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의 경우도 그렇듯이...
창조하는 자는 고독한자입니다. 고독하니까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기위해 고독해 보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것에 감사함이며 또한 인내입니다. 자기에겐 가진것이 일절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처럼 허허벌판처럼 '무'의 고독한 경지를 그 밑바닥을 거닐어 보았으니까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자는 여자와 소인(어린애)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것은 단지 신체적 성별이나 나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이지메 학교폭력의 주범은 핵가족시대에 저마다 아이 하나만을 낳아 공주 왕자로 만들어 놓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그 부모들에게 있다. 애가 애를 낳아 애를 기르는 격이다.


두레나 품앗이 같이 우리 옛 어른들의 삶은 마을이 하나의 영성공동체와 같았고 어느 한 가족의 아이는 그 집안 부모만이 아니라 마을 어른들이 모두가 공동으로 기르다 시피했다. 이것이 깨지기 시작한것이 그들이 갖은 개인주의를 주입한(일본은 같은 아시아이면서도 일찌기 그 영적 차원에서 개인주의, 편의주의, 외부의 권력에의 의존성이 강했다) 일제시대때부터 공포를 겸험하고 부터 였다.


'편안'한것은 추구하되,
'편'하려고만 하지마라. '편'하려고만 하는 것은 영적 성장의 적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외부의 풍족함속에 이 뭣 모르는 철없는 공주왕자들에겐(그들 책임만은 아니다 그들의 부모가 잘못이 있다)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없다.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짜증만 늘것이다. 그 짜증은 전쟁과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 혼란과 분쟁은 다른 외부의 힘이 당신들을 통제력과 지배력을 지속하기 위한 좋은 빌미을 준다. 당신을 그렇게 나약하게 만든 주범이 무엇인가 영적성장을 배제한 편의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영적 성장에 참을성 인내는 필수인것이다.물질적 풍요와 영적 성장은 같이 가야하는데, 어느정도 조율이 필요하다.


그것이 5차원이든, 극락정토든, 소멸이든, 지구를 떠나 천국에 가기만을 바라는 자에게 하는 말이지만,
당신은 학교에 입학해 왔는데
겨우 육체의 고통이 싫어서 자신의 위임을 남에게 떠넘기는것 그게 힘들다고 이 세상에 태어남을 도피하고 직무유기를 하고 도망가고 집에 가려 한다면 학급 청소시간에 쓰레기통은 누가 청소하고 집안 청소는 누가 하는가. 당신이 학교에 온것은 그 일을 통해 인성을 배우기 위함이다. 그것은 또한 이제막 그 것을 하는 순수한 어린 아이들에겐 보람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다. 그 힘든 일을 서로 도와가며 해 놓은 학급 친구들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 서로를 만날것이다. 아무것도 손해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자타 간에 더 가까워져 있고 건강해져 있으며 승리감에 당당해져 있다. 그들의 유대는 더욱 건실하게 다져져 있다. 도망간 당신만이 후회 할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최고 부자인데 상류층인데, 집에선 일 시키는 하인이나 종을 시키서 했는데 내가 학교에 와서 이런 일을 하다니 당신은 하루 빨리 학교에서 빠져나가 궁전에 앉아 있으려만 하는가.


당신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 해야 한다.


나의 몫을 남에게 떠 넘기는 것은 모면하려하고 회피하려 하는 것은 영적 성장의 적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허무하다고 보는 것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영적 차원에서 보라. 영혼의 입장에서 보라. 아무것도 억울한 것이 없다.


지구에 최초로 온것은 그대 자신이지 다른 이가 온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대의 원인은 그대 내부에 스스로에게 있다. 남이 억지로 지구에 오게 한게 아니다. 당신이 그것을 기억했내었을때 당신은 세상을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자각하에 주도 하게 될것이다. 당신에게 불필요한 것을 더 이상 겸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먼저 직시하고 인정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이상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다. 치유를 하자면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 그 일을 그 과정을 무시하고 어떻게 치유가 가능한가. 최고의 경지가 가능한가. 그러나 당신은 그 기억을 잃어버렸고 누군가의 죄인처럼 강제로 이곳에 왔다고 여긴다. 그러나 원인이 다른 존재에게 있다면 그가 오면 되지 당신이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여전히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이곳에 구할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삶에 왔으면서도 지구에 왔으면서도 삶 밖에 존재하고 지구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세한다.삶에서 지구에서 밖에 나가 있는가. 삶을 살면서 삶을 부정하고 지구에 살면서 지구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누워서 스스로 침 뱉기에 불과한것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할때야 비로서 그 자신은 정말로 쓰레기가 될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도 그 자신이다.


