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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랄체에 대하여
육체와 아스트랄체
일반 과학자들과 오컬트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가장 큰 이슈는 육체 속에 있는 아스트랄체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육체가 없어도 존재한다.
[씨크릿 독트린 II, 149]
육체보다 아스트랄체가 먼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어떤 형태의 물체를 형성하는 데 필수라는 것은 내면의 삶이 원인이고 눈에 보이는 외면은 항상 결과라는 것을 긍극적으로 깨닫는데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육체 그 자체로는 기능 할 수 없고 심지어 근본적인 아스트랄체 없이는 그 구조를 유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과학에서 이것을 더 빨리 이해하면 할수록 많은 신비한 문제들을 푸는 열쇠를 더 빨리 갖게 될 것이다.
덧없는 육체 속에 아스트랄체가 있다는 것은 얼마 전까지 하나의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 과학계에 물질주의를 세웠으며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에는 아무런 여지가 없는 기계적인 운동법칙에 따라서 모든 물질 입자들과 유기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였다.
그러나 물질주의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해 전에 세계의 주도적인 과학자들 중에 한 명인 로버트 밀리칸은 물리학에서 일련의 중요한 발견들을 자세하게 열거하면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칙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원자 현상과 상대성이론으로 끝을 맺으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물리학에서의 독단적인 물질주의는 죽었다.” 물질주의로부터 떨어지는 다음 단계는 1938년 아인슈타인이 말했을 때이다: “서서히 그리고 힘겹게 장(field)의 개념이 스스로 선도하는 위치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적인 개념들 중에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근대 물리학자에게 전자기장은 고학자가 앉아 있는 의자만큼이나 실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외부 껍데기 보가 근저에 깔려있는 자성적인 장이 훨씬 더 실재적이라면 육체의 기능과 중요성은 무엇인가?
육체는 무엇인가
졋지 씨의 [신지학의 대양] 36 페이지에서 육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전체 구성 요소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이고 영속하지 않으며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부분에 있는 것이 항상 변하고 있어서 사실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비록 만질 수 있을 지라도 끝 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체는 진화의 현재 단계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질계에서 생명을 접촉하고 경험을 얻는 방법이며 또한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들을 돕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체가 근육, 뼈, 신경, 혈액 그리고 뇌 물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일정 기간 동안 이런 역할을 채운 후 진화의 다른 주기로 넘어가는 수많은 “생명들” 혹은 지성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7년을 주기로 완전히 새로운 물질로 대체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생명들은 자연에서 다양한 형태 속에서 수 많은 세월 동안 수련과 경험을 겪어왔으며 이제 인간의 형태 속에서 활동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과거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의 일부분이며 매우 높은 수준의 축적된 지성체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성 때문에 두뇌로부터 받는 엄청나게 복잡한 요구들에 대응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들을 구성하는 그것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동안에는 우리들의 책임이며, 우리가 주는 성향이나 취향에 대해서도 우리의 책임이다. 이런 생명체들이 신체를 떠날 때 우리가 준 성향을 가지고 위대한 대자연의 많은 형태들 속으로 돌아간다.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자성적인 인력 때문에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진화의 보편적인 과정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지학의 대양] 35 페이지에서 졋지 씨는 이런 생명체들에 대해서 말한다:
육체적인 삶의 신비들 중에 하나가 이런 “생명들” 속에 숨겨져 있다. 프라나 혹은 지바(Jiva)라고 불려지는 생명 에너지에 의해서 억지로 강요된 그들의 행동이 활동적인 존재와 육체적인 죽음을 설명해 줄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파괴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자들이다. 이 두 부류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결국에는 파괴자가 승리할 때까지 서로 전쟁을 한다.
우리가 잠잘 때 우리는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깨어나서 활동하면, 마치 전구 속에 있는 필라멘트가 빛을 만들기 위해서 전기의 흐름에 저항하듯이 우리는 에너지의 흐름에 저항해야 한다. 필라멘트가 결국에는 저항할 수 없듯이, 결국에는 육체 속에 있는 생명들로 생명의 힘에 저장할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되어 생명 자체가 육체를 죽이게 된다.
