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한국어

자유마당new

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빛의 지
구는 내면에 있는 다양한 차원
의 의식을 통합하여 평화와 조
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신과나눈이야기한국모임
http://cafe.naver.com/cwgkorea


자유게시판

1. 나의 생각과 의문들

글쓴날 : 2003년 5월

[1]

- 나의 의문과 생각들 -

(순서)

(1) 처음
(2) 인간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있는가?
(3)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와 의미 탐구
(4) 힘과 원리 그리고 존재의 욕망
(5) 끝

[2]

(1) 처음

나에게 살아가는 목적인듯한 이 정신적 활동인 철학은 멈추어 버렸고 그로 인하여 좋아서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 너무나도 우울하고 허무함과 슬픔까지 느끼기도 한다. 나는 내 자신의 철학을 뛰어 넘기 위해 나의 모든 생각들을 이 종이에 적는다. 다시 철학이란 정신적 활동이 재개하기를 바라며 말이다. 나는 어떤 결함이 있는지 그리고 무슨 가능성이 있는지 고찰하기 위한 어떤 행위로 본다. 그리고 나의 사상 즉 철학을 알리기에도 좋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이일을 반드시 끝낼 것이며 나의 생각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사람들이 나의 말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만약 이해하지 못하고 안됀다는 식의 비난을 가한다면 정말 나는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생산적인 일인데다가 내가 발전할 길을 못찾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비판은 나에게 있어 매우 유익한 것이고 비판한 사람의 수준까지 짐작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제대로 된 비판자가 나오기를 바라며... 나에게 있어 제대로 된 발전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Evilution -

[2]

(2) 인간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있는가?

철학에 있어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물에만 국한시켜 의문을 던지지 말고 모든 것에 대해 던지는 것이지만 그만큼 사물에 대해 의심을 던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인간 그리고 환경이라 불리는 것들이 사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허상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맞는 말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번째로 중요한건 사물의 본질을 알아 그것을 통해 이 세상의 원리를 알아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며 사물이 실제로 존재 하나 아니면 이 세상이 존재하냐에 대해선 둘째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사물과 이 세상이 실제로 조재하느냐는 것이 사물의 본질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힘들며 앞에서 말한 거와 같이 이 세상의 원리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확실하게 말하고자 한다. 사물의 본질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이유는 자신이 바로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으로 사물과 세상을 판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잘 모른다면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 의도를 벗어나려 한다. 사물의 본질은 이 세상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가 때문에 연구할 가치는 있다.

[4]

■인간의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이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준 결과물인가?

인간의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을 가지고 사물과 세상을 판단한다. 왜냐하면 믿을만한 존재에게 듣지 않는 이상 거짓일지도 모르는 다른 존재의 말을 들을려 할까? 자신의 감각에만 믿는다. 그리하여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는데 판단한걸 가지고 잘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감각이 사물의 본질을 잘 알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것일까? 인간의 감각과 그것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판단은 충분히 잘 활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의 감각이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에는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인간의 것과 생물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 보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과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그 외에도 많지만 생물에게 각각 나름대로의 감각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처럼 감각이 다르고 감각이 다른 만큼 판단과 사는 방식이 다르다면 감각과 판단을 생물이 나름대로 갖춰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인간의 감각과 판단이 진리를 위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라고 보면 된다. (아까 말한 판단이란 가치를 가지는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과학 지식과 생물이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 과정 , 그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는 목적과 판단 원리를 알아낸다면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 쉽게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인한 사물에 대한 자세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이해 못하더라도 사물을 나름대로 지혜있는 판단을 내리면 다음과 같은 자세를 지녀야 한다.

감각 ☞ 경험 ☞ 가치와 의미 부여 중지

경험에서 바로 이것은 성질을 어떤 것이다. 라고 판단을 내려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중지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행위가 주관적으로 사물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편견을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가치와 의미 부여를 중지시키고 바로 그대로 본다면 좀더 신중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다. 가치와 의미 부여 중지 행위는 사물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행동으로 본다. 편견 없이 모든 것을 바라 봄으로서 중립적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인간이 경험으로 얻은 것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없이 그런다는 것은 말이 안됀다. 실제로도 생물들은 생존을 위해 판단(가치와 의미 부여 동시에 판단)을 내리고 인간도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가치와 의미 부여를 내리는 행위는 곧 생존을 위한 것이며 어떤 복잡한 이유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연구할 가치가 매우 높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원리, 가치와 의미 생성과정과 기준 , 인간의 잘못 이유 등을 조금 혹은 그 전체를 알수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5]

(3) 인간이 말들어낸 가치와 의미 탐구

앞에서 말했듯이 생물은 감각을 통해 경험이 만들어지며 그 경험으로 바탕한 가치와 의미 생성부여를 한다고 얘기했다. 가치와 의미 생성부여는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다. 나는 이것을 연구해 왔는데 어떤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렸다. 즉 모든 존재는 계속 존재하기 위해 대응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좀더 나아지기를 갈망하는 것이 권력의지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모든 것이 나아지기를 갈망한다면 왜 나아자기를 갈망할까? 그것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즉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것이지 나아진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니체 사상을 자세히 모른다. 아무튼 나는 존재하기 위해 환경에 대응하는 행위를 '존재의 욕망'이라고 명명했다. 존재의 욕망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며 물론 꼭 그렇다고 볼수 없지만.. 말이다...

[6]

■물질의 가치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물질이 필수적이다. 인간의 생활이 풍족해지기를 갈망한다. 왜냐하면 물질이 부족해 질때는 매우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굶어 죽을수도 있다. 인간은 존재의 욕망에 위협당하면 반드시 더 존재의 욕망을 넘쳐 채울수 있도록 한다. 앞에 말한 것과 같이 부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위협의 가치

"좀더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 물질의 가치에서 반 정도를 해명하고 지금 설명하려 한다.

인간은 생명의 존재 하나 하나로 구성된 대 집단과도 같은 것이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이끌고 오직 대집단 존재를 위해 움직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존재는 존재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워낙 환경에 대응하고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남을 희생하기 위해 이익 행위를 보이는데 이를 계기로 일단 강해봐야 산다는 식으로 변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을 제거할려면 존재를 위협하는 요소가 없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종교계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방식이 절대로 먹혀들리 없다.)

강한자가 약한자를 먹는 것은 존재의 보험심리를 위한 것이고 약한자는 강한자에게 증오는 품을수 있지만 비난할수는 없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7]

■존재의 가치

인간은 반드시 타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당연히 모든 것이 이해와 이익관계이다. 어떤 이는 "그래도 인간에게나 생물에게는 자식과 부모의 사랑이 있으며 인간만 해도 친구와의 사랑, 저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자비심이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의 말이다. 인간은 눈앞의 있는 현실에 대해 오히려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의 영속을 위한 것이고 하나의 행위이며 친구의 관계라는 것은 이해관계와 이익관계이다. 연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역시 이해관계와 이익관계를 둔 것이며 마지막으로 불쌍하다는 식의 동정심같은 것은 존재의 보험 심리와 같은 것이다. 반드시 어떤 존재 행동에는 존재의 욕망에 움직이는 것이며 소용돌이 같은 것이다.

■의미 부여

인간은 편한대로 타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에게 이익이 있느냐와 없느냐로 구분된다.

■할 이야기들 (1)

내가 말한 가치 이론에 대해 반박할 사람들이 많을 줄 안다. 왜냐하면 왜 그렇게 생각할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건 이렇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내가 예를 들지 않아서 이해 부족이 된다. 아니면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8]

■할 이야기들 (2)

나는 상당부분 앞에 한말들 즉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와 의미탐구" 글이 많은 허점이 있는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으며 발전해 나갈 어떤 계기로 본다. 아쉽게도 연구진행중인 것들을 여기에 적을수가 없다...


[9]

(4) 힘과 원리 그리고 존재의 욕망

모든 것에는 인과율의 법칙이 적용되며 아닌것도 드물게 나타난다. 따라서 반드시 탐구하려는 자세를 갖고 임해야 한다. 존재는 힘으로 이루어져 이씅며 힘과 원리로 인해 힘은 조합되고 다른 존재의 힘 때문에 해체하게 된다. 그렇다면 존재는 힘으로 이루어져 있고 힘과 원리로 인해 조합과 체제를 가지게 되는데 나는 이를 존재의 욕망이라 부른다. 존재는 존재하자마자 존재의 욕망을 품는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는 성립할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욕망을 갖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사멸하거나 해체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욕망은 모든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그 끝은 없다.

