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aldiwkzl703/1430
주기에 대하여
도입
[신지학의 대해]에서 졋지 씨는 말하길, “주기의 가르침은 비록 가장 덜 알려져 있으며 자주 언급되지 않았지만, 전체 신지학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H.P.B.도 [씨크릿 독트린]의 세 가지 근본 명제를 제시할 때, “주기의 법칙의 보편성”을 두 번째로 제시했다. 주기의 법칙은 생명의 모든 부문, 즉 인간 이하의 모든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그 이상의 세계들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다고 신지학은 주장한다. 모든 행위들, 생각들 그리고 감정들은 하나의 원이 아니라 그 이전 보다 높거나 낮은 스프링의 코일처럼 되돌아온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오는 인상들이며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은 적당한 조건이 되면 새로운 형태로 언제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모든 사건들의 주기적인 회귀의 법칙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그 예나 적용되는 것들을 인용하기가 어렵지 않다. 아마도 천문학에서 이 법칙의 작용하는 가장 많고 분명한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체들이 항상 순환하는 배열 속에서 사건들의 나선형 형태의 길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라는 거대한 기간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지구는 하루에 한번 돈다. 그러나 다른 말 같은 시간이 되었을 때 태양 주위를 도는 원에서 다른 위치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돈다. 그러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 지점이 움직였다. 왜냐하면 태양 그 자체가 하늘에서 어떤 지점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회귀한다. 현현한 어떤 것도 주기의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과 대자연 속에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는 신지학에 과학이 동의하기 시작했다.
관찰된 주기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날씨의 패턴들 속에서 주기는 수 년간 관심을 끌었으며 기상학의 주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나무의 나이테의 도움으로 우기와 건기의 주기를 관찰하고 기록되고 있다. 미래에 재발할 것을 예측하기 위해서 빙하기와 온난기의 주기를 기록하고 있다. 지역의 날씨 주기들은 수 년간 농부들을 위한 연감의 중심을 차지하였으며 식물들의 성장 주기와 곤충들의 주기적인 폐해도 항상 농업 세계에서는 핵심적인 요인들이었다.
“생명의 미묘한 조수”라는 리더스 다이제스트(1963년4월) 글에서 자연학자 루더포드 플래트는 신지학의 입장과 일치하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진행했던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기록했다. 그가 말하길,
거의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은 외부의 힘들과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행동 주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다양한 연구들을 보면 인간 또한 주기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체온과 혈압이 주기적으로 올랐다가 내려간다. 기분과 에너지가 주기적인 변화를 따른다.
인간과 하위 유기체들의 바이오리듬이 공기중의 전기나 중력장 그리고 기압의 높고 낮음과 같은 힘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많은 연구들이 제시해 준다. 지구상의 이런 힘들은 외부 공간에서 오는 힘들에 영향을 받는다. 즉, 달의 단계,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감마 광선들과 X레이, 우주광선들 그리고 지구의 대기에 퍼붓는 대기권 밖에서 오는 다른 전자기장들과 그 전자기장들의 파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태양 흑점의 주기가 우리들에게 영향을 준다. 이런 모든 혼란들 속에는 일시적인 오르내림이 있고, 넓고 규칙적인 움직임이 있으며, 시간 주기, 일주기 혹은 한달 주기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주기의 리듬이 있다.
비록 과학이 이 분야에서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신지학에서는 대륙의 지형을 바꾸는 홍수나 빙하기 혹은 지각의 격변과 같은 기상의 대혼란은 기간이 엄청나게 길지만 모두 주기적이라고 말한다. 기상의 변화와 11년 주기의 태양의 흑점과 관련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론이 확실하지 않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동적인 영향을 포함하는 많은 다른 요인들을 감안해야 한다고 신지학은 말한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씨크릿 독트린(I,541)]에서 11년 주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렇게 태양의 만반타라 기간 동안 혹은 생명이 있는 동안 태양이 심장인 태양계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액의 규칙적인 순환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 속에서 혈액 순환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심장이 그러듯이 태양도 그것이 돌아오면서 규칙적으로 수축한다. 단지 그것을 몇 초 만에 하는 대신에 태양의 혈액 순환하는 데 10년이 걸리고 폐를 지나서 정맥과 동맥으로 가기 전에 심방과 심실을 지나가는데 1년이 걸린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인 주기를 주목했다. 기록된 역사가 있던 시기부터 지구 상에 문명의 전성기가 주기적으로 출현했다. 이런 시기를 필연적으로 암흑기가 따랐다. 그리고 다른 주기에 또 다른 치장을 하고 전성기가 도래했다.
[아이시스 언베일드]에서 H.P.B.는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진보의 흥망성쇠가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것을 본다. 이 세계의 위대한 왕국들과 제국들은 위대함의 절정에 다다른 다음에 같은 법칙에 의해서 쇠퇴한다. 인류가 다시 강력하게 다시 한번 일어설 때까지 가장 최하위 지점에 도달한다. 그 지점은 주기적으로 상승하는 법칙에 의해서 이전에 내려간 지점보다는 더 높은 지점이다.
신지학에 따르면 이것의 원인은 하나의 문명 속에 같이 일하는 엄청난 사람들 전체가 미래 어떤 시기에 함께 환생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졋지 씨는 [신지학의 대양]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들과 국가들은 특정한 흐름 속에서 규칙적인 순환 기간 동안에 지구로 돌아온다. 그래서 한 때 작업했던 바로 그 사람들과 문명 그리고 예술들을 지구로 다시 가져 온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속에 있는 단위들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줄로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기가 약속된 기간을 다하면 그런 단위들로 구성된 전체가 느리지만 분명하게 다 함께 다른 시대에 새로운 민족과 문명 속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집트 문명과 미국 문명의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고대 로마와 현대 뉴욕이 비슷하다고 지적한 역사학자들이 여러 명 있다.
세부사항까지 들어가지 않고 사업이나 인구, 전염병 혹은 개인들의 병들이 늘어나는 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했다. 개개인의 우울함과 즐거운, 정신적 감정적인 주기들도 주목할만하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사상과 위대한 가르침들 그리고 그런 가르침들을 가져올 사람들의 주기적인 회귀도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아바타들의 주기”라고 불려지며 나중에 언급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기적인 회귀의 원인은 무엇인가?
H.P.B.는 [신지학의 열쇠(p.83)]에서 우주 밖에 있는 신의 생각에 반대한다. “우리는 창조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엄청난 기간을 포괄하는 주기적인 간격으로 우주가 주관적인 세계에서 객관적인 세계로 주기적으로 연속해서 현현하는 것을 믿는다.” 모든 거대한 주기인 현현기간 시초에 작은 주기들의 기조를 제공해주는 어떤 진동율이 정해진다는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주기들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는 졋지의 [신지학의 대양(p.118)]에서 말한다. “거대한 주기를 결정하고 작용하는 힘은 영적인 존재로서 여겨지는 인간의 힘이다.” 그리고 크로스비 씨도 [질문과 대답(p.177)]에서 말한다. “이런 모든 주기들은 이 태양계와 우주의 진화 초기에 있던 존재들의 지성과 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거대한 주기들을 세운 그런 존재들이 때때로 출현하고 회귀하는 것이다. 주기란 이전에 있던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수 백 만년 이상 걸리는 칼파와 유가들이 거대한 주기들이다. 그것들은 인간 진화의 주기들로 “진화”라는 주제에서 세부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런 주기들 중에 하나가 분점들의 세차를 나타내는 25,868년 주기의 항성년(Sidereal year) 주기이다. 분점들의 세차는 하늘의 순환을 끝내는 주기이다. [신지학의 대양(p.121)]에서 졋지는 말하길,
마지막 항성년이 9,868년 전에 끝났다고 말한다. 그 당시 지구 상에서 격렬한 이변들과 국가들의 분할이 있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기간이 끝남으로써 지구를 우주의 새로운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지구 자체의 궤도가 아니라 자체의 궤도를 도는 태양이 실제로 앞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주기들도 같은 법칙을 따르며 큰 그룹이나 작은 그룹 속에서 함께 활동하는 존재들이나 그것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개개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윤회와 카르마는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주기성의 법칙의 두 가지 측면이다. 그리고 주기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카르마의 법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카르마의 법칙이 작용하는 수단들이다. 카르마의 법칙은 충동이나 행동 혹은 생각을 보낸 자에게 다시 되돌아가도록 만드는 힘이다. 모든 생명의 본질적인 하나됨(ONENESS)과 그런 하나됨을 보존하는 카르마의 법칙은 인상들을 반드시 돌아오게 만드는 원인들이다.
주기들이 물리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가?
이 법칙이 우주와 이 세계 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 법칙은 똑같이 우리들의 작은 세계인 인간의 육체 속에서도 작용한다. 1996년 [내셔널 옵저버]는 시간을 재는 자연의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해서 보고했다. “생물학적 시계는 인간의 내적인 기능들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의 거의 모든 형태들 속에 있는 기능들을 조절하는 리듬믹한 주기들을 자극한다. 인간의 낮과 밤, 질병들, 문젯거리들, 혼란의 시기 및 명백한 순간들 모두가 거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 생물학적인 주기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다른 보고서는 말한다.”
생물학적 시계들은 아드레날린 부신을 일깨우면, 부신 분비물들은 심지어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육체로 하여금 그 날 하루의 활동을 준비하도록 만든다. 머리 속에 있는 시계는 심지어 알람 시계가 울리기 몇 분 전에 깨어나도록 만든다. 내면의 시계들은 이른 아침 온도가 낮을 때 사람이 체온이 낮 시간 높을 때처럼 올라가도록 명령을 한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호흡도 점점 더 빨라진다. 그리고 취침 시간이 다가오면 생물학적 시계들은 잠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들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주기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되면 의학적인 치료를 개선시킬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H.P.B.는 [아이시스 언베일드(274)]에서 말한다.
그러나 인류의 어떤 질병들, 성향들, 행운과 불행들이 어떤 때는 더 빈발하는 주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육체적, 도덕적인 일에도 유행의 주기들이 있다. 어떤 한 시기에는 “종교적인 모순의 기운이 인간 성질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장 잔인한 격정을 자극해서 서로 박해하고 피를 흘리며 심지어 전쟁까지 일으킬 것이다. 다른 시기에는 헌정 당국에 저항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전 세계 반 이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신체적인 불안으로서 동시에 급속도로 퍼질 것이다.”
우리들 본성 속에 있는 무엇이 이런 리듬들의 원인인가
수 년간 이런 리듬들의 원인에 대한 추측들이 있었다. 어떤 주기들은 분명히 천문학적 주기들, 즉 달과 관련 있는 주기들 그리고 일일 주기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여전히 신비이며 물질계 뒤에 있는 힘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신비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모든 신체적인 리듬들이 심장의 기본 리듬에 맞추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이상 진전이 없다. 단지 태아의 심장을 인지할 수 있자마자 그리고 혈액이 형성되기 전에 신경들이 심장에 도달하기 오래 전부터 아주 작은 태아의 심장 세포가 박동을 한다는 것을 주목한다. 이것에 대해서 신지학은 어떻게 말하는가? 오컬티즘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을 졋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는 물질계 혹은 정신계 모든 부문에서 작용하는 법칙이 있으며, 파동과 억제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때는 진동으로 다시 나타나고, 그리고 다시 끌어당기거나 밀치거나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고 바탕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식물들 속에서는 수액이 한 방향인 위로 올라가도록 만드는 원인이고 같은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들 혈관 속에는 심장에서 나온 혈액이 있다. 그리고 보낸 길인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작은 밸브들이 있다. 의학계나 해부학계는 혈액이 이런 밸브들을 지나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심장에 의해서 전달된 압력인지 혹은 혈관 속에 있는 혈액이 가볍게 눌러주는 외부에서 온 공기 중 압력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컬티스트들은 이런 경험적인 추론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중심으로 가서 그 충동이 심장으로부터 오고, 모든 신비가들이 말한 교차하는 진동을 가지고 있는 아스트랄 심장 혹은 아카샤로부터 충동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신비가들은 자연에는 수축과 확장의 교차하는 진동이 있다고 말한다.
언제 인상들이 돌아올 지 무엇이 결정하는가?
[주기적인 인상과 회귀 그리고 진화]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주기의 법칙은 우리의 진화를 지배하는 지고의 법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윤회도 주기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고 지고한 법칙이다.” 또한 이 법칙의 한 면은 인상들의 회귀라고 말한다. 어떤 한 나라나 민족의 생각들 혹은 행위들은 인상을 만들게 된다. 상당히 중요한 느낌들이나 싸움들 혹은 사건들은 모두 우리들 속에서 인상을 형성하게 된다. 과거의 위대한 사건들은 우리들에게 인상을 남겼고 그 당시 있었던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주기의 법칙은 그런 인상들이 되돌아오도록 요구한다.
