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2] 1951~52년 버마 국경에서 국민당 잔당의 중국 윈난 공격을 조종한 미국 CIA는 무엇을 노렸나
▣ 타이페이=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전쟁이 우리를 강요한다면, 모든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 1951년 4월19일 맥아더 장군은 미국 의회에서 감정 섞인 퇴임 연설을 하고 있었다. 맥아더와 트르만의 갈등, 그리고 장제스 같은 시각, 일단의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윈난성 겅마(耿馬)를 향해 쳐들어가고 있었다. 앞서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는 대통령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내 명령에 도전했다. 더 이상 그이의 반항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며 한국전쟁을 이끌던 맥아더를 연합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1950년 11월24일, 맥아더는 도쿄 극동사령부에서 “유엔군이 적을 포위하고 강력하게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며 확신에 찬 승전보를 남기고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크리스마스 전에 아이들(미군)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전선을 독려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연설은 단 하루 뒤인 11월25일 저녁 중화인민공화국이 30만 대군을 앞세워 압록강을 건넘으로써 ‘전황 판단력 부재’를 드러내는 낯뜨거운 말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맥아더는 승리(한국 통일)를 위해 ‘중국 본토 공업단지 폭격과 해안 봉쇄, 대만 국민당 군대를 동원한 중국 본토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염려해 “압록강 5마일 이남까지만 폭격 대상으로 삼고, 특히 중국 국경과 맞댄 압록강 작전은 한국군만을 동원하라”는 제한 공격을 거듭 명령했다. 1951년 초, 그동안 트루먼과 사사건건 대립해온 맥아더는 한국전쟁 휴전안마저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1951년 4월14일, 리미(李彌)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인 윈난반공구국군(雲南反共救國軍) 소속 중무장 2개 종대(縱隊) 2천여명이 버마 코캉(Kokang) 지역의 험난한 산악을 올라 중국 윈난성으로 쳐들어갔다. 국민당 잔당은 1주일 만에 국경도시 겅마와 티탕을 점령했다. 이어 국민당 잔당은 정체불명의 항공기들로부터 물자를 공수받으며 겅마 북부 60km 지점의 멍사 비행장으로 진격해갔으나, 인민해방군(PLA)의 역공을 받아 한달 만에 다시 버마의 와(Wa)주 몽마우(Mong Mau)로 후퇴했다.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을 놓고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타이베이에서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트루먼에게 국민당 정규군 3만3천명의 한국 파병을 강력히 제의했던 장제스(蔣介石)가 휴전협상을 부정하며 ‘한국 무력 반공통일’을 주장했다. 또 버마-타이 국경에서는 국민당 잔당 제26군사령관 뤼궈취안(呂國銓)이 2천 병력을 이끌고 몽삿(Mong Hsat) 본부를 떠나 다시 윈난으로 쳐들어갔다. 잔당들은 윈난성 시수앙반나(西?版納) 행정중심지로 방어망이 견고한 징훙(景洪)을 피해 멍하이(猛海)로 진격했으나 인민해방군의 역공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낸 채 1주일 만에 버마의 몽양(Mong Yang)으로 후퇴했다.

갈 때는 무기, 올 때는 아편을 싣고…

그렇게 한국전쟁에서 대만 국민당 병력을 이용해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자 했던 맥아더는 1951년 4월19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맥아더의 전략을 부정하며 맥아더를 해고했던 트루먼은 맥아더가 사라지자마자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들을 동원해 중국 남부 윈난성을 공격했다. 한반도를 벗어나 약 2500km나 떨어진 중국 남부 윈난 지역에 한국전쟁 ‘제2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미 1950년 초부터 미국 합동참모본부(JSC)의 건의에 따라 버마-윈난 국경지대로 쫓겨난 국민당 잔당을 비밀리에 지원해온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중국이 참전하자 다시 “인민해방군을 견제·분산시키기 위해 국민당 잔당을 동원해 윈난을 공격하자”는 미 중앙정보국(CIA) 정책조정실(OP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CIA 국장 월터 스미스는 “지나치게 위험하다”며 이 비밀계획을 거부했으나, 트루먼은 그 가치를 인정해 작전을 승인했다. CIA는 곧장 ‘오퍼레이션 페이퍼’(Operation Paper)라는 작전명 아래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들을 지원하며 한국전쟁 제2전선을 형성해나갔다.

“워낙 비밀리에 진행한 작전이다 보니, 소비에트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버마 국경지역 국민당 잔당 지원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한국전쟁과의 연관성을 감지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버마 현대사를 연구해온 스웨덴 기자 베르틸 린트너의 말마따나 오퍼레이션 페이퍼는 철저한 암흑 속에서 진행됐다.

오퍼레이션 페이퍼를 위해 CIA는 타이에서 반공 홍보영화를 제작해온 전직 전략업무부(OSS) 소속 퇴역 군인 로버트 노스가 운영하는 파 이스트 필름(Far East Film Company)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며,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 서플라이스(South East Asia Supplies Corporation)로 하여금 탄약과 군수품을 조달토록 했다. 그리고 CIA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퇴역한 클레어 첸놀트(Claire Chennault) 장군 이름으로 자신들이 운영해온 시빌에어트랜스포트(CAT)라는 항공사를 통해 버마-타이 국경 몽삿에 자리잡은 국민당 잔당에게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CIA는 그 보급물자들을 오키나와의 CIA 비축창고 또는 대만에서 직접 타이까지 실어나른 뒤, 타이 정부를 쥐락펴락하던 실권자이자 CIA 끄나풀인 경찰 총수 파오 스리야논다(Pao Sriyanonda) 장군의 지원 아래 다시 버마의 몽삿으로 공수했다. 그 무렵 CAT는 주당 2회씩 정기적으로 대만~몽삿을 운항하면서 700여명에 이르는 대만 군사고문단과 정규군을 비밀스럽게 국민당 잔당 지원에 투입했다. 그리고 몽삿에서 되돌아나오는 빈 비행기로는 국민당 잔당들이 생산한 아편을 타이로 운반해주었다.