(5) 끝

본 의도와는 달리 글도 잘 안써지고 생각도 잘 정리가 안됐다. 결국 실패한 셈이다. 앞으로 계속 보완해 가며 써나야 겠다...결국 말은 이렇게 하지만.. 부끄러워 죽겠다..

 

 

2. 삶에 대한 나의 생각

- 삶에 대한 나의 생각 - (2003.12.27)

(1)

진리가 마치 삶의 교과서인듯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이지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싫다. 삶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선택해가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의지를 진리라는 상자로 집어넣으려한다. "이것이 진리이다." 라는 강한 자물쇠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들이 (그들이 말하는 개념인) 정당성이 없다고 비난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이 나의 스스로의 의지를 위협하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 뿐이다. 신을 믿는 자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을 신을 믿습니까? 신을 안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신을 안 믿는 이유는 나의 스스로의 의지가 침식당하고 삶은 신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다(당신을 봐도 알 수 있다.) 당신의 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신이 두렵지 않습니까?" 나는 답했다. "당신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없다. 그것은 오래전 어찌해 볼 수 없어서 한탄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자들의 갈망이 모여 만들어진 거짓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 할지라도 그 신은 인간을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의지의 선택을 부여해 놓고 인간에게 말한다. "너는 노예가 되어라 대신 천국을 보장해 주겠다." 라고 그럴듯한 제안과 협박을 주며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한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신이 싫다. 당신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겠지... 다 안다... 당신과 같은 여려명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신을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대답은 한결 같았다. "불쌍하다고 생각해도 믿으라고 강요할 마음이 없어요. 믿으라고 해도 믿던 안 믿던 자유잖아요? 그들은 지옥에 갈텐데..." 그들은 당신과 같이 어떤 세계관 속에만 머물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당신의 의지의 선택이고 하던 말던 사실이니까요... 다만 증오할 뿐입니다."

(2)

정당성을 외치며 그것이 마치 본질적으로 옳다고 생각해 남의 의지의 행동에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자들을 보면 나의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한 두번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착각을 하고 있으며 나의 스스로의 의지를 억압하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의 스스로의 의지는 이렇게 속삭인다. "저들을 보라...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듯 하다. 그래서 그들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를 착각으로 빠뜨려 버린 저 거짓종교와 어리석은 군중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그들에게 외치는 것이다. "이제 그만 깨달아라.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의 외침의 그들의 귀에 너무나 과분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유뚱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들에게 설교조로 말한다. "정당성은 진리나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무언가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덧붙여 얘기하면 정당성이란 나의 의지이며 무언가를 하기 위한 하나의 방패인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방패를 지나치게 주위로 부터 들어오는 소리를 막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해가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방패가 주위의 소리를 막음으로서 당신의 가능성이란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통해 쉽게 갈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만 하는 자의 문은 문에서 구멍이 되고 끝끝내 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완고한 자가 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라는 방을 수호하기 위해 요새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요새를 만드는 자에게 자주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요?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요?" 그러면 나의 질문을 들은 자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가진것을 보시오... 이것은 진리이요. 나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 나의 삶에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진리를 따르는 삶은 정당한 삶이자 내 행동 또한 정당한 것이오... 하지만 나의 방.. 외부에 있는 것들은 저마다 거짓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 하고 있소.. 나는 그러한 것들과 맞서 싸울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안돼기 때문이오..." 아... 정말이지... 이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째서 진리가 항상 그대의 삶에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어째서 진리가 정당성을 부여해 줄것이라 믿는가? 정당성이란 변명임을 알고 외치는 정당성이야 말로 그대에게 이롭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만약 당신이 진리를 구한다면 그 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펴보라.

 

 

3.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머리말

본인은 2001년 7월부터 철학적 사유를 처음 시작해서 2003년 5월까지 쌓아두어 왔던 사유들을 모아 정리해 쓴 두 결과물이 있는데 첫째는 2003년 5월 28일에 쓴 글인 '나의 생각과 의문들' 이고 둘째는 2003년 12월 27일에 쓴 글인 '삶에 대한 나의 생각' 이다. (첫째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유를 정리한 글이고 둘째는 첫번째 글에서 빼먹은 내용만을 모아 정리한 글이다.) 이 두 결과물을 내놓는 동안 본인 사유에 큰 위기가 닥쳤다. 2003년 5월에 최초로 사유를 정리한 기념적인 사건이 있은 직후 본인은 본인의 철학적 태도가 완성되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쯤되면 게으름을 부려도 된다는 안일하고 낙관론적인 생각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분명 본인의 사유력이 미숙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아직 의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한 잿빚추억의 말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당시 본인의 사유상태를 지적해 준 것이다. 하지만 앞에 언급했듯이 본인의 사유력은 미숙했기 때문에 그 지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본인은 아무런 근거없는(생각없는) 낙관론적인 생각 때문에 사유결집력은 쇠퇴하고 사유의 질이 떨어지고 만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시저'는 본인의 여성에 대한 발언을 계기로 자기 카페에서 본인을 내쫓았다. 어린왕자도 더 이상 본인이 사유발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2004년 2월에 '시저'의 카페에서(DAUM카페) 본인과 함께 운영하고 있던 '어린철학'에 더 이상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글을 적어 올렸다. 이처럼 본인의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지만 다행히도 2004년 2월 말 즈음에 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사유 위기의 원인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 '왜 철학을 하는가?' 에 대해 잊었기 때문이라고 판단. 바로 이 두가지를 되찾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가며 되찾기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런 되찾기 작업을 하는 동안 또 않좋은 일이 발생하고 마는데 그 않좋은 일이란 다음과 같다. 어린철학을 같이 만들었는데 어째서 만들어 놓고 운영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지냐고 따지는 동시에 만약 이에 대한 책임과 변명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어린철학'에 추방하겠다고 '어린왕자' 에게 말하자 '어린왕자'는 마지막으로 남긴 말 때문에 본인에게 쫓겨났다. '어린왕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그곳에서 한 말 그대로입니다. 이젠 더 이상 멍청한 인간들의 글을 읽고 싶지 않거든요. 시저나 님이나 한계가 보였죠. 그 이기적인 성질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모습... 아! 님은 '위선' 빼드리죠. 아무튼 내쫓던지 멀던지 마음대로 하십시요." 나는 씁씁함을 뒤로한채 그가 떠난 2주일 뒤 결정적인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게 되었고 계속 작업에 정진한 결과 결국 그 동안 본인이 갖고 있었던 문제를 깨닫고 해결 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작년에 정리된 사유와 최근의 사유를 모두 모아 정리한 동시에 철학결집력의 붕괴를 막기 위한 사유투쟁의 준비이다.

2004.05.12.Evilution

(1)

"현실은 진실이다. 현실을 추구하고 탐구하기 위해 투쟁하며 투쟁을 위해 현실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자를 나는 '투쟁인'이라 부른다."

본인은 철학적 사유가 최초로 시작된 200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에 접근하기 시작한 2003년 2월까지는 분명 보편적 도덕을 주장하는 많은 철학자들에 대한 신뢰와 보편적 '도덕' 혹은 '진리'가 실재로 존재하며 인간이 이를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 많은 '철학자' 와 '사상가'의 생각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러한 나의 믿음에 의문이 던져지기 시작했고 그 의문은 'D.Hume'의 사상에 의해 크게 커지기 시작했으며 끝엔 'F.W.Neitzsche'의 사상에 의해 의문은 이러한 나의 믿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인간이 보편저기 진리와 도덕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근거없는 독단이였으며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성 결여로 인해 실패해 왔다는 것을 깨달은 본인은 이러한 근거없는 독단 즉 모든 가치와 정보에 대한 의문을 쉽게 던질 수 없는 현실과 어떻게 하면 현실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을 돌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들이 2003년 8월이후에 시작되어 2004년 2월까지 이루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2004년 5월,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볼때 혹시 아에 처음부터 실패할지도 모르는 잘못된 길을 본인은 새로운 시도로 여기고 이를 과감히 진행하기로 했다. '나의 생각과 의문들' 이후 부터 올해 중반까지 시도된 여러 적용된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정리해 주로 '1.거짓과 정당성' , '3.인식과 이성에 대하여'에 서술할 것이며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2.통찰과 엄밀함을 위하여'에 넣을 것이다.