같은 글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그래서 인간 속에서도 그런 인상들이 되돌아오는 조수가 있다. 즉, 일단 어떤 한 가지 일을 하면 그것을 반복할 성향이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을 두 번째 하면 그 영향을 배가 될 것이고 같은 일을 반복할 성향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 인격에서 주기적인 인상들의 일정한 회귀가 나타난다.
이런 인상들은 되돌아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들 일부분이고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이다. 언제 돌아올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기들의 기간이 최초 충동의 강함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조건이 적합할 때, 카르마적인 조정처럼 가장 영향이 클 때, 건설적인 혹은 교정적인 조치가 가장 클 수 있을 때 인상들이 되돌아온다고 가르침은 지적하고 있다.
같은 글에서 졋지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개개인이 어디에 있건 문명 속에 있는 개개인은 자신 속에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파탄잘리가 설명한 가장 유리한 환경들 속에서 들어갈 때, 어떤 도구를 얻었을 때, 과거의 인상을 끌어낼 것이다. 고대인들이 말하길, 개개의 행위는 그 밑에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개개의 생각은 정신적인 인상을 남긴다고 한다. 그리고 도구가 제공될 때, 그 때 새로운 조건이 줄이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 속에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들의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반복해서 되돌아왔을 때 어쩌면 중세를 지나서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마침내 지급 제공된 것과 같은 환경에 온 것으로 그것은 자연적으로(물리적으로) 다른 모든 면에서 우리와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잘 할 수 있게 해 주는 환경이다.
주기들은 시간의 기간만을 나타내는가
그 법칙은 여러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사건들 사이에 시간을 나타내는 것만 보기도 한다. 즉 그런 사건들의 다시 출현하는 규칙성 같은 것. 이것은 어떤 주기들 속에서 진행된 많은 것이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나 잎 혹은 씨앗의 일년 주기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이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더 큰 천문학적인 주기들 속에서 우리는 단지 시간의 표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지학을 연구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주기들이 한 해의 계절과 유사한 기간을 거쳐 간다. 그 주기들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주기들은 유아기, 청년기, 성년기 그리고 노년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진화를 연구하면 각각의 인종은 네 개 계절 혹은 유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거들은 크리타 혹은 사티야(황금시대) 유가, 트라타(은시대), 드바푸라(구리시대) 그리고 칼리(철기시대)이다.
황금시대는 인종이 유아기에 있을 때로 위대한 스승들에 의해서 배우고 안내되는 시기이다. 은시대는 젊은 시기로 대스승들이 뒤로 물러나서 입문한 왕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 시기이다. 구리시대는 성년의 시기로 인종이 위대한 철학자들과 입문의 학파들의 도움으로 스스로 남아 있는 시기이다. 구리시대인 칼리유가는 물질과 분리감, 영적인 진리들에 대한 무지 그리고 악이 우세한 시대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기가 칼리유가이다. 많은 불리한 점들과 어려움들이 있으나 또한 많은 유리한 점들도 가지고 있다.
칼리유가는 모든 유가들 중에서 가장 짧다. 황금시대인 크레타 유가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칼리 유가에서는 모든 것이 더 빠르게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모든 경험들, 카르마 그리고 교훈들이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 그 결과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어떤 다른 시대들보다 이 시대에서 더 많은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혹은 우리들 속에 있는 이기심을 제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네 배의 효과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신지학의 대양]에서는 칼리유가는 크리슈나의 죽음이 있던 기원전 약 3,102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며 총 기간은 432,000년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실망스러운 것이나 이런 시대에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들 내면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있던 영적인 지식을 적용함으로 상승할 수 있다. 집단적으로 다음 황금시대의 씨앗이 될 핵을 재건함으로써 토대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가지 생각: 하나.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인종들은 같은 유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칼리유가 속에 있는 반면 다른 그룹들이나 인종들은 유가의 다른 면 혹은 다른 유가 속에 있다. 네 가지 유가들은 각각 사계절 혹은 낮은 유가들을 가지고 있다. 둘. 상응의 법칙을 사용해서 질병들이나 사업들, 흥미거리들, 종교들, 습관들 그리고 유행들과 인간의 다른 많은 활동들을 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나의 친구여 황금시대는 지나갔다.
단지 선만이 그것을 다시 데려올 힘을 가지고 있다. - 괴테
이런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주기적인 회귀의 법칙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정신과 육체를 수련시키려고 시도할 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 우리는 노력의 패턴을 세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한 번 하면 다시 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하나의 주기를 시작한 것이고 세 번, 네 번째는 인상의 회귀로 더욱 많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를 하면 소회기가 준비하고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음식을 적절하게 흡수한다. 만약 하루 주기 혹은 일주일 주기든 같은 주기로 공부를 하면, 그 주기가 되었을 때 정신이 일할 준비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하게 된다. 규칙적인 주기로 운동을 하면 이전에 했던 것을 세우도록 도와주는 인상들의 주기적인 회귀를 만들게 된다.
그러면 습관들이 있게 된다. 습관들은 우리가 어떤 습관을 만들었던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이런 습관이 우리 본성의 일부분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같은 시간에 반복해서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혹은 행동함으로써 주기의 법칙에 따라 그것들을 만들었다. 그것은 좋든 싫든 우리 도구에 우리가 만들어 넣은 어떤 것이다.
우리들 습관들 중에 많은 것들은 유익한 것이다. 예를 들면 걷는 것, 악기를 치는 것, 운전하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 등등. 심지어 우리 육체의 활동도 수많은 진화의 역사 동안 내재되어 쌓아온 무수히 많은 복잡한 습관들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좋고 필요한 습관들이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졋지 씨는 같은 글에서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이런 습관들이 돌아오는 주기를 확인하는 것이라도 지적한다. 만약 자신감을 잃었을 때 의기소침하는 주기를 가진 다면 혹은 자기 연민이나 없애고자 하는 다른 주기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날과 시간 등을 체크하고 돌아올 때를 잘 경계해야 한다. 일단 주기가 형성되면 준비할 수 있고 그 주기 대신에 반대되는 충동이나 주기를 만들 수 있다. 일단 돌아오는 성향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돌아오는 성향에 직면해서 명랑하게, 자신감 있게 그리고 희망차게 행동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규칙적으로 한다면 오래된 습관을 지울 수 있고 새로운 습관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주기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 중에 하나는 바로 그 때 나가서 어떤 다른 것을 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알고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겨울에 식물을 정원에 심지 않는다. 계절에 따라서 가고 파도를 따라서 항해한다. 종종 친구가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 있을 때 우리의 도움을 이용할 때이고, 절정에 있을 때는 우리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들 대부분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주기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명심해서 그 지식이 우리를 위해 활동하도록 만듦으로써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주기적인 인상과 회귀 그리고 진화]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 하면 어쩌면 다음 100년간 그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래된 어떤 것이 주기들의 선을 따라서 당신 앞에 돌아온 것이다. 무시할 수 있듯이, 그것을 무시하면 같은 기회는 수 백 년 간 돌아오지 않을 거이다. 어쩌면 다음 생까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같은 법칙에 따라서 결국에는 돌아올 것이다.
무엇이 주기의 끝을 표시하는가
한 주기의 끝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오래된 형태들을 청소하는 것을 수반한다. 그리고 주기들은 서로 겹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형태들의 파괴와 새로운 형태들을 동시에 본다. 죽어서 파괴되어 가는 나뭇잎들 속에서 부드러운 가지가 새롭게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위대한 주기의 교차로에 새로운 인종의 개발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래된 인간들의 작업들이 쓸려져 가는 큰 격변들이 있다고 신지학은 주장한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위대한 주기들의 교차로에서는 역동적인 결과들이 일어나며 지구의 극을 바꾸거나 다른 대이변들로 지구의 표면을 바꾸게 된다. 인간은 에너지를 만들고 조장하고 쏟아내는 위대한 발전기이다. 그리고 인종을 구성하는 아주 많은 인간들이 이렇게 에너지를 만들고 배분할 때 분명하고 대이변이라고 하기에 강력한 그런 역동적인 영향인 결과도 생기게 된다.
그 결과들을 지배하는 주요 법칙들은 주기적인 규칙 하에 움직이는 카르마와 윤회의 법칙이다. 인간이 이 법칙들에 따를 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 원자와 물질 덩어리가 인간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상가가 겪는 것에 상응하는 변화들을 나타낸다. 물질계에서 지구의 고체들 위에 있는 기체들과 함께 작용하는 전기적인 액체와 다른 액체들을 통해서 영향이 나오게 된다. 위대한 주기의 변화로 폭발적인 시점에 도달해서 지진, 홍수, 화재 및 빙하 같은 격렬한 대이변을 유발한다.
재앙들은 진화의 필요한 부분인가
오래된 형태를 파괴하는 것은 때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파괴가 대재앙 같을 필요는 없다. 하나의 교훈에서 다른 교훈으로 진화해 감에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형체들은 점점 더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집과 더 나은 도구들로 이사해야 한다. 오래된 형체들은 재활용되고, 물질들과 생명들은 다시 새롭게 더 좋은 도구들 속에서 사용된다. 그 형체들이 종교이건, 제도이건, 문명이건 혹은 인간의 형체이건 오래된 형체들은 바뀌어야 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그것이 파괴가 되는 이유는 이런 형체들을 사용하는 존재들이 변화에 저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변화의 힘들이 폭발하는 시점에 도달해서 대재앙을 겪게 되는 것이다.
자연은 이런 변화를 서서히 진행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린 아기의 형태가 사라지고 어릴 적 형태가 사라지는 등 이런 과정들은 서서히 진행된다. 나중에 극적인 동요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젊은 시절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 생명의 주기적인 성질을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과 변화를 제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어느 정도의 탐욕으로 인해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격렬한 파괴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변화를 거부하는 제도나 기관들을 보았고 한 순간에 쓸모 없게 되었다. 우리는 파괴와 변화라는 “작은 주기”를 시작하게 해서 살아 남게 만든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는 법칙을 사용할 수 있고 혹은 그 법칙에 의해서 사용될 수도 있다.
무엇이 아바타의 주기인가
[씨크릿 독트린]은 위대한 주기가 시작할 때 영원하고 진실한 철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위대한 주기가 끝날 무렵에 우리가 망각해 버린 것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위대한 스승(아바타)들이 환생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주기들은 상호 겹친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런 두 가지 충동이 많은 경우에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본 같은 노력이라고 믿을 수 있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아바타들의 주기는 여러 개 작은 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위대한 주기들을 보면 힌두인들 사이에서 출현한 라마와 크리슈나이고, 이집트인들 사이에 출현한 메네스(Menes)이고, 페르시아인들 사이에 출현한 조로아스터이고, 힌두인들과 다른 동양의 국가들 사이에 출현한 붓다이다. 붓다가 출현한 아바트들 중에 마지막이며 유태인들 사이에 출현한 예수 보다 더 큰 주기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들은 붓다의 가르침들과 같은 것이고 예수를 가르친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으로 채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붓다와 크리슈나를 합쳐놓은 것에 상응하는 또 다른 위대한 아바타 주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크리슈나와 라마는 군대적이며 집단적이며 종교적인 오컬트 계통이고, 반면에 붓다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이며 신비적으로 예수가 따른 계통이다. 모하메드는 어떤 특정한 인종을 위한 작은 중간적인 주기로 집단적이고 군사적이며 종교적인 계통이다.
6세기가 서구 역사에서 가장 암흑시대였다는 것은 상식이다. 피타고라스와 H.P.B.의 2500년 주기의 중간시점이다. 또한 거의 설명하기 불가능한 정신적 영적인 암흑시대인 1000년의 시작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편협과 완고함은 유럽 사람들 정신을 마비시키는 영향을 주어서 안개를 흩어지게 해서 그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결정되었다. 14세기 초에 위대한 초인인 쯔온카파(Tsong-Kha-Pa)가 티벳에 태어났다. 라마교 기록에 의하면 붓다의 가르침이 타락한 결과로 이 존재를 통해서 붓다 자신이 환생했다고 암시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578
제3장 에텔체의 이론
동양의 심리학자들은 서양 심리학자들이 가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강조하여 물리적인 본성 자체는 영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내적인 주관적 에너지가 외적으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는 우주적이고 인간적인 메카니즘 전체를 결과로 간주하며 과학은 그 결과만을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에너지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형상에 스며들어 운동하게 하는 자로, 이른바 에테르와 유사한 어떤 실체를 통해 작용한다. 물질은 가장 거친 형태의 에너지 또는 영혼이며, 영혼은 가장 승화된 상태의 물질이다.
