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han.co.kr/itnews/it130.html상상초월한 동양 數세계

국내 대표적인 이론물리학자인 고등과학원 김정욱 원장은 초청강연을 다닐 때마다 ‘동양의 십진법’이라는 표를 소개한다. 불교철학에서 발췌한 이 표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일, 십, 백, 천, 만과 같은 숫자뿐 아니라 불가사의, 찰나, 허공 등도 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양의 십진법에서 기준이 되는 수는 서양과 똑같이 일(一). 가장 큰 수는 무량수, 가장 작은 수는 청정으로 각각 무한대, 10의 -21승까지 표현한다. 서양 과학에서 가장 큰 수인 요타(Y)는 10의 24승으로 불교철학의 ‘자’에 해당한다.

물리학자들이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0의 28승㎝로 서양 과학에는 이 수를 표시하는 단위가 없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양(壤)으로 표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正), 재(載), 극(極) 등의 큰 수도 있다.

표에서 항하사(恒河沙)부터는 특정한 수가 아니라 아주 많은 상태를 말한다. 항하사는 ‘갠지스강의 무수한 모래’만큼 많다는 의미로 수학의 숫자로 계산하면 10의 56승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말하는 불가사의는 10의 80승 혹은 10의 120승으로 표기된다. 불가사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들어있는 입자의 수와 비슷하다. 과학자들의 계산 결과 중성자, 양자, 전자는 10의 80승개, 광자는 10의 90승개가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안에 있다. 마지막의 무량수(無量數)는 서양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대’다. 무량수는 불가사의의 억배로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히 큰 수를 말한다.

1이하의 숫자를 나타내는 말도 재미있다. 요즘 유행하는 나노(10의 -9승)는 동양의 십진법으로는 티끌 진(塵)이다. 양자, 중성자의 크기가 10의 -13승㎝로 모호(模湖)에 해당한다.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라는 뜻의 탄지(彈指)는 현대 과학으로 잴 수 있는 가장 작은 수다.

청정(淸淨)은 부처님만이 느낄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김정욱 원장은 “우주의 밀도를 계산하면 10의 -29승g/?거의 빈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수치인데 이를 진공을 재는 단위인 토르(torr)로 환산하면 신기하게도 청정에 해당하는 10의 -21승토르”라고 말했다.

동양의 십진법이 서양보다 큰 이유는 우주의 시작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는 하느님이 우주를 만드셨다. 1654년 제임스 어셔 신부는 성경을 토대로 우주의 시작을 계산한 결과, 기원전 4004년 10월26일에 세계가 생겼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불교, 힌두교에서는 우주가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에서는 우주의 시작을 빅뱅의 순간인 1백40억년 전으로 보고 있다.

김원장은 “몇년전 불교철학을 공부하는 학자에게 이런 사실을 전해듣고 표로 정리해봤다”며 “해외 강연에서도 많이 소개하는데 서양과학자들도 굉장히 신기해한다”고 전했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ejung@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5월 24일 18:5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