(2004.06.29)


■ 모든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정당성' 이란 무엇인가?

1. '존재의 욕망' 은 외부나 내부의 투쟁속에서 투쟁을 통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만든 일을 진행한다. '존재의 욕망'은 내부의 투쟁을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시키려면 내부를 설득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정당성'을 고안해야한다. 이것이 내부의 정당성이다. 이것 말고도 외부의 정당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외부의 정당성이란 존재의 욕망의 의도를 위해 외부를 설득시키기 위한 개념을 고안해내는 것을 말한다.

2. '정당성'이란 개념은 주로 어떤 것에 '옳다.' 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어떤 행위의 방향 혹은 결정을 정하는데 쓰인다.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방향과 결정에 '옳다.'라는 정당성에 의한 판단이 필요한 이유는 어떤 행위도 나아갈려면 사고체계(의식, 이성)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정당성'이란 마치 외부의 법칙인 것처럼 인식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매우 잘못되었다. 1번과 2번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당성'이란 내부의 인식과 가치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당성'이란 개념만큼 실천적이고 보편적으로 널리쓰이는 개념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그만큼 어떤 사고적 행위엔 반드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당성'이란 개념의 의미가 안들어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헌데 '정당성'의 본질적인 목적에 의하면 반드시 목적 혹은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려면 다른 '정당성'이 틀렸다는 주장(투쟁)을 펼쳐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정당성'을 보호하는 동시에 다른 정당성을 쓰러뜨리려고(혹은 설득이라고 불림) 몇가지 내부적 도구(혹은 외부적에도 포함됨)를 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믿음 : 자신의 정당성을 보호하기 위해선 그 정당성을 뒷받침 혹은 관련되어 있는 정보를 중요도 순서대로 믿음을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보가 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외에도 믿음이 주는 의미인 '참'은 그 형태와 강도가 다르지만 만약 강도가 심하다면 어떤 명백한 혹은 자신의 능력 내에서의 수준의 증거가 발견된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 거짓생산 : 거짓생산의 현상의 원인은 두가지인데 첫번째, 믿음이 극단적이거나 강하다면 이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치명적인 적들인 다른 정보의 정당성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믿음은 본래 목적인 정당성을 아예 바꾸어놓는 현상까지 벌이는 것이다. 두번째, 굳이 다른 정당성을 무력화시킬려고 믿음이 나서는 일이 아니거나 믿음은 없고 정당성만 있을 경우 자신을 뒷받침하고 있는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왜곡 작업을 벌인다. 하지만 정당성이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할 경우(이는 흔히 오판이라 불리는데) 첫번째 원인의 결과가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따라서 정당성이 어디에서 왔으며 이를 결코 잊지 않고 존재의 욕망에 충실한다면 결코 정당성의 도구가 벌이는 거짓/왜곡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기까지 내말을 이해했다면 분명 정당성이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닌 도구적 개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 열등인자의 승리를 위하여 - 정당성에 대한 저항

본래 '정당성'이란 존재의 욕망을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존재의 욕망을 위해선 '정당성'에게 신경을 쓸 수 박에 없었고 이 과정에 어찌된 일인지 존재의 욕망이 아닌 정당성 중심으로 행위가 돌아가게 되어 버렸다. 정작 중요한건 정당성이 아닌 존재의 욕망이라는 올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정당성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정당성이 만들어낸 거짓과 왜곡은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정당성으로 인한 부당성은 두가지 피해를 주는데 내부적 정당성은 자신을 거짓을 말하게 하고 위선자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어보자 많은 대중은 불쌍한 이웃의 모습을 보면 불쌍하다고 동정심을 내던지고 약간의 성금을 하거나 그 이웃을 도와주는 사람을 보고 분명 선량하다고 칭찬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언가의 정당성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헌데 막상 자신의 존재의 욕망에 위협되는 요소에 부딪친다면 그들의 안에 있는 다른 정당성이 표면으로 표출되어 나온다. 장애인시설 설립반대가 그것이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땅값이 떨어진다나? 고아원 출신의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결코 그들을 알아보기전에 고아원출신은 불량한 놈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배척한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래선 안됀다. 나서서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한다." 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작 자기가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데는 인색하게 대부분이다.. 나는 인간이 사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량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많은 투쟁의 결합체이지 단순한 단세포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아는가? 단세포 조차도 존재의 욕망적인 투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결국 인식하려는 자들은 결코 하나의 인식으로 봐서는 안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투쟁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여러 인식을 결합해 다양하게 보려는 정신! 그리고 우리는 영화에서 나오는 열등인자들이 승리하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모차별을 경멸하지만 정작 영화에선 "잘생긴 주인공은 곧 우등인자여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한 외모차별을 영화에서 맛보자." 라는 생각으로 감상한다. 그래서 항상 못생긴 사람, 얄미움 받는 사람, 악인은 항상 불행하고 편견적인 설정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정당성의 부당함에 고통받는 현실의 비유적인 거울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열등인자가 영화에서 변화되는 꼴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그리고 주인공이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대 진정한 불행속에서 나오고자 하는가? 인간세상을 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앞서 말한 위선자의 껍질을 벗어던져라. 그리고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열등인자가 삶의 승리를 얻는다는 희망을 품어라. 열등인자의 승리를 위하여!

■ '투쟁인' 대 '가면쟁이'

인간세상의 수많은 철학자는 내부적인 사유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유인 외부적 사유와의 투쟁을 통해서(정당성 혹은 존재의 욕망에 의한 투쟁) 자신만의 사유를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본인은 철학을 가르켜 '사유투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인간에 의한) 현상에 대해, 사건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가? 불행 그리고 진실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사유투쟁을 이해하기 전에 본인이 제시하는 두가지 종류의 인간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현재 세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면쟁이' 두번째, 이와는 반대로 소수의 사람 혹은 없는 인간인 '투쟁인'에 대해 알아보자.

가면쟁이 : 신념(혹은 강한 신념), 정당성에 사로잡혀 그것을 위해 있는 사실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왜곡한 사실을 잊어 그것을 진실인양 떠받들어 행동으로 실천으로 옳기며 여러 불행을 일으키나느 자 혹은 그러한 성질에 가까운 자이다. 대부분 이러한 자들은 능력도 별볼일 없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세상을 옳게 바라볼줄 모르는 인간이다. 심지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야기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심지어 이렇게 생기는 불행에 대해 관심도 없다. 단지 자기가 옳으면 다른 정당성이 부정해보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그것을(다른 정당성) 가진 자를 미워하고 미워하는 것이 지나쳐 그것이 가진 가능성과 사실을 부정한다. 따라서 진정 이기적인 인간이 바로 '가면쟁이'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투쟁인 : 자신의 감정과 정당성에 휘둘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항상 의심하고 감시의 눈으로 빠짐없이 지켜본다. 내부와 외부에 의한 왜곡과 거짓정보가 없는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잘못되었다면 투쟁으로써 이를 고쳐나간다. 모든것에 공평하게 평가하며 어떤 것도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항상 자신이 한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시도해 본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 존재의 욕망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투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과 가치를 완벽히 분리하고 모든것에 철저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진실한 자이며 자유로운 자이다.

(2)

본인의 사고능력은 소위 말하는 보통사람의 것 보다 낮다. 관심대상이 아니면 집중하기 어렵고 평소 무언가를 하면 딴 새각이 항상 나는 형편없는 집중력, 본인의 사유결과물을 정확하게 표출하려 하면 당장에 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언어표현력, 어떤 기억을 꺼내거나 외우는데 시간이 남들보다 더 걸리는 기억력, 어떤 상황에 의해 감정이 크게 일어나 이성적 작업을 못할 정도로 방해하는 약한 통제력 등 이런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성적 작업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본인은 이 문제들을 해결할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어느 정도 본인의 노력 덕분인지 몰라도 글의 표현력과 사유체계의 기초는 형성이 되었지만 체계적인 글을 못쓴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절실히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스스로 내놓은 것이 바로 '수정작업' 이라는 글작성 방법론이다. '수정작업' 이란 글의 전체적인 내용흐름을 구상해놓은 다음 생각나는 대로 적고 글을 읽어 표현해내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글을 수정하거나 삽입 혹은 생략을 해서 다시 글을 읽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의도한 내용이 될때까지 앞서 말한것을 반복한다. 이 '수정작업' 은 비록 본인의 선천적 능력 덕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론이긴 하지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와 글작성을 가능하게 이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참고로 2003년 5월말에 작성된 '나의 생각과 의문들' 이란 글은 20번의 '수정작업' 을 통해 체계적인 글로 완성을 볼 수 있었다.)

