에 익히려면 다음의 과정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붓다의 생애와 깨달음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을 이해합니다.

 

2. 괴로움의 원인: 육체 입은 의식이 마음으로 욕망/집착/번뇌를 만드는 메커니즘

   ☞ 자신의 삶에서 어떤 괴로움이 있었는지를 면밀히 조사합니다.

   ☞ 다음으로 그러한 괴로움이 어떠한 마음의 매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를 조사합니다.

 

3. 괴로움의 해방 : 조화라는 중도의 법칙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간 마음의 강함)

   ☞ 괴로움을 낳는 마음의 원인을 스스로 살펴본후, 영혼 그리고 대우주(神)와 함께 반성해 나갑니다.

   ☞ 그리하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있는 불필요한 에너지들을 깨끗히 하고 우주에 방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4. 반성의 기준이 되는 8가지 척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물과 현상, 삶과 우주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는 법을 익혀 나갑니다.

     즉 자신의 관점을 영혼의 관점과 대우주의 관점으로 계속해서 성장시켜 나갑니다. 

 

2) 첫번째가 진행되면서 사물과 현상에 대해,

    영혼의 관점에서, 그리고 대우주의 관점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익혀 나갑다.

 

3) 만약 두번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이제 말이 가지는 힘과 그것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익혀 나갑니다.

    말이라는 것은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신성한 것임을 깨달아 갑니다.

 

4) 올바른 생각과 말이 만들어지면, 스스로 생각한 것을 올바른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행동하는 것에 의해 자신의 현실의 에너지를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5)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듬어가면서

    점차 자신에게 주어진 영혼의 레벨의 역할과, 신의 레벨의 역할

   그리고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자신만의 悟意를 알아차리고 행해가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6) 이에 따라, 이제는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빛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갑니다. 

    에고가 들어가지 않은, 올바른 기도와 염원의 방법을 익힙니다.

     

7) 이제 자신이라는 것이 한개인이 아니라 점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확장되어 갑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하나임이 이해됩니다.

     그에 따라 또다른 나 자신인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성장하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8) 이와 같은 자기반성과 성찰을 생활화하고, 매순간 깨어있으면서 행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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