졋지 씨가 말하길, “생명은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원리이다. 지구는 바로 그 대양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생명은 구체 전체뿐만 아니라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물체와 존재에 침해해 있다.” 우리가 육체 속으로 윤회할 때, 이 보편적으로 고동치는 생명의 힘을 육체를 보존하는 특화된 에너지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도구 혹은 매개체가 필요하다. 산스크리트로 이런 보편 생명을 지바(Jiva)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화된 생명을 프라나(Prana)라고 부른다. 죽음으로 생명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다른 특화된 생명에 의해서 사용되기 위해서 보편적인 형태로 돌아간다.
아스트랄체는 무엇인가
위에 모든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매개체에 달려있다. 즉 보편적인 생명력을 개인적인 활력으로 변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움직이는 물질이 형체를 견고하게 유지하도록 해주는 육체의 원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이다. 그것에 대해서 많은 이름으로 불렀다. 에텔복체, 유령, 도플갱어 등등. 그러나 가장 좋은 이름이 아마도 산스크리트 이름인 “링가 샤리라(Linga Sarira)”이다. 그 의미는 도안체(design body)이다. 그것은 육체의 모형이며 사실 진정한 육체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하에서는 육체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아스트랄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아스트랄체의 물질이 별들을 구성하는 물질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개략적으로 말하면 전자기 “장(field)”이다. 졋지 씨가 아스트랄체에 구성 요소에 대해서 [신지학의 대양]에서 말하길:
아스트랄체는 눈에 보이는 육체와 비교해서 매우 미세한 구조를 갖고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신장강도를 가지고 있어서 육체에 비해서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당히 먼 거리까지 늘어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아스트랄체는 유연하고 탄력적이고 확장이 가능하며 강하다. 아스트랄체는 구성하는 물질은 본질적으로는 전자기적인 물질이며 인간을 위해서 물질체를 만들어내는 시점에 진화 과정이 도달하기 전 오랜 과거에는 전체 세계가 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잡한 물질이 아니다. 엄청난 진화의 시기를 거치고 셀 수 없는 만큼의 정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 성질은 우리가 육체적인 눈과 손으로 만지거나 보는 물질 보다 훨씬 세련되어 있다.
위에서 아스트랄체가 사실 진정한 육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잠을 자거나 트랜스 상태나 최면 상태에 있을 때 완전하며 활동하는 내면의 감각들이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진정한 감각들은 아스트랄체 속에 있다. 그리고 외적인 감각들은 단지 물질계의 물질과 접촉하기 위한 것이다. 졋지 씨는 첨언해서 말하길, “육체에서 혈액에 해당하는 아스트랄체의 아스트랄 유액(fluid)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나름대로의 혈관들과 신경체계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개성을 가진 인간이다. 오늘날 최면하는 사람들이 다루고 올라는 잠재의식적인 인식과 잠재적인 기억이 있다.”
아스트랄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아스트랄체는 육체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며 육체가 만들어진 모형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존재인 정신도 내면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시키는 연결고리로써 아스트랄체를 투사시킨다. 아스트랄체를 형성하는 것도 물론 자아의 개별 카르마에 따라서 안내를 받으며 개별 카르마는 다음 환생을 위한 적합한 조건들을 만든다. 또한 이전 육체 속에 있는 동안 형성된 성격의 특이성들인 스칸다(skandhas)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스칸다들은 우리들이 죽을 때 떠나고 태어날 때 다시 만나는 지금까지 배운 교훈들과 아직 배우지 못한 교훈들의 기억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스트랄체들을 만든다. 그러나 아스트랄체의 형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주변적인 변화만 가능 수준까지 제한되어 있어서 전반적인 형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생각과 행위들의 영향은 기본적인 형체를 세련되게 만들거나 부패시키는데 제한적이다. H.P.B.는 [씨크릿 독트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들은 아스트랄 혹은 에텔 원형으로 영원 속에 존재해왔다… 오컬티즘에서 가르치길, 이상적인 형태가 주관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도 인간도 자연도 줄 수가 없다. 최소한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형태나 형체도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 올 수 없으며 상상 속에서 진화할 수 없다.
