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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스에 대한 가르침 시작 전에
이제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기본 가르침을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바탕으로 자주 명상한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입니다.
특히 카르마의 가르침 시작전에 나온 금언은 그 어디에서도 나온 적이 없는 가르침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차근 차근 되새기다 보면 한층 더 넓은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 내용이 받아 들이기 힙들다 싶으면 그냥 없던 것으로 지나가 버리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시작할 마나스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마나스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내용들을 먼저 말씀 드리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마나스의 의미 : 용어집에 있는 내용
“생각하다”, “숙고하다”를 의미하는 말이 그 어원이다. 인간이나 어떤 다른 자의식적 실체들 속에 있는 자아-의식의 중심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위에서부터 보면 세 번째 원칙이다.
열매가 꽃에서 나오듯이, 마나스는 두 번째 원칙인 ‘붓디’에서 나온다. 그러나 마나스 그 자체는 죽음과 함께 산산히 흩어진다. (물론 하위 마나스가 그렇다) 사후에 살아 남게 되는 것은 단지 영적인 부분으로, 마치 화학자가 장미에서 그 본질적인 부분인 장미유(油)를 추출하듯이 마나스의 ‘아로마' 부분이 불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이 일어나게 되면 모나드(아트마-붓디)는 그 모든 것을 데봐챤으로 가지고 가게 된다. 아트만, 붓디 그리고 마나스의 상위 부분이 인간의 영적인 모나드이다. 엄밀히 말해서 ‘신선한 모나드’가 자신의 매개체인 아트만과 붓디에다 상위 마나스 요소가 있는 ‘인간의 자아’를 같이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후에는 하나로 뭉쳐져서 종종 ‘영적인 모나드'라고 부른다.
상위 삼개조(triad)를 형성하는 세 개의 원리들은 의식이나 힘이라는 면에서 각자 자기 자신의 세계에 존재한다. 인간으로써 우리들은 그것들로부터 오는 영향력을 계속 느끼게 된다. 물론 심령적, 아스트랄적 성격의 베일이 존재하고 있더라도 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진화시켜온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세 번째 원칙인 마나스는 제 4라운드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소화한 것이다. 다음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완전하게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마나스’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로 ‘윤회하는 자아’인 상위 마나스이다.
인간의 구성 원리
H.P. 블라바츠키 여사가 쓴 초기의 신지학 가르침을 정리한 [신지학의 열쇠]에서 설명한 인간의 구성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위 네 가지 구성원리
(a) 육체, 루파(Rupa) 혹은 수툴라-샤리라(Sthula-Sarira)는 살아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원리들의 매개체이다.
(b) 프라나(Prana) 혹은 생명(Life)으로 육체, 링가-샤리라 그리고 카마 루파와 마나스의 하위 부분이 활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다.
(c) 링가-샤리라(Linga Sharira) 혹은 아스트랄체(Astral body) 혹은 복체(The Double, the phantom body)
(d) 카마 루파(Kama rupa)로 욕망과 열정의 자리이다. 동물적인 인간의 중심으로 불멸의 부분과 구분을 짓는 선이다.
상위 세 가지 구성원리
(e) 마나스(Manas). 그 기능이 이중적인 원리이다. 정신 혹은 지성은 인간 정신의 상위 부분으로 그 빛은 모나드를 유한한 인간과 살아 있는 동안 연결시켜 놓는다. 인간의 미래 상태와 카르마적인 운명은 마나스가 동물적인 열정의 자리인 카마-루파로 향했는지 아니면 영적인 자아인 붓디로 향했는지에 따라 다르다. 후자의 경우 마나스의 영적인 열망들로 이루어진 상위 의식은 붓디에 흡수되어 자아(Ego)를 형성하여 데봐챤의 지복 속으로 들어간다.
(f) 붓디(Buddhi). 영적인 혼으로 순수한 우주영의 매개체이다.
