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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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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사, 자이언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클레오파트라, 작은 아씨들을  본 기억이 납니다.   영성이니 뭐니 몰랐던 시절에 꽤 감동 많이 받았던  휴식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흑기사와 자이언트는 극장판 대형화면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이런 이미지의 여배우를 더이상 찾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http://www.sunoo.me/nonsul_reading/20966

 

[ 예술의 세계 ]

  예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술은 단지 예술가의 심리만 만족시키면 되는 것인가? 철학이 그랬듯이 우리의 예술에 대한 이해도 매우 뜬구름 잡는 형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 사회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예술성은 감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성질이며, 사회성이란 이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성질이다. 여기서는 예술성과 사회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동요와 민화를 통해 두 가지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다루고자 했다. 훌륭한 작가의 작품이라 해서 모두 예술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작가의 작품이라 해서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민화와 동요는 사라지기 쉬운 것들이지만 사회성, 전통, 예술성이라는 면에서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예술임에 틀림없으리라.

  미감을 어떻게 정의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장 그것을 이론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추상적인 미감은 단지 예술 활동의 본질적 기초일 뿐이다. 예술 활동을 맡은 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활동은 인생의 모든 교류에 지배된다.

  미감에는 3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물질적 − 색, 소리, 몸짓 및 기타 더욱 복잡하고 정의할 수 없는 물리적 반응을 순전히 지각하는 일이며, 둘째는 이러한 지각을 쾌감을 주는 모양과 패턴으로 배열하는 일이다. 심미감은 이 두 과정으로써 그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셋째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지각의 배열을, 기왕 있었던 정서나 감정의 어떤 상태와 일치시킬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정서나 감정이 표현되었다고 한다.  (허버트 리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1. 예술의 영역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고고한 사람인가? 사실 우리는 예술가라 하면 턱에 수염이 났고, 긴 담뱃대를 물고는 오로지 자기만의 세계에서 제멋에 사는 사람을 떠올린다. 정말 예술이란 그러한 것일까?

  예술을 영어로는 아트(art)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아르스’에서 온 것으로 아르스는 원래 그리이스어 ‘테크네’를 번역한 말이다. 테크네란 기술 또는 숙련된 솜씨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오늘날 예술이란 뜻으로 쓰일 때까지는 여러 번 성격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예술과 생활 속의 기술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로마나 중세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예술 속에는 시가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양 교육 전반이 예술의 주요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이 오늘날의 미적인 가치를 갖는 행위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의 예술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과학과 공예가 예술 범위에서 빠져나가고, 대신 시(문학)가 예술의 한 범위로 들어왔다. 이 가운데 공예가 예술의 범위에서 빠져나간 까닭은 공예는 단순 기술에 해당하는 것으로(그리스 시대의 테크네), 예술가들 스스로 단순한 기술자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욕구는 비교적 쉽게 달성되었다. 미술가들은 단순 기술자로 취급되기보다는 좀더 고상한 대우를 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과 예술의 구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 사람들은 ‘예술가냐 과학자냐’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면 예술가보다는 학자로서 대우를 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15세기말까지 예술가들은 학자로서의 대우를 더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술과 과학의 구분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은 바로 갈릴레오였다. 그는 과학보다 예술이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예술의 영역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오늘날의 예술은 매우 혼란스럽다. 어디까지가 예술인가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논의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대중 매체의 발달로 인한 순수 예술과 통속 예술의 이분법적 사고, 예술이 미를 추구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예술도 사회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라는 관점의 혼동 따위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간혹 우리는 고전 음악이나 고고한 미술품을 듣고 볼 줄 모르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지만 때때로 이러한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람이라는 대우를 받기도 한다. 과연 예술의 본질은 무엇일까?


2. 예술을 보는 두 가지 관점 

  분명 예술은 감정을 매개로 하는 인간의 활동이다. 아름답다거나 불쌍하다, 혹은 답답하다, 기쁘다, 슬프다 따위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가 아니고서는 예술이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문학의 기능으로 손꼽혀 온 카타르시스(정화 : 어떤 감정의 홍수 끝에 오는 후련한 마음)를 느낄 수 있는 작업, 바로 이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거나 느끼는 작업이 예술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반드시 미적인 목표에만 얽매여 있는 것일까?