2. 모든 형상에는 이 에테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형상은 에테르 형체 또는 에텔체를 갖고 있다.
3. 작은 원자가 음의 측면과 아울러 양의 원자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모든 에텔체에는 음의 물질 한가운데에 양의 에너지 센터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또한 음적인 육체에 대비되는 양적인 에텔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육체를 활동적으로 활성화시키고 존재 상태를 유지하도록 통일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4. 사람의 에텔체는 심령적 활동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가 흐르는 7 가지 주요 에너지 핵들을 갖고 있다. 이 핵들은 뇌척추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심령적 활동의 기초 또는 혼은 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원리는 머리에 있으며, 이 센터로부터 모든 메카니즘이 지시를 받으며, 다른 6 가지 에너지 센터들은 이를 통해 에너지를 받게 된다.
5. 특정한 센터들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상태에 있으며, 나머지는 정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완성된 사람 안에서는 모든 센터들이 완전히 작용하여 완벽한 심령적 전개와 완벽한 메카니즘을 만들어낸다.
영적 에너지에 대해 동양에서 강조하는 것과 구조 또는 메카니즘에 대해 서양에서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상위 국면과 하위 국면에서 모두 사람의 심령적 본성을 완전히 설명한다.
동양적 생기론적 착상과 서양적 또는 기계론적 착상을 결합시키기 위해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면 에텔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동양적 체계는 난해하고 복잡하며 요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한 소개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래서 다음의 개요를 제시한다. 그것은 불완전하지만, 그 분야의 지적인 개관이 된다면, 아무리 간단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개요를 제시할 때 우리는 “동양의 심리학자가 믿는다” 또는 “동양주의자가 말한다” 또는 유사한 표현을 계속 반복하는 대신에 긍정적인 진술을 할 것이다. 서양적인 사고에는 그것이 실험을 통해서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반증된 것으로 기각되는 하나의 가설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소개와 함께 우리는 동양의 이론을 요약할 것이다.
모든 것의 원천인 보편적인 본체가 있지만, 매우 순화되어 있고, 미세해서 인간 지성이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다.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미묘한 향기, 춤추는 태양빛의 발광, 진홍빛 일몰의 영광조차도 거칠고 현세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빛의 거미줄”이다.
물질성을 암시하는 “본체substance”라는 핵심어는 오류어misnomer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라틴 어원으로 환원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즉 “sub”는 아래이고 “sto”는 서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체는 아래 쪽에 서 있는 것 또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sub-stans(본체)”라는 철자 또는 오철자가 보다 더 직설적이고 시사적이다.
이 보편적인 본체가 미세하고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에서 물질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실과 가능성에 반하는 가설인 보편적인 본체 밖에서 동인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외적인 동인이 보편적인 본체를 압축시키거나 다른 식으로 외부에서 영향을 미친다면, 본체는 이미 알려진 물질보다 더 밀도가 높을 것이다.
생명, 중단 없는 생명은 본체에 내재하며 그의 영속적인 대응물이다. 생명과 본체는 동일한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이지만, 한 실재의 상이한 측면들이다. 생명은 양전기와 같고 본체는 음전기와 같다. 생명은 동적이고 본체는 정적이다. 생명은 활동성이나 영혼이고 본체는 형상 또는 물질이다. 생명은 낳아주신 아버지이고, 본체는 품어주신 어머니이다.
생명과 본체의 이러한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것도 있다. 생명은 이론적 또는 잠재적인 활동성이고 작업장을 필요로 한다. 본체는 이것을 제공하고 생명과 본체가 결합하면 활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그래서 단일한 실재, 즉 보편적인 본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존하는 이원성, 즉 생명과 본체가 있으며, 그와 동시에 공존하는 삼개조, 즉 생명, 본체, 그리고 이른바 의식 또는 혼의 상호작용이 있다.
현현된 세계 전체는 에너지(그리고 공통 인자인 본체와 의식)로부터 나온다. 극히 작은 모래알로부터 별이 빛나는 하늘의 웅대한 회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시인으로부터 부처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모든 것은 에너지의 산물들이다. 물질은 가장 조밀하거나 가장 낮은 형태의 에너지이다. 영혼은 이와 같이 가장 높거나 가장 미세한 형태의 에너지이다. 그래서 물질은 하강하고 하락한 영혼이고 거꾸로 영혼은 상승하고 영광이 더해진 물질이다.
밀도를 취할 때 에너지는 7 가지 단계 또는 계들을 거쳐서 하강한다. 대개의 경우 그 중에서 세 가지를 구현하는데, 사람은 육체, 감정적 메카니즘 그리고 심체mind-body를 갖게 되어 결국 세 가지 국면에서 기능하게 되거나 세 가지 계에서, 즉 물리계, 감정계 그리고 멘탈(mental: 정신)계에서 깨어 있게 된다. 그는 네 번째 이상의 요소, 즉, 혼, 자아Self를 인식하게 되는 경계에 서게 되고 그 이후에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깨어 나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상위 계들에 대해서는 이 기본적인 논의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7 가지 계들과 아울러 각 계에는 7 가지 하위계가 있다. 우리는 가장 낮은 물리계의 7 가지 하위 계만을 논할 것이다.
물리계의 세 가지 하위 계들은 모든 학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로 예를 들면, 얼음, 물 그리고 증기이다. 그에 더하여 네 가지 더 미세한 계들 또는 매우 다른 4 가지의 에테르가 있다. 이들 네 가지는 잘 알려진 세 가지 하위 계와 각각 공존하고 있으며, 거기로 침투한다.
사람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또한 에테르적 대응물, 즉 에텔체를 갖고 있다. 거친 육체가 음인 반면, 이것은 양이다. 에텔체는 응집 인자이며, 생명과 존재 안에서 육체를 유지한다.
사람이건 어떤 물건이건 에테르적 대응물은 보편적인 본체, 보편적인 생명, 그리고 보편적인 에너지의 성질을 띤다. 그것은 이 모든 것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족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보편적인 에너지의 저장소이며, 에테르적 대응물 속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한다. 에너지는 그래서 에테르적 대응물을 통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경우도 참이다. 보편적인 에너지는 그의 에텔체를 통해 작용한다. 그리고 사람이 7 가지 계들에 존재하는 것처럼 에텔체에는 에너지와 7 가지 접촉하는 지점이 있지만, 세 가지 계들만이 활동적이고 네 가지는 휴면 상태인 것처럼 세 가지 에너지 센터들만이 완전히 발전되어 있고 네 가지는 아직 발전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룬다.
서양 과학과 동양 이론을 조화시킬 때, 이 둘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된다.
다름 아닌 아이작 뉴톤 경과 같은 과학자는 의심 없이 에테르라는 보편적인 매질을 받아들인다. 프린키피아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모든 탁한 체들 속에 가득 차 있고 숨어 있는 대단히 미세한 어떤 활기에 관련된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활기의 힘과 활동에 의해 체의 입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견인하고 연속적이라면 뭉친다. 그리고 이웃하는 전기체들은 이웃하는 미립자들을 견인하는 것만큼 잘 반발하며 먼 거리 사이에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빛이 방출되고, 반사되고, 굴절되며 굴곡이 생기면서, 체들을 타격한다. 그러면 온통 동요가 일어나고 동물적 몸의 구성 부분들이 의지의 명령, 이 활기의 파동에 의해 외부적인 감각 기관으로부터 뇌에까지, 그리고 뇌로부터 근육으로 신경의 견고한 통로를 따라 상호 유도되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들은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전기적이고 융통성있는 생기의 작용 법칙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입증하는 데에 요구되는 충분한 실험을 우리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에드윈 어서 버트 박사, 현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 275.
위의 인용으로부터 뉴톤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형상을 밑받침하는 에텔체의 진상을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뉴톤이 현 세기 이전에 살았기 때문에 최근 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1926)으로 눈을 돌려 보자. 다음 설명은 “에테르”라는 제목 아래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공간이 단지 기하학적 추상물인지 또는 연구될 수 있는 명확한 물리적인 속성을 갖는 지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논의되어 왔다. 물질에 의해 점유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본체는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어떤 의심도 없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물질이 부재한 공간에서 매개하는 부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리적인 속성도 갖고 있으며,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셈이다.
“이 물리적인 속성들은 감각에 직접 미치지 않고, 그래서 좀 모호하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현재 의문이 없다. 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물리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공간이 기하학적 추상물 이상의 그 무엇이고 실제적인 현실처럼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오래 전에 에테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은 아이작 뉴톤에 의해 채택되었고, 현재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테르라는 용어는 모든 공간에 차 있고, 어디에서나 어떤 분열이나 공백이 없는 진정한 일체이고, 편재하는 물리적인 실재를 뜻하며, 물질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구성한다는 인식이 증가해 가는 추세이다. 물질 자체는 이로부터 변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에테르는 물질 조각과 조각들 사이에서 이른바 중력을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고 아무리 작고,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물질 조각들 사이에서 방사되는 파동을 전달하는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에테르의 속성은 물질로 표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좋은 단서가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말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물질이라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물체처럼 이름이 붙여져야 하고, 탄성과 밀도로 표시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실제로 표현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는 것처럼 원자 물질이 에테르 속에 있는 어떤 구조라면 에테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알려진 물질적 본체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물질은 본체를 이루는 매질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섬세한 구조이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제 13판: 에테르 항목
이 견해는 다른 과학자들이 부연하고 있다.
17 세기의 저작에서 버트 박사가 인용한 캠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 헨리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가 철학자에게 영적인 본체가 자연에 존재하는지 묻는 것이 필요할까? 이 본체가 몸의 모든 기질, 또는 적어도 동작, 모습, 장기의 위치와 같이 몸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한편...이 본체가 몸을 제거하고 중단시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 관련되는 것은 무엇이건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작은 부분을 결합시키고, 나누고, 흩어놓고, 묶고 형성시킬 수 있고, 형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배치된 것을 회전시키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움직이고 그 회전 운동을 저지하고, 원리에 따라 빛, 색, 그리고 다른 감각 대상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추가할 수 있다... 영적인 본체는 마지막으로 끈도 없고, 갈고리도 없고, 영사기나 다른 도구도 없지만 다만 자신을 적응시켜, 물질을 결합시키고, 나누며, 추진시키며, 동시에 조절을 유지하는 신기한 응집력과 분산력을 갖는다. 그것이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을 분쇄하여 그 자신을 다시 확장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무어를 논하면서 버트 박사는 계속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는 인간 안에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결론으로부터 모든 자연 안에 이와 유사하고 더 거대한 영적인 본체가 있다는 가정으로 자신의 추론을 확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의 사실들은 인간보다 더 간단한 기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에드윈 어서 버트, 현대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들, pp. 131-132.
또한 17 세기 저작에서도 로버트 보일은 동일한 가정을 제시하면서, 에테르의 두 가지 기능을 연속적인 충격에 의해 운동을 전파시키고 자아와 같은 신비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매질이라고 생각했다. 보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 그러한 본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현상들을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몇 가지 실험에서 매우 미세하고, 확산되지 않는 에테르적 본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에 대한 설명에 대해 여러 가지 정확한 답이 내려져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해 살펴 보지는 않겠다.” 상동, pp. 182, 183.
현대로 다시 돌아와, 윌리엄 버겟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주는 동물과 식물의 전 영역을 차지하는 조직화된 활기의 세계, 즉 지성과 물질 세계 사이의 연결 고리인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적인 현상의 집합으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사의하지만, 물질의 분자 간 운동은 물리적인 것과는 다른, 매질의 성질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생명 없는 물질 운동을 통제하는 일반 법칙을 대체하고, 간섭할 수 없는 법칙에 기원하지 않는 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동일한 원리에서 힘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윌리엄 버렛 경, 보이지 않는 것의 입구에서, p. 274.
동양의 가르침은 생기체를 육체와 지성체 사이의 매개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태양계에서 인간의 마음과 우주심의 매개자로 작용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윌리엄 버렛이 말한 “물리적, 생기적 그리고 지성적”인 세 가지 항목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있다
올리버 롯지 경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소통에 대한 견해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순수과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이 시대의 전선에 서 있다. 그는 말한다.
“원자를 결합시키는 에테르, 즉 몸의 특징적인 구성에 본질적인 결합 에테르는 어떠한가, 어떤 것이 물질 자체만큼 근본적인가?
“우리는 대개 몸의 에테르 측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을 갖고 있지 못하며, 물질을 직접적으로 파악한다. 어린 시절에는 물질만을 파악한다고 해도, 성장하면서 에테르를 추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파악하기도 한다. 우리는 특징적인 외형이나 어떤 외형적인 몸도 응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즉 에테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테르는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비물질화된 부분, 즉 변형이 일어나는 부분이며, 잠재적인 에너지의 그릇, 물질 원자들이 들어 있는 본체이다. 물질로 구성되는 몸이 있을뿐만 아니라, 에테르로 구성되는 몸도 있다. 둘은 공존하고 있다.” 올리버 로저 경, 에테르와 현실, pp. 161.162.
