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말 국내 기업들의 사장단 및 임원인사의 뚜껑을 열어보니, 무엇보다 오너 일가의 본격적인 경영 참여가 눈길을 끌었다. 주요 기업들마다 오너 2~4세들에게 중책을 맡기면서 속속 경영 전면에 이들을 등장시킨 것이다.
또 작년 말 인사에서는 기업들마다 내수 부진으로 국내 영업 담당자들이 죽을 쑤는 동안, 외국에서 뛰어난 영업 실적을 기록한 해외통들이 전면에 대거 부상했다. 그리고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예전에는 한직(閑職)으로 여겨지던 홍보 분야의 인력들도 대거 승진대열에 합류했다.
LG그룹에서 분가한 LG전선그룹은 지난해 12월 26일 구두회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외아들인 구자은 LG전선 이사를 1년 만에 해외사업담당 상무로 승진시킨 데 이어, 다음날인 27일에는 구평회 E1(옛 LG칼텍스가스) 명예회장의 3남인 구자균 고려대 교수를 LG산전 관리담당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E1은 또 28일에는 구평회 명예회장의 차남인 구자용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구자용 사장은 서울고와 고려대 무역학과를 졸업한뒤 1979년 LG전자에 입사, LG전자 미주법인 이사와 법인장(상무)을 거쳐 2001년 E1으로 자리를 옮겨 기획·재경 담당 상무와 부사장을 역임했다. E1 측은 “구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섬에 따라 향후 신규사업 추진 등 회사의 변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1은 이미 LG전선·LG니꼬동제련·극동도시가스·가온전선(옛 희성전선)·LG산전과 함께 LG그룹에서 분리, LG전선그룹으로 편입됐다. E1은 LG전선 계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기업이미지(CI)를 변경했으며 단순한 ‘동력 에너지’뿐만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창조’하는 기업으로 이끌겠다는 브랜드 비전에 따라 새로운 사업 영역인 범양상선 인수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LG그룹 내에서 구인회→구자경→구본무로 이어지는 장자(長子) 승계 시스템은 이미 오래 전에 구축되었지만, 이제 다른 ‘회(會)’자 형제들의 항렬에서도 아들 세대인 ‘자(滋)’자 항렬로 후계 경영이 확산되고 있다.
LG상사 ‘오너 3형제’ 역할 강화
이번 인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은 학계에서 자리를 옮긴 구자균 부사장. 그는 고려대 졸업 후 미국 텍사스대에서 재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를 거쳐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해 왔는데, 이론이 아닌 실제 일선 경영에 몸담기는 처음이다. 구자균 교수는 오는 3월 주주총회에서 신규 등기 임원으로 등재될 예정이다.
이번 인사로 LG전선그룹은 고(故) 구인회 LG 창업주의 동생인 구태회(4남), 구평회(5남), 구두회(6남) 등 원로 3명의 2세들 대부분이 계열사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게 됐다. 우선 구자홍 LG전선그룹 회장을 비롯, 구자엽 가온전선 부회장, 구자명 극동도시가스 부회장은 구태회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또 구자열 LG전선 부회장, 구자용 E1 사장, 구자균 LG산전 부사장은 구평회 명예회장의 아들이다. 이들은 구본무 LG그룹 회장보다 대체로 나이는 적지만 항렬상으로는 하나 위다.

LG상사도 지난해 12월 15일 임원인사를 통해 고 구자승 LG상사 대표의 막내 아들인 구본진 경영기획팀 부장을 상무로 승진시켰다. 구 상무는 형인 구본걸 부사장, 구본순 상무와 함께 LG상사 지분의 15%를 지니고 있는데 앞으로 사내에서 이들 오너 3형제의 역할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이들 3형제는 그동안 여러 계열사에 흩어져서 일해오다 LG그룹이 구씨와 허씨가(家)로 양분되는 과정에서 모두 LG상사에 합류했다.