인민해방군 분산시도, 실패로 끝나다

“1951년 4월 윈난 공격 때는 헬리콥터를 타고 온 열댓명도 넘는 CIA 군사고문관들을 봤어. 그이들은 리미 장군과만 이야기했으니, 우리 같은 일반 장교들이야 직접 말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딱 잡아떼던 도이 매살롱의 레이위톈(雷雨田) 장군은 세 번째 만남에서 말문이 열리자 CIA에 대한 거부감부터 쏟아냈다.

“그, 못된 놈들이야. 난 그놈들이 싫어. 자기들 필요할 때는 윈난까지 와서 별짓 다 해놓고, 우리가 쓸모없게 되자 본 척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런 일(국민당 지원)도 없었다고 잡아떼고.” 비밀문서로만 존재하여 지난 50년 동안 암흑 속에 묻혀왔던 CIA의 오퍼레이션 페이퍼도, CIA의 국민당 잔당 지원도 그리고 한국전쟁 제2전선의 존재도 모두 레이 장군의 입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한국전쟁 제2전선은 현재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증언자를 통해 확인됐다.

“몽삿에 온 CIA 요원 두명이 리미 장군에게 ‘한국전쟁을 돕기 위해 윈난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직접 들었어. 또 내가 윈난을 공격해 들어갈 때 그 CIA 요원들도 함께 갔고….” 국민당 잔당 제8군 709연대장으로 윈난 공격에 참전한 뒤 대만 대사관 무관으로 여러 나라를 다녔던 슈쯔정(修子政·82) 소장은 타이베이로 찾아온 낮선 한국 기자에게 대뜸 “한국전쟁 제2전선 때문에 왔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할 만큼 확신에 찬 증언을 했다.

“병력 수나 전투력만을 놓고 전선이 형성됐다 아니다를 말하지 않는 거야. 전쟁은 이기는 게 목표지만, 전선은 꼭 그런 게 아냐. 상대(인민해방군)가 말려들지 않았을 뿐이지, 국민당의 윈난 공격은 명백한 한국전쟁 제2전선이었어. 그건 처음부터 CIA가 제2전선으로 설계한 비밀 군사작전이었어.” 그렇게 CIA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들은 1951년 4월과 7월 두번에 걸친 윈난 내부 공격에 실패한 뒤에도 버마-윈난 국경지역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선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952년 8월 들어 다시 리미 장군이 윈난 내부를 공격해 들어갔으나 인민해방군에게 밀려 버마로 후퇴함으로써 한국전쟁 제2전선도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

마약 보급선만 폭발적으로 확장시켜

이번 취재를 종합해볼 때, CIA가 오퍼레이션 페이퍼 아래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의 존재 사실만큼은 분명하지만, 그 제2전선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국민당 잔당들은 CIA가 제2전선으로 노렸던 윈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해 인민해방군을 견제하는 일도 또 윈난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중국 공산당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도 모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여 트루먼이 꿈꾸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을 통한 인민해방군의 분산도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제2전선은 처음부터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해왔던 미국 정보당국과 군 지휘계통의 부실한 한국전쟁 전황 예측이 낳은 또 하나의 낭만적 오판이었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중국 공산당이 ‘국내 재건 문제’ ‘군사적 숙련도 부재’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의석 확보 열망’ ‘소비에트의 공·해군 지원 가능성 전무’ ‘북한의 소비에트 위성국 성격’ 탓으로 결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게다가 CIA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거듭 군사적 개입을 경고했으나, 인민해방군의 움직임은 만주 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중국공산당이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함으로써 워싱턴 정책 결정권자들의 판단을 흐려놓았다. 말하자면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중국 불개입’ 오판에 이어 ‘제2전선 효용성’을 놓고 거듭 오판을 일으키면서 정보 판단능력 부재를 유감없이 드러냈던 셈이다.

결국 버마-윈난 국경을 통한 제2전선은 한국전쟁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오히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남아시아의 마약 보급선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비극적 유산만 남기고 말았다. 게다가 초기 4천명 남짓하던 국민당 잔당은 제2전선을 계기로 CIA의 전폭적 지원을 업고 국경 소수민족을 흡수해 병력을 1만2천여명으로 확대함으로써 지역 안보 문제에 심각한 걸림돌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Presidential Decisions for War〉 Gary R. Hess.

장수야교수(張淑雅.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타이베이) 인터뷰. Memorandum, Bradley to Secretary of Defence, 10 April 1950 and Annex to NSC 48/3, “United States objectives, policies and courses of action in Asia” 2 May 1951.

〈The Politics of Heroin in Southeast Asia〉Alfred W. McCoy.

Rankin to Department of State〈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1952-54.

〈Burma in Revilt〉Bertil Lint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