그는 히버트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다시 동일한 주제를 거론하고 있으며, 매우 재미있고 시사적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빛은 에테르가 미치는 영향의 일종이다. 빛이 에테르와 맺는 관계는 소리가 물질과 맺는 관계와 같다... 모든 시공의 법칙에 따르고, 주로 지상의 에너지 근원인 에너지 법칙에 완전히 지배되며, 물리적 힘이 현현되는 것을 모두 다스리고, 탄성과 견인 등 모든 물질의 속성의 근간을 이루면서 물리학의 계획표 안에 에테르는 적합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정된 에테르의 전위들이 우주적 건설재라고 입증될 가능성이 있다... 무차별적인 에테르는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그리고 온 공간을 채우는 일체이다. 이원성은 물리학의 도식인 물질과 에테르를 통해서 나타난다.
“모든 동역학 에너지는 원자든 육체적 형태든 이른바 물질에 속해 있다. 운동이나 이동은 그것의 특징이다. 모든 정적인 에너지는 에테르, 수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에테르에 속한다. 에너지는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즉 에테르에서 물질로 또는 그 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제, 모든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은 물질적인 대응물과 에테르적인 대응물을 모두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전자만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지만, 후자는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다른 측면을 파악하는 어려움, 간접적인 추론의 필요성은 우리에게 물질을 알려 주고 에테르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 감각 기관의 본성에 본질적이고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만큼 생생하고 실제적이며 공존과 상호 작용은 본질적으로 결합하는 그들의 성질이다. 모든 곳에 그리고 언제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에테르 없는 지역은 없다 하더라도 많은 지역에는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가능성과 실재성은 모든 곳에 퍼져 있으며, 현세적인 경험 전체를 완전하게 구성한다.”
보충설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테르는 사물의 물리적인 틀에 속하며, 그것이 심령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물질이 그런 것처럼 심령적 목적을 보조할 것이다. 테이트 교수와 밸포어 스튜어트 교수는 1875년 이전까지 공간의 에테르에 대한 심령적 의미를 추측했고, 보이지 않는 우주라는 책에서 비판된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그리고 위대한 수리 물리학자 제임스 크러크 맥스웰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제 9판 “에테르” 항 결론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이고 보편적인 연결 매질이 실제로 존재하며 확실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신뢰를 표명하였다.” 올리버 롯지 경, 에테르, 물질 그리고 혼, 히버트 저널, 1919년 1월.
펜실배니어 대학의 내분비학 교수인 사져스 박사는 이 보편적인 매질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언했다.
“에테르와 같은 본래의 지성적이고 협동적이며 창조적인 매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분명해 보인다...
“과학자들이 해석하는 에테르는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과학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매체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물질에 스며들어 있으며, 파의 움직임에 의해 우주에 제한 없이 모든 공간에 퍼져 있다. 그것은 실제로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항성에서 오는 빛의 방사 에너지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선’파, 무선 전파, 베크렐 광선, 엑스 또는 뢴트겐선 등을 전달하는 매체이이다.
“에테르는 우주와 지상에서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에테르는 협동과 지성으로 물질을 만드는 것처럼 우주의 에테르는 태양계를 만들고, 그것이 형성하는 모든 화학적 원소들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제공한다...” E. de M 샤스 사져스. 의학박사, ScD. LLD, 과학에 의해 제시된 종교의 힘, pp. 152, 153.
옥스퍼드 대학의 조아드 박사는 물질을 활기있게 하는 이 생기력, 즉 ‘생명력’의 활동을 우리에게 그려 주며 생명과 형상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그는 진정 에테르의 대응물과 그를 통해 작용하는, 동양적 에너지 이론에 근접해 있다.
“생명력. 우선 우주가 순전히 물질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에너지나 목적이 없고 생명이 없는 혼돈, 죽음, 그리고 공허였다. 어떤 단계에서 이 무기적인 우주로, 그리고 어떤 설명되지 않는 근원으로부터 생명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나는 물질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생명을 통해 의도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이고 뒤뚱거리고 순전히 본능적인 충동이나 기분으로 더 높은 의식을 얻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한다. 우리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의식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생명력의 궁극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는 생명과 에너지가 온 우주에 스며듦게 함으로써 보장될 수 있고 이것은 ‘물질’ 세계로서 시작한 것이 ‘마음’이나 ‘영혼’의 세계로서 완성되게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에너지와 생명의 원리가 물질에 주입되고 스며들면서 물질 속에서 그리고 물질을 통해서 일한다. 우리는 그렇게 주입된 물질에 살아 있는 유기체의 이름을 부여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그 목적이 성취되면,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생명력이 창조한 도구 또는 무기의 빛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주 그 자체처럼 살아 있는 각각의 유기체는 전선이 전류를 담을 수 있는 것과 흡사하게 생명에 의해 활기를 받은 물질의 토대를 형성한다.
“생명력은 전능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정복하려는 물질에 의해 제한되고, 그 방법은 실험적이며, 그에 의해 창조된 유기체로 구성된 사람들 속에서 그것이 도달하는 진화 단계에 따라 변화한다. 다른 형태의 존재들은 다른 단계들에서 그 목적에 가장 잘 봉사한다.” C. E. M. 조아드 박사, 마음과 물질, pp. 178, 179.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가장 폭넓게 읽히고 인기있는 작가인 윌 듀런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이 기본적이라는 생각을 점점 덜 하게 되고, 육신이 생명과 마음의 외부적 징표인 것처럼 단지 에너지가 외화된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형상과 힘을 주는 물질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자발성과 생명을 갖는 비물질적인 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미세하고 숨겨져 있지만, 항상 드러나는 생명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의 궁극적 정수이다... 생명은 우선하며 내적이다. 물질은 논리상, 그리고 의미 상 시간적으로 그와 동시적이고, 공간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본성 상 그것에 이차적이다. 물질은 생명의 형상이고 그의 가시적 성질이다...
“생명은 형상의 기능이 아니고, 형상이 생명의 산물이다. 물질의 무게와 굳기는 원자 내적 에너지의 결과이고 표현이며 몸 안의 모든 근육이나 세포는 주조된 욕망의 도구이다.” 윌 듀런트, 철학의 저택. pp. 66, 67, 80, 81.
이 책들과 과학자들은 에너지 또는 생명의 생기체의 매질인 에텔체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이 신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의 모호한 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서양 연구가들에 의해 자연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견해를 요약하면서 이들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몸 뒤에는 에테르 물질로 구성된 주관적인 형태가 있으며, 이는 에너지, 또는 프라나의 생명 원리의 행위자로 작용한다. 이 생명 원리는 혼의 에너지 측면이며, 에텔체를 통해 혼은 형상에 활기를 부여하고, 특이한 성격과 속성을 부여하고 욕망들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마음의 활동을 통해 그것을 지휘한다. 머리를 통해 혼은 몸을 의식적인 활동으로 동력화하고 심장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생명이 퍼지게 한다.
이 이론은 서양의 물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현재로써는 활력론(animism: 정령론)이라는 용어로 충분하지만, 인간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발전들 때문에 “물력론(dynamism)”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 완전히 의식적인 존재가 된 사람과 통합되어 작용하는 개성에게, 의식적인 목적과 지도하는 의지를 처음으로 증명하는 때가 되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언급된 물리적, 감각적, 정신적인 인간 본성의 세 가지 상태들은 인류사에서 비로소 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휘하는 자아는 조절할 수 있으며, 마음을 통해 생기체 또는 에텔체에 작용하고, 뇌에서 그 접촉점을 갖으면서 그 도구를 완전히 조절하여 표현하고 이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키설링이 “심오한 존재”라고 부른 것이 출현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문제는 심오한 존재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우리가 인간의 능력과 대조되는 특성으로 그의 존재성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생생한 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가 결정한다고 말하는 경우, 그 모든 언설들에 개별적인 생명이 침투해 있다는 것, 모든 개개의 표현은 개성을 발산한다는 것, 그리고 이 개성은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러한 통찰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혼을 지닌 존재로써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의식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감각 연관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덕택에 가능하다.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즐겁게 여기는 곳은 어느 것이나 중시할 수 있다. 그래서 중시하는 ‘위치’에 따라서 심령적인 유기체는 그 센터를 실제로 변화시켜서 새로운 존재의 센터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센터가 존재 안에 놓이는지 표면에 놓이는지는 의식의 센터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적인 연구가 보여 준다면, 필요한 변화 과정을 유도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 존재를 향상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성에만 지속적으로 강조를 두고 실제로 자신의 내적 존재와 일치할 것만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분명 이 과제는 어려운 것이다. 그 해법은 매우 느린 과정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훈련 기법을 필요로 한다.” 허먼 키설링, 백작, 창조적인 이해, pp. 180, 181.
메카니즘, 생명과 목적, 의지의 종합으로써 인간이 혼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서양과 동양의 심리학자들이 연합해서 분비샘과 생기체, 그리고 에너지 센터들과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이해한다면 크게 촉진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와 관련해서 호킹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건전한 정신 건강법의 도움으로 보다 나은 인류의 구체적인 미래를 바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돌팔이 의사의 시대가 지나간 뒤에 그리고 어느 정도 그들의 도움으로 요가와 같은 수련의 영적인 의미가 서양 심리학의 건전한 요소들과 온전한 윤리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자아 완성의 가능성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것이 없이는 가치가 많지 않을 것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 75.
에너지 센터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는 혼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진 혼 의식의 위치에 대한 증언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3장 에텔체의 이론 |작성자 피노코
2 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분비선에 대한 연구는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문헌들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면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어떤 분비선의 분비물의 효과와 내밀한 본질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많으며, 미스테리가 장막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정한 분비선에서 분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일반적인 논의에서도 갑상선과 갑상선 추출물의 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지만, 대부분의 분비선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일부만이 추출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학이나 강단의 심리학에 과학적으로 훈련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성적인 사람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두툼한 사전으로 무장하여 분비선과 그 분비물, 그리고 그 효과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유용한 자료를 부지런히 수집하고 그 분야를 조사한 뒤에는 이를 보고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러한 연구가 중요한 탐구 분야에 대한 잘 된 요약을 제공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인 문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감명과 아울러 특별히 과학적인 자료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참신한 정신이 모든 분야에 더 좋은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훈련받은 전문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연구되고 보고된 바대로 심리학의 일반 주제에 대해 동양에서 지니고 있는 전래되는 믿음과 오래된 확신에서 표현되었다면, 특별히 그럴 것이다.
분비계를 연구할 때, 그것이 몸의 성장, 머리카락, 심장, 혈액, 그리고 생식기들과 맺는 관계와 같이 일반적인 생리학적 용어로 그 효과를 설명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세기에 출판된 의학 서적에서도 수집될 수 있다. 오히려 내 의도는 선진적이고 현대적인 탐구자들,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분비선의 연구로부터 추리할 수 있고,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신기한 내적인 분비물이 사람의 행동, 감정 그리고 정신성, 간단히 말해 사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비선을 연구할 때, 나는 이용할 수 있는 책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용할 것이다. 이것은 권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제시된 견해를 보다 참신하고 생생하게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고 문헌의 일부는 이 책의 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책들과 훈련된 연구자들은 일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갑상선의 분비는 “삼 요드 삼 수소 엑시진돌 프로피오닉 산! (triiodotrihydroexygindolepropionic acid)”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가능한한 나는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피할 것이다.
분비선을 살펴 보기 전에 “심리학”으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심리학이 심령 또는 혼의 논리(logos) 또는 법칙(law)이라는 본래적인 의미를 포기해버렸다. 리어리 박사가 제시한 최근의 정의는 이렇다.
“포괄적 의미로 행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인간 행동의 과학이란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 즉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동은 전체적이고 통합된 개성의 행동을 뜻한다.
“심리학은 유기체를 전체로 다룬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물리적이고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즉 개성으로, 복합적인 외부 환경 속에서 다른 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통합성과 적응성을 지닌 개인으로 다룬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은... 생리적 사실과 결과, 결국 생물학의 영역으로, 그리고 생화학, 일반 화학으로 귀결되고 필연적으로 운동하는 물질의 과학인 물리학으로 귀결하게 된다.” 대니얼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p. 10, 14, 18.
그러므로 심리학은 인간을 환경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다루는 인간 행동의 과학이며, 사람과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의 과학이다. 그것은 인간 행동의 과학이지만, 선악의 행위로 구성되는 윤리적 의미에서 그러하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행동, 즉 개성의 과학이다. 그러나 이 행동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호킹은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참으로 행동의 체계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희망에서 나오는 목적 지향적 행동의 체계이다. 자아의 핵은 희망이다.” Wm. E, 호킹, 몸과 자유, p.46.