(g) 아트마(Atma). 혹은 영으로 절대자의 발상하는 빛으로 절대자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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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스에 대한 가르침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뇌가 우리들의 마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뇌는 정신이 물질계에서 작용하고 물질계와 접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물리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최면술 실험이나 꿈 속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뇌가 잠을 자거나 활동하지 않을 때 정신은 항상 의식하면서 활동하고 있고 인상을 받아 들여서 그것들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식은 우리들이 진화라는 변화를 겪는 동안 하나의 계(界)에서 또 다른 계로 옮겨갈 때 동일성을 느끼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신지학의 열쇠>에서 마나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윤회하는 영원한 영적아 혹은 개체성은 바로 마나스이며 수없이 다양한 개성들은 단지 외적인 가면들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형상이 아닌 본질적인 면에서 불멸하며 생명의 주기 내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유일의 진실한 인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나스이며, 정신-인간 혹은 화신한 의식이다.”
졋지 씨도 <신지학의 대해>에서 말한다.
“광대한 시간에 걸쳐 고통 받고 즐거워하며 경험을 쌓아서 ‘신성 자아’에 보태고, 한 생 한 생 인상들을 축적하면서 환생하는 내면의 자아는 바로 제 5본질로 붓디에 결합하지 않은 마나스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개체성이다. 이것이 수많은 낮과 밤을 거치고 어릴 때부터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하나의 동일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잠으로 생긴 틈 사이를 연결시켜준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수면에 의해서 생긴 틈을 연결한다. 우리 인간들을 동물들보다 위로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 두뇌가 아니다. 인간에게 있는 두뇌 모양의 다양한 깊이는 마나스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것이 정신의 원인은 아니다. 우리가 영적 혼인 붓디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신’을 우러러 보게 된다.”
정신은 하나의 힘이고 원리이며 기능인 동시에 열매들이다. 하나의 힘으로써 그것은 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현현들 뒤에 있는 활동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로써 모든 창조, 보존, 파괴 혹은 재생의 토대이다. 우주에서 어떤 활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어떤 정신의 작용이다. 기능으로써 정신은 경험을 통해서 개개의 존재가 획득한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진화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정신이란 어떤 존재가 지금까지 진화해 온 성격, 성향들이나 인상들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능력, 즉 내적 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 그의 정신은 과거의 모든 카르마의 열매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기능인데 바로 그 기능에 의해서 정신적 침전물 속에 더 많은 카르마를 만들고 쌓게 된다. 정신은 카르마의 주관적 비가시적 그리고 원인적인 면이다. 그것은 모든 대자연 속에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에너지적인 힘으로써 카르마 그 자체이다.
마나스는 인간의 영적인 면과 개성적인 면을 잇는 연결고리로써 물질계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러한 경험들을 얻기 위해 접촉하고 사용하는 형태들을 구성하는 모든 생명들의 진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
마나스의 근원은
블라바츠키 여사는 인간 속에 있는 정신인 마나스의 근원은 마하트, 즉 우주심이라고 말한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길,“원리에 집중된 우주적 추상개념은 개체적 자아 의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의 현현은 우파디의 단계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하다. 예를 들면 마나스라고 알려진 것을 통해서 ‘정신-의식’이 일어난다.”
졋지씨가 쓴 <오컬트 과학의 통합>이라는 칼럼에서 말하길,
“우주적이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마나스 요소는 단순히 동물의 발달된 본능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추상개념의 잠재적 혹은 활동적인 가능성이며 모든 형상의 본질이고 모든 법의 토대로 우주에 있는 모든 원리의 잠재력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한 형상 및 법들과 원리들을 인간의 의식영역에 반영 혹은 재생한 것이다.”
졋지 씨가 여기서 언급한 주요 요점들 중에 하나는 바로 정신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진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시작된 역진화라는 것이다. 모든 대자연 속에서 우리가 보듯이 진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진화의 힘과 방향은 항상 자아적 본성, 즉 상위의 본성에서 온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인간과 동물ㅡ그들의 모나드 혹은 지바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ㅡ사이에는 정신과 자아 의식이라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신이 상위 신성계로부터 온 위대한 존재의 본질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고급적인 면 속에 있는 인간의 정신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그들의 지성적인 잠재성이 태양과 개똥벌레의 차이 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볼 때, 동물의 형상 속에 있는 하나의 신인 인간이 단지 대자연의 물질적인 산물이며 동물과는 외적인 형상만 다르고 신체적인 조직을 구성하는 물질에서는 다르지 않은 똑같은 모나드에 의해서 생명이 불어 넣어진 단지 물질적인 대자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껍질 속에 “살아 있는 신”이 아니라면 그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신지학은 인간의 하위적인 면이 상위로 끌어 올려지는 신비하면서 웅대한 과정을 소개한다. 가장 고도로 진화한 형태들로 화신한 고급 존재들이 잠재되어 있는 정신의 기능들에 불을 밝히고 이러한 개성들 속에서 영의 빛으로 향하는 자발적인 노력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을 떠맡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희생적인 노력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진화에서 필요한 단계이다. 그래서 그것을 “마나스를 밝힌다”라고 부른다.