어찌 자기 자신 하나 존재 그 발판 조차 책임지기가 두려워하고 받들지를 못하는가. 그래서 자기소멸을 운운하는가.

자기 자신의 사랑은 무엇을 해도 기본적인 밑천이 되주고 발판이 되어 준다. 자기 사랑을 하지 못할때 (정직한 책임을 느끼지 못할때) 단지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의도로 사용될때 소멸이란 것은 귀신이 될뿐이다. 그 동기가 강박과 두려움으로부터 나오는 겨우 저 하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끌어온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당신에게 오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그렇게 해주겠다고 당신을 유혹하는 마귀가 될것이다.

당신은 상위를 추구해도 무엇을 해도 두발 두 다리를 땅에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한다.

 

부처가 산다는 극락은 여러분 내면에 가슴안에 존재한다.


천국은 당신 몸안에 내면에 있다. 신과의 연결은 내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은 신체안의 내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신의 육체안의 에테르체(빛의 몸), 영과 영혼 이모두가 근원하나님과 창조자신과 연결을 지속시켜주고, 끊어지지 않게 하는 끈과 같다.


머리로는 그것이 역경이고 헤쳐가야할 문제이고 시련이고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내면으로는 천국임을 느낀다.


외부 환경이 극락이라고 해서 행복을 느끼고 지옥이라고해서 고통을 느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 환경에 똑 같은 에너지로 반응하는 조건반사적인 자동로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환경에 똑 같은 모양으로 반응하는 로보트 노예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할수 있는 힘이 당신에겐 있다. 스스로 환경을 주도하는 마스터가 되어 보라.


이성은 분별은 지옥임을 알고 개선할것임을 알지만 그리고 노력하지만 가슴 속으로는 어디에 놔도 천국임을 느끼는 것 그것이 소위 깨달은 자의 능력이다.


춤꾼이나 소리꾼이 또 복서나 마라토너가 재능을 연마하기 위해 고된 훈련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행복을 느낀다. 그것을 고통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꿈이 있기에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것이다. 인간은 육체의 동물이 아니다. 정신으로 사는 동물인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육체가 고통스럽다고 탓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는 꿈이 없다는 것을 탓하라. 스스로에게 믿음과 소망이 없다는 것을 탓하라.정신의 힘은 능히 이겨내지 못할 고통이란 없다. 정신의 힘은 스스로의 주인, 다시 말해서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육신은 그것만 존재한다면 허수아비와 같아서 사실 12시간 24시간 두둘겨 맞고 서 있어도, 파괴되어도  고통을 모른다. 영혼이 떠나가면 땅에 묻히면 썩어지고 없어질 육체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신이고 마음이다.


최면 실험 장면에서 가끔나오는 것이지만, 최면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은 마늘을 입안 가득히 씹고 있어도 그것을 초콜렛이라고 여길만큼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다. 고통또한 외부환경 에 보이는 대로만 반응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그렇다고 느끼는 착각에 불가하다.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도 그것이 전부라고 느끼는 일종의 환영이고 착각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해골의 썩은물을 맑은 샘물인 줄 알고 먹고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걷도 이 세계가 자기 마음이 그려낸 환상에 불과한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체가 고통이 너무 극심하다 보면 유체가 잠시 빠져 나갈수 있는데 그렇게 할것 없이,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차력사의 심신 단련(마인드콘트롤) 따위로도 이런 고통 쯤이야 벗어날수가 있다. 정신일도하사불사라는 영혼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은 모든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영혼이 자아내는 힘이다.