우리는 아스트랄체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나?
아스트랄체는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으며 날카로운 칼이나 강한 산으로도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과 감정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는다. 태아가 발달하는 초기에 엄마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 강한 감정으로는 아기의 아스트랄체에 영향을 주어서 표시를 남기거나 어쩌면 기형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아기를 낳을 어머니 근처에 아름다운 동상을 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스트랄체 아니 아스트랄체의 기능이 우리들의 생각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졋지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감각들은 아스트랄체 속에 그 뿌리가 있으며 우리들 감각 보다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감각은 수 천 배나 훨씬 확장적이다.” 그가 계속 설명하길, “보통의 건강한 사람의 경우 이런 아스트랄 감각들은 육체와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으며 깨어 있는 동안 그 도구에 제한을 받는다.” 이런 외적인 기관들이 잠이나 다른 최면적인 과정으로 무기력화될 때 내면의 인간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무한한 비전을 제시해 준다.
한편 이런 아스트랄 감각들을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우리들의 미래 진화의 일부분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사람들이 따르게 될 그런 방법이다. [집중의 문화]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설명하길, 정신의 집중력을 고양시킴으로써 우리는 서서히 내면의 감각들을 외적인 감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내면의 감각들이 그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우리들의 내면의 힘들을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런 힌트를 제시해 준다.
우리들 내면에는 분별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개발하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알 수 있다.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은 오컬티즘을 가르치는 스승들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은 집중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마치 신체 기관들이 제 기능들을 다 하기 위해서 신체가 성숙해져야 하듯이,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내면의 인간도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거나 믿지 않는다. 여기 “내면의 인간”은 앞에서 말한 “이쉬바라”인 “상위 자아”가 아니라 우리가 종종 “혼” 혹은 아스트랄 인간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을 말한다.
두 번째 부분인 내면의 인간이 이런 모든 능력들과 힘들을 잠재력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힘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 아직 깨어나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만 개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내면의 존재는 우리 육체와 서로 떨어트릴 수 없게 한 올 한 올 엉켜 있다.
보통 이 내면의 기관들과 외면의 기관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내면의 기관이 외면의 기관과 너무나 조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집중하기 시작할 때 내면의 다른 기관들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육체적인 기관들의 사슬로부터 분리하려고 한다. 이렇게 그 사람은 자신의 힘들을 복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육체의 기관들은 하나도 해를 입지 않으며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에서 여전히 그 기관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기관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집중이 완전하게 될 때, 보통 때는 우리를 피해 지나가는 그런 지식들이 이제는 우리들이 뻗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우리가 있게 된다.
이 글에서 졋지 씨는 경고를 부가적으로 말한다. 즉 분노는 이런 집중의 결과들을 파괴할 것이고, 특히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된 아스트랄체가 그 형체를 잃게 되어 육체 속으로 다시 날아들어갈 것이며 육체 속에 얽히게 되어 구속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가 말하길, 시기, 허영 그리고 두려움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통제되거나 근절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들의 감정들을 통제하고 감각이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지배력을 깨버리는 것이 이런 개발의 필수 조건인 것 같다.
아스트랄체의 힘들에는 어떤 것이 있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스트랄체는 육체 속에 있는 감각들의 “원조들”인 완전한 감각들과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세련되고 발달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힘은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다른 기능들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들의 인식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이다. 내면의 감각들이 이런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간과 공간의 장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텔레파시, 투시력 그리고 투청력의 기능들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기능들이다. 그리고 내면의 감각들은 이미 일어난 원인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어느 정도는 미래 속을 내다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광범위하고 깊은 지각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자아의 분별력을 위한 통로를 제공해 주게 된다.
삶의 모든 사건들의 기억들과 그림들이 기록되고 저장되는 곳은 아스트랄계이다.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아스트랄체는 이런 그림들과 소리들 그리고 감정들을 접촉할 수 있다. 수련을 닦은 초인에게 이런 것들은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는 수련이 안된 심령가들은 그것들에 혼란스럽지만 매혹을 느끼게 된다.