신지학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다른 모든 과정들과 마찬가지로 잠재해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영감 혹은“불꽃”은 대자연의 물질적인 면이 아닌 영적인 면에서 온다고 가르침은 말한다. 이전 진화 주기에서 자신들의 진화 단계를 모두다 거친 자아들이 화신해서 전임자들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정신의 빛을 다시 전해줌으로써 이렇게 불을 밝히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진화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먼저 역진화에서 시작된다. 즉 고급의 지성이 덜 개발된 지성체들로 구성된 형태와 관계를 맺는다. 다시 말하면 영이 물질 깊숙이 떨어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구제하게 되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형태 속으로 화신하듯이, 개성적인 정신에 영향을 불어 넣으려는 노력으로 상위계에서 “하강하는 것처럼” 현명한 존재들(우리 자신들)은 대자연에 준비해 놓은 형태들 속으로 화신해서 잠재하고 있는 정신에 불을 밝힘으로써 장구한 진화의 또 다른 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신지학의 대해>에서 졋지 씨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진화 과정은 하위 원리들을 개발시켰으며 결국에 가서는 어떤 다른 동물보다도 더 좋고 깊은 역량의 두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형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형태 속에 있는 이 인간은 정신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물계와 구분되게 하고 자의식적인 힘을 부여하는 다섯번째 원리인 생각하고 인식하는 원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상위 신의 영과 하위 개성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또 다른 이전의 세계들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 같은 과정을 다 거친 존재들이 그것을 정신이 부재한 모나드들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정신은 현재의 태양계가 시작하기 오래 전에 끝난 다른 진화의 주기에서 온 것이다.”
<블라바츠키 롯지 회의록>에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자신들보다 낮은 모든 지성들의 진화를 촉진시키려는 노력에서 이러한 자아들이 행한 희생을 지적한다.
“마나스-푸트라들 혹은 화신하는 자아들은 자신들의 미래의 개성들이 저지를 모든 미래의 죄들을 알면서 자발적으로 떠맡았다는 것을 <씨크릿 독트린>은 보여 준다. 자신을 희생시키는 “자아”를 주기적으로 감싸는 것은 A씨도 B씨도 아니며 진짜 고통을 받는 자인 우리들 내면에 있는 순진한 ‘크리스토스’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자아는 마부이며 개성들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승객들이라고 힌두 신비가들은 말한다. 한편 말들은 인간의 동물적인 열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무관심한 채로 있다면 우리는 내면의 크리스토스를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정신의 이중성
상위계로부터 온 더욱 진보한 지성체들이 동물 형태들 속으로 화신하기 위해서는 상위계와 하위계에서 동시에 기능 할 수 있으며 영계와 물질계에서 동시에 행동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원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결 고리가 빛의 광선인 마나스로 이 길에 의해서 진보나 깨달음이 가능하다. 화신하게 되면 마나스는 이중성을 띤다고 종종 말한다. 즉 육체에 들어 오게 되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영적이고 초월적이며 비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다른 하나는 동물적이고 이기적이며 개성적인 동기에서 행동한다. 우리는 두 개의 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우리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에 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할 것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이며 이러한 결함 없이는 상위계로부터 어떤 도움이나 접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신지학의 열쇠>에서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인 실체이며 물질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체들은 인류라고 불려지는 동물적 물질 덩어리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윤회하는 자아들로 그들의 이름은 마나사 혹은 마인드들이다. 일단 육체 속에 갇히게 되면 그들의 본질은 이중성을 띄게 된다. 즉 개체적 실체들로 여겨진 영원한 신성한 마인드의 광선들은 두 가지 속성을 띄게 된다. (1)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성격, 즉 하늘을 열망하는 고급 마나스 (2) 카마로 향하는 저급 마나스, 즉 두뇌의 우위 때문에 합리화되는 동물적 의식. 하나는 붓디를 향해서 끌리고 다른 하나는 열정과 동물적 욕망의 자리로 끌린다.”
