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공포는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극복해야할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는 어둠과 벌레에 대한 두려움, 성인이 된 후에는 고독과 적막함에 대한 공포, 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이 생기는데 이는 모든 사회적인 행위의 근원이었습니다.

중국과 북한처럼 공산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에서 공산당의 독재와 폭력은 공포를 제공하는 공통적인 원인입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런 공포의 진실한 원인을 잊었거나 혹은 잊은 것처럼 가장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핑계로 이를 교묘하게 회피하려 합니다.

중국의 저명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高智晟)은 부당한 법원의 판결을 받고 일 년 동안 연금당하면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중국의 인권상황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길 바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쓰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오즈성은 자신이 쓴 편지가 (중공에 의해) 스스로 내린 사망 선고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가 편지 한통을 쓴 것이 하늘땅을 진감(震撼)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여러 가지 공포를 만나게 됩니다. 공포에 통제당하지 않기 위해 인류사회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공포에 대응하거나 제거하는데 특정한 공포에 대해서는 이를 막기 위해 법률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여러 종교에서는 현실사회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인류가 직면한 공포를 처리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공포를 대하는 방식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을 형성하는 근본원인을 보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가오즈성 변호사가 보여준 공산당이라는 거대한 사악에 대항하는 용기는 어릴 적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직접 공포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확실히 인류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또 부족한 기질이기도합니다.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할 때면 그의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양심이 너무 나약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중공의 폭력 위협에 직면한 중국내 지식인들의 표현이 바로 이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서양의 자유국가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발생하는 인권박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이들 역시 공포 때문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늘 자신의 치욕적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침묵에 부합하는 이유를 찾습니다. 이렇게 해서 폭력이 가한 공포가 효력을 보게 하며 또 계속 존재하게 합니다.

노자는 “몸이 없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及我無身,吾有何患)”라고 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있을 때에 효력을 발휘합니다. 물론 가오즈성은 부모와 처자가 있기에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른 마음과 양심이 있었기에 악랄한 행위를 배척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침묵은 아름다운 품성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공의 독재 하에서 침묵은 늘 위선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과정이 아니라 보다 많은 경우에 선과 악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는 양심의 부재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은 후 직접 공포를 유발하는 사물이나 현상을 마주대한다면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공포에 짓눌린 민족은 희망 없는 민족입니다. 오늘날 중화민족은 반드시 전 중국을 뒤덮고 있는 공포를 떨치고 일어나 가오즈성처럼 중공이 만들어낸 공포를 정시해야 합니다.

글/장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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