아스트랄체에 기인한 많은 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육체에서 다리를 밀어낼 수 있는 능력, 육체를 나와서 먼 거리까지 여행할 수 있는 능력, 볼 수 있게 해서 다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 등.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것이지만, 순수한 동기 및 인격과 함께 이런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없이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혼의 외피]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이런 외피들 중에 하나로써 아스트랄체의 정상적인 기능과 위치에 대해서 제시해 준다. 그가 말하길;
태양계에서 현재의 진화가 시작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혼은 자신에게 맞는 다양한 덮개들을 만들었다.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에 근접한 매우 미세한 것에서부터 외부에서 볼 때는 가장 진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덮개들 중에서 가장 환영이 많은 육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혼이 알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런 덮개들 혹은 외피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혼 혼자로는 대자연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덮개들을 통해서 모든 감동 혹은 감흥들과 생각들을 즉시 변형시킨다. 그 과정에서 혼이 육체를 지시해서 자신은 경험을 얻는다.
아스트랄체는 이런 외피들 중에 하나이고 다음 상위계로 감각들을 번역하거나 보고하는 기능을 하며, 마찬가지로 내면의 인간의 명령들을 신경들과 근육 등 육체 인간에게 번역해서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비록 아스트랄체가 모든 감각들과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아가 물질계에서의 생명을 접촉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
육체 없이 존재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 물질 그 자체가 여전히 아스트랄 상태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가장 외곽의 매체가 아스트랄체 이었던 때가 있었다. 인류 전체가 물질의 환영을 볼 때가 올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이런 미세한 아스트랄체 속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내면의 세계에서 살고 활동하는 진보된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그 분들은 초인들이고 대스승들이며 육체라는 매개체의 필요성이 없는, 내면의 세계에서 일을 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그 분들 중에 육체를 가지고 물질계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 의사 소통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분들은 필요할 때마다 육체를 떠나서 양쪽 세계에서 골고루 활동하는 분들이라고 한다.
아스트랄체를 개선시키거나 오염시킬 수 있는가
일단 아스트랄체가 활동하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아스트랄체가 진정한 육체이고 욕망의 성질과 하위 마인드의 활동들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열하고 더러운 생각들과 감정들로 아스트랄체를 오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내면의 아스트랄 감각들을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종종 이런 일은 그런 감각들이 존재하지 않다고 혹은 내면의 존재가 없다고 믿음으로써 일어난다. 우리는 그런 지식이 없어서 혹은 물질적인 편견에 의해서, 육체적인 감각들의 대상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반전시켜 왔다. 이런 집착은 내면의 감각들을 외적인 감각들에 가둬두는 효과가 있으며 그래서 그 내면의 감각들을 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지고자에 대한 지각을 얻는 열쇠로 활동의 결과에 대한 초연함의 가치를 말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아스트랄체를 바꾸거나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조절(집중)을 통해서 영원한 아스트랄체를 만드는 과정이며 언젠가는 시작해야 할 절차이므로 상당히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로 이런 시도에 의해서 개개인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기억들과 능력들을 유지할 수 있는 아스트랄체를 창조할 수 있다.
크로스비 씨는 [친절한 철학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정신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고 내면의 인간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알기를 원하게 되자마자, 그 노력과 자세로 인해서 힘과 견실함이 증가하게 된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신체의 기관들이 주위로 만들어지는 힘의 센터였던 것이, 이제는 분리된 아스트랄 기관들이 되도록 만들어진다. 그 기관들을 만드는 과정은 육체의 모든 기관들이 아스트랄체에 완전하게 통합되어 그 노력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 내면에서 서서히 진행된다. 그러면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의 부침 이상이 된다. 이제 우리는 아스트랄체가 행동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여기 물질계에 있는 육체 보다 아스트랄계에서 훨씬 더 완전하고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일곱 가지 초감각들을 가지고 더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상의 아스트랄체가 있는가
육체는 매일 깨어 있는 의식 상태로 단지 하나의 의식 상태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아스트랄체는 훨씬 더 넓은 활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의식 상태들과 칠중 구조의 여러 가지 내면의 원리들을 표현하기 위한 힘들과 물질을 제공해야 한다. 생명의 단계들이 다양하다는 사실 때문에, 특화된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다양하다. 가르침에서 말하길, 여러 가지 아스트랄체 혹은 일곱 개의 아스트랄체가 있다고 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진 하나의 아스트랄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새로운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특정한 체가 변하게 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크로스비 씨는 [신지학의 대양]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다.