우리가 물질계에서 생명을 접촉하는데 사용하는 개성적인 마음이 항상 ‘낮은’ 것은 아니다. 공부와 일에 의해서 태도와 사고 습관을 바꾸어서 새로운 사고의 토대를 줄 수 있으며, 고급 마인드와의 조화 속에서 진동하는 상태까지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들이 말하는 대사(大師)들 혹은 초인들의 상태이다. 그들은 고급 마인드의 이해력과 자비 그리고 시계(視界)를 가지고 어떤 계에서든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화신하는 자아들인 우리들이 미래의 개성들의 문제들과 시련의 짐을 자발적으로 짊어진 이유는 하위 마나스와 상위 마나스를 다시 뭉치게 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그 부분을 영적화 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서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어린 형제들이 한계단 올라서도록 돕게 될 것이다.
정신의 힘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잠재적으로 정신의 힘들에는 한계가 없다. 인간 개개인의 마인드는 우리들이 개체로써 가지고 온 우주마인드의 그런 면이다. 현재 이러한 힘들은 개인 및 집단 카르마에 의해서 우리들의 의식 상태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우리 자신들과 전체 대자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의해서 제한 받고 있다. 그러나 잠자고 있는 이러한 힘들은 그것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적당한 방법들만 취한다면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하위 마인드는 인간의 삶에서 정상적이고 적합한 기능을 한다. 그것은 필요한 도구이며 고급 마인드가 현상계에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것은 감각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며, 인상들을 평가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사실들을 모으고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이며 가정들로부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사고 기능이다.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연결시키는 능력,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능력들 중에 하나이며, 아마도 고급 마인드의 포괄적인 인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디딤돌이다.
우리들의 마인드는 다섯 가지 위대한 면을 가지고 있다-사고, 의식, 느낌, 기억, 상상. 그 어떤 존재 속에나 그것들이 실재하고 단일체를 이루게 되면 의식과 지성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특징들은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사물들과 구분되는 것으로 인식되며 사물들에 의해서 그 기능들이 활동하도록 자극받는다. 바로 이러한 회고적 인식이 자아-의식이다. 진화의 단계에서 인간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존재들은 행동하기 전에 회고해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마인드와 사물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접촉한 일련의 사물들에 의해서 흥분된 감각과 완전히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 속에서는 이러한 마인드의 회고적인 용도가 사실이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다. 모든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선택하고 회고할 수 있다. 즉 원인을 일으키기 전에 결과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들로 인해서 마인드를 우주의 창조자로 구분 짓는다. 이상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청사진을 만들고 바퀴가 돌아가도록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생각, 의식, 느낌, 기억 및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성의 힘에 대하여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한다.
“(a) 감각들을 해석하는 힘 (b) 과거의 생각들을 돌이켜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는 힘 (c) 근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연상의 법칙들”로 나타나는 힘. 즉 다양한 그룹의 감각들과 그 감각들의 가능성들을 잇는 지속적인 연결 고리를 형성하게 하여 외적인 사물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내게 하는 힘 (d) 기억이라는 신비한 연결 고리에 의해서 개념들을 연결시켜서 자아 혹은 개체성이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는 힘. 물질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몇몇 현상들에는 (1) 투시력이나 (2) 싸이코메트리가 있다.”
우리들의 마인드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져온 것이 현재의 물질주의적인 믿음이나 의식 상태이기 때문에, 일단 이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일어설 수 있다면, 마인드는 시공간 속의 먼 거리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하고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질의 실재라는 환영을 극복하게 될 때, 마인드는 우리들이 형상으로 보고 있는 것들의 영적인 면과 생명의 원인적인 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인드의 힘들은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생각들에 의해서만 구속 받는다.
<침묵의 소리>에서 말하길,
“마인드는 거울과 같다. 비추는 동안에 먼지를 끌어 모은다. 환영이라는 먼지를 쓸어 버리기 위해서는 혼의 지혜라는 부드러운 미풍이 필요하다. 오, 초심자여! 그대의 마인드와 혼을 융합 시켜라.”