  예술도 무엇인가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는 표현 방법을 얻을 수가 없다. 음악은 소리를 통해, 미술은 선과 색을 통해, 문학은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의 표현 양식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또한 예술 자체가 감정을 매개로 하여 타인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곧 형식은 다르지만 교감(감정을 교환함)이나 의사소통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점에서 예술도 언어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지닌다.

  이제 우리는 예술의 두 가지 목표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첫째의 목표는 예술도 사회적 존재물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곧 예술도 사회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또다른 하나는 예술이 비록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하더라도, 예술 자체에는 다른 사회적 산물과는 다른 미적 탐구라는 형식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예술은 개인의 창조 본능을 기본으로 삼는다. 곧 예술은 사회성과 미적 가치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 될 때만이 올바른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1) 예술의 사회적 성격 
  이른바 예술 사회학이라 불리는 학문 분야는 예술과 사회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가  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특정한 시기에 존재하는 생산 체계가 사회에서의 예술 내용과 양식을 결정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술 발달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고대의 벽화와 현대의 미술관을 견주어 보라. 고대의 벽화에 나오는 소재는 종교적인 소망이라든가 풍요로운 생산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그러나 현대 미술관에는 다양한 소재의 미술 - 정물화에서부터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 이 들어와 있다. 소재뿐만 아니라 그림 도구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의 색체 예술 기법과 현대의 미술 용품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미술 도구만으로도 이미 고대인의 미술 도구를 능가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단지 도구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사회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예술을 결정하는 요소라 볼 수는 없다. 훌륭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분명 남과 다른 정신적인 요소를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2) 미적 가치와 예술성 
  예술은 사회성 못지않게 개개인의 독창적인 업적과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미적 가치는 단순히 사회성에서만 평가될 수는 없다. 가장 문학적인 시는 감정에 바탕을 둔 낭만시라고 하듯이, 가장 예술적인 예술은 미적 감정에 바탕을 둔 예술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미인가? 미적 구조란 무엇인가? 사실 이 문제는 쉽게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에 따라 정의가 달라질 수 있고, 또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대해 공부하려는 사람은 -어떤 이는 예술 자체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예술과 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를 알아보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을 미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분류하려 했던 시기는 18세기이다. 이 시기의 예술은 파인 아트(Fine arts : 순수 예술)를 비롯하여, 뮤즈(음악의 신)의 예술, 고상한 예술, 시적인 예술 등 땅위의 용어를 모두 동원하여 사회에서 예술만을 따로 분리해 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용어에 대한 이해는 다소 주의를 해야 한다. 학문 용어나 예술 용어는 대부분 의미의 특수화가 이루어져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데 주의를 해야 한다. 사실 어떤 언어든 우리는 일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학문, 예술 용어의 경우 일상적인 의미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순수 예술이란 용어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하면 참여 예술의 대립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예술만을 위한 예술의 의미로 쓰였을 뿐 참여와의 관계로 쓰인 용어는 아니다. 여러분들이 예술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이런 점에 특히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순수 예술로 돌아가 보자. 16세기 예술은 조화를 통해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화는 바로 미의 출발점이며, 특히 시각 예술(회화)에서 적합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전통은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인의 시각도 바꾸어 주었는데,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창조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낳게 했다.

 