아스트랄체는 단순히 포괄적인 총칭이다. “아스트랄”이라는 용어는 물질을 넘어서 있는 모든 것들에 사용된다. 그러나 물질계에서 흙, 물, 공기 그리고 불이 있듯이, 아스트랄계에도 유사한 분류로 나누어져 있다. 흙에 대응하는 아스트랄 형체는 육체를 침투해서 육체와 함께 같이 있다. 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스트랄 물질의 상태이고, 카마-루파를 형성한다. 공기에 상응하는 것은 마나스 체이고, 불에 대응하는 것은 사고자의 체로 의식의 자리이다.
아스트랄체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류하는 다른 방법들이 있지만, 지성적이고 유연한 성질 때문에 인간의 영적인 면과 물질적인 덮개 사이를 연결하고 해석하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내면의 훨씬 더 미세한 물질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트랄체”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스트랄체를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는가
과학의 구조를 급변시키는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데 확립 체계로서 과학이 어려움을 갖는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심리학이나 의학과 같은 다른 학문들이 아스트랄체를 자신들이 하는 연구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볼 때, 그 때가 되야 비로서 과학에서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근접한 과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신지학의 입장에 근접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런 과학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일 대학교의 H.S. 버(Burr) 박사와 노오스롭(Northrop) 박사로, 1939년에 “생명의 전자-역학이론”에 근거한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1939년 뉴욕타임즈 과학편집자가 쓴 기사에서 일부를 발췌한다.
구체적으로 미리 정해진 패턴에 따라서 개개인을 만들고, 배아기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육체 속에 있는 전자기적 건축가가 살아 있는 사물들의 몸 속에 존재한다. 신체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변화를 한다. 뇌 세포를 제외하고 신체를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개개의 세포들은 성장해서 죽고, 다른 세포들로 대체된다. 그러나 전자기적인 건축가는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유일하게 안정적이다. 새로운 세포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원래 세포들과 비슷한 패턴에 따라서 조직화시키고 이렇게 계속해서 신체를 지속적으로 창조한다. 내면에 있는 전자기적인 건축가가 기능을 멈추게 될 후에 죽음이 오게 된다.
전자기적인 건축가는 생명의 성질과 살아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다. 마치 자석이 그 주위에 자기력의 장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은 개개의 살아 있는 유기체는 전기 역학의 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버 박사에 따르면, 실험의 증거를 보면 동물들 개체들과 그 개체들 속에 있는 개개 세포들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 전기 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체를 상호 침투하는 전자기적인 패턴의 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다른 과학자들은 소련에 있던 과학자들로, 소위 킬리안(Kirlian) 사진을 가지고 식물의 아스트랄체를 찍을 수 있었던 과학자들이다.
또 다른 돌파구가 1981년 생명의 신과학에서 루퍼트 쉘드레이크(Rupert Sheldrake)에 의해서 있었다. 그는 생물학에 대한 현재의 정통적인 접근 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형태의 신비를 설명하는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형태 발생의 장이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물리적인 영향을 주며, 이런 장들이 모든 복잡한 단계에서 특이한 형태나 유기체를 조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 장들은 패전이 있는 제약을 에너지적으로 물리적인 과정의 결과가 가능하도록 제약을 가한다.
죽은 후에 아스트랄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의 죽음으로 아스트랄체의 가장 하위 측면이 육체와 함께 분해된다. 이것이 바로 물리적인 분자들을 위한 틀을 형성하는 “장(場)”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아스트랄체 속에 있는 응집력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덤 근처에서 종종 목격되는 유령이다.