무엇이 상위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는가
자아(Ego)는 환생할 때 마음의 한단면을 하위 자아에 투자함으로써 하위 자아를 일깨우고 내면의 진정한 본성과 잠재력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진화하는’ 개성에 자신을 연루시킨다고 앞에서 말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치 통치자들이 권한을 이양하듯이 개성이 잠재적인 판단과 의지를 표출하길 기대하면서 개성에게 권한과 선택의 자유가 위임 되어져야 한다. 하위 마나스가 감각들과 욕망의 본성에 굴복하게 되었을 때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내면의 자아가 하위 자아의 관심을 끌 수 없게 되어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된다. 스승들의 롯지의 지속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이러한 물질주의적인 추세가 계속되었을 것이며, 끝없는 환생의 기회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내면의 기억들을 환하게 밝혀 우리들을 항상 환기시켜준다.
하위 마나스에 대해서 졋지 씨는 말한다.
“그것은 상위 마나스의 활동에 간섭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진화 시점에서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모든 힘들과 기능들 그리고 감각들이 최고도로 개발되어 있어서 마나스의 영적인 면을 나타내는 백색 빛을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나스에게 제시된 것이 생각이든 물질적인 사물이든 마나스는 그것에 의해서 채색되어 진다. 즉 뇌를 통해서 작용하는 하위 마나스는 어떤 사물의 형태나 다른 특질들로 즉시 변형된다. 그래서 마나스는 네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어떤 한 지점이나 사물에서 다른 지점이나 사물로 자연스럽게 날아가 버린다. 둘째 어떤 즐거운 생각으로 날아간다. 셋째 불쾌한 생각으로 날아가 버린다. 넷째 수동적인 상태 속에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기억과 마나스의 자연스러운 운동 때문이다. 둘 째와 셋째는 순전히 기억 때문이다. 넷째는 정상적인 때는 수면 상태를 나타내고 비정상적일 경우에는 정신이상을 나타낸다. 붓디와 아트마의 도움을 받는 상위 마나스는 하위 마나스에 속하는 이러한 정신적 특성들을 싸워서 정복해야 한다. 만약 상위 마나스가 활동할 수 있게 되면 소위 천재가 되는 것이고, 상위 마나스를 완전하게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영적인 스승인 크리슈나는 똑같은 생각을 말했다: “감각들의 성향들에 따르는 자는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관심에서 열정이 일어나게 되고 열정에서 분노가, 분노에서 환영이, 환영에서 기억 상실이, 기억 상실에서 분별력의 상실이, 분별력의 상실에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물질계에 있는 물질들에 대한 집착은 기억과 느낌들(두려움, 편견, 욕망 등) 그리고 생각을 통해서 일어난다. 크로스비씨는 말하길, “모든 사람의 장애는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삶에 대한 거짓된 생각들 속에 있다.”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주석>에서 졋지 씨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많은 체들 속에 거주하는 인간은 영원히 생각한다. 그를 구속하는 것은 생각이며 그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들은 살아있는 것들로 종종 우리들의 느낌(감정)들을 먹으며 계속 살아간다. 그 생각들은 명확한 시야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오류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주제에 대해서 상호 모순되는 생각들을 동시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개념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내면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무엇이 정신을 지배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생각들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을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소위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생각과 행동의 토대로써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들이다. 바꿀 필요가 생길 경우에는 종종 생각들을 바꾼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생각이나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생각들이 불완전하거나 혹은 잘못되었거나 진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우리들은 자신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생각들ㅡ부모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다른 분야의 권위자들로부터 물려 받은 생각들ㅡ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에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미치게 된다. 여전히 의문을 갖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신성, 법칙,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매우 중요한 생각들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근본적인 생각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방향에서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의 인식을 채색하게 된다. 근본적인 생각들은 다른 모든 생각들과 생각하는 과정의 지주가 되는 토대 역할을 하는 생각들을 말한다.
졋지 씨는 말했다: “모든 생각은 그 생각이 아무리 찰나적인 생각일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의 마나스에 씨앗을 남겨 놓는다. 그러한 작은 생각들의 총합계가 더 큰 생각의 씨앗을 구성하게 되어 이런 성격 혹은 저런 성격의 사람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다 욕망은 생각의 토대를 형성하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욕망, 무지와 게으름 등을 통해서 그런 생각들을 고수한다. 우리는 그 생각들이 맞는지, 근원이 무엇인지, 평범한 상식에 부합하는지 등을 검사해 보아야 한다. 생각들이 정신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 속에 어떤 생각들을 주입시킬 것인지 결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지 않으면 어떤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 것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주도 면밀한 의지의 노력을 통해서 그 동안 소중하게 지녀왔던 생각들을 조사해서 뿌리뽑아 버릴 수 있으며, 정의와 평화 속에서 진실한 생각들을 찾기 시작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런 생각들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듣고 진리와 대면할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진리를 알아 볼 수 있는 인지력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다.
