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람의 철학, 배움:  화엄경에서 배운다.





인간은 일평생 배움으로 시작해서 배움으로 끝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움이 완전한 것이라고 보장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이 있습니다.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부터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검증을 통한 과학적인 지식만이 참 지식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학도 현재까지 알려진 지식의 범위 내에서만 말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지적한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칸트(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진리나 자유, 혹은 영혼과 같은 '물 체(物自體)'는 이성의 판단 영역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적 이성주의가 발달한 서양의 근대 철학에서 데카르트(1596-1650) 이래 꾸준히 논의된 합리적 지식의 근거를 이성에 두고 있지만, 동시대의 대륙의 합리주의자였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이성보다는 직관적 지식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유대교회에서 제명당했지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하고 렌즈 깎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 폐병으로 죽을 때까지 자유로운 진리탐구의 열정을 보여주었던 보기 드문 용기 있는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식의 단계를 상상의 단계, 이성의 단계, 직관의 단계로 구분하여 직관이야말로 최상의 단계라고 말했습니다. 이 직관의 최상의 단계에 이르면 온갖 정신적인 불완전성이나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여받은 완전성의 단계에 대한 갈망(conatus)과 수용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오직 그 완전성의 지식이 결핍 될 때에만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완전성의 지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 곧 철학적 지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신에 대한 사랑이란 신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공식을 깨달을 때 얻게 되는 수학에 대한 사랑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신이란 자연(Deus sive Natura)'이며, 우주와 자연의 질서와 같은 것이니까요. 스피노자가 말하는 수학 공식과도 같은 깨달음, 그것을 얻기만 한다면 선과 악, 쾌락과 고통뿐만 아니라 생사(生死)의 문제도 어느 정도 이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기계론적인 결정론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면적으로 수용하기가 어려운 한계가 있습니다. 기계론적인 결정론을 말하는 스피노자에게서 깨달음의 세계를 온전히 배운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의 말대로 직관이라는 최상의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정신적 불완전과 욕망의 포로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러한 스피노자의 '직관적 힌트'를 염두에 두고, 『화엄경』이 말하는 직관의 세계를 한번 통찰해 보는 것도 좋은 배움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은 글자 그대로 꽃과 같이 빛나는 장엄한 하나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붓다 아바탐사카-수트라(Buddhāvatamsaka-sūtra)'라는 말을 한역(漢譯)으로 번역하여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대방광(大方廣)이라는 '마하바이풀리야(Mahavaipulya)'가 첨가된 정식 명칭에서 번역된 것이지요. 4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경전을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Buddhabhadra:覺賢이라고도 불림, 418-420)가 60권으로 한역하였고, 그 후 실차난타(實叉難陀 Siksananda, 695~699년)가 80권 본으로 한역한 것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현수 법장(賢首大師 法藏:643~712)이 60권 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라는 해설서를 쓴 이후 60권 본이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전체 34품 가운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이 가장 초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2가지 품은 산스크리트 원본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화엄경'이라는 소설과 영화로도 알려진 내용은 바로 입법계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입법계품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으로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구도(求道) 이야기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과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의 기본 내용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의 무수한 보살과 신적 존재들이 그 깨달음을 찬탄하는 장면으로 전개되며, 인드라 신의 궁전에서 큰 모임을 가진 후, 보살들이 석가모니를 대신해서 가르침을 베풉니다. 유사한 모임들이 지상과 천상에서 여러 번 이루어지는데, 모든 존재가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며, 모든 현상은 "상호의존(相互依存)"의 결과라고 보살들은 가르칩니다. 이른바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만물이 하나 같이 공존 공생하는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우주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깨치는 것은 인간이 이미 자신 속에 내재한 불성을 깨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엄경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 깨달아야 할까요? 화엄경 본문 속에서 구구절절 피어나는 무수한 보배와 같은 가르침의 일부를 선택하여 아쉬람의 철학적 구조와 어떻게 조우 할 수 있을지 그 내용을 잠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화엄의 세계는 불이일원(不二一元)의 세계를 강조합니다. 선재동자처럼 구도자가 믿음(十信)을 가지고 마음을 내어(十住) 구도의 길에 올라 수행을 하며(十行), 좋은 선업을 쌓고(十廻向), 경지에 오르지만(十地) 여전히 깨달음의 세계는(等覺) 오묘(妙覺)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일단 부처가 되고 나서 펼쳐지는 세계는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진리의 본체(眞諦)와 현상의 속제(俗諦)도 하나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세계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이(理)의 세계가 현상의 사(事)의 세계와 무차별적인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세계요, 현상계 사이에서도 거리낌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가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진리 가운데서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런 삿됨이 없는 청정장엄(淸淨莊嚴)한 순수의 경지에서 그렇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세계를 일러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하는데, 법(진리)의 세계는 원융하여 두 개의 대립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물론 처음 마음을 내는 그 순간이 곧 깨달음의 시간으로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지만, 게으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수행이 필요하지요. 이른바 신(信, 믿음), 해(解, 이해), 행(行, 실천), 증(證, 증거)이라는 공부 즉 배움과 나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려워서 그만 두겠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왕 알게 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한번 수행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근기(根幾)에 따라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것도 한 방편이지요. 배움 곧 학문도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한 방편이 아닐까요?