이 체의 또 다른 측면은 욕망체를 의미하는 카마루파(Kama Rupa)이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죽을 때 떠나는 욕망들과 열정들의 일시적인 매개체로서 형성되는 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것보다 더 오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 또한 진정한 인간인 상위 삼개조(Higher Triad)가 인간의 네 번째 원리인 이 성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자마자 분해하게 된다. H.P.B.는 용어집에서 말한다. “인간의 창백한 복사본이었던 것이 일정 시간 동안 식물같이 살아가는데, 그 기간은 다양하며 그 속에 남겨진 물질의 구성요소와 죽은 사람의 과거 생에 따라서 결정된다. 상위 정신과 영 그리고 육체적인 감각들이 없기 때문에 무감각한 도구로 남겨지면 서서히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령”으로 불려지는 것이고, 영매에 의해서 다시 활성화되어 기억 속에 있는 기억들을 내주기 때문에 영적인 강령회에서 참석한 사람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영이 아니다. 영은 이미 떠났고 이 세계에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
욕망과 열정의 원리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
카마(욕망과 열정)는 육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원리이며, 육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카마는 인간의 칠중 구조의 네 번째 원리로, 그것을 중심으로 위로 올라가는 혹은 아래로 내려가는 균형의 원리이다. 졋지 씨는 그것이 행동의 토대이고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잘하거나 못하거나 먼저 우리들 내면에 있는 욕망을 일깨워야 한다. 결국에 성인이 되는 사람도 많은 삶들 중에서 어느 한 때 신성한 사람들의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계속 하기 위해서 진보하고자 하는 욕망을 살려야 한다.” 카마를 개인의 욕망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사악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욕망들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카마의 다른 면이 있다. 다시 용어집에서 보면, “카마는 보편적인 선과 사랑 그리고 살아 있고 느끼는 만물과 도움 및 친절을 필요로 하는 만물에 대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최초의 의식적인 욕망이고, 절대자로부터 나온 하나의 광선이 되어 생명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창조적인 유일의 힘의 의식 속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무한한 자비와 동정이라는 첫 번째 감정이다. 카마는 행복과 사랑을 창조하는 신성한 욕망이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인류가 웅대한 이상들을 미리 결정된 도그마로 인격화시킴으로써 물질화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카마는 동물적인 계에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힘으로 되어 버렸다.”
카마가 두 가지 측면, 즉 하나는 낮은 측면, 다른 하나는 높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이 전적으로 하위에 있으며 물질적인 것들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런 성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물 성향을 자극하여 우리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의식이 최고로 고귀한 열망과 비이기적인 욕망들에 집중되어 있을 때, 카마가 변형되고 영의 힘이 붓디 성질로부터 오게 된다. 이기적인 욕망들에 대한 집착으로 물질계와 물질적인 감각들을 제외하고는 지각 영역을 닫아 버리게 된다. 이런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면 내면의 감각들의 영역과 붓디 성질의 분별력 그리고 수많은 생의 복합적인 결과의 판단력이 열리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서 있듯이, 카마와 붓디는 마나스가 중간에 서있는 서로 반대되는 싹이다. 그래서 카마를 건설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만드는 것은 마나스적인 자아이다. 카마는 활동하는 물질 에너지 힘을 나타내고, 그 힘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진화에서 앞으로 나아가거나 반대 방향으로 떠 가거나 한다. [신지학의 대해[에서 열정과 욕망들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제시해 준다.