“지배구도 확립 필요성 크다” 판단
재계에서는 총수 일가의 본격적인 경영 참여가 부쩍 활발해지는 이유로 여러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가령 앞으로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집단소송제의 도입, 출자총액한도 제한의 강화 등으로 오너를 겨냥한 공격이 거세질 것이기 때문에 미리미리 방패막이나 지배구도를 확립해 놓을 필요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또 그동안 2~4세들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경영수업을 해왔으며 이제 자연스레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역량을 발휘할 단계가 되었다는 판단도 따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역시 옥석(玉石)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고 봐야 한다. 순수한 승계나 경영참여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이유에서 승계 작업이 이뤄진 곳도 적지않기 때문이다.

CJ그룹은 작년 말 이재현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씨를 CJ엔터테인먼트, CJ CGV, 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씨의 장녀인 이 부회장은 1995년 CJ(당시 제일제당) 이사로서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회사 드림웍스 설립을 주도한 뒤, CJ엔터테인먼트 사업부 해외파견 상무 직함을 갖고 미국에서 머물다 최근 귀국했다. 이 부회장은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연극배우 윤석화씨의 남편)과 이혼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CJ그룹 측에서는 “이미경 부회장의 선임에 대해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분야의 해외진출을 위해 관련 사업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과 폭넓은 해외 네트워크를 가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재현 회장이 직접 요청해 이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CJ그룹 내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내막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가령 이재현 회장의 어머니이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맏며느리로서 시아버지로부터 막강한 신임을 받았던 손복남 CJ 고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관측도 있다.
과거에는 ‘현대그룹’이라는 큰 틀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분가한 현대백화점그룹도 3세 경영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은 2003년 장남인 정지선씨를 현대백화점 부회장으로 승진시킨 데 이어, 지난해 12월 23일 정기인사에서 차남인 정교선 부장을 그룹 기획조정본부 기획담당 이사로 발령하여 본격적인 경영참여의 길을 걷도록 했다. 이에 앞서 정 회장은 증여를 통해 장남을 현대백화점의 최대주주(지분율 15.72%)로, 차남을 자신에 이어 계열사인 현대백화점H&S의 2대 주주(10%)로 올려놓으며 후계 구도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정몽근 회장이 여러가지 이유로 경영 일선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현대백화점의 후계 승계는 이미 완결 상태에 들어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알짜기업으로 통하는 한일시멘트그룹도 3세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한일시멘트그룹은 지난해 12월 29일 총 16명의 계열사 임원 인사를 단행하면서 오너인 허정섭 명예회장의 장남인 허기호 한일시멘트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한일시멘트그룹은 이에 따라 허정섭 명예회장의 동생인 허동섭 회장과 장남인 허기호 사장의 공동경영 체제로 들어가게 됐다. 허기호 사장은 1966년생으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대표이사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다. 성남고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허 사장은 미국 선더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마쳤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리더십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일시멘트그룹은 1995년 작고한 개성출신 기업인 고 허채경 회장이 1961년 설립한 국내 서열 2위 시멘트 회사로, 40년 연속 흑자를 내고 있는 우량 기업이다. 계열사로는 한일건설, 서울랜드, 한국기업평가, 한일레미콘, 한일산업, 한일개발 등을 두고 있다.
2·3세 경영 참여 본격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외아들인 조원태씨도 지난해 10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 부팀장(차장)으로 입사함으로써 한진그룹의 3세 경영체제 구축을 위한 잰걸음을 시작했다. 이미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씨도 대한항공 기내판매 팀장을 맡고 있다.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그룹의 구조조정본부격인 롯데호텔 정책본부 본부장에 앉으면서 경영 참여를 본격화했다. 신 부회장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새해부터 국내 경영에 본격적인 자기 목소리를 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새해 관심을 모으는 인사는 삼성그룹에서 과연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전무나 부사장으로 승진하느냐이다. 삼성그룹의 사장단·임원 인사는 1월 13일을 전후하여 단행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재용 상무가 상무보에서 승진한 지 3년이 지났으므로 이제는 자연스레 전무나 그 이상으로 승진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이와 관련, 이학수 삼성구조조정본부장(삼성전자 부회장 겸임)은 지난해 12월 2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재용 상무는 경영수업을 잘 받고 있다”고만 언급, 구체적인 승진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상무의 승진 여부가 재계의 핫이슈인 점을 감안, 삼성그룹이 이 상무의 승진에 적절한 속도조절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오너 후계자들이 경영 전면에 대거 등장하면서, 선대(先代) 오너들과 가까웠던 전문 경영인들은 대거 현직에서 옷을 벗게 된다.