삶은 더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이 희망은 진정 지속적인 희망이지만,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호킹은 목적 지향적인 행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행동과 개성이라는 영역에는 세 가지 주요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는 환경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사실, 또는 사실들의 모음, 또는 드라마가 연기되는 단순한 수동적인 무대 이상이다. “문화적이든, 사회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모두가 다양한 사실로 나타나거나 기록되는 유기체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적 장치, 특히 이제 우리가 더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반응 장치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환경과 특정한 반응 장치, 일련의 행동을 제공하며 불가피하다고 주장되는 환경과 반응 장치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관계의 행위 또는 결과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인간 행동이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히 두 번째 주 요소, 즉 반응 장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서 메카니즘의 특정한 측면들, 즉 신경계와 내분비선ductless glands은 다른 것들보다는 더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이 두 체계는 인간의 몸에서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환경, 외부 세계에 접촉하는 것은 신경계로, 인간 체구조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놀라운 부분이다. 이 계를 통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것을 인식하게 되고 신경망과 척수와 뇌를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는 정보를 인식하게 된다. 여러 가지 메시지들은 수 백만 개의 신경 전달 통로를 따라 뇌의 중앙 발전소로 전달되어 신기한 방식으로 정보로 전환된다. 정보에 대한 역 반응이 일어나게 되고 인간은 전기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신경 에너지의 나타남과 함께 내분비계(그리고 근육계)에서 이와 유사한 활동이 일어나며 활동의 연결이 긴밀해서 내분비선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면, 전달되는 정보에 대한 적절한 반응과 한 형태의 에너지에서 다른 형태로의 에너지 변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체 반응 장치와 그 경우의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유기체는 수용체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주변의 에너지를 근육과 분비선의 작용에 따라 송출되는 에너지로 전환하는 변형 장치이다. 이와 동시에 이 장치도 이 과정에 의해 변형되며, 자극, 즉 유기체가 완전히 작용하거나 행동할 때 이 두 가지의 자극과 에너지가 결합되어 출력 신호를 내부에서 일으킨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 심리학: 정상과 비정상. p. 33.
신경계와 근조직은 대개 물리적인 반응 장치, 또는 환경에 대한 물리적인 반응이 이루어지는 수단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지만, 신경계와 내분비선을 지성적이고 감정적인 반응 장치, 실제적인 반응을 형성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장치와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후자의 상호 작용은 행위와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감정과 사고 활동은 내분비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사람의 본성도 그런 식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리어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결국 현재의 이론이 보다 정확하고 더 근거가 확실한 지식으로 대체되면, 우리는 내분비선 안에서 또는 그와 관련되는 위치를 발견할 것이다.” 상동., p. 189.
루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상태와 되고자 한 상태는 정상적인 내분비선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아닌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믿음에 우리는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H. H. 루빈, 우리의 신기한 분비선들, p. 10.
그리고 리어리 박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본능보다는 “수용체와 민무늬근와 내분비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니엘 B. 리어리, 현대심리학: 정상과 이상. p.61.
콥 박사도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체 구조를 결정하는 분비선의 작용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개체individual의 정신적 외관, 즉 ‘행동 복합behavior complexes’은 물질적인 행복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적인 행복은 틀림없이 다양한 분비선의 분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상호작용에 따르는 것이다...
“비록 이 주제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 해도 내분비선의 특별한 배치에 의해 몸에서 특정한 형태가 만들어지고 동일한 곳에서 그 결과를 마음이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I. G. 콥, 운명의 분비선, pp. 3,6.
최근 강의에서 J. S. 헉슬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공을 이루는 데에 순수한 지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질은 주로 갑상선, 뇌하수체, 등등 다양한 내분비선들의 균형이다. 미래의 응용 심리학은 성격을 수정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상동., pp. 11, 12.
이 성격의 문제에 대해 호킹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갑상선이나 내장에 있는 분비선들, 또는 부신과 같은 내분비선들이 성질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선들 중에서 어떤 것을 자극하거나 그 산물을 주입하거나 그와 함께 복용하면 한때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변화들이 일어날 것이다. 티록신을 조절함으로써 크레틴병(갑상선 호르몬의 결핍에 의한 것으로 소인증과 정신박약 증상을 보인다.: 역주)이 정상처럼 될 것이다. 복용을 멈추면 원래의 조건으로 되돌아 간다. 이 복용을 늘려도, 불행히 그 누구도 정상에서 천재로 향상되지는 못한다. 다만 또 다른 비정상 형태가 만들어질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화학적인 발견도 인간의 정상성을 증가시키는 밝은 희망들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개인을 천재로 생각하게 하는 약들도 있지만, 복용 결과가 동일한 영향을 준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발견에 관해 미래 인류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혼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진짜 의미가 있고, ‘요오드 결핍은 현명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 것’이다.” W. E. 호킹, 몸과 자유, pp. 58.59.
그러므로 내분비선과 육체 구조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미치는 효과를 고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분비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특별히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무엇인가? 콥 박사는 말한다.
분비선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배설계drainage system와 관련되는 분비선과 림프선과 육체 작용에 이용되는 산물을 분비하는 것과 관련되는 분비선이다. 림프선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두 번째 집단은 서로 조율되어 작용하면서 몸의 과정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유체들을 분비하는 것이 임무이고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분비선들은 내용물을 분비하는 관을 갖는다. 두 번째는 관이 없고 그 분비가 혈액의 흐름으로 직접 흡수된다. 이들은 무관 분비선(ductless glands) 또는 ‘내분비 기관’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산물을 내분비물이라고 부른다. ‘내분비학’이라는 용어는 내분비선의 연구와 관련된다.” W. E. 호킹, 자아, 몸 그리고 자유, pp. 58, 59.
루빈 박사는 말한다.
“내분비”라는 단어는 “분리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크리네인(krinein)"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무관 분비선들 또는 분비 기관들은 ‘내분비선’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이들의 분비물은 직접 혈액으로 영양 림프의 흐름으로, 즉 몸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자아에게 필요한 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비들은 심리학에서 알려진 몇 가지 경이적인 반응을 자극하는 ‘호르몬’ 또는 유기체의 화학 전달 물질이 포함된다. 사실 호르몬이 심리학에 대한 관계는 라듐이 화학에 대한 관계와 같다.” H. H. 루빈 의학박사, 신기한 분비선들, pp. 8, 9.
이 내분비계는 고도의 협동과 상호의존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적인 단위를 형성한다. 버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기질은 완전히 협동적이다. 내분비의 분비선들이 이 협동을 지휘하는 자이다... 육체 배후에 그리고 마음 배후에는 이러한 지휘자들의 위원회가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 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p. 96, 97.
사실 모든 분비선들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활동을 연계시키고 있으며 통일된 효과에 의해 사람은 현재 상태가 된다.
사실 그들은 인체의 메카니즘 속에서 다른 계와 분명히 구분되는 기능과 유기체들과 밀접히 연결되는 체계를 형성한다. 혈액계와 신경계는 고유한 활동을 하지만, 내분비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혈액은 신기하게도 다른 분비선들이 분비하는 특별한 호르몬을 전달하는 작용을 하며, 신경계는 내분비선의 정상 또는 비정상 기능을 일으키기 쉬운 심령적인 발전과 특별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내분비계에 대한 이러한 논의로부터 우리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럼 무관의 분비선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특별히 중요한 7 개의 분비선들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름 위치 분비물
1
송과선 머리 알려지지 않음
2
뇌하수체 전엽/후엽 머리 알려지지 않음
3
갑상선 목 티록신
4
흉선 흉곽 상부 알려지지 않음
5
췌장 태양총 인슐린
6
부신 피질/수질 신장 뒤 부분 알려지지 않음/아드레날린
7
생식선 하복부 정소와 난소
이처럼 머리와 몸에는 중요한 분비선들의 망상조직이 분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생리학적으로 몸의 구조, 성장 그리고 화학적인 변화를 다스리고,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반응과 사고 과정을 담당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선행과 악행, 행동의 성질, 그리고 성격을 만드는 자일 것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분비선을 고려하여, 우리는 정신적 심리적 효과에 제한하여 설명할 것이다.
1. 송과선-위치, 머리-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송과선은 고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가 완두콩 만하고 코뿌리 뒤에 위치한 뇌하수체 배후 상단에 있는 뇌 중앙의 작은 공간 안에 들어 있다. 송과선은 뇌의 제 삼 뇌실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눈의 망막 색소와 유사한 색소가 있고 이른바 “뇌사립brain sand particles”의 모음이 들어 있다. 틸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송과체는 어떤 기능을 하는지 확인해 보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생명에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대사 활동의 특별한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아마 이 기관이 사람과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기능이 내분비물에 의해 특별히 결정될 수는 있지만, 생명에 불가결하지는 않는 것이 확실한 분비물일 것이다. 송과선 분비물의 정확한 영향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레더릭 틸니 의학박사, 송과선, pp. 573, 542.
이 분비선은 빛에 대한 민감성을 조절하고 성적 특징에 영향을 미치며, 뇌 성장과 관계 있으며, 이하에서 논의되는 역사적 경우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그 활동적인 기능은 사람을 지적인 면에서 조숙하게 만든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 분비선은 또한 제 삼의 눈, 그리고 시클로프의 눈the eye of the Cyclops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실 또는 추측을 넘어서 연구자들은 솔직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여러 가지 실험들도 정보를 별로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이들과 장애인들에게 송과선 추출물을 복용시키는 실험에서 실험자가 15 세 이상일 때에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경우에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와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몇 십년 전까지 송과선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버먼 박사는 통증과 두통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한 어린 아이가 독일로 보내졌던 경우에 주목했다. 그는 5살 정도의 나이에 매우 조숙해 있었고, 이미 사춘기에 이르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이상할 정도로 명랑했으며,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집단 의식적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에만 행복해 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 그의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한 달 이내에 죽었다. 부검에서 송과선 종양으로 나타났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89.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역사적인 사례는 동양 철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할 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은 저서에서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고 주장했으며, 데까르트는 “사람 안에서 혼과 몸은 단일한 점에서만, 즉 머리에 있는 송과선에서만 서로 접촉하고 있다”는 말을 빈번하게 했다.
송과선이 혼의 자리라는 고대의 믿음에서, 그리고 아동기의 특징적인 분비선이며 이후 위축되는 분명한 사실에서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은 신에 대한 믿음과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왕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고, “너희가 어린 아이들처럼 되지 않고는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워즈워드의 “아동기의 회상으로부터 불멸성을 암시하는 송시”도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우리의 태어남은 꿈일 뿐이고 망각일 뿐이다.
혼은 우리와 함께 떠오르는 삶의 별,
다른 곳에 그 자리를 두고 있고
저 멀리서 왔네
완전한 망각 속에 있지도
벌거벗고 있지도 않지만,
영광의 구름을 걸어가고 있네
그곳은 우리의 고향인 신으로부터 우리가 오는 곳
하늘은 유년기에 우리 주변에 놓여 있다네!
교도소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네
소년으로 커가면서,
하지만 그는 빛을 바라보고 그것이 흐르는 곳에서
즐거움 속에서 그것을 안다네.
낮에는 동쪽에서 멀리 떨어져 젊은이는
여행해야 하지만, 그는 자연의 성직자,
빛나는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네
마침내 그는 죽음을 감지하고
일상의 빛으로 흐려진다네.”
동양의 철학은 송과선과 혼과의 이러한 관련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확인한다.
2. 뇌하수체-위치 머리-전엽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후엽의 분비물 피투이트린pituitrin
지난 세기(19세기)의 80년대까지 수 세기 동안 뇌하수체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외분비 기관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것은 한곳에 위치한 두 가지 분비선이라 해도 옳을 것이다. 이것은 콩만한 크기로 코 뿌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뇌의 기부에 놓여 있다.
이 분비선은 “자연의 소중한 보물”이라고 불려 왔고, “두개골 속의 두개골”처럼 빈 공간 속에 들어 있다. 대부분의 분비선이 그런 것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수면과 성 주기와 같은 주기적인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노력, 즉 에너지 소비의 분비선이며 생명에 본질적이다. 뇌세포를 자극하며, “개성과 직접적이고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또한 뇌하수체가 불충분하게 발전하면 분명히 도덕적, 지성적인 열세, 그리고 자아 통제력의 부족이 나타나거나 적어도 이러한 현상을 동반하지만, 뇌하수체가 잘 발전되면, 정신적 활동과 인내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적 정신적 성격과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뇌하수체는 진정 한 기관 안에 있는 두 가지 분비선이다. 뇌하수체 후엽의 분비물은 피투이트린이다.