아스트랄체와 함께 열정 및 욕망은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그 발달 정도가 아직은 희미한 식물계에도 존재한다. 진화상의 어떤 한 시기에 정신, 혼, 영의 상위 원리가 잠재해 있었고, 다른 물질적 원리들의 발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 시점까지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동등하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있는 동물은 열정과 아스트랄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차이를 의미하는 정신의 싹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 내면의 신은 마나스로부터 시작되며, 바로 신지학에서 자주 언급하거나 경고하는 싸움이 바로 이 신과 하위 동물간의 싸움이다. 하위 원리는 상위 원리와 비교해서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행동의 기반이 된다. 우리는 더 잘하려는 욕망으로 자신을 먼저 나타내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것을 ‘라자스’, 즉 활동적이며 나쁜 속성이라고 부르며, 어둠과 무관심의 속성인 ‘타마스’와 구별된다. 라자스가 있어서 충동을 주지 않으면 인간은 일어설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열정의 원리를 이용함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상위 특성들이 욕망들을 세련되게 만들고 고양시켜서, 그 욕망들이 진리와 영에 지속적으로 놓여질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지학은 열정을 탐닉하거나 지칠 때까지 충족시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유해한 가르침은 없었기 때문이다. 요점은 이기심과 무관심 속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어두움의 속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상승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원리가 주는 활동성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를 움직이고 조절하길 원하면 먼저 욕망을 일깨워야 한다고 신지학은 말한다. 그 욕망은 낮은 성질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봉사에 삶에 대한 욕망이다. 심지어 붓다나 예수로 과거 오래 전에 이 세계를 돕고자 하는 욕망을 깨워서 그 욕망을 수많은 생 동안 살아 있도록 지켰다고 들었다.
우리는 맹세의 힘과 가치에 대해서 많이 듣는다. 중요한 것은 상충되는 목적들을 거부하고 의도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함축하는 것을 이루고자 필요한 노력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것이 욕망의 원리를 재생 혹은 영성화시키는 것이다.
http://blog.daum.net/aldiwkzl703/1433
사후의 상태에 관하여
윤회하는 자아는 영원하다
“나 자신은 결코 없었던 적이 없고, 지구의 모든 왕자들도 마찬가지이며, 이후에도 우리들 모두는 결코 존재하지 않지 않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
오랜 세월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죽음”이라는 “관문”에 대해서 신지학이 비춰주는 혜택을 충분하게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제들을 명심해야 한다. 첫번째는 진정한 인간인 자아(Ego) 혹은 의식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식 상태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이런 의식 상태들의 성질과 특징은 대부분 육체 속에 있을 때 행동하고 생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네 번째 죽음이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몇까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필요하며 은혜롭고 지복과 치유를 가져오는 휴식이다.
1) 윤회하는 자아는 영원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오래된 사실을 한층 깊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죽을 수 없다. 우리들은 죽음을 여러 번 반복해서 경험했으며 항상 관찰자로써 경험했다. 그리고 형상과 육체가 죽고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변화들의 목격자이며 “인식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 인식자”이다. 형체는 죽는다. 그러나 그 형체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것은 영원하다.
죽음과 재탄생의 주기 동안 우리의 도구와 상태가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의식이며 그런 변화들을 가져오는 같은 힘이다. 우리 개개인은 그 주기를 여러 번 지나왔으며 우리들 어딘가에 그 기억이 있다. 현재의 조건에서는 우리들이 이용할 수 없지만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는 그 기억의 일부분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현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가 할 일에서 주의를 분산시킬 뿐 아무 것도 도움이 안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과거 생에 대한 기억을 나타내는 수천의 검증된 케이스들(이안 스티븐슨 박사가 기록한 케이스들)과 임사체험을 한 여러 권의 책들을 보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죽음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최근에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기계를 끄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의학계와 종교계 사이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사건에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믿어왔던 것보다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졋지 씨가 [신지학의 대해]에서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숨이 육체를 떠나면 우리는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시작에 불과하다. 죽음은 다른 계에서 진행된다. 육신이 차가워지고 눈이 감기고 신체와 정신의 모든 힘들이 두뇌를 확 뚫고 지나가며, 방금 마친 생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 뿐만 아니라 아주 세밀하며 작고 사소한 인상들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이 내면의 인간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게 각인되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들이 보여지지만 진정한 인간은 두뇌 속에서 매우 바쁘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일이 끝나야 비로소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엄한 일이 끝나게 되면 아스트랄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생명에너지는 사라지고 나머지 다섯 가지 원리들이 카마로카 계에 있게 된다.
이곳이 바로 아스트랄계로 지구를 둘러싸면서 동시에 관통해 있는 세계이며 지구로부터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 뻗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계는 하나의 장소이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장소라는 의미로의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법칙들이 그곳에서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조건들 때문에 다른 의식 상태가 필요하다.