다시 화엄경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진리의 본체론적 입장과 현상계의 속성적 측면을 보여주는 본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불성(佛性) 곧 여래(如來)의 입장과 부처의 은덕이 드러난 현상계를 대비하여 주는 본문들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화엄경의 문구들을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逸乘法界圖)』를 저술하여 7언 30구의 210자로 요약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법계도>는 널리 애송되는 게송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의상이 요약한 <법계도>와 함께 화엄경 본문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불국토 무변색상(諸佛國土 無邊色相)"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온 세상이 부처의 나라라는 것이며 동시에 그 세계는 끝이 없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라는 말을 반드시 "부처"라는 언어에 집착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진리"라는 또 다른 언어로 재해석해도 무방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느님의 나라, 혹은 광대 무한한 진리의 나라, 순수하고 깨끗한 영원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세계는 "변현자재 우무진보(變現自在 雨無盡寶)"라 하여, “자유자재한 부처의 나라에서 비가 쏟아지듯 무수한 보배가 중생에게 흘러넘쳐”, 그릇에 따라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衆生隨器得利益).




보배를 그리스도교에서는 천국의 비유에서 보듯이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일컫습니다. 과연 그 보배는 무엇이겠습니까? 무명을 떨치고 얻게 되는 광명이 아니겠습니까? 그 깨달음의 비밀은 바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의 작은 털끝만한 먼지 속에서도 시방세계의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먼지 속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一切塵中亦如是). 마치 신비주의적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곧 "급중묘화 분산어지(及衆妙華 分散於地)"라는 말로도 보충이 됩니다. 묘한 화엄의 꽃이 온 세계 지구상에 흩어져 피어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지요. 그야말로 일심법계(一心法界)의 꽃이 온 세상에 만발하여 화엄법계(華嚴法界)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심의 세계에서는 온갖 선한 뿌리가 함께 모여져 있는데(共集善根), 그것이 일단 흩어지면 바다와 같다(辯才如海)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부처는 모든 일을 잘 포섭하고 수용하여(攝事攝受), 모든 사물 사건을 만남에 있어 거리낌 없이 잘 받아들인다(皆已善攝)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부처 아님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일체여래(一切如來)의 경지에서는 공덕 또한 큰 바다와 같다(功德大海)는 것이지요. 바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걸림이 없이 자유 자재하게 움직입니다. 먹고 먹히는 사슬 구조가 있지만, 그것 또한 큰 흐름의 틀에 보면 생사유전(生死流轉)의 한 흐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이 모든 것을 마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심연기(唯心然起)의 세계일 것이며, 현실의 현상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도리(道理)가 현실로 나타나는 이실법계(理實法界)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현실의 결과는 말로 다 열거하거나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지만(果分不可設), 그 모든 현상의 원인은 상호 의존하는 인연법(因緣法)에서 기인하고 있다(因分可設)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法)의 측면에서는 영원한 것(法爾常住)이지만, 그 법은 시공을 넘어 두루두루 온 우주에 편만하게 다양한 형태로 베풀어진다(恒設普設)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의 진리, 곧 일(一)이 다(多)의 세계로 확산되고 다시 다(多)의 세계가 일(一)의 세계로 귀환하는 원융한 세계를 의상은 <법계도>에서 잘 요약하고 있고, 원효(元曉)는 일도출생사, 일체무애인(一道出生死, 一切無碍人)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생사를 벗어나는 도를 얻으면 일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지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無碍) 자유,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요소가 가득한 세상에서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컨대, 단적인 예로 극단적인 살인(殺人)이 장난처럼 버젓이 횡행하는 세상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 하여, 생사와 열반이 함께 늘 공존하는 세상에서 열반을 획득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은 물론 가난과 질병을 포함하여 온갖 악(惡)이 난무하는 현실을 어떻게 하나의 빛의 세계 속에 포섭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無知) 혹은 무명(無明)의 결과로 빚어낸 모든 현실적 결과를 순수 의식 곧 깨달음의 차원과 혼동해서는 안 되겠지요. 깨달음의 차원에서 볼 때는 여전히 현실 세계가 미망(謎妄)의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떠난 여래의 세계가 없기에, 현실을 안고 현실의 미망을 넘어서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미망으로 귀결 됩니다. 미망은 무엇이고 미망을 깨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나(眞我) 곧, 내안의 불성(佛性)인 여래(如來)를 여실(如實)히 보지 못하고 여래를 둘러싼 ‘거짓 나(魔, maya)’에 속는 것이 미망이며, 거짓 나의 울타리를 깨치고 나오는 것이 미망을 깨치는 것이 아닐까요?




미망이 걷히고 보면 일체의 세계가 하나의 장엄한 빛의 세계요 보배로운 꽃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莊嚴法界實寶殿). 그 세계에서는 살인도 미혹도 없어지니까요. 이른바 사랑과 평화의 세계가 건설 되는 것이지요. 우리 아쉬람이 추구하는 바의 세계가 바로 이러한 공생공존하고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의 가슴을 드나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온 우주 자연 속에 신(神)이 충만하다고 했던 스피노자의 직관이나, 만물 속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一切萬物悉有佛性)는 불교의 가르침도 그런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신즉자연(神卽自然)의 세계와 붓다의 유심연기(唯心緣起)의 세계가 서로 만나는 것이지요. 실로 깨달음 곧 직관의 세계는 순간 속에서 빛이 납니다. 그 섬광 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일러,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고도 하고, 역으로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로 말하자면, 깨달음의 하늘나라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영원의 순간들이지요.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위하여, 오늘도 이기적인 거짓 나를 넘어서, 참된 빛의 세계인 '대방광(大方廣)'의 참 나를 향하여, 겸허히 비우면서 배움 공부를 거듭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과 평화의 세계가 도래할 때까지, 미망에 흔들림 없는 각자(覺者)가 되기 위하여(舊來不動名爲佛)! 모두가 함께 춤추는 우주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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