“뇌하수체 후엽은 모성적-성적 본능과 그 승화,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본능을 다스린다... 온화한 감정들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지성화된 자아 보호적인 감상주의와 반대로) 모든 기본적인 정서 때문에 다정다감, 동정 그리고 최면 암시에 잘 걸리는 성향이 이 기능들과 연결되어 있다.”
뇌하수체 전엽의 분비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뇌하수체 전엽은 지성의 분비선이라고 설명되어 왔다... 지성에 의해 마음의 능력을, 개념과 추상적 사고에 의해 환경을 통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78.
버먼 박사는 또한 “정신적 활동은 지성적으로는 뇌하수체 전엽의 기능 증가를, 감정적으로는 뇌하수체 후엽의 기능 증가를 동반한다.” 상동, p. 236.
이러한 연구로부터 모든 동물들이 공유하는 모성적인 본능, 동료들에 대한 사랑, 또는 신의 사랑 등 어떤 것을 의미하든 개성의 자질인 감정은 대개 지성화시키는 능력이기도 한 뇌하수체의 조건에 크게 의존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면, 동양의 지혜를 배우는 학도는 이 모든 추측이 상대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3. 갑상선-위치, 목- 분비물, 티록신
갑상선에 대해서는 송과선 또는 뇌하수체보다 더 많이 밝혀져 있으며, 동양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 분비선은 기관 위쪽에 있는 후두 근처의 목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큰 분비선이다. 그것은 한때 성선(sex gland)이었으며, “제 삼의 난소”라고 불리기도 했고 언제나 난소낭(ovarian cases)과 관련되어 있다. 척추 하부에서 성기의 관들ducts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관련성이 상실되고, 성기와 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머리 쪽으로 점차 이동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46.
또한 여러 가지 조직을 분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며, 중독을 방지하고 독에 대한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해독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갑상선은 에너지 대사의 조절 기관이다. 그것은 에너지 변형의 효과적인 윤활 장치라고 불려 왔고 몸 에너지의 거대한 촉매이다.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내분비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생명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정상 이하의 사람들, 장애인과 백치들을 다룬 실험을 통해서 연구자들은 버먼 박사의 말처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갑상선이 없다면 육체적인 능력과 기능의 전개도, 예상 연령에 보이는 사춘기의 징후와 그 이후의 성적인 경향을 보이는 종족의 생식과 아울러 복합적인 사고, 배움, 교육, 습관 형성, 상황에 대한 반응 에너지도 있을 수 없다.” 상동 p.55.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감각 정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 감수성과 지각의 정확도는 갑상선의 또 다른 기질이다. 이에 더하여 갑상선이 더 원기왕성하면 더 민감하다. 사물을 더 많이 느끼면 고통도 더 쉽게 느낀다. 왜냐하면 자극이 신경 장치를 자극하는 단계에 훨씬 더 빨리 도달하기 때문이다.” 상동 p. 180
뇌하수체와 같이 갑상선도 기억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 뇌하수체는 기억의 보존과 관계된다고 보이며... 갑상선 기억은 특히 지각과 교훈에 적용되며, 뇌하수체는 이해 (독서, 학습, 사고)와 개념에 적용된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182.
4. 흉선-위치, 상위 흉부-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흉선에 대해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매우 신비한 것 중 하나이다. 송과선과 같이 이것은 아동기의 분비선으로 간주되지만, 아직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
흉선은 흉부에 위치해 있으며, 심장의 상부를 덮고 있으며, 영양과 성장과 관련된다고 짐작된다. 아이들의 무책임한 성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성인기에 기능항진이 일어나면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다.
5. 췌장-위치, 태양총 부근-분비물, 인슐린
췌장과 관련된 정보는 대부분 심리학적이며, 그래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복부에 있고 (본능적인 동물적 본성의 뇌인) 태양총에 가까이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목적들을 위한 에너지의 작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소화 과정과 관련 있으며, 당 대사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인슐린을 분비한다. 세포에 충분한 당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에 필수적인 근육 작용이나 신경 작용이 가능하지 않다.” 상동. p.93.
6. 부신-위치, 신장 뒤-부신 피질의 분비물 알려지지 않음, 부신 수질의 분비물 아드레날린.
부신의 분비선들은 각각 쌍을 이루고 있으며, 하복부에 위치해 있으며, 신장 뒤에 걸쳐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장과 뇌 세포의 성장에 관련되어 있다. 부신 피질의 분비물은 성숙을 이루는 내분비물들의 원천이다.
그러나 부신의 분비선들은 기본적으로 대항의 분비선들이다. 이들은 위험이나 분노를 나타낼 때 직접적이고 활동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그 분비물은 긴급한 때에 자극된다. 고통, 분노 그리고 두려움은 이 분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모든 증거는 수질이 두려움의 증상들을 만드는 물질을 분비시키고, 피질은 화의 반응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들, p. 76.
또한 이렇다.
“용기는 두려움과 화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모두가 항상 논란 거리가 되고 있다. 용기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의 반대가 되는 감정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부신 수질의 억제를 의미하는 용기를 가져 올 것이다. 사실상 용기의 메카니즘은 더 복합적이다. 동물의 용기와 의도적인 용기는 구분되어야 한다. 동물의 용기는 글자 그대로 짐승의 용기이다. 언급되었듯이 엄청난 양의 부신 피질을 갖는 동물들은 들판과 숲의 왕들로 호전적이고, 공격적이며, 돌진한다. 그들의 감정은 일종의 피의 욕구를 지닌 것이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황소에게 붉은 천을 흔드는 것처럼 움직이는 공격 대상은 부신 피질의 분비물의 흐름을 자극해서 말하자면 새로운 혈액 조건에 의해 화의 본능이 일어난 것이다. 의도적인 용기의 경우에는 본능 이상의 것이 있다. 결단의 행위, 의지의 표현이 있다. 부신 피질이 없다면 그러한 용기는 불가능하며, 용기에 대한 영예는 주로 뇌하수체 전엽에 돌려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 분비물과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부신 피질은 진정한 용기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용기 있는 행동들은 뇌하수체 전엽 형의 개인들에게서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루이스 버먼 의학박사, 개성을 조절하는 분비선, p. 177.
7. 생식선- 위치, 하복부-분비, 정소와 난소의 분비물
생식선 또는 간질성 분비선interstitial glands은 외분비의 성선들이지만, 내분비물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많은 분비물은 생식을 위한 수단이다. 생식선이 개성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 성적 충동과 그 육체적 정신적인 다양한 부수 효과는 잘 알려져 있고, 연구되어 있는데, 이는 주로 남용과 금지에 대한 것이며, 인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육체적,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인간의 반응을 모두 성과 관련짓거나 성에만 관련지우는데 우리는 모든 극단적인 주장 배후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성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동양적 지혜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고, 에너지 센터들과 분비선들과의 관계를 살펴 볼 때 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앞서 설명한 모든 것과 이 주제에 대한 많은 책들과 논문들 중에서 다음의 것이 아마 간단한 요약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는 모두 실험 단계에 있고,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분비선과 그 기능의 유사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대부분은 신체 대사와 성장에 연결되어야 하며, 그 모두가 성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그들은 개성의 형태와 기질을 결정한다.
과학이 실험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정신분석이 이루어져야 이해될 것처럼 보인다. 감정과 정신적 개념이라는, 파악하기 힘들고, 감지할 수 없는 과정은 물질에 의해 설명된다. 분비선과 신경계, 그리고 접촉 장치와 반응 장치의 발전과 기능의 정도로 현재의 모든 상태가 귀착된다. 성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죄인을 성자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내분비물의 증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나오는 장치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 메카니즘이야말로 사람의 총합이다. 그는 그것을 증진시킬 수 있거나 남용할 수 있지만, 그 장치가 결정 요소이다. 자유 의지는 종식되고 불멸성은 부정된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다음 세대가 심령적으로 더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더 좋은 몸을 형성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 결론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모든 연구 대상의 메카니즘과 함께 완벽한 몸이 구성될 수 있고, 따라서 결국 완벽한 심령적 본성이 작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될 수 있는 법칙과 방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분비선에 대한 이 모든 결론들이 사실상 올바른 것일까? 개략적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개요에 공백을 채우는 것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의문 속에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선 개인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개인에 있어서는 분비선과 분비 기능이 기본적인 원인일 것인가 아니면 효과 또는 도구적 성질만을 갖을 뿐인가? 사실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원인이 되는 것은 없는가? 모든 물리적이고 심령적 메카니즘을 통해 작용하는 어떤 혼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성 바오로가 사람은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자연의 영광이 하나이고 영의 영광이 다른 하나라고 암시했던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그리고 더 일반적인 두 번째 질문에서 단순한 메카니즘이 실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고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 별은 그 메카니즘을 완성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내일 죽으니까 먹고 마시도록 하자” 우리 내면에는 영혼, 혼, 등등으로 불리는 미세한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에머슨이 말하는 상위혼(Oversoul) 또는 어떤 다른 이름의 초월적인 전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자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결코 그것과 하나되지(at-one: 속죄되지) 못하지만, 그 대신에 그 하나됨(at-one-ment: 속죄)에 대한 열망이 우리를 전진시키는 것인가? 썩지 않는 것이 썩는 것을 입는 것일까 또는 필멸은 불멸을 입지 못할까? 죽음은 극복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동양의 지혜를 살펴 보기로 하자.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2장 분비선과 인간 행동 |작성자 피노코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532
혼과 그 메카니즘
앨리스 베일리 / 최환 번역
이상수님 주: 혼과 그 메카니즘(The Soul and its mechanism)은
앨리스 베일리 여사가 D.K.대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지 않고 직접 저술한 몇권의 책들중 하나로서 영혼과 영혼의 도구인 몸(육체/에텔체)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에 대해서 다소 학술적인 방식으로 적은 책입니다.
-----------------------------------------------------------------------
혼과 그 메카니즘
혼과 그 메카니즘
심리학의 문제
엘리스 배일리
번역 : 최환
루시스 출판사
113 유니버시티 플레이스 11 층, 뉴욕시, 뉴욕 주 10003
루시스 인쇄사
3화이트홀 커트 슈트 54 런던 사우스웨스트 1번가 2 EF
감사와 사랑으로 엘리스 E. 듀퐁 오티즈에게 바친다
차례
서언
제1장 소개
제2장 분비선(腺)과 인간 행동
제3장 에텔체 또는 생기체의 이론
제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제5장 혼, 에테르 그리고 에너지에 대한 동양의 가르침
제6장 일곱 가지 에너지 센터
제7장 결론
부록
참고도서
색인
“몸과 혼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은 다른 인과 관계보다 신기한 점이 훨씬 더 많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자가 사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루돌프 헤르만 롯체
“중심적인 자아의 소망에서 하강하는 의도meaning가 몸을 감싼다. 이것은 세포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가지 의도로 구성된 성채가 된다. 그 기관들은 사실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모험적이고 심오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치와 미추, 우아함과 기교, 암시적인 철학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오만스럽고 수치스러운 태도, 예술에 대한 무한한 관심, 자유자재한 춤의 의미, 그 모두가 명료하게 된다. 자세, 몸짓, 그리고 무수한 색채와 강도에 따른 표현상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내면의 움직임이 거침 없이 즉시 나타난다. 시와 도덕, 종교와 논리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처럼 성원들의 내면에 다시 자리를 잡고, 분열에 의해 파멸할 것이라고 위협받는 세계는 구체적인 통합을 회복한다.
자아, 그 몸과 자유, WM. E. Hoching, p.97.
서언
동양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이를 무분별하게 경외하거나 막무가내로 불신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상태는 유감스러운 것이다. 숭배자는 불신자만큼이나 위험하다.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우리들의 사고와 신기할 정도로 다른, 거대한 동양적 사고의 본체를 공평하게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본질적인 탐색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무분별한 태도는 우리의 철학적 심리학적 서적들, 이 책과 또 다른 책에서 동양적 사고를 거의 완전히 생략해버리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비난한다. 동양은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자신들만의 고유어를 갖고 있다. 이를 잘 번역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동양의 저작이 혼란스러운 시적 표현이나 자아 신비화의 기이한 허튼소리로 채워져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배일리 여사는 비판적인 정신이 동양적 사고로 나가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비판적인 정신이란 서양적 사고와 똑같이 동양적 사고도 지혜의 궁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녀는 서구인들이 훨씬 더 경이적인 신비한 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경외심을 일으키는 외양과 동작으로 다가와서, 조잡스러운 부정확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서구인들에게 그것은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컨대 이렇게 말한다. “이 동양적 사고는 실존의 문제들을 깊이 연구하는 경우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이 서양의 사고보다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은 모두 자신의 사고를 특화시켜 왔다. 그러므로 둘 다 진지함과 독특한 통찰력의 미덕을 지닌다. 그렇지만, 특화는 궁극적 통합으로 이어질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 동양과 서양이 각자의 삶의 가장 심오한 영역, 즉 그들의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고의 영역에서 결합할 때가 성숙되지 않았는가?”