죽음이 시작되면 육체와 활력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분리가 시작된다. 이 시점에서 두 가지가 일어난다. 하나, 내면의 세계에서의 기억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활동하는 실재들이 된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둘, 그 변화는 의식 상태의 변화이다. 육체가 없다면 의식의 일부분만이 나타나게 되고 육체적인 생명의 대조가 없다면 판단을 할 수 없다. 단지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카마-로카에서 아스트랄체는 욕망의 본성과 결합하여 카마-루파라고 부르는 실체를 만들게 된다. 카마-루파는 지난 생의 모든 욕망들과 혐오들의 총 집합체이다. 그런 느낌들이 있는 그대로 숨김 없이 그림처럼 지나가는 동안 자아가 벗어나야 할 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곳을 욕망의 세계라고 부르고 지성이 없는 욕망이 지배적인 힘이다.
만약 이 성질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단시간에 이 “연옥”에서 자유롭게 되어 데봐챤으로 “떨어지게” 된다. 욕망의 체인 카마-루파는 결국 육체가 겪는 같은 분해 과정을 겪게 된다. 자아는 이 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다음 윤회할 때 새로운 체들을 만들 때 “스칸다(Skandhas)”라고 부르는 형태로 이 욕망들의 성격과 힘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런 사후 상태는 무한하게 다양하고 방금 지나온 삶의 상태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설명이 맞지 않는다. 카마-로카는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이다.
카마-로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카마-로카에서의 삶은 그것을 구성하는 욕망들의 강도에 따라 다르다. 만약 그 욕망이 강하면 아스트랄계에서 오랜 시간동안 실체로써 지속할 것이고, 만약 그 욕망이 약하면 목표 없이 둥둥 떠다니다가 곧 분해될 것이다. 아스트랄계에서 형성 되었기 때문에 과거 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졋지 씨는 [어떤 학생의 주석과 추측]이라는 글에서 “아스트랄계는 인간과 자연의 모든 습관과 유전의 기억과 생각 형태의 저장소이고 용매제이다.” 따라서 만약 사는 동안 심령적인 것들에 끌리는 성향을 만들게 되면 아스트랄체(카마-루파)가 강령회로 끌려서 자신의 기억들을 쏟아놓게 될 것이다. 영매들이 자주 이 아스트랄 “기억 은행”을 떠난 혼으로 착각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환경 하에서 마치 녹음기가 녹음된 것을 반복해서 틀어주듯이 카마-루파도 거기에 기록된 기억을 그대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 혹은 혼은 거기에 없다. 혼은 접촉할 수 없는 상태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카마-루파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영향은 주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 의지나 방향성이 없는 욕망과 질투 색욕이 응집한 덩어리이다. 그것들은 지구의 심령계 영역에 있으며 그냥 놓아두면 아사하게 된다. 그러나 수동적이거나 자신의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심령적인 것을 장난 삼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은 항상 위협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최악의 생각들이 나오는 원천이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가 질투, 색욕, 증오 등의 강력한 감정들을 품게 될 때 이런 감정들을 끌어당긴다. 분명히 정신이 없는 실체들에게 먹이를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마지막으로 카마-로카에서는 카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곳에서 나쁜 카르마를 갚지 못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곳은 결과가 나타난 상태이며 그곳에서 어떤 진보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지나갈 필요가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방금 마친 삶의 모든 이기적이고 사악한 면들을 자아로부터 분리하고 떨어뜨리는 과정으로 그렇게 되면 자아는 데봐챤의 필요한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리가 일어나게 되면 다음 상태로 변화하기 전에 무의식 상태가 되고 “데봐챤의 희열”로 깨어나게 된다.
데봐챤은 무엇인가
그 글자는 “신들의 거주지”를 의미하지만, 데봐챤은 어떤 거주지가 아니며 따라서 장소라는 제약을 받지 않는다. 꿈과 비슷하며 그것은 하나의 의식 상태로 어떤 다른 외적인 간섭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자기 자신의 데봐