2004년 5월 중순당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정상화 하는데 성공한 본인은 성공하는 과정에서 모아 놓은 사유결과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글로 옳기려는 작업을 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워낙 개인적인 일들로 생겨난 정신적 고통 때문에 감정이 불안정하고 이에 의해 이성적작업이 완전 불가능하게 되자 작업을 실행으로 옳길수가 없었다. '마르시안' 님과 'SelfExistence' 님에게 사유는 정리되었고 바로 글로 옳길거라고 말해서 이 말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불안정한 감정 상태 때문에 체계적인 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은 본인은 매우 괴로웠고 결국 글을 쓰기로 계획한지 2개월후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고 나서야 문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렀기 때문에 당장 써서 공개해야 한다는 '수정작업' 은 무시하고 그냥 한번에 써서 완성을 보았다. 이 글이 바로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 1. 거짓과 정당성' 이다. '수정작업' 을 거치지 않은 탓에 당초 글을 계획했던 것과 어긋나고 '설명' 이 빠져 버린 '주장' 만 있는 글이 되었는데 본인은 이를 염두해두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 '2. 통찰과 엄밀함을 위하여' 란 글에 '가면쟁이' 와 '투쟁인' 이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글을 상당수 포함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의 주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04년 08월 13일 - Evilution -

■ 모든 '정당성' 과 '믿음' 에 대한 반박

"거짓과 어리석은 생각에 의해 생겨난 수 많은 불행과 원한이 지배하는 어둠속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이를 인식하고 진실한 진리를 찾으려 하는 자는 탐구와 사유라는 도구를 이용해 이곳 저곳을 헤매인다. 헤매인 끝에 찾은 '자유로운 정신' 이라는 보물을 받아들이면 현실이 곧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현실을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인식을 통한 정보에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가치를 심어둔다. 가치의 동업자인 '정당성' , '감정' , '거짓' 이 무언가를 확실히 알아두어야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정신을 통해 진실한 인간 더 나아가 투쟁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끝 (2004.09.29) -

 

 

4.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 보충설명

[머리말] : 나의 철학이 두번째로 발전하는 계기의 기초

(1)

2004년 05월 12일에서 2004년 09월 29일에 작성된 나의 철학을 요약 정리하고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 정성을 들여 쓴 글인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란 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대부분 부정적이였다. 내가 그 부정적인 의견들을 기억해내고 있는 것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가면쟁이는 단순히 사기꾼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 "현학적인 표현만 머리속에 집어넣었다. 헛 배웠군." , "이것은 단순히 너의 일기장을 의미할 뿐이야." 그 의견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 내가 나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하지 못했다. 나는 이에 대해 화가나고 기분이 상하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려고 결심한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 이유는 지금까지 나의 철학을 요약정리한 글인 세가지 글("나의 생각과 의문들" , "삶에 대한 나의 생각" ,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을 모두 묶어 이에 이전에 미처 설명하지 못한 것을 보충설명하고 나의 철학이 두번째로 발전하는 계기의 기초로 만들 생각이다. 세번째 이유는 그 동안의 나에 대한 오해와 나의 철학을 요약정리한 글에 대한 오해를 없애버리기 위한것이다. 이 두 오해를 없앨 만한 내가 제공하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글 말고 지금까지 썼던 세가지 글인 "나의 생각과 의문들" , "삶에 대한 나의 생각" ,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등의 서로 간의 글 수준차는 나의 철학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글 작성 능력과 논리능력의 향상 과정을 나타낼 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철학을 하기 시작한 2001년 07월 이후부터 "나의 생각과 의문들" 이란 글을 쓰기 전까지만 철학을 하고 그 이후엔 생각을 정리하고 그 정리한 생각을 글에 옮겨 적는데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2. 나는 철학입문서만 공부했지 전문적으로 깊게 공부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마치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인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란 글을 읽어보고 깊게 공부한 것인양 나를 대한다.

3. 나의 진정한 철학의 시작인 2001년 7월엔 사유에 논리가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논리보단 감정만 앞섰다. 그리고 현재 쓰는 글 말고 지금까지 나의 최고 수준의 글인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란 글과 무묘앙에오의 철학과 비교해보았을때 별 차이가 없고 그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글 문장의 변화만 있었다는 것.

4. 내가 하는 노력과 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용없어 보일지라도 나는 반드시 하고 만다. 왜냐하면 오직 참을 추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5. 내가 처한 상황과 나의 철학을 어느정도 대변하는 글이 있다. 이것은 이성도라는 사람이 나와 함께 어린철학을 만들었을때 쓴 소개하는 글중의 일부이다. 그 글은 다음에 있다.

"특수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과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이라는 것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수하다는 것은 경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일 뿐이며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는 쉽게 경험할수 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쉽게 문제 풀리는 것이 아니듯 일반적이라고 하여 쉽고 특수하다고 하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가치라는 것 역시 필요한 양에 비해 생산되는 양이 적게 되면 높아지는 성질의 상황도 있지만 앞의 특수한 상황과 일반적인 상황의 가치의 차이는 경험자 본인의 마음과 현실적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보면 별로 비중 있는 문제가 아닌 것 본인의 위치에서는 굉장히 비중있는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일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 글은 또 다음에 언급할 것이다.

네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사유투쟁' 을 위한 준비" 란 글을 쓴 이후 나 스스로 공부를 마치기 전까지 절대 나의 철학을 요약정리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위와 같은 이유에 대한 압박감과 당분간 ADHD에 의해서 공부를 제대로 할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이런 약속을 깨버리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이 글은 그 동안 발전이 없었던 나의 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새로히 발전하는 두번째 계기의 기초를 마련해 줄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쓴 이후 나의 철학 요약정리글을 계속 쓸 생각이다.

2008년 06월 27일 , 정유진(鄭楡陳)

(2)

나는 내가 앓고 있던 문제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 남들처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들은 내가 앓고 있는 문제들에 관심도 없고 존재하는지도 몰라서 언제나 본인탓에 의한 잘못으로 공격하곤 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나의 문제를 알아낼 단서를 군복무 시절 ADHD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에서 얻어냈고 그 즉시 깨달았다. 이 글을 쓴 이후 병이 완치된다면 그때야 말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2008.07.11 , 정유진(鄭楡陳)

제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존재에 대한 참을 알기 위해 생각의 '체계, 논리, 원칙'을 갖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에 의문과 비판을 행한다. 철학을 행함으로 인한 결과물을 어떤 것이든 행동해서 체험해봐야 참 혹은 거짓 임을 앎으로써 철학은 완성되며 어느 정도의 수준에 부딧혀 한계를 가진 참을 얻어 멈추거나 그렇지 않다. 멈추는 곳에서 사상이 탄생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의문과 비판을 자신의 극한까지 행한다는 것과 똑같다. 그리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은 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참의 핵심을 잘 이해할 수록 자신의 생각이 확실성을 띄며 참이란 개념들이 단순해지고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진다. 그래서 참은 단순하다. 거짓으로 가까워질수록 참의 핵심을 잘 이해할수 없으며 확실성과 개념의 단순성에서 멀어져 어떤 것이나 복잡해지는 것이다. 인류세계의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 만들어준 '거짓된 상징' 과 '거짓된 생각' 을 받아들여 철학없이 살다가 죽는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내의 인류 역사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것이다. 언제나 그들은 극한의 의문과 비판으로 얻어낸 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위험한 것으로 취급하곤 했다. 그러한 인류세계에는 참을 추구하고 철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위험하고 힘들기 때문에 또, 생존에 손해본다는 이유로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과 참을 외면한다. 그래서 인류세계는 '거짓된 상징' 과 '거짓된 생각' 이 널리 펴져 있어 인류의 삶에 거짓이 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자기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참을 몰라도 된다. 대신 가면쟁이들이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움직여가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참을 조건없이 열렬히 추구하고 사랑하는 자에겐 반드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철학을 하는 참된 철학자의 길을 걸어야 하며 동시에 투쟁인이 되어야 한다. 투쟁인은 가면쟁이들이 만들어낸 것들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한편 가면쟁이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사기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가면쟁이는 어떤 개별적이고 특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참보단 생존과 거짓을 추구한다. 가치와 개성이 강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다. 그것은 꽉차있다. 반면 투쟁인은 가면쟁이의 대립자가 아니라 가면쟁이 상태의 부재를 말한다.