모든 고통은 외부환경에 노예가 되고, 외부 환경대로만 정보가 주입되어 스스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환상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나고 나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냐 이지, 고통이냐 쾌 그 자체가 아니다.

 

육체의 고통은 지나고 나면 환영입니다. 지나고 나면 거기에 영혼이 얻어가는 것이 과연 없을까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복한 자가 남습니다. 유례없는 극한 상황을 만나 그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과 연결된 끊을 놓치고 단절되어 버렸을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물질의 환경이 현실이 전부라 생각하고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정된 것으로 추종하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영혼에 이기지 못할 하위세계의 고통이란 없습니다. 영혼은 고통을 정복할 초인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천하무쌍 영혼에 대적할 어둠이란 없습니다. 영혼은 선과악을 모두 아우르는 중립지대입니다.
소위 차밑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올려버렸다는 어머니의 감동적인 일화처럼, 초인의 능력, 기적, 마법이라는 것도 영혼의 힘(사랑)으로 부터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지금도 우리들의 몸에 이미 깃들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될때
모든 외부 환경의 육체적 고통은 환영이 되어 버린다. 고통은 물에 씻기듯이 가고 그 사건에서 영혼이 실질적으로 취할수 있는 교훈과 배움의 테이터 만이 남습니다.


지나고 보면 모두 추억이 되지요. 영혼 입장에서 보면 지나고 나면 고통의 감정은 사라지고 기억만이 남습니다.영혼은 사랑이고 사랑은 영혼으로부터 나옵니다.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사의 영혼에게 적당하지 않은 과도한 고통이란 없습니다.
그 어떤한 하위의 고통도 영혼에게는 원천에서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시요.
모든 육체적 고통은 환영입니다.
당신이 당신 영혼과 함께 할때 처음부터 피해받는 것도 손해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혼에 비하면 육체는 단지 그것을 느낌으로서 배움과 겸험을 얻기 위한 것일뿐이다.


고통따위는 없다 문제는 당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느냐이다.  어떤자에게는 고통이 어떤자에게는 기껏이 기쁨으로 나설 정복의 대상이다. 복서는 육체적 고통을 고통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동굴 해저 탐험가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등산가는 어떤가...우리가 이 세상에 온것은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게임이며 심각할 것은 두려워할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성숙도 성장도 못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진화도 창조도 없다.서로 다른 것이 만날때는 항상 어느 정도의 스스로를 내주어야하는 자극이 따른다. 그것은 어떤 자들에게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포용하고 받아들일만큼 당신이 클때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항상 작은 자들에게만 생긴다.


처음부터 병약한 환자들처럼 ,모험이 없으면 거기에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고통이 극심하면 극심한만큼 그것을 극복했을때의 승리감이란 말할것이 없다.


자전거를 배우려 하는데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한다면 영원히 타지 못하겠지요.
걸음마을 배우려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길 바란다면 영원히 걷지 못하겠지요.


단지 이건 놀이인데 회피할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당신이 영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망각할만큼 심각할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엔 댓가가 너무 지나치다. 단지 이건 겸험을 위한 놀이일뿐임을 명심하라.


기계들은 여러분들을 어른이 되길 두려워하는 나약한 어린애로 만들어놓고 여러분을 지배한다.


기계들은 여러분들에게 당신이 그 원하는 댓가없는 육체의 천국, 처음부터 나중까지 완벽함과 안락과 편리를 주고 당신 영혼을 흐물흐물 문어 대가리 같은 병든 시체로 만들어놓고 구속하고 지배한다.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풍자한 과학으로만 처음 부터 나중까지  통제되는 <멋진신세계>와 같다. (이 소설은 정확히 라엘리안을 묘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며 라엘리안 추종자들은 이 소설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그 세계에서 인간들은 과학기술에 의해 시험관에서 인간 등급이 결정되고 태어나 처음부터 나중까지 짜여진틀대로 편하고 안락하기 그지 없는 생활을 하지만  왠지 인간들이 백치같이 차갑고 정情이 없다. 걱정 근심들 고통 스트레스들은 조금만 나와도 약물(환각제)로 해결한다.  H.G. 웰즈의 <타임머신>의 미래사회에서 나오는 지하인간에 의해 사육되는 인간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놀기만 하는 아름답고 어린애 같은 백치같은 퇴행된 지상의 인간들은 또 어떤가. 아무리 처음부터 범죄가 없고 육체적으로 완벽한 안락함과 편리를 누린다해도 영혼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아무리 처음부터 육체적으로 안전한 안락하고 편리함을 누린다해도 당신 자신 스스로, 영혼의 자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이미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죽는 수행을 열심히 하거라)
아무리 스스로 걷는 것이 고통 스럽다해도 자유가 없는 것 영혼이 없다는 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만의 꿈과 소망을 가질때 당신은 그것을 기껏이 이겨내고 감수할 것이다.