만약 다른 이유가 없다면, 이 책은 동양을 서양으로 그리고 서양을 동양으로 번역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 가지 계열의 사고를 단일한 관점에서 조화롭게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녀가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는지 아닌지는 독자들이 평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주목할만 하며, 두 가지 형태의 사고 모두에 보다 지성적인 접근을 할 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적인 분비선(腺)의 연구와 동양적인 “에너지 센터”의 연구 사이에서 저자가 행하는 독특한 비교야말로 이 책에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는 오래 전에 절대자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이른바 개체라는 절대자의 표현된 삶에서 몸과 마음이라고 부른 것의 엄격한 병행론(parallelism)을 지적했다. 만약 그런 병행이 존재한다면, 모든 외적 현현에 대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적 힘이나 심령력의 발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우 일반적으로만 내적 힘과 외적 힘을 가정해 왔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개성을 조정하는 분비선의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보다 적절한 개체의 수련에 대해 풍부한 암시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연구의 진전 가능성을 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제시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생리학적 행동과 관련해서 갑상선thyroids 또는 부신adrenals을 함께 말한다. 이처럼 생리학적 행동의 심령적 대응물이 있을까? 그것은 답하기 힘든 질문이고 이를 처음 접한 생리학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19세기 유물론의 어두운 상황으로부터 나온 완고한 독단론자가 아니라면, 뇌라는 생리학적 기관의 심령적 대응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상선, 부신, 그리고 나머지들의 심령적 대응물은 왜 아니겠는가?
만약 이러한 질문을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탐구한다면, 개체의 심령적 삶이 머리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매우 유약한 지성적 관점을 훨씬 넘어서 우리의 사고는 틀림없이 확장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을 정리하지는 않겠다. 특별한 결론들은 수정되거나 심지어 거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생리학적 심리학적 연구로 이어지게 될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놓았으며 결국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도전적일 뿐만 아니라 독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을 줄 것이지만, 서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지나치게 낯선 동양적 사고 과정에 대해 진정으로 감탄하는 마음과 이에 대한 경이감이 뒤섞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http://blog.naver.com/challngr/60026257603
제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혼은 논의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고 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이것은 여러 시대 동안 최고의 지적 관심 거리이자 모든 종교와 철학의 주요 주제였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혼에 대한 수 천년의 증언이 실제로 어떤 기초를 갖고 있어야만 하고 자연히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나 노이로제와 병적인 환상과 경험에 기초한 추측을 배제하면 인류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확인을 보증하는, 건전하고 훌륭한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로부터 나온 증언과 추론 구조의 잔여물이 남는다.
리처드 뮐러 프라인펠스 박사는 “혼에 대한 인간의 신앙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류사 전체를 쓰는 것과 같은 시간이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차드 프라인펠스 뮐러, 혼의 신비, p. 24.
이 문제는 아메스 교수가 잘 요약해 놓았다.
“한 쪽에는 자아 또는 혼이 생각과 함께 있고, 다른 쪽에서는 대상, 즉 사람들과 신의 세계가 있다. 수 세기 동안 현자들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틈을 넓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사상이, 외부에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 속의 상상들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 참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확실한 연결 통로는 전혀 없었다. 이 해협의 양측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자아 쪽에 서 있는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의 앎에서 분리했던 실재에 이르려고 자신들을 확장시켰지만 헛된 것이었다. 반대 쪽에서는 유물론자들이 자아를 무시하거나 그것이 환영 또는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유출되는, 숨이나 안개 같은 수반현상이라고 간주했다. 이른바 이원론자들은 실재가 심령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그 위치를 인정하여, 마음이 어떻게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면서, 그렇게 다른 객체로 가는지, 또는 객체가 어떻게 그 자체일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적절히 답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아메스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 종교, pp. 127-128.
혼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수많은 정의에서 취합한 것이다. 정의와 설명에서 매우 분명한 일치가 있다. 웹스터 사전에는 몹시 흥미로운 어구로, 매우 정확하게 동양 지혜의 관점에서 혼을 정의하고 있다.
“개별 생명, 특별히 심령적인 활동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본질, 본체, 또는 동인으로 생각되는 실체. 개별적인 실존의 매체, 몸과 본성상 분리되어 있고, 실존상 분리될 수 있다.”
혼의 본성에 대해 다른 해석을 살펴 보면 세 가지 관점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웹스터 사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첫째, 혼은 실체 또는 주체로 다루어지고 특히 사람의 의지적인 사고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몸을 통한 경험의 주체이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 혼은 마음 또는 의식적인 경험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관념론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셋째, 혼은 뇌의 작용 또는 기능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피에르 J. G. 카바니스(1757-1808)는 위가 음식을 소화하듯 뇌는 사고를 분비한다고 가르쳤다.”
웹스터는 현재 사고의 적용 경향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페히너의 이해처럼 혼은 단일한 전체, 즉 단일한 몸의 과정 전체와 결합되는 영적인 과정으로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 사이에 서 있다.” 웹스터 사전, 1923년 판
무엇보다도 불교도가 강조하는 “숭고한 중도”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길을 취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혼이 신의 광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특이하고 유체같은 화합물을 통해 움직인다. 인도인들은 사람의 혼이 불변의 원리, 세계혼, 우주혼anima mundi, 우주 도처에 퍼져 있는 에테르Akasa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이 에테르는 단지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를 지휘하는 자이고 본질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매체로 작용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 철학을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피타고라스는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다. 중국에서 노자는 영적인 혼은 반물질적인semi-material 생기있는 혼과 결합되며, 그러는 가운데 육체를 활기있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지닌) 혼은 몸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로마인들은 혼이 영적인 혼, 지성적인 혼 또는 마음, 그리고 생기체로 구성되는 삼개조라고 간주했다. 테오프라스투스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의 참된 원리”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프노이마(pneuma: 영, 정신)라는 생기의 원리 또는 생기의 발전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유포시켰다... 프노이마의 도입과 함께 인간 개성의 몸, 혼, 영이라는 3원론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신학자들의 사색 속에서 탁월하게 형성되었다. 혼 또는 심령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즉 한편으로는 생리학자들의 활력vital force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 또는 인간의 비물질적 혼으로 분화되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p. 53-54.
그렇게 스토아학파는 동양 철학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가르침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진 틈에 다리를 놓았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혼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혼이 세 부분을 지닌다고 믿었다. 하나는 신으로부터 오는 불멸 또는 합리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속하는 식욕과 감각의 자리인 필멸의 동물적 또는 감각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의지 또는 영혼으로 이를 통해 이성은 욕망을 정복한다. 식물은 최하위 부분을 갖고 동물은 두 가지 하위 부분을 갖지만, 합리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이 이성적인 혼을 그는 본성상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필멸의 몸과의 결합은 장구한 생애 동안에 나타나는 사건 중에서 사소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혼과 몸을 기본적으로 구별했다.” 상동. p. 35.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생기vital 원리들의 합으로 간주했고 존재가 몸에 대한 것은 시각이 눈에 대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혼은 육체 내에 있는 진정한 존재였으며, 플로티누스는 그에게 동의했다. 그는 혼을 물질보다 더 높은 존재에 속하는 육체의 살아 있는 지각력으로 간주했다. 터툴리안은 성 그레고리가 했던 것처럼 혼을 생기 원리와 합리 원리,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동양 학파들은 혼을 자아, 즉 개체로 간주했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내면의 그리스도”인 그의 부름과 그의 현존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각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성 바울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기독교와 동양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비교하면 자아, 혼, 그리스도라는 용어들이 동일한 존재나 의식 상태를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실재를 가리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혼에 대해 그리스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뒤에 영지주의와 마니교에 의해 윤색되었다. 그들은 혼은 빛으로 몸은 어둠으로 간주했다. 빛은 몸을 비춰서 결국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4 세기의 성 그레고리는 성 바울이 했던 것처럼 몸, 혼, 영이라는 몸의 삼중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의 관점을 자신의 가르침에서 요약하였다.
“혼은 부분을 갖지 않지만, 그레고리는 영적인 능력, 감각적인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을 구분해서, 몸, 혼 그리고 영에 대응시켰다. 이성적인 본성은 몸의 모든 부분들에 동등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위 본성은 하위 본성을 매체로 사용한다. 물질에는 생기력이 들어 있으며, 생기력에 감각력이 거주하며, 감각력에 이성력이 결합된다. 감각적인 혼은 그래서 매체이며, 육신보다는 순수하고 이성적 혼보다는 탁하다. 그래서 몸과 결합된 혼은 모든 활동의 진정한 원천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 88.
5 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파들이 혼에 대해 사고를 전개했다. 스콜라학파, 아랍의 철학자들, 카발라 연구가들, 중세의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던 일군의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혼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논했지만, 많은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 왜냐면 모두가 서서히 현대 과학의 출현, 현대 의학의 수립, 그리고 전기 시대의 출현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자연의 형태 측면과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관심을 끌면서, 혼과 그 본성에 대한 사색이 신학자들에게 점차 이관되었다.
17 세기에 슈탈은 혼을 주제로 글을 썼고, 당시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가르침을 요약했다. 이것을 애니미즘 이론(Theory of Animism: 활력론: 혼이 생명에 원천이라는 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혼이 생명 원리이며, 모든 유기적 발전의 원인이 된다는 학설이다. 애니미즘이라고 하면 자연의 힘들을 인격화하고 숭배했던 진화가 덜된 종족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탈이 요약한 애니미즘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힘과 에너지, 원자에 대한 현대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의 세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 속도, 활동, 활기, 이동, 소리 전달, 전기 에너지, 그러한 많은 말들은 오늘날 표제어가 되어 있다. 우리는 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슈탈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침을 요약했다.
“몸은 혼을 위해 만들어졌지 혼이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명 운동의 원천은 혼이다. 이것은 몸의 기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외적 영향에 대해서 잠시 그것을 유지한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이 아니라, 심각한 외상에 의해 작동할 수 없게 되거나 더 이상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에, 혼이 몸의 기관을 떠나는 직접적인 행위 때문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69.
버클리의 혼에 대한 정의는 재미있다. 왜냐면 그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간단하고 활동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혼을 두뇌 활동의 산물로써 간주하는 현대의 유물론적 심리학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생명 혼을 부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뮐러 프라엔펠스 박사는 말한다.
“... 우리는 몸을 원자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광범위한 생명 에너지의 매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몸’이 단순한 물질임을 그치고 ‘활기찬’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또한 계속 말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우리는 혼의 이해에 이를 가능성을 본다! 인류가 이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는가 기억해 보자. (의식 없이 ‘혼’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생명이라는 활동의 복잡한 지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는 혼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원시 문화들에서 ‘혼’은 결코 의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동일시가 그 후에 철학적으로 은폐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상 원시인들이 ‘혼’이라고 이해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활기있는Animated’ 것과 ‘살아 있는alive’ 것은 개념상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마치 ‘활기없는inanimate’ 것과 ‘죽은dead’ 것이 동일한 것과 똑같다.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결코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생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에 독일어 레벤Leben과 젤레Seele도 영어의 ‘라이프life’와 ‘소울soul’이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현대 철학의 주 경향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 후기 유물론자들도 혼은 본체가 아니지만, 심령적 과정이 본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움직임motion’과 동등하다고 간주했다. 다른 한편 양심주의자들conscientialists도 심령적 과정을 물리적 운동과 어느 정도 관련지워야 하는 ‘사건events'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두 관념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른바 ‘혼’이라는 것은 확장된 ‘본체’나 생각하는 ‘본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체’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사건들, 즉 여러 가지 결과들의 연속성으로, 한편으로는 몸의 구조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학설은 우주를 본체와 의식으로 나누지 않고, 둘 사이에 한편에서는 물질적으로 나타나고, 또 한편으로는 의식이라는 가설의 연결 고리를 설정하는데, 이 점에서 유물론과도 다르고 관념론과도 다르다. 그것은 혼을 본체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의식과 몸은 둘 다 우리에게 의식을 산출하고 또한 원물질에 형상을 부여하면서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제 3의 사물의 결과일 뿐이다. 의식은 보다 심원한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물론은 몸을 형성하고 그와 함께 혼을 형성하는 형태를 이루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이 이론은 비록 이원론을 회피하는 것처럼 일방성을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이 남용되어 왔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관념론과 유물론은 둘 다 단원론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론은 역학론이라고 불린다. 왜냐면 그것은 혼의 본성을 지도받는 힘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활력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힘이 몸에 형상을 부여하고 의식을 야기시키고,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뮐러 프라엔펠스, 혼의 신비, pp. 40. 41. 42.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영혼, 혼 그리고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시를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삶을 이른바 물질 속에 나타나는 실존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또는 부정확하게 분리시키면, 사람 안의 영, 혼, 그리고 물질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실존계에 혼이 현현하기 위한 매체이고, 혼은 영의 현현을 위한 상위 계의 매체이고, 이 셋은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생명에 의해 종합되는 삼개조Trinity이다.” H. P. 블라바츠키, 비경, I권, pp. 79,80.