생각의 힘에 대해서 블라바츠키 여사와 졋지 씨는 파격적인 생각을 제시했다. <신지학의 열쇠>에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말한다.
“요점은 모든 범죄와 비도덕성의 가장 많은 근원, 즉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들의 결과를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뿌리 채 뽑아 버리는 것이다. 모든 법칙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카르마와 윤회의 법칙을 가르치고,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느끼게 하면 신체적인 위험을 피하듯이 악을 피하게 될 것이다.”
졋지 씨는 근본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카르마와 윤회의 가르침 속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즉 그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에 강하게 밀어 넣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 이유는 자아 자신이 윤회와 카르마의 경험자이며 내면에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하위 자아가 이러한 가르침들을 공부하게 될 때 기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지학의 바로 이러한 구조가 우리의 정신을 한층 더 높은 봉사의 단계로 고양시킬 수 있는 수련 방법과 정신을 명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플라톤이나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보편적인 혹은 근원적인 생각들, 즉 생명 신성 인간과 그 운명에 대한 영원한 생각들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기 시작하라고 권한다. 삶의 모든 방향 모든 문제들과 인식들에 이러한 진리들을 적용함으로써 그 어떤 신비도 꿰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정신의 성장 혹은 진화란
인간의 정신의 진화는 영원한 진리들에 대한 이해의 진화이며 생명에 대한 진리들과 만물의 대자아를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해가 커져 감에 따라서 우리의 인지력도 명확해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도 더욱더 날카로워져서 쉽게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신지학의 대해의 질의 응답>에서 말하길,
“인식자는 인식력과 그 인식의 범위를 높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인식력은 이미 획득한 인식들 때문에 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인식의 영역을 계속해서 높일 수 있다. 인식의 범위가 커져 갈 수록 인상들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보다 나은 도구를 개발시킨다. 진화란 항상 성장하는 지성과 보다 나은 형태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존재의 뿌리에 무한한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순간 순간을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 자신만이 정신의 형성과 성질에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찮은 작은 생각들이라도 그런 생각들을 하면 혼의 거주지를 재정렬하게 되는 것이고 장막을 두텁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모든 단계는 의식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의 표현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 의식이기 때문이다. 생각에 대해서 만들어 지지 않은 무력감은 없으며,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계도 없다. 또한 환경을 이루는 물질 원자들에 대한 신비한 힘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은 환경의 불투명함도 없다. 결국 자신이 모두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우리 내면의 본성 어떤 부분에 이런 진리들과 비슷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위대한 영적인 진리들을 알아 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졋지 씨가 말하길, “인간의 내면에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지혜의 문헌들을 볼 때 약동치는 어떤 것이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단지 지혜의 서적들에서 재확인하거나 추가적인 생명력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플라톤도 인간의 정신 속에는 신성과 비슷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영원한 실재들을 우러러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내면에 진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진리이다. 우리는 환생했을 때 바로 여기 실생활 속에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바로 이곳이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며 조건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조사해 보고 검증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생각들은 분명한 생각일 수도 있고 숨겨져 있는 생각들이나 혹은 암묵적인 생각들일 수도 있으며 그것들 모두를 포함한다. 진화의 길을 멀리 가서 언제든지 우리를 돕고 안내해 줄 분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의 진보를 더욱더 심화 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든 것들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졋지 씨는 훨씬 더 중요한 실천적인 것을 지적한다. 그는 <아는 힘>이라는 칼럼에서 말하길, “아는 힘은 책을 공부하거나 단순히 철학을 연구하면 오는 게 아니라 애타주의를 행동과 말과 생각 속에서 실천하게 될 때 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실천을 하게 되면 혼의 외피들을 정화시켜서 빛이 두뇌와 정신 속으로 깃들게 해주기 때문이다. 두뇌-정신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받아들이는 도구이기 때문에 감각과 인식에서부터 정화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방법은 철학과 최고의 내적 외적인 미덕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대자연에서 정신의 근원은 무엇인가
대자연에 관한 엄청난 양의 서적들과 프로그램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대자연 속에는 거대한 신비한 지성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것을 안내하고 나누어 주는 법칙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지성이 인간의 지성과 같은 것인가? 벌들은 자신의 정신을 인간처럼 훈련시켜서 향상시키는가? 나뭇잎과 수정 피부 그리고 눈은 어떤가? 이것들 속에 있는 믿기 어려운 지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들은 대자연의 일부분들이며 그것들 모두가 작용과 반작용으로 정신의 힘을 나타낸다. 어째서 이 나뭇잎 속에 있는 지성이 옆에 있는 나뭇잎과 거의 유사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새의 지성과는 다른가?