에고를 '자아'라고 번역할때 그것은 육체의 자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에고를 버려야할것, 육체의 부정적 자아로만 알고 있지만 에고(자아)가 없으면 당신은 식물인간이고 허수아비다. 본래 에고란 현존이고 독존이다. 신성과 하나가 되고 함께 항께 행동하고 움직이는 에고, 신적 자아란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를 위해 긍정적 역활을 한다. 에고는 존재하되 인간의 에고와 신의 에고가 하나가 되어 합치되어 행동할때 그것이 바람직한것이다.

 

광야에서 낙타털를 입고 석청과 메뚜기 만을 먹고 살았던 요한과 예수는 영혼이 건강하다.
살롱같은 왕좌에 앉아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헤롯은 병들고 타락했다.


고타마 붓다는 스스로 왕좌를 버리고 궁전에서 나와 반라의 걸인이 되었다.

 

자연에는 완벽한 사각형이란 없다고 합니다. 완벽한 사각형이란 인간이 만든것이다.
서구인은 유화를 보더라도 전체 화면에 빈틈없이 온통 색깔로 떡칠을 한다. 뭔가 화려하긴 하지만 어쩐지 이기적으로 보인다. 성냥갑 같은 집구조도 그렇다.
완벽한 사각형을 추구하는 것이 서구라면
어딘지 좀 빈 공간이 있고 여유를 두고 모자라면 모자란데로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우리 한국의 미학이었다.
한국화의 여백의 미나 성기면 성긴대로 돌출되면 돌출된대로 구부러지면 구부러진대로 자연그대로의 나무나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는 그랭이 공법, 일본에서 보물로 숭배받는 우리의 막사발이나 탁사발들이 그렇다. 


미술시간에 도화지 가득히 색을 빽빽하게 채우는 아이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나중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짜여진 틀대로만 이루어지는 완벽하게 세계 그것은 이유를 두지 않는 기계들의 세상이다.
그것을 자기에서 떠난 권력 추종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힘의 숭배가 조폭들과 같다.단지 겨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두려움은 자기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한다.  거기에는 빈공간이 없고 숨쉴 공간이 없으며 영혼이 없으며 사랑이 없다. 그 '완벽한 예정, 완벽한 능력'이라는 말에 배척 받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다. 거기에 먼저 소외되고 걷어 차일것은 자기자기 자신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완벽한 능력이란 되려 완벽하지 못한 것들을 미정된 것들을 정형화 되지 않은 것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바로 눈 앞에서  남들이 팔이 잘리고 모가지가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겨우 자기 발가락에 박힌 가시 하나 가지고 앵앵거리는게 인간이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그렇게도 오래 살아 왔는데 아직도 인생을 관조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덜들었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귀염만 받고 자라 감사함도 겸손도 모르는 응석과 엄살만 부리는게 어둠의 본질이다. 세계를 경영하고 지배하는 어둠의 본질(그림자정부)은 그들이 정확히 어린애에 머문다는 것이다. 어둠이란 별것이 아니다. 어둠이란 이렇듯 어린애 상태에 불과한것이다.