- 존재란 무엇인가?

우주는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 존재란 개념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철학은 모든 것을 다룬다. 존재란 개념을 크게 네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제 1은 '있다.' 이며 제 2는 '변화' 이며 제 3은 '관계' 이며 제 4는 '성질' 이다. 이 네가지에 의해 존재의 가치와 개성이 결정된다. 존재는 한계가 있다. 일정하게 자신을 유지하여 생존하려 하며 고통을 회피한다. 생존을 위해 변화 하고 점점 생존가능성을 늘리려고 모든 행위를 하는 것을 나는 '존재의 욕망' 이라 부른다. 그런데 만약 존재가 한계가 없다면 그것은 존재의 원리 부재상태를 가진 존재일 것이다. '존재의 욕망' 을 포기한것이다.

- 대한민국 철학계의 현실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철학을 단순히 점, 사주팔자에 대한 운명학, 관상, 생각, 단순히 현실과 사실에서 멀어진 학문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들의 편견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한민국의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알려는 노력이 없다. 철학을 해선 직접적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둘째, 대한민국의 철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대중들에게 '철학은 이러한 것이다.' 라는 것을 알리는데 관심도 없으며 알려주는 노력을 거의 안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의 철학계는 매우 열악하다. 철학책의 판매부수의 적음, 철학에 대한 편견과 인식, 철학하는 사람들이 적음으로 인한 철학연구의 어려움, 철학이란 학문에 대한 지원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너무 적다. 이러한 참을 외면하고 자기 할일만 할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2009년 01월 08일, 정유진(鄭楡陳)

제 2장 참에 대한 열정

참은 존재와 존재의 감각을 통해 생각을 해서 만든 결과물이 존재와 논리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반면 거짓은 존재가 없는 것과 그 결과물이 존재와 논리적으로 불일치 하는 것이다. 참과 거짓은 그와 관련된 기초적인 개념의 단어이기 때문에 이 둘을 사용한 것이며 예를 들어 진리, 진실, 사실 같은 단어들은 서로 사용하는 의도와 이유가 다르지만 같은 뜻이기 때문에 그리고 항상 이들을 대신해 순우리말이란 이유로 참과 거짓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참을 추구하고 참에 대해 열정을 가진 존재 혹은 투쟁인은 자기 생각의 것들을 모두 허용함으로써 이것들에 대해 탐구와 관심을 행하며 존재에 대한 탐구를 할때 편견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 참을 위해서 무언가 버릴줄도 알고 진실된 태도를 유지한다. 상황에 처했을때 참을 구하기 위해서 외부의 것보다 먼저 자신의 것을 변화시킨다. 이것들을 행함으로써 참에 가까워져 마침내 참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 말, 행동이 각각 다르다. 게다가 어떤 것은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정당화한 것들에 대해 자각을 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또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죽음이라 불리는 변화를 반대하며 싫어한다. '내가 어떻게 될까?' 라는 죽음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이성도의 말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에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생존과 유지를 하기 위한, 존재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투쟁인은 다르다. 참된 '참에 대한 열정과 태도' 를 가지게 되면 사는 것이 중요한 만큼 죽는 것도 중요하게 된다. 투쟁인이 되어 가는 과정속에선 참을 알지 못하는 것을 유일하게 제일 두려워 하거나 싫어한다. 이 모든 말을 종합해 한 명제로 압축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참을 추구하는 존재는 참을 조건을 따져 구하면 거짓을 얻을 수 있고 무조건적으로 구하면 참을 얻을 수 있다. 존재는 존재일 뿐이다. 존재 자체엔 좋고 나쁨, 선과 악이라는 거짓된 있지도 않는 존재는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자신이 만든 편견과 망상으로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가한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존재에 대해 해가 되는 행위를 하면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이 존재에 대해 안다고 말들을 한다. 그래선 참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자신의 성질을 다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자연이란 존재를 들자면 상대방이 좋든 나쁘든 성질에 의해 작동한다. 산에 큰 돌이 굴러가는데 선인은 피하고 악인을 치는가? 아니지 않은가? 투쟁인은 날씨를 좋다 나쁘다 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을 선하다 악하다 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참은 그 투쟁인에게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신약성경 구절을 좋아한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는 내가 하려는 말과 같다. 반면 가면쟁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은 참을 원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참으로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며 이를 이루려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행복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면 대부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모든 사업들은 모두 망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의 불행에 의한 여러가지 활동에 의해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인류사회나 어떤 단체 그리고 전 우주적 집단적인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존재는 과연 고통없이 활발히 움직일수 있을까? 그럴순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이끌려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통과 불행에 의해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존재에게 이익을 보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 그 존재가 참을 알 수 없도록 거짓을 유포시켜 참을 알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어, 그러한 거짓들 중에 하나가 생명존중사상과 인명존중사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을 중히 여긴다면서 똑같은 생명인 바퀴벌레를 때려잡고 자신들이 직접 느끼지 않는 미생물을 인식하지 못한채 무참히 살해한다. 일반 인류사회에서는 비전시때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법으로써 엄히 다스리지만 전시때는 전쟁터에서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계급상승과 상이 내려진다. 이 무슨 모순과 거짓인가? 참을 알고도 참을 외면하고 거짓을 선택하는 것은 가면쟁이적이다. 참을 모르면서 거짓은 알고 자신은 참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도 가면쟁이적이다. 거짓을 참으로 미화하는 것도 가면쟁이적이다. 참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도 가면쟁이적이다. 가면쟁이들이 별로 자신에게 하지 않았던 질문,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2009년 01월 24일, 정유진(鄭楡陳)

제 3장 누가 그것들을 인정 안할 것인가?