3) 절충적 접근
  예술에 대한 두 가지 시각, 곧 사회성과 미적 특성이라는 관점은 전혀 다른 분야일까? 사실 예술가들의 입장이라면 자신들을 단순히 사회적인 존재에 끌어다 붙이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학자라면 사회와 괴리되어 있는 예술가들을 무척이나 싫어할 지도 모른다. 분명 두 가지 시각에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시각을 각각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 곧 예술 사회학이란 학문이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예술 사회학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모방설을 바탕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대상이 특별히 예술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가치를 무시한 어떤 존재도 무의미함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전통에서 좀더 발전한 내용이 있다면, 스펜서의 진화론이다. 사회학자인 그는 예술도 미적인 정서와 예술의 지속성을 위해 일반적인 진화론을 적용했다. 곧 예술의 기원은 어떤 특별한 단계의 사회적 적응에 대한 조건적인 영향에서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곧 예술도 문화의 일부로서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문화를 선도하는 구실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복잡한 사회 현상에 더 잘 적용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대중 매체와 예술의 관계가 그러하듯, 때로 대중 매체는 예술 위에 군림한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예술을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고상한 예술만을 고집할 수 있는 배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술을 누구나 쉽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작품 사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다시 대량 생산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좁혀 볼 필요가 있다. 곧 예술성과 사회성을 절충하지 않고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3. 현대 사회의 예술론  
  이제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오늘날 이루어지는 예술의 본모습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근대와 현대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근대가 전근대의(특히 봉건 시대의) 신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현대는 근대의 개인주의적 신념보다는 조직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근대 사회가 시민계급(부르조와)에 한정된 것이지만 개인주의를 철학적 신념으로 삼고 있었던데 비해, 현대는 거대한 사회 조직의 부분으로서 개인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분업화, 조직화, 극대 이윤 추구는 현대 사회의 한 특성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개인의 소외감 또는 자기 상실감도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특성에서 예술의 위치도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경제나 사회 구조와 관련된 예술 구조는 시장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비예술적인 지배(특히 대중 매체나 사회인의 기호 따위)가 심해진다. 반면 현대인의 심리적인 면과 관련지어 본다면 자기 상실이나 소외감을 조금이라도 보완해 줄 수 있는 예술미가 절실히 요구된다. 곧 예술이 갖는 사회성과 미적 특성의 거리가 그만큼 더 커졌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현대 예술의 특징은 예술 자체에서 본질적인 두 가지 관점(예술성과 사회성)을 좁혀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데 있다. ‘매스미디어’ 곧 대중 매체는 방대한 규모의 문화 소비자와 상대적으로 소수화 된 문화 생산자를 중개하는 현대적인 체제이다 

어떻게 본다면 대중 매체는 예술의 사회성을 그만큼 더 넓혀 놓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다. 넓어진 것은 소비 시장과 생산량이지 예술 자체의 질이라든가, 생산자는 결코 달라진 것이 없다. 더욱이 대중화된 소비자들의 심리를 지배하는 매체야말로 예술성을 타고 올라앉아 있는 거대한 괴물일 수 있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전시회를 보라. 그 전시회가 질적인 가치가 있든 없든 성공적인 전시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시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조차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예술론 속에 은연중 잠재해 있는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우리는 ‘대중 매체의 예술 속에서 인간 주체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광고나 매체 전파 속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 예술 속에서는 무엇을 이야기 했는가?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인 것이다.


문제1) 다음 글에 나타난 예술론을 ‘예술의 사회성과 미적 갈등’이라는 두 측면에서 해석 하고 자신의 예술론을 개진하라.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각 시대의 문화는 그 나름의 예술을 만들어 내며, 그것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일이다. 지나간 시대의 예술 원리를 재생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고작해야 사산(死産)된 아이를 닮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꼴이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고대 조각 작품을 만들면서 그리스식의 원칙을 좇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의 작품은 정신성이 결여된, 오로지 형식의 유사성만을 따른 결과가 될 것이다. 이는 원숭이의 광대짓과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숭이는 인간과 닮았다. 가령 원숭이가 코앞에 책을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긴다 해도 그런 일들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권영필 역,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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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이 : 창조 

http://www.lightearth.net/73725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Be Still - and KNOW)
이제, 나를 알고자한다면, 그리하여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나라고 즉,

당신의 진정한 자아라고 확신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우선, 가만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몸, 그리고 그 활동들을 잠재워서 마음과 몸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나를 알고자 하고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실행하면서 나를 따르고

나를 신뢰해서 내가 말한 것을 실증한다면, 당신에게 방법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들으십시오!
"나", 이 책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당신의 신성한 자아로 여겨보십시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과 지성에 말을 걸고 충고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당신은 분리된 인격으로 여길 것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경험하고 배운 것과 맞지 않거나

지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나"는 당신입니다. 즉, 당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당신의 인간적인 마음은 지성과 몸이 이기적으로 탐닉해서 제공한 과제에 너무나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며 매스터인 진정한 당신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과 지성이 느끼는 기쁨과 고통에만 귀기울여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은 자신이 지성과 몸이라고까지 믿게 되었으며

당신의 신성한 자아인 나를 거의 잊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지성도, 몸도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당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는 가르침과 당신에게 부과하는 주된 의무는 당신이 이 위대한 사실을 의식 속에서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을 노예상태로 만들어왔던 이 몸과 지성에 대한 의식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부에 있는 나를 알기 전에 내부에서 나를 느껴야 합니다.
마음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 그리고 몸과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눈 멀고, 귀 멀고자 하려면,

내부에서 나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가르침인 이 말을 성심성의껏 따라야만 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조용히 앉으십시오. 그리고 아주 편안해지면 마음으로 이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십시오.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나는-신이다"
아무런 판단없이 이 말을 받아들여 보십시오.