고통과 쾌는 그 어떤 것을 가치로 여기고 그 어떤것을 무가치로 여기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어떤것을 스스로 라고 여기고 그 어떤것을 타의에 의한 주어진 불편부당한 강제로 여기냐에 따라 같은 고통이 누군가에겐 행복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된 자에게 주도적이 된 자에게 고통이란 없다. 꿈을 품어라. 꿈은 모든 역경과 고통을 이겨낼만큼 당신은 강인하게 해줄 것이고, 그 꿈, 소망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허무함은 그 반대이다. 허무함은 당신을 모든 외부 환경으로부터 나약하게 만들것이다. 나약한자는 필연적으로 머리만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영악해질수밖에 없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뭣에 의존하면 그것이 내가 노력할 필요도 없이, 내 일을 모두 기계처럼 알아서 해준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나는 도를 얻고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다고, 그것도 사랑이라고, 보고 만 있는 것도 사랑인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멸망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라면 같은 생명을, 몸과 의지를 발휘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것이 사랑이겠지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영을 할줄 안다면 수영 실력을 발휘하는 것, 수영을 할줄 모르면 주위에 나무가지나 밧줄과 같은 건질것이 없나 도와줄 사람이 없나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것도 힘들고 복잡하다는 사람에겐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리고 실질로 몸을 써서 움직이는 것은 의지입니다. '복잡함'이든 '단순함'이든 간에 그것을 하려는자가 그것들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해내겠습니까. 편리 따위로 도피하지 말고 회피하려고만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지혜와 의지없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사랑을 가지고 대하다 보면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다 보면 몸(의지)을 움직이며(내면으로든, 외면으로든) 지혜를 간구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의 여신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지혜와 힘의 여신에게 도움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쉽냐  복잡하냐가 문제가 되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따지고 있는 한가한 구경꾼의 일이지요. 그것은 자기 힘씀이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각오이고 용기입니다. 편의적인것이나 이기적인것에는 희생이 사랑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쉽게 편하게 구할수 있다해도 그게 무슨 칭찬받을 대수는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구할수 있는 방안과 기술이 처음부터 있어 구한 사람이래도 칭찬받을 것은 없습니다. 얻어갈것은 없고 처음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것입니다. 요는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게임처럼 환상처럼 사라질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남아 영원한 불명의 신전에 올려집니다.


처음 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춘 부자가 애정없이 없는 사람 도와주는 것은 특별히 사랑이 없어도 쉽지요. 그러나 없는 사람이 자기 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백배 빛이 나는 겁니다. 처음부터 쉽게 편하게만 한다면 나쁠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겪는 그 만의 고유한 인생의 삶을 통해서 오는 감동도 배움도 교훈도 없습니다.  사랑은 또한 인내입니다.


쉬운것만 편의적인것만 찾는 사람이 모르는 것이 이 우주에는 있습니다.사랑은 수고와 인내를 마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산가나 동굴 탐험가 처럼 모험가 처럼 영혼들은 그 체험과 탐구의 감동과 기쁨을 위해 능동적으로 이 지구에  온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는데 사서도 할만큼 체험은 그 체험 자체로 행한다는 것 자체로 기쁨을 주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슬픔과 고통일지라도 아무것도 없는 자의 고독 보단 낫습니다.


신은 고독해서 창조를 행했고, 고독한 자는 고독 또한 사랑하면서도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체험하면서 풍요로워 집니다. 신은 고독해서 창조를 행했고 스스로를 사랑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모두를 사랑합니다.


돌아보면 결과가 아니라 과정속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의 과정없인 그것으로부터 얻어질 교훈도 데이터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과정 속에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당신이 선택하지 않는한 당신의 영혼은 죽지 않고 불사이며 신과 함께 이니까 그것이 절망적이지 않고 지나고 보면 하나의 체험으로 가치가 되는 배움이 되고 겸험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영원한 외로움의 삶을 살아본자는 비록 어떤 것이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마음만으로도 그것을 감사하게 여길것입니다. 거기서 얻어진 우리들의 지혜와 교훈의 데이터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신의 신전에 축적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다음 당신의 사랑스런 어린 아이들 우주를 창조할때 당신만의 고유한 교훈은 신에게 불리어져 그것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로 쓰입니다. 지나고 보면 모두 기억이 될뿐입니다.  당신은 신과 함께 영원히 죽지 않고 사니까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