1. 주느비에브 프레스의 '남녀평등이란 무엇일까?' 란 책에 대한 비판

실제로 오늘날 과학이 밝혀낸 남녀간의 신체구조와 유전자가 다름에 의한 행동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남녀 각각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에게 갖추어진 조건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 행동을 펼치는데 남성은 자손생산을 여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결하므로 되도록이면 그 대상을 많이 하며 자신의 성에 대한 힘을 바깥으로 분출시키는 형태이다. 대부분 여성에 비해 남성이 무엇이든지 훨씬 일을 잘하고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이유가 남성이 근본적으로 여성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대한 격렬한 의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성욕이 여성에 비해 넘치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는 입장에서 여성에게 잘대해주어야 하는 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성욕을 조절할 수 있고 자손생산을 하기 위해 남성으로부터 유전자를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성에 대한 힘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형태이다. 때문에 남성이 여성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만큼 여성은 남성을 상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게다가 남성은 여성의 마음에 들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쟁과 행동을 펼치는데 여성의 입장에선 자손생산을 자신이 직접하는 것이여서 되도록이면 외부의 것들 중에 자신이 제일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선택하려든다. 여성 취향의 만화 속의 남성들이 별 보잘것없는 여성을 차지 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즐기는 것도 자신보다 못한 남성보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남성을 선호하고 지배받길 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여성은 어차피 선천적으로 성에 대해 승리하는 입장이다. 이것이 여성이 남성을 배후조종하는 원리인것이다. 승리한 여성은 자신의 성의 힘이 안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관심사는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매력에 의한 힘 그리고 안전한 자손생육이다. 이 모두를 위해선 노동과 물질이 필요한데 자신은 이미 승리한 입장이여서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남성에게 이를 시킬수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에 대한 여성의 혜택과 힘든 노동제외 그리고 재화의 손쉬운 획득을 할수 있다. 그래서 여성은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에 기여한바가 거의 없다. 서양의 산업혁명 시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고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행동을 가해왔다고 주장하지만 이 모든 일에 대한 원인과 책임은 자손을 생육하는 입장을 가진 여성 자신에게 있다. 각 시대의 상황에 맞게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하기 위해 남성에게 끊임없이 요구해왔고 남성은 이를 맞춰 들어준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여성이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남성다움의 기원이며 남성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여성다움의 기원이다. 예를 들어, 생존에 필요한 농사나 기타 다른 노동일에 필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노동을 하는 남성생산을 중요시 여겨 남아선호가 생긴것이며 사회적 혼란의 방지를 통한 효율높은 생산을 위해 남녀가 따로 해야 할일을 정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이전에도 분명 여성은 사회진출이나 남성들처럼 외부에 향한 일들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안한것뿐 결코 남성들이 필사적으로 여성들의 행동을 막아왔던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간간히 보이는 산업화 시대 이전의 여성 위인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사회진출과 그것을 위한 여러 소수 인권에 대한 보장 특히 동성애같은 것 그리고 평등을 부르짖어 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나같이 참을 추구하는 자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 거짓부렁인 것이다. 그들은 남성을 점점 지치게 만들어 가지고 있는 힘을 빼앗고 정정당당하게 여자로서 남자와 대결해 싸워서 쟁취하려는게 아니라 남녀 평준화 시킨뒤 자신의 경쟁자인 우수한 자손생산능력을 가진 여성의 힘을 떨어뜨리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들의 주장에 겉으로 동의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원치않는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예를 들어 그들이 주장하는 바들을 실행에 옮겨 이룩해낸다면 인류문명자체에 생산성이 떨어질것이 불보듯 뻔하다. 특히 동성애같은 것을 받아들이면 동성애가 사회전체에 영향을 미쳐 않좋은 결과물이 나올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성애를 경계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남성보다 더 높은 생산을 기계가 대신하기 때문에 여성이 관심과 의지만 가진다면 충분히 행동으로 옮겨 뜻하는 바를 이룩할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과거의 모든 습관들은 고쳐져야 하지만 아직도 여성들은 자손생육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해야 하는 행동들을 남성에게 점점 더 요구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지나쳐 요구의 한계가 부딪친다면 분명 남성들은 분노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 자체가 오길 원치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여성은 자기 잘못을 남성에게 덮어씌우는 비열한 행동을 그만두어야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여성들과 여성적인 것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와 경계를 가지는 이유는 그들의 문제해결에 대한 무찌르는 것보다 수용하는 태도를 능동보다 수동을 추구하는 것을 가장 경멸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여성적인것에는 정의와 참을 찾아볼수가 없다. 언제나 남성위에 군림하는 여성들의 참은 밑바닥인 남성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젠 여성해방이 아닌 남성해방을 부르짖어야 한다. 아무튼 프랑스 철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페미니즘에 대한 철학을 '참된 남녀평등이란 무엇인가?' 란 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간단명료하고 논리있게 설명했으나 내용 가운데의 주장을 살펴보면 뒷받침하는 근거가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페미니즘의 가치관과 개념에 유리한 입장만을 위주로 내용의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시켰다. 게다가 철학적인 '왜 그러한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 그리고 모든 가치관과 개념에 구애받지 않은 참을 외면 함으로써 이 책은 거짓을 참이라고 여기게 만들어 페미니즘을 근거로 행동하게끔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용하려는 자 쪽에서는 참을 알고 있지만 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해 거짓을 참으로 꾸미고 이용당하는 자는 평소에 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매우 갈구하고 열렬히 행동한적이 없으면서 이 꾸민것을 참이라고 믿게끔 만든 자신의 행동들이 성립되기 때문에 페미니즘과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 역시 가면쟁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연구의 부재로 인해 비판적인 의문을 갖지 않음으로써 이 책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여길 확률이 높다. 실제로 그러한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서점인 Yes24에 이 책에 대한 평가글들을 전부 내가 확인해본 결과 모두 긍정적이였다. 그래서 이 책은 페미니즘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철학책으로써 참에 대한 열정과 열렬한 연구의 것들이 아닌 그들만의 사상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남성들이 이룩해놓은 문명이 망가지는 것을 막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여성들의 하찮은 거짓부렁들을 박살내야 하는 것이다. 누가 그것들을 인정 안할 것인가?

2009.03.17, 정유진

2. '게리 채프먼' 의 '5가지 사랑의 언어' 란 책에 대한 비판

이 책의 저자인 게리 채프먼은 기독교 신자이자 20년 넘게 한 결혼상담가이고 박사로 불려진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수 많은 사람들과의 상담경험을 통한 여러 사례들 그리고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문제에 대한 각 상황에 맞는 해결방책들을 책 내용에 넣었다. 어느정도 참에 관계된 하에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상대방에게 가하면 긍정적인 상황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저자 자신의 의도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주로 부부관계 및 기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책 내용의 수준은 어떤 사람사회이든지 그 안의 대중들이 어느정도 평균적으로 경험하고 생각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일부분적인 참이였다. 게다가 대중수준의 이하가 아닌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여서 대중수준 이상의 수준을 가진 자 혹은 진정한 철학을 하는 자라면 이 책이 얼마나 별 가치가 없는 책인지 읽어보면 알게된다. 대중들 자신들이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이미 알았거나 가지고 있는 조건하에 조금만 노력을 하면 찾을 수 있지만 깊게 철학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안하는 이러한 상황속에 시중에 나와 있는 대중수준에 이해될수 있고 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듣기 좋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는 현상은 그 대중들이 진정한 철학없음 그리고 능동적인 의지가 없음과 저급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최근까지 이와 같은 수준의 책은 시중에 많다. 정말 어렵게 철학을 해서 얻은 참을 담은 철학책은 대중들이 그것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음과 이해할 확률이 낮은 만큼 잘 안팔리는 것에 반해 아까 말한 대중수준의 책은 실제로 인기가 많아 많이 팔리고 유명하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지지받고 유명한 것이라고 해서 꼭 실제로 훌륭하고 위대한 것은 아니다. 대중들은 철학을 잘 안할려고 하고 자신들의 상식하에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대중 스스로의 대중수준에 맞춰진 문제해결로 행동하니 당연히 문제가 해결될리가 없다. 그러므로 소수의 경우는 이 책의 자신의 상황에 딱 맞는 내용이 아니라면 이 책 내용대로 행동할 의지가 있어 행동으로 옮겨도 잘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이 주장하는 여러 것들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고 그마저도 일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책이 주장하는대로 모든 존재들에게 적용이 된다면 이 책은 모든 존재들에게 지지받는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정말 대중들에게 필요한 건 이런 저급한 책이 아니라 철학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언제나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괴로워하다 죽을 수 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가면쟁이적 현상이자 대중의 자업자득이며 내가 이성도의 어린철학 개설글 중 일부분을 언급한 ""특수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과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이라는 것보다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수하다는 것은 경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일 뿐이며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는 쉽게 경험할수 있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라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책에 관련된 현상에 열심히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누가 그것들을 인정 안할 것인가?