나의 신성한 이 말이 당신의 영혼 깊숙이 흘러 들어가게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 속에서 감지하는 인상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십시오.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고 방해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신중하게 느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당신입니다.

그리고 무언가 생생한 의미가 당신의 의식으로 전해져 오기 시작하면,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말하십시오.

나의 말을.

당신의 몸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모든 세포에게

그리고 당신 마음이 작용하는 모든 기능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적인 힘을 전부 동원해서

이 나의 말을 하십시오.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나는-신이다"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이 말이 마치 여기에 씌어져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신 안의 신이 당신에게 명령하고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근원적인 것이 아닌 당신의 부분이 그 명령과 요구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이 말을 탐구하고 그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이 말과 함께 하면서 이 말 속에 잠기십시오.

창조적인 생각을 할 때, 이 말이 그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하루에 천 번 행하십시오.
당신이 내 안의 가장 깊은 뜻을 발견할 때까지,
당신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고요하라!"라는 명령에 답하여 기쁨으로 전율하고 지체없이 이 말을 따를 때까지,
당신의 마음 주변을 맴돌던 모호한 상념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 때, 이제는 텅 빈 당신 존재의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말처럼,
그 때, 당신 의식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알아감(Know-ing)의 태양처럼,
그 때,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호흡이 엄청나게 넘쳐 들어와서,

당신을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 결국에는 변화하고 스러져 갈 모든 부분을 극도로 채우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로 인한 희열감으로 당신의 감각은 거의 폭발해 버릴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의 내부로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이 땅에서 거의 들어올려질 것입니다.

그 때, 내 존재의 그 장엄함, 그 신성함, 그 영광을 당신의 내부에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당신은 알 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신이다"라고.
그러한 순간에 내부에서 나를 느끼게 될 때,

 나의 힘을 감지하고 나의 지혜에 귀기울일 때,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안는 내 사랑의 환희를 알 게 될 때,

그 때는 어떠한 질병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외부환경으로 인해 약해지지도 않으며

그 어떠한 적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은 내부에서 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나에게 올 수 있으며 모든 면에서 나를 신뢰하고 내 의지가 표현될 수 있도록

나를 허용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오면,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 나의 실재와 나의 힘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고요하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에게 맡기면 됩니다.

당신의 질병과 다른 이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당신의 마음을 밝게해서 당신이 찾고자 하는 진리를 나의 눈으로 보게하거나

예전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을 완벽하게 하도록합니다.

이러한 지혜, 이러한 현실이 금방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당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망과 인간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당신의 인성은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나, 내부의 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봉오리를 터트려서 꽃으로 피우는 이가 누구입니까?
병아리를 알에서 깨우는 이는 누구입니까?
날과 시간을 정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의식입니다. 나의 지성인 내부의 지성이 나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꽃으로도 병아리로도 표현되며 내 생각이 결실을 맺도록 합니다.
꽃이 피고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것을 행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의지를 접고서 나의 의지와 하나가 되었으며 내가 나의 의지로써,

꽃을 피우고 알에서 깨어나올 수 있는 시간을 정하게 하고 성숙하게 했습니다.

또한 내 의지가 주는 자극을 받아들여서 노력을 했고 그렇게 해서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인간적인 의식의 껍질을 뚫고 나오려고 수 천번은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성으로.
그와 같은 노력은,

실체로 이루어진 형상의 세계와 손으로 잡혀지지 않는 꿈의 영역사이에

내가 드리워 놓은 문을 부수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면서 물리치지 않는 한,

당신의 개인적인 영역으로 침입해 오는 침입자를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 예전에는 없던 힘을 얻고 앎을 가져다 주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단, 당신이 지식과 선을 얻고 나와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면

모든 욕망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나의 신성한 본질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활짝 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인성의 껍질을 던져 버리고

천국에 있는 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빛 속으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나를 따라서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을 성심성의껏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애를 쓴다면,

곧 나를 알 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이 쓰여져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것이라도 당신에게 제시해서 이해하도록 할 것입니다.