신지학에서는 이 주제에 대하여 흥미 있는 몇 가지 생각들을 제시한다. 즉 대자연 속에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신비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신지학은 제시한다. 모든 형태들은 어디에 있건 우주심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현의 어떤 시기 동안에 나타나는 지성의 총합계는 이전 현현 시기 동안에 개발된 지성을 다시 개화시키는 것이며 여기에다 현재 현현기에 개화시킨 것을 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왕국들과 그 왕국들 속에 있는 종들은 카르마의 법칙 안에서 진화의 법칙을 수행하는 계층적인 지성들에 의해서 안내되고 지배 받는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자연의 전체 질서는 더 높은 삶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언뜻 보기에는 맹목적인 힘들이 작용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계획이 있다. 끊임 없는 적응을 통한 진화의 전체 과정은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강자를 위해서 약자는 희생되고 ”적자생존“을 보여주는 변치 않는 법칙들은 그 즉각적인 작용을 보면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거대한 목적을 향해서 작용하는 것이다. 환경 적응이 일어나고 적자가 생존하여 살아 남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소위 “무의식적인 대자연”은 실재로 최고의 혹성영들(디얀쵸한)에 의해서 조정되는 힘들의 합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혹성영들 전체는 미현현한 로고스의 현현한 ‘말씀’을 이루며 동시에 우주심과 불변의 법칙을 이룬다.“
현현 초기에는 생명의 파동이 물질이 응축된 단계를 내려와서 진보하는 의식 상태들에 상응하며 연관된 계들의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형체들 속에 자신을 감싸게 된다. 우주심의 단면을 나타내는 형태들 속에서의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하위의 생명들은 진화를 성취해 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현현기에 나타나는 모든 지성은 대자연과 함께 그리고 대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동안 자의식적인 존재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지성은 그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며 또한 어떤 높은 존재에 의해서 보내어진 것이 아니다. 거대한 대자연의 모든 과정들을 인간의 신체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신체를 통해서 대자연의 생명들이 이러한 기능들을 수행할 때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길, “인간은 현재 라운드에 식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씨앗들의 저장소이다. 그리고 그의 태아는 자신 속에서 대자연 속에 있는 여러 세계들 전체를 가지고 있다.”
외부 세계에서 보는 것은 우리 도구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과 형태의 “씨앗들”이 펼쳐진 파노라마이다. 그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미래에 다시 되돌아와서 가지고 일하게 될 도구를 결정할 것이다. 대자연은 살아 있는 거울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들과 우리들의 일을 볼 수 있다. 생태학자들은 세계의 모든 사막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매년 새로운 질병들이 나타난다. 듣고자 하기만 한다면 대자연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지학은 한 마리의 새가 어떻게 다른 모든 새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왜 개미와 나뭇잎 나비가 생존에 필요한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많은 설명을 제시해준다. <Isis Unveiled>에서 블라바츠키 여사는 말하길, “탄생의 순간부터 대자연에 의해서 규정된 영역 속에서 행동하고 실수 없이 자신을 돌보는 동물들의 이러한 본능을 자동적인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물의 내부나 외부에는 그것을 안내하는 어떤 지성이 있다. 각각의 계와 종들은 소위 계 의식에 의해서 정신이 박히게 된다.
윤회하는 자아인 인간으로써의 환생에 적합한 형태인 현현기 최고의 형태를 얻게 될 때까지 생명력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우주심에서 획득한 더욱더 많은 지성을 나타내면서 이동해간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인간은 대자연의 훈련을 받게 되던가 아니면 그것을 오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만이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인류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우리들 자신이 파놓은 수렁에서 구해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는 스승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