혼과 자아는 동양의 문헌에는 동의어로 나온다. 혼, 그 본성, 목적 그리고 실존 양식에 대한 주요 보고서로는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데, 이는 동양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더이쎈은 아트마, 자아 또는 혼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약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우주의 일반 원리로서 브라만을, 심령적 원리로서 아트만이라는 도식에 따른다면, 모든 우파니샤드 철학의 기본적인 사고는 간단한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브라만 = 아트만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 물질화되어 나타나는 힘인 브라만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 유지, 보존,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며, 이 영원하고 무한한 성스러운 힘은 아트만과 동일하며 외적인 모든 것을 탈각한 이후 우리는 내면에서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존재, 우리의 개적인 자아, 즉 혼을 발견하게 된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이 동일성, 즉 신과 혼의 동일성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기본이 되는 사고이다...
아트만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단어는 바로 ‘자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가능한데, 아트만의 이해에 따라 (1) 물질적 자아, 몸 (2) 개체 혼, 즉 몸으로부터 자유롭고 앎의 주체로써 대상과 대립하고 구분되는 자 (3) 지고의 혼, 주객은 더 이상 서로 구분되지 않거나 인도의 이해에 따르면 대상 없는 앎의 주체이다.” 파울 듀센 의학박사, 인도의 종교와 철학, pp. 39. 94.
어느 동양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기적 존재들은 자기 결정의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는 ‘혼’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주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혼’은 내면에 생명을 갖는 모든 존재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혼들은 본상상 동일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면 혼의 생명을 모호하게 하고 방해하는 물리적인 조직 때문이다. 혼이 결합되는 몸의 본성에 의해 다양한 모호성의 정도가 나타난다.
감각 등의 파악과 더불어 각각의 부띠buddhi는 과거의 업보karma에 의해 결정되는 고립된 유기체이며, 그 자신과 특이하게 관련되는 무지(avidya: 무명)를 지닌다. 자아ego는 우리가 경험적 자아의 내면적 생명으로 알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의식 경험의 심리적 통일체이다.
경험적 자아는 자유로운 영혼과 메카니즘, 즉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혼합이다... 모든 자아ego는 죽을 때 해체를 겪는 조잡한 육체 내에 감각을 포함한 심령적인 장치로 형성된 미세체subtle body를 지니고 있다.” S. 라다크리슈나, 인도 철학, II 권, pp. 279, 283, 284, 285.
어느 인도 경전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 마음, 혼, 영혼이라는 네 가지 아트마가 있다. 혼, 마음, 생명 원리의 대우주적 현현력의 뿌리에 놓여 있는 궁국적인 힘은 영혼이다.’” 라마 쁘라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 121. (쁘라슈노빠니샤드에서 인용))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생명력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물질은 영혼 또는 에너지가 가장 낮게 나타난 것이며 영혼은 물질이 가장 높게 표현된 것이라는 동양에서 공식화된 진리에 우리는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특이한 편애와 경향에 따라 종교인, 심리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의 관심을 끄는, 현현한 생명 의식의 다양성이 나온다. 모두가 활기 있는 한 생명의 변화하는 국면을 연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과 관련되는 차별화, 용어, 그리고 그 요약은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통일된 실재를 부분으로 분리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분리시킨 특별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러나 전체는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의식을 총괄하여 진정한 경험에 참여함에 따라 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 자라나게 된다.
이 경험에 대한 증언은 바로 시간의 밤으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세계의 계획에 따른 진화적 발전 과정에서 인간 가족이 출현한 때로부터,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신 관념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혼 관념은 진보적인 발전을 나란히 이루어 왔다. 혼을 다룬 저작은 그 과제의 중대성 때문에 발전이 지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위치와 사람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위치에 대한 추측은 항상 많이 있었다. 그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이론들을 여기서 다뤄 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생명의 원리가 뇌 속에 있으며, 뇌와 척수는 생명력의 조정자라고 주장했다.
스트라토는 뇌의 앞부분의 양미간에 그것이 위치해 있다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뇌 안에 의식 또는 혼이 있다고 했고,
헤로필루스는 calamus scriptorius를 혼의 주요 자리로 삼았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소뇌에 혼을 위치지웠으며,그것은 운동의 조절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현대 의술의 위대한 선구자 갈렌은 제 4 뇌실을 인간 혼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기원후 3세기의) 히폴리투스는 “송과선을 향해 나가는 영혼에 의해 뇌막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근처에 영혼의 흐름을 받아 척추로 전달하는 소뇌의 입구가 위치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과정에 의해 이 소뇌는 송과선을 통하여 영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물질을 끌어들인다.”
성 어거스틴은 혼이 중간 뇌실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상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아랍의 철학자들은 뇌실을 혼이나 의식적인 생명의 자리로 생각했다.
홀랜더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뇌의 위치에 대해 아랍인들이 취했던 강(腔) 또는 동공을 의미하는 특정 세포에 고대 철학자들이 그 기능을 위치지우려고 했던 이유는 기체 상태인 프노이마가 확장할 공간 상의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4 가지 부위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이마 쪽을 향해 있다고 생각된 제1 또는 전방 뇌실은 일반적 의미의 동공이었다. 왜냐면 그로부터 5 가지 외부 감각의 신경들이 뻗어나가 있고, 이들 신경의 도움에 의해 그 속으로 모든 감각들이 결합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제 2 뇌실은 제 1 뇌실과 함께 작은 입구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상적 능력의 자리로써 고정되었다. 왜냐면 다섯 가지 외부 감각으로부터 인상들이 제 1 뇌실로부터 그곳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뇌를 통과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이룬다. 제 3 뇌실은 이해의 자리였다. 그리고 제 4 뇌실은 기억에 할당되었다. 왜냐면 제 2 뇌실에서 흡수된 마음의 개념 작용이 집중과 집적을 위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상 이른바 전실은 두 동공으로 구성된다. 좌측과 우측의 뇌실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제 3 뇌실과 연결된다. 고대에는 이 중실이 몬로의 소공이라고 불렸다. 제 4 뇌관과 세 번째 뇌관은 신호를 주고 받는다. 고대인들은 이 후실을 실비우스의 맥관이라고 불렀다.
측실들은 뇌량corpus callosum으로 지붕처럼 덮혀 있다. 제 3 뇌실은 시상optic thalamus으로 덮혀 있고 제 4 뇌실은 소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한다... 만약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자극되면, 그 효과는 어쨌든 의식 내에서 결합되고, 이 사실에 대한 지식은 공동 감각중추sensorium commune 또는 공동 감각(common sense: 일반 상식)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감각 센터의 가설에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했다. 뇌의 부분들은 중복되기 때문에 위치 선택이 매우 제한되며, 중심선에 있는 조직들만이 선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에 의해 송과선이, 그리고 19세기에는 W. B. 카펜터에 의해 시상이,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연수pons cerebri가 선택된 것과 같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97.
로저 배이컨은 뇌의 센터를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했다.
루도비코 비베스는 “혼을 의식적인 생명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명의 원리로 간주했다. 심장은 그 생명 활동 또는 생장 활동의 센터이고, 뇌는 지성적인 활동의 센터이다.” 상동. p. 119.
중세의 유명한 해부학자 문디누스는 “동물 영혼”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 동물 영혼이 협소한 통로을 통해 제 3 뇌실로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뇌의 세포질들이 지성의 자리라고 가르쳤다.
뇌의 회질과 백질의 차이를 처음으로 구분했던 베살리우스는 5 개의 뇌실을 설명하여, “세 개의 혼들을 구분했으며,.. 기능이 특히 정신적이었던 동물 영혼의 합인 주요 혼을 뇌에 배당했다.” 버나드 홀랜더 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29.
세르베투스는 뇌의 제 3 뇌실과 제 4 뇌실을 연결하는 통로인 실비우스의 맥관에 혼을 위치지웠다.
De Rerum Natura에서 텔레시오는 “혼은 가장 미세한 형태의 물질, 매우 미묘한 본체로 신경계 내에 갇혀 있어서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자리는 주로 뇌이지만, 또한 척수, 신경, 동맥, 정맥, 그리고 체내 장기의 외피로 확장한다... 신경계는 혼-생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의 혼은 동물의 혼과 그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의 물질적 혼에서 벗어나 그 물질적 혼과 결합되는, 신에 의해 직접 각인된 신성한 비육체적 혼을 추정했다.” 상동, 132.
윌리스는 정신성, 활기, 기억 등 혼의 다양한 기능을 뇌의 다른 부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뵈쌍Vieussens은 centrum ovale에 혼을 두었다. 스웨덴보르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혼에 대한 육체 감각의 왕도는... corpora striata를 통한다... 의지의 결단도 모두 그 길을 하강할 것이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머큐리이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혼에 알려지고, 거기에는 혼이 몸으로 내린 명령도 담겨 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86.
코르포라 스트리아타는 전두엽과 후두엽 바로 아래에 있는 한 쌍의 거대 뇌신경절이다.
홀리스는 “감각과 운동은 둘 다 뇌수질에서 동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혼의 자리이다,”라고 결론을 맺었고
챨스 보넷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감각들은... 우리가 부여받은 것... 뇌 속 어딘가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으로 비밀스러운 교신을 한다. 교신들이 일어나는 부분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의해서이고 몸으로 다른 존재들에 작용한다. 이제 혼은 신경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상동, p. 190.
반면 폰 좀머링은 혼의 자리를 대뇌의 유동체에 위치지웠다.
심리학자 W. B. 카펜터는 시상을 혼 생명의 자리로 간주했다.’ 이 다양한 저자들의 결론은 위에 인용된 홀랜더 박사의 저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물활론자이자 물리학자이고 골상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죠셉 겔의 시대로부터 혼의 위치는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조명을 받게 되었고, 성격, 윤리, 그리고 이른바 인성학(Ethology: 품성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뇌와 심적 기질들과의 관계가 연구 주제로 되었고, 오늘날은 분비선을 포함시켜서 이러한 관념을 연구 과제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심리학의 현대적이고 유물론적 원리들은 일시에 낡은 생기론적, 물활론적, 그리고 신비적 관념을 대체해버렸다. 그렇지만, 유물론적 접근법은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우선 균형을 유지시켰고, 지식 구조를 만들었으며, 자연적 사실에 기초했으며, 예언적 신비가의 오류와 결론, 그리고 종교 신학자들의 미신들을 상쇄시켰다. 둘째, 현대 심리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마음, 그리고 그 힘의 연구를 통해, 그리고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신사고와 같은 조직의 영향을 통해 이뤄진 결론에 의해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교가 건설되었다. 이제 혼, 마음 그리고 뇌의 삼중성triplicity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이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습들을 제거한 뒤에 (그리고 현재 몇 개가 있다) 서양 과학과 협력하여, 빛은 다시 동방에서 비칠 것이며 새로운 존재 상태로, 권능의 더 완전한 실현으로 인간 혼의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인류에게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브라우닝이 이 통합된 인간에 대해 이해한 것이 진실임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세 혼이 한 혼을 구성하네, 첫째는 지혜,
한 혼이 신체 부위 각각으로 모두로 이뤄지니,
그 속에 들어서, 일하는, 행위자,
땅을 향유하다가, 그것이 끝나자 사람은
하락하네, 허나 충고 따라 위를 향해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다음 혼까지, 뇌 속에 자리하네
첫째를 이용하니 합하여 쓰는구나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지자(知者)
때맞춰 방향을 위로 돌리고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마지막 혼에 의해, 모두 첫째를 쓰는구나,
지원 받든 받지 않든 자존하고,
사람의 자아를 구성하는 존재자
전자(前者)에 의지하여 놀게 하고,
첫째가 끝내면 위로 향하여,
신은 유지하고 지지되니, 끝나는 것은 인간
영적 교통의 경외로운 순간 위를 향해,
어느 장소도 필요 없이, 그에게로 돌아가니.
행위자, 지자, 존재자, 세 혼들에 한 인간.”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출처] [본문스크랩] [혼과 그 메카니즘]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작성자 피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