책이나 가르침, 혹은 자연이나 친구에게서.
만약에, 이곳에 쓰여진 말 중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말을 버리기에 앞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찾으십시오.
단 한 문장이라도, 혹은 그 안에 있는 어떠한 생각이라도, 불분명한 채로 남겨두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탐구하고 분투한다면, 결과에 대해서 연연해 하지 말고

내부의 진정한 자아인 나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과는 나의 관리하에 있으며 내가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당신의 인성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성이 추구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실패와 좌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출처: http://cowhiterose.net의 임퍼스널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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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케이시의 삶의 철학중 얼(한자로 영혼의 영)로 번역한 것에 대한 회원님의 쪽지에

저도 책에 있는글을 옮긴 것이라 자세히 몰라 한참  공부했습니다.
삶의 철학은  지나.서미나라의  윤회의 비밀이라는 책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혼백의 차이점은 루쓰 몽고메리의 나는 누구 였던가에 있는 내용입니다.
영혼과  혼백
영혼혼백 !

내가 심령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 거의 20년 동안, 나는 soul 과 spirit 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 노력해왔다.  

책이나 세미나를 통해서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지도령들에게 그 차이를 물어 보았는데, 그들이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혼(soul)은 인격이고 자아이며, 개체로서의 사람이다.  
영(spirit)은 우리가 자신의 영적 존재로부터 끌어내는 힘이다.
우리가 자신의 혼이나 자아가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진보 수준보다 높거나 낮은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한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육체를 차지하기로 결정한 혼은 과거의 환생을 통해서 개성과 행동양식을 이미 갖추고 있다.
그 결과 혼은 앞에 놓인 물질적 삶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지 알고 있다

그 때 영이 그 혼에게로 끌리게 되며 그 혼은 영 혹은 신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 혼은 자신의 앞길을 향상시겨 간다.
모든 사람이 가능하면 오직 최상의 만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의 영적 진보 수준에 어울리는 영만 끌어 들이 수 있을 뿐이다.  영은 신의 정수이다.  
비록 신속의 모든 것은 완전하지만 영에서 발산되는 힘은

인간이 첫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부터 완전한 전체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등급의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혼이 창조주와 재결합을 추구하면  영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지도령들은 다음에 이 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약속했다.  
며칠 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은 우리가 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존재이다.   개성과 기억과 유일성이 바로 나다.
그것은 신성의 일부로서 궁극적으로 창조주와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환생한다.
   영은 항상 현존하며 환희에 차 있는 창조주의 정수이다.
우리는 영이라고 불리우는 이 정수를 다양한 곳에서 끌어낸다.  

즉 육체로 환생할 준비가 되면

우리는 무한히 축적되어 있는 영(우주에너지,신)을 끌어내어 나라는 존재에 옷을 입힌다.
이 영적 본질은 우리 내부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며 우리는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그 일부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물질적 삶을 통해서 끌어 당긴 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통해 다른 혼들과도 연결될 수 있다.
영은 신의 정수이며 우리 존재의 고결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영을 대영(over-soul,만물을 생성시킨다고 하는 영) 이라고 부른다.

대령이 우리를 자극해서 세속적 물질을 초월하여 완전함을 갈구하도록 만든다.
예수는  이것을 성령이라고 불렀으며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루쓰 몽고메리의 나는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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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이라는 단어를 대신할 단어는 있는가?