2009.03.17, 정유진

3. TV 만화영화 '흡혈희 미유' 의 인물관계에 대한 분석

두 일본인인, 히라노 토시키와 카키노우치 나루미의 공동 원작인 '흡혈희 미유' 란 만화책을 대중적인 TV채널에 방영하기 위해 맞춰 제작된 이 만화영화는 총 26화로 구성되어 있고 먼 옛날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에 의해 신마라는 신과 악마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인간에게 지상을 내주고 자신들은 어둠 공간에 터를 잡아 잠을 청해 자신들의 잠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지상위에 아직도 활동하는 신마를 어둠공간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감시자라는 신마에게 맡겼다. 라는 세계관을 기본으로 깔아 사명에 의해 감시자일을 맡게된 흡혈귀 소녀 '미유' 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진행시켜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이용하는 신마와 인간들의 갈등 미유의 신마퇴치에 의해 생긴 감정과 사랑 그리고 친구들의 우정을 표현해냈다. 여기서 주목할점은 각 화의 공통점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 만화영화에서 표현된 세계엔 다른 곳은 몰라도 최소한 일본내에서 만큼은 일부 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곤 국민 대부분은 물론 정부마저도 신마와 감시자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다. 도저히 평범한 사람의 상식수준으론 이해될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일을 벌리는 신마와 감시자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수준을 꿰뚤어보고 눈앞에 알 수 없는 일을 보고도 모른체 넘어갈수 있도록 교묘하게 상황을 나름대로 조정한다. 그리고 신마와 관계된 사람과 이 알 수 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 사실을 파헤칠려는 사람은 반드시 파멸적 상황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가 H.P.Lovecraft의 소설속에 나오는 세계관과 닮아 있다. 도저히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참을 알게되는 상황이 오면 파멸 아니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항상 참은 알 수 없게 되버리고 사람은 이 넓은 우주의 여러 존재들중의 하나에 불과하고 언제든지 강한 존재에 의해 무참히 없어질 수 있다는 참을 모른채 사람의 세계는 항상 질서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직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 세계는 그 사람들처럼 비극적인 파멸 혹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사명에 의해 어린 소녀인채로 불로불사의 몸을 가지게된 흡혈귀 미유는 수 많은 시간속에서 신마퇴치를 여러번 하는 과정에 이러한 사람의 나약함과 어둠을 많이 보아왔던지라 인간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로 대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파멸적 상황에 놓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피를 빨아 대신 영원한 행복의 꿈을 주는식의 나름대로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그 영원한 꿈을 얻은 사람은 결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참과 현실을 직시 할 수 없다는게 문제다. 그런점에서 미유라는 존재는 정의가 있다고 볼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평범하지 못한 조건들에 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작품속에서 다니고 있는 학교내의 3명의 친구들과 교제하면서도 나중에 작품 후반에 원치않게 친구들을 위험한 상황에 빠져 결국 그 사람들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치사토라는 친구는 미유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부어 미유에게 우정과 호감을 갖게 하지만 작품 후반에 적으로써 신마라는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주인공인 미유가 친구인 치사토를 어쩔수 없이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그런 세명을 제외한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과거에 적으로써 싸워 자신에게 흡혈당해 심복으로서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한 서양신마 라바와 토끼형태의 동료 신마 시나 그리고 경쟁자 레이하뿐이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명속의 영원한 시간에 의해 외로운 미유는 자신의 심복이자 서양신마인 라바에 애정을 갖는다. 이러한 관계는 잘생기고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남자와 함께하고 영원히 아름답고 젊게 살고 싶다는 여성의 욕망을 잘 나타내준다. 한편 경쟁자 레이하는 자신이 감시자로서 능력을 각성하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감시자로 각성하기 전인 미유를 지키느라 목숨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미유를 마음속으로 평생 증오한다. 때문에 항상 미유와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작품 후반중에는 미유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지만 결국 패해 목이 잘려진 채 나중을 기약하며 후퇴한다. 싸움에 의해 사람의 세계는 어느정도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하는 아무런 보상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이런것을 볼때 자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고 피해를 받는 다는 생각은 결코 망상이 아니라 중요한 통찰인것이다. 만화영화같은 작품은 언제나 현실을 어느정도 반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속에 자주 나오는 주인공급과 조연급의 인물들을 주목한게 아니라 그들에게서 벌어져 파멸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것이 투쟁인의 방식이다. 누가 그것들을 인정 안할것인가?

2009.03.17, 정유진

4. TV 만화영화 ‘흡혈희 미유’의 인물관계에 대한 분석 (2)

만약 이 작품에도 깊이 있는 철학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자에게 강한 비판을 할 것이다. 철학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깊이 있는 철학이란 개인의 능력과 사람의 사회를 비교한 뒤에 내린 상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지구의 평균적인 대중들의 수준을 못 벗어 났기 때문이다. 작품속의 현상들이 실제 지구인이 살고 있는 영역의 현실에도 일어 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가장 첫번쨰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주목할 점은 작품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각할 줄 아는 존재들이 작가의 철학없음에 의한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한 의인화와 철학이 없음 같은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뻔한 이야기는 내 말을 잘 이해했다면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의 내용 중에 열등인자의 승리를 위하여 란 글이 이 작품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절대 단순히 상황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작품속에는 투쟁의 길도 없으며 투쟁인도 없다. 누가 그것들을 인정 안할것인가?

2009.05.18, 정유진

5. 이성의 원리

이성의 원리란 단순히 지구인의 생각하는 원리와 그것을 바탕으로한 지구인 수준의 인공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의 원리의 부산물을 보고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성의 원리는 투쟁의 길을 기초로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2009.05.18, 정유진

제 4장 그러므로 어둠은 어둠속에 갇혀야 한다.

- 자아의 역할

가면쟁이와 그 단어의 일부인 가면은 개체적인 뜻이 아니다. 핵심적이지만 가면은 단순히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매우 포괄적이고 이 우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아는 생존을 위해 떄론 타협하고 거짓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의 길을 걷기 위해선 반드시 자아를 반대하고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란 글 중의 일부인 ‘모든 정당성에 대한 의문’ 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 투쟁인

투쟁인은 결코 투쟁의 길을 걷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그것을 마친 존재이다.

- 참이란 무엇인가?

참이란 그 자체가 참이며 만약 개념안에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무조건 거짓된 개념이다. 참은 결코 싸우는게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 투쟁의 길

자아는 생존을 위해 자기 주인이 잘 모르게 하고 거짓을 믿도록 하는데 이것은 이미 내가 ‘삶에 대한 나의 생각’ 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만약 자신의 자아 때문에 거짓을 믿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를 확인할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를 정해 끝까지 계속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 어떤 예외나 감정상의 그 무엇도 개입해서는 안됀다. 정말 정직하게 의문을 밀어붙이기를 했다면 자아가 숨기려 했던 진정한 의미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이다.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관심없어 할텐데 만약 이를 지키고 싶다면 진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광적인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이게 바로 무묘앙에오가 말한 진실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광인이다.

- 참의 자유정신

모든 참을 갖고 참된 정신상태를 지녔다면 이미 투쟁인이라고 봐도 된다.

2009.07.16, 정유진

5장 어린철학의 역할

어린철학은 본래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 모여 토론을 통해 생각을 주고 받아 서로 자극시켜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홈페이지가 목적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내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직 지구내의 인터넷 공간에서 그런일이 실현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이미 앞의 글에서 말했지만 이제 어린철학은 그런 것을 포기하고 한 사람이 철학적 정보를 인터넷 공간에 전달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린철학 공동체는 이미 이성도가 나간 때부터 불가능으로 바뀌었다.

2009.07.16, 정유진

맺음말 – 나의 철학의 첫번째 시기의 종료 (2001.07 ~2009.07.16)

드디어 이 글을 마침으로써 나의 인생에 해당하는 철학적 시기의 첫번째가 끝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여러 여건들과 상황들이 이 글을 완성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결국 오늘날 이렇게 성공했다. 비록 썩 잘된 글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철학적 입장에서 이제 새로히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두번째 시기는 나의 철학이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까지 제대로 못한 명상이라는 방법을 내가 직접한다는 전제하에 분명 명상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2009.07.16, 정유진

 

 

5.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 외전

머리말

어쩌면 이 글은 나의 철학의 첫번째 시기의 마지막 글인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 보충설명에 첨가되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당시 상황 때문에 불안해진 나는 그글을 7월달 중순에 급하게 마무리 짓고 말았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이글은 이전 글과 비교할 필요 없이 새로울게 전혀 없는 글이기 때문에 두번째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인 상태에 있는 글인 것으로 정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문제들이 앞으로 나올 두번째 시기의 글이 안나올리가 없다. 게다가 이 글은 그 시기를 위한 하나의 구상적인 글이다. 왜냐하면 나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참과 자유이기 때문이다.

2009.08.03, 정유진

- 대중이란 사람사회에서 요구시되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 사람들은 사람사회에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많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친밀감을 크게 갖지 않는다. 대중이 많으면 많을 수록 통치계급의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를 조종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 우주엔 100% 순수한 자유란 없다. 우주가 가하는 통제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안의 자유는 환상이다. 기껏해봐야 선택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 있을 뿐이다.

- 참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 참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한다.

2009.08.03, 정유진


과거단편글1 -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근거한 행동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작성일 2005.06.19

