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에서 이런 모습으로 많이 존재했다.

관음이라는 존재의 상에도 들어가봤고, 지xx씨,이xx씨,월하아저씨 상에도 들어가 봤고,이무기 상에도 들어가 봤고, 들어가고 나옴이 자유로왔다.
(오로지 꿈이다. 이것은 내 기억의 단편이지 그 존재의 본질에 들어간 것이 아닌 내 안의 나로부터 각색되어 받아들여진 내 안의 그 존재에게 들어갔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음.보통 내 반쪽의 뒷편은 내 눈이 없고,
앞면만 본다. 그냥 보이는쪽을 앞면이라 하여 그 앞면에 존재가 있다.

그냥 그 이 자체로 전체적으로 내가 움직일 수가 있는데
보통 날고 있다는 느낌보다 그냥 있다는 느낌의 가벼운 느낌과 있음의 명확함.

형상이 없고, 내 앞에는 존재들이 존재하는데 내 뒷면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

내 뒷면의 본질.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분리이다.
나는 모두를 없음으로 돌리고 나또한 없음으로 간다.
그럼으로써 내 뒷면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나를 비롯해 모두를 죽였다.
나는 모두를 먼저 죽이고 나도 죽는다.
그 무엇도 있질 않았다.


내 앞면의 본질.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나와 너는 하나이며 모두 있음으로 돕는다.
앞면은 환하여서 모두 존재하고 모두 명확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안에는 내 뒷면의 본질의 뿌리인 암흑(없음)이 아닌
어둠들이 빛과 함께 썩여서 존재한다.

그러나 돕는다는 느낌보다는 다른 존재의 상에 들어가 체험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고
그런 느낌이랑 돕는다는 느낌이 함께 있음.

나는 없고, 또한 있다.
나는 지금 있지만, 또한 지금 없다.

분리는 환상이 아니라 존재한다.
하나는 환상이 아니라 존재한다.

항상 나의 선택.
내가 있음과 없음 두모습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두 모습이 모두 내 본질이기 때문.

그 두 본질이 완전 사라지지 않고, 즉 내 뒷면과 앞면이 완벽하게 구분되어있지 않았을때 영원성은 혼돈속에서 떠돌게 된다.

혼돈속에서 모든것을 걸고 나아갈때 그곳은 질서를 잡고 다시 명확해지며,
그 질서 밖으로 나가게 되면 다시 혼돈이 존재하며 그곳에 모든것을 거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혼돈은 내 안에서 질서를 잡게 된다.

나는 지금 보이는 것들 느끼는 것들은 모두 내 앞면이다.
나는 그 안에서는 하나이며 빛이며 생명이며 하나이며 나와 너의 관계안에서 나이다.

생명에서 생명이 나왔고,
있음에서 있음이 나왔다.

없음에서 없음이 나왔고,
파괴에서 파괴가 나왔다.

있음에서 없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안에서 없음이 비슷하게 어둠으로 창조되어진것. 그러나 없음이 어둠을 창조하는 것을 도왔던 것.

그럼으로써 어둠의 본질은 도와주는 의지를 본질적으로 가지게 된다.
즉 어둠은 자신을 버리고 빛을 돕는 방향으로 갈때 어둠이라 불리는 것이고,
어둠이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닌,
어둠이 빛의 존재로 인해 자신을 버리게 되었을때 암흑과 연결되어,

빛을 죽임으로써 도울 수 있는 그 존재상태의 암흑이 되는 것이다.
암흑이 될때는 그 빛을 죽이고 자신이 그 후에 죽게 된다.

그럴때 암흑이라 불린다.

모든 죽음과 소멸은 그 존재상태의 상의 사라짐을 말한다.


즉 느껴지고 존재하는 모든것은 빛의 씨앗이다.
결코 없음이 그 명확한 두 본질안에서 썩일 수가 없다.
이유는 그것이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식과 의지와 생각 느낌 체험 전의 이야기다.
그것은 인식할 수 없는 혼돈속에 내 맡김을 통한
명확성안에서 다시 피어오른 인식이기 때문이다.

혼돈 후에 남는것은 명확한 인식과 그 기억으로 남게 된다.
기억은 모두 명확성과 관련있다.

그 두 본질은 물과 기름처럼 썩일 수가 없으며,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이곳은 앞면이다.

즉 인식하고 의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체험할수 있는 곳이며,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거는 상의 변화를 택하게 될때

차원변화가 일어나고 베일의 장막이 쳐지는 것이다.
즉 지금 존재하는 것은 빛의 씨앗 즉 있음의 씨앗 완성의 씨앗이며,

그안에서 어둠의 씨앗은 암흑으로부터 나온것이 아닌,
빛의 씨앗의 변형을 통해 나온 또 다른 빛의 씨앗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암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거짓은 아니다. 그것도 옳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돕기 위해 탄생한것이 명확하다.

그 어둠이 도움이 아닌 자신을 살리는 방향으로 갈때 암흑과 연결된다.
그 암흑은 곧 그 어둠을 결국 소멸시킨다.

그것은 다시 빛을 돕도록 강제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고,
소멸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을 벗는다는 것이다.


암흑과 어둠이 연결되어지고,

생명과 빛이 연결되어졌다.

암흑과 생명의 빛이 함께 존재한다.
어둠의 길을 가는 이는 모두 없어질 것이고,
빛의 길을 가는 이는 있게 되어진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항상 빛과 어둠은 함께 존재하며,
생명과 암흑또한 함게 존재하는 것이 명확하다.

단지 사라지는 것.

단지 존재하는 것.

자신의 두 면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 두 면의 극을 가게 될때 없음은 없어지고,
있음만이 존재하여 완성된다.

그러나 항상 없음과 있음을 명확히 인식한다.
그리고 보통 표현은 반쪽밖에 할 수가 없다.
두 쪽 다 표현하려면 그냥 육신을 버리고 그 상태로 가야 되는 것.
인간의 앞쪽에 두 눈이 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이 길이고, 그 길을 걸어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생명에서 암흑을 알기위한 여정속에의 길들.
비유적으로 존재의 무를 알기 위한 여정속의 길들.

그것이 진리이다.

그것은 각자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나, 본질적으로
어느때나 완벽했다.

모든 어둠의 도움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내가 빛이며 어둠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택하였고 다시 빛이 되었고, 다시 어둠이 되어 암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되었다.

단지 혼돈속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모든 것은 도움이며, 모든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모든 선택을 하는 것은 바로 나이며, 또한 당신이다.
그것은 나만의 자유이며, 또한 당신만의 자유이다.

우리는 그 혼돈속에서 각자가 스스로 태어날 수 밖에 없다.

스스로의 근원이 되어야지
누군가의 근원이 되려 하는 순간 그대는 근원이 아니게 된다.

근원은 언제나 자신 스스로가 내면안에서 키워지는 것이다.
즉 근원을 키우는 이가 나와 당신이다.

각자가 처음으로부터 스스로 태어나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결코 어떤 도움도 존재하질 않았다. 처음에는 말이다.

그것이 그대와 내가 같은 시간 같은 날 같은 곳에 함께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태어나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
그곳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질 않는다.

스스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갔고, 나는 나의 길을 갔다.

각 자의 창조공간이 있고, 공존계가 존재하는 것은
각자의 사랑이 정확히 동등하게 전부를 향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오지 못한다.

전부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랑.
그것이 공존계를 만든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