내 안의 나
순수의식
초월의식
그리스도 의식
참자아
지존자
얼나
우주심
영체(靈體)
신(神)
신성(神性)
본성(本性)
불성(佛性)
진아(眞我)
상위 자아
더 높은 자아
확장된 자아
고차원적 자아
지고의 존재
소울
주인공
본래면목
참 나
본성
진짜 나
우주적 지성
대아(大我)
우주적인 나
내적 존재
내면에 거하는 연금술사
하느님의 영
신의 자식
한얼
하느님
성신
'''''''''
정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어찌 문자로 묘사하리요? 영혼을 달리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단지 체험할 수 있을 뿐이거늘.....
ㅡ 정신세계사 자유게시판에서-

http://www.lightearth.net/7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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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스터들이여,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통일된 신광(神光)의 영역으로
기꺼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신의 모든 측면들이 재통합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온 우주로
파급되고 반향을 일으키는 진리의 발표communique,
창조자의 가슴 핵으로부터 나오는 호출이 있습니다.
우리는 1차원에서 5차원으로 불리는 하위 차원들을 파악하는 법을 점차 재평가하고
수정할 것을 청합니다.
유리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5 차원 또한 하늘의 저택, 경이로운 세계 그리고 진화의 나선운동에서
여러분이 장엄한 영토를 향해 전진해 갈 때 이용 가능한 간이역일 뿐입니다.
퇴화(devolution: 역주- 영계에서 물질계로 하강하는 운동, 진화와 반대 방향의 운동)의
과정은 거대한 들숨이 추진력momentum을 얻으면서 이 특별한 우주에서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스토리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내는 상승과 하강의 과정,
창조의 보다 정화된 진실들을 지금은 결합할 때입니다.
우리는 차원 사이에는 견고한 경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차원이란 실제로는 파동의 유형이고,
회전이며, 정화도, 파동형, 진동의 전자기 에너지 레벨들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들은 여러분의 내적 외적 현실에 모두 현존하며 작용하고 있습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의 하위 수준들에서
조잡하거나 밀도 높은 현현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거부하고, 심판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창조의 모든 수준에는 바람직한 파동과 현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고
말은 여러분의 두려움을 완화시킬 것입니다. 이 에너지 유형들을 변질시키고 왜곡되게 한 것은
인류이지 우리 어버이 창조자는 아닙니다. 지구의 몸은 1차원과 2차원 진동을 담고 있고,
그녀가 수 천년 동안 3차원 환경에 붙잡혀 있었다 해도 여러분은 지표에서 아름다운 많은 모습
들을 목격하고 있다
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5차원의 열반Nirvana에 이르기 위해서 3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가능한 한 빨리 4차원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위 차원과 상위 차원,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라는 분리의 상념태를 해결하는 것을
돕기 위해 우리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개념을 전합니다.
3차원, 4차원 또는 5차원으로 세속의 계에서 경험하는 영역을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을 통일되어 있는 차원으로 보기를 권합니다.

이에 대해 신조어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합차원(Uni-dimensions: 단차원)이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여러분이 통합하기를 바라는 이러한 차원들의 모든 긍정적인 측면,
속성, 창조물을 세워놓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자신의 창조물로 이뤄진 볼텍스,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그것은 이 모든 5 가지 차원들의 에너지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고,
이제 정화된 의 상위 진동 에너지가 가능한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 의식으로 들어가면 숫자, 수준, 입문initiation 그리고 지위는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지구 창조의 모든 측면들을 통합하기 위해서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수준/차원부터 창조의 에너지와 유형들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한 측면을 구성하는 일자(一者)인 원창조자의 왕국과 연결되면
그 안에 광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계가 들어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DNA 내에는 모든 12 가지 은하 광선/미덕/속성들의 파동으로 암호화되어 있는
가닥들이 있고, 깜짝 놀랄 정도로 창조자 근원과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빛의 파동을 담고 있는 가닥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빛의 막 속에 묶여 있지만,
여러분과 연결되어 거기에 담겨 있는 선물을 전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ㅡ http://cafe.daum.net/OPT    글쓴이: 불꽃님- 

------------------------------------------------------------------------------------------------------------------------------------------------http://www.lightearth.net/100328 

 

♡ ♤ ♡ ♡ ♡ ♡ ♡ ♡ ♡ ♡ ♤ ♡

        사 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장] 

 

    

 

 

 

내가 천사의 말 한다해도

  
 

James Michael Stevens
Joseph M. Martin

 

 

내가 천사의 말 한다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 없으니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모든 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 영원하네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자랑치 않으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불의 기뻐하지 아니하네
내가 천사의 말 한다해도
내맘에 사랑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 있어도
아무 소용없으니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나 있는 모든것 줄지라도

           나 자신 다 주어도

           아무 소용없네 소용없네

           사랑은 사랑은 영원하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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