예를 들어, Karma와 윤회란 이론을 들어보자. 이 두개를 연결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자신이 전생에 어떤 (도덕적인)나쁜 일을 했다면 현생에서 전생의 나쁜일을 한 만큼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전생에 어떤 좋은 일을 했다면 현생에 전생의 좋은일을 한 만큼 좋은 일이 되돌아온다.""좋은 일을 하면 할 수록 다음 생에 더 훌륭한 존재로 태어나며 나쁜 일을 하면 할 수록 다음 생에 더 저열한 존재로 태어난다.""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육체에 깃들여 다른 생을 산다." 'Karma와 윤회' 개념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설명되어지기 위해 정당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 두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렇다. "인간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전생에 어떤 나쁜일을 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아무리 고통스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다음 생을 위해서 남에개 해꼬지 하지 않고 현재 삶에서 좋은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본인이 보기엔 이러한 믿음은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사이트에 카르마와 윤회이론은 분명 잘못되었고 본인은 그것이 없다고 주장하자 'Karma와 윤회' 이론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반박을 했다."Karma와 윤회' 는 분명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전생에 그 어떤 나쁜짓을 했더라도 전생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 현생에 전생이 한 일들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들 하며 의문을 품지만 안타깝게도 Karma와 윤회는 법칙으로써 존재한다. 법칙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나쁜일을 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 더 괴뢰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또 이런 반박도 있다. "현생에 나쁜짓을 하고도고 다음생에 자신이 한 만큼 되돌려받지 않길 원하지 않는 그들을위해 뜨거운 지옥불이라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현실에 이것들을 철저히 믿으며 그 이론에 따라 철저히 행동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용서', '자비',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2.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이것을 참고 다음 생을 위해 열심히 착한사람으로 사는 것"3.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를 미워하되 나중에 더 벌을 받거나 다음 생에 고통스런 삶을 살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 물론 다시 말하자면 철저히 믿고 철저히 행동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본인이 추론을 했다. 하지만 'Karma와 윤회' 이론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이론에 생각을 영향받은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어떤 부조리한 행동을 보게되는데도 그가 강해서 맞서기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하며 자신들이 마치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선량한 양인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 자신들이 아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것을 그 어떤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통해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요청되어졌고 그 요청을 통해 탄생한 것이(사실 여부관계를 제외하고) 바로 '윤회' , 'Karma' , '영혼' 같은 것들이다. (세상에 종교와 형이상학적인 이론들이 난무하는 이유이다. 현실에서 밖으로 분출되어야 할 힘이 어떤 원인에(용기부족, 힘부족) 의해 실패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으로 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형이상학적인 이론들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말처럼 그것이 무엇에 의해 요청되어진 것이냐 라고 묻는 것이 매우 훌륭한 의문이라 하겠다.

과거단편글2 - 인터넷을 이용하는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성일 : 2005년 06월 07일

철학을 잘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 '철학' 하면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얘기겠지만 "사주, 점, 동양철학, 배부른 소리" 이정도가 되겠다.본인이 사람들의 철학에 대한 인식이 이정도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때 철학에 약간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철학에 접근을 하려고 해도 접근이 쉽질 않았다. 접근이 쉽지 않다보니 결국 철학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파악이 안돼서 철학에 대한 관심은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그 과정중에 자신이 철학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철학에 대한 이미지가 오해돼어 더욱 더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본인은 어떤 희망이 이 온라인 철학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미 행동에 옮겼다."

수정일 : 2009.08.15

빨리 기록하기 위해 수정했습니다. 이글만.

 

 

6.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 외전2편

특별히 이 글에 대해 할말이 없다. 이 글 역시 나의 철학의 첫번째 시기와 앞으로 다가올 두번째 시기 사이를 이어주는 과도기적인 두번쨰 글이다. 어쩌면 이 글은 사유투쟁을 위한 준비 : 보충설명 이란 글에 넣었어야 할 글인지도 모른다. 지난날의 나의 글을 대부분 이상 이해하는 사람은 이번글이 내용상 내가 작성한 이전글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어쩔수 없이 이렇게 따로 두고 써야 한다. 제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한명이라도 좀 더 이해핳ㄹ 가능성이 높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것이 첫번째 시기의 철학에 대한 마지막 설명이다. 아프올 더 이상은 없다.

2009.08.18, 정유진

(1)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사람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언어를 배우면 인간의 오성에 의한 감각적인 자료들을 모아 적절하게 언어라는 이름표를 단다. 감각적인 자료들 이외에도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복잡한 생각도 언어를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그럼 언어에 의해 사고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생각은 언어보다 복잡하고 깊은 뜻이 있는데 반해 언어는 평균적인 뜻을 지녀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목적 때문에 당연히 한계지어 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로운 생각은 틀이 없다. 그러나 언어는 틀이 있다.

(2)

대중매체와 대중주의 정치엔 이런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대중이 자신들의 의도하에 움직이고 존재해 주는 것.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되어 있는 자를 싫어한다.

2009.08.19, 정유진

 

조회 수 :
6117
등록일 :
2011.01.25
10:44:28 (*.133.124.163)
엮인글 :
http://www.lightearth.net/free0/118120/395/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lightearth.net/118120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sort 추천 수 비추천 수 날짜 최근 수정일
공지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실시간 전달되는 중요한 정보를 금일부터 올립니다. 아트만 149879     2020-05-14 2022-03-25 13:02
공지 현재 진행중인 국내, 국제정세에 대하여.. 아트만 150670     2020-01-09 2020-01-16 18:33
공지 어보브 메제스틱 (한글자막) -- 데이빗 윌콕, 코리 굿 출연 /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 [1] 아트만 168474     2019-10-20 2019-12-17 04:02
공지 유엔 각국대표부에 보내는 제안서 [2018. 8. 29.] 아트만 157074     2018-08-29 2018-08-29 12:14
공지 우리가 지금 이곳 지구에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1] 아트만 237968     2015-08-18 2021-07-14 23:44
공지 [릴루 마세(Lilou Mace)] 포스터 갬블(Foster Gamble)과의 인터뷰 1부/ 2부 아트만 237809     2014-05-10 2015-03-11 07:25
공지 가슴으로 느껴보세요 - '빛나는 꿈들' [2] [46] 관리자 282991     2013-04-12 2021-12-16 14:02
공지 자본주의 체제가 총체적 사기 임을 알려주는 동영상(한글자막) [67] 관리자 314089     2012-12-09 2012-12-09 23:43
공지 각성을 위한 준비 --마이트레야(미륵) [7] [57] 관리자 352124     2011-08-17 2022-01-10 11:20
공지 자유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 [3] [54] 관리자 466856     2010-06-22 2015-07-04 10:22
16862 영적 정부는 곧 나타나는가? [14] [3] clampx0507 6258     2011-08-05 2011-08-11 00:43
 
16861 육체를 버리는게 아니라, 육체의 진화 도상에서의 육체와 영의 통합입니다 [7] [33] 네라 6251     2010-10-27 2011-01-12 13:31
 
16860 MI6의 전신= 영국 해적용병 아트만 6250     2023-12-14 2023-12-14 10:58
 
16859 푸틴, 사우디/UAE/이란 정상회담 / GAZA 해법과 BRICS 기대감 아트만 6240     2023-12-07 2023-12-07 19:51
 
16858 교회에서 만나사람 [1] [40] 권정희 6234     2002-04-19 2002-04-19 04:36
 
16857 중경 하늘에 빛의 고리가, 산동에 신기루 재현. 여자부처 그림 [5] file 한울빛 6227     2002-05-23 2002-05-23 02:27
 
16856 님들... [1] [27] 외계에서온소년 6216     2002-04-25 2002-04-25 10:40
 
16855 머카바란 빛의 영혼 신체이며 에너지 필드의 회전체이다 -Merkaba [5] [55] 베릭 6201     2012-03-15 2020-09-30 10:28
 
16854 UFO는 비행중에 미사일을 파괴 - A UFO Disables , Zaps, Shoots Down a Missile [9] [110] 베릭 6200     2012-06-09 2013-05-16 04:40
 
16853 자연발생적 휴머노이드와 인류와의 차이 [6] 조가람 6197     2010-10-01 2010-10-24 23:08
 
16852 강제입원 제한법 시행 됐지만 …퇴원해도 갈 곳 없는 조현병 환자들 [4] 베릭 6185     2017-05-30 2021-08-11 03:54
 
16851 레인보우 휴먼의 합동육화 목적 ㅡ 빛의 영들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고차원 천상계의 자비로운 프로젝트 베릭 6184     2023-07-06 2023-07-10 07:41
 
16850 네피림 [2] [70] 베릭 6175     2012-03-09 2012-03-09 19:11
 
16849 자기애성 성격의 유형 [2] [77] 베릭 6168     2012-04-07 2013-05-16 05:02
 
16848 전체가 되는 것 : 지구의 대전환에 대비하기 아트만 6163     2023-11-23 2023-11-23 19:53
 
16847 라파엘님의 진심은.........그리고 종교의 정치성에대해 [4] [18] 한울빛 6157     2002-05-03 2002-05-03 23:51
 
16846 [텔로스의 아다마] 환상 매트릭스의 경험 아트만 6156     2023-12-12 2023-12-12 16:55
 
16845 우리 스스로 힘도 신안에서 해야... [3] [6] 네라 6150     2011-01-23 2011-01-24 12:11
 
16844 의문 [1] [37] 이방인 6149     2002-04-15 2002-04-15 15:40
 
16843 돈버는 숫자와 방법 [33] 서윤석 6127     2002-05-03 2002-05-03 0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