코오롱그룹은 지난해 11월 말 송대평·조왕하·김주성 등 부회장 3명 전원을 포함, 임원 34명을 무더기로 퇴진시키는 대규모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구조조정을 위해 전체 임원의 27%를 한꺼번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 다른 그룹에서도 그동안 선대 쪽으로 분류되는 전문경영인들이 속속 옷을 벗고 있다.
오너 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일반 전문 경영인의 인사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실적을 기록한 해외주재원들의 승진 비율이 높았다. 해외파가 대거 승진한 이유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 시스템이 확산된 데다, 내수침체로 국내영업 부문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최근 발표된 현대자동차 인사에서 임원 승진자 56명 가운데 10명이 해외에서 높은 실적을 낸 ‘해외파’였다. 수출이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등 해외 부문의 영업 실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의 부사장 승진자 3명 중 베이징법인장을 맡고 있는 노재만 전무는 올해 중국법인의 비약적인 성장을 주도했고 윤여철 경영지원본부장은 해외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차기 경영구도 확립 차원에서 사장 승진설이 나돌던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기획실장(부사장)은 이번 승진인사에서 제외됐다.
해외통의 승진은 고루 확산돼, 한진해운도 중국 지역 본부장인 김황중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는 등 12명의 승진 임원 중에서 해외영업 인력을 대거 포함시켰다.
작년 말 LG전자 인사에서도 김광로 인도법인장과 안명규 북미총괄 부사장이 사장으로 각각 승진했다. 그동안 LG전자의 간판으로 불리던 백우현 사장과 우남균 사장이 각각 미국법인 발령이나 미국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팽(烹)’을 당한 것과 대조적이다. LG전자에서는 또 12명의 부사장 승진자 가운데 강신익, 김종식, 양정배, 조중봉 부사장 등 4명이 미국, 멕시코, 중국, 브라질 등 해외에서 높은 실적을 낸 해외파다.
LG그룹의 한 관계자는 “연중 내수침체에 시달린 국내 영업 쪽 인력들보다는 날로 높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지에서 일하는 해외파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실적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내수 침체… 해외파 실적 더 높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동안 기업체 내에서 ‘한직(閑職)’으로 통했던 홍보실 인력의 약진이다. 갈수록 기업들의 대외 커뮤니케이션이 중시되면서, 이제 홍보실도 사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가지게 됐다는 분석이다. 심지어 CEO나 사장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늘고 있다. 과거 이인호 LG애드 사장, 배동만 제일기획 사장, 심재혁 인터컨티넨탈호텔 사장 등이 홍보 업무를 맡다가 최고경영자(CEO)로 승진한 케이스다.
현대자동차는 작년 4월 인사에서 홍보실장 출신인 최한영 부사장과 당시 홍보실장이던 이용훈 전무를 각각 사장과 부사장으로 승진시킨 데 이어, 작년 말 인사에서도 김조근 홍보담당 이사를 상무로 승진시켰다.
또 LG전자의 김영수 홍보담당 부사장은 작년 말 인사에서 ㈜LG스포츠의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LG화학의 류근창 홍보담당 상무는 부사장, 조갑호 홍보부장은 상무로 각각 승진했다. 김영수 부사장은 LG화학에서부터 시작, 홍보 전문가로 잔뼈가 굵었으며 친화력있는 성격으로 각계에 다양한 지인(知人)을 두고 있는 점이 강점이다. 한화그룹도 남영선 그룹 구조조정본부 홍보팀장(상무)을 ㈜한화 사업총괄담당 사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한편, 40대인 최선목 상무를 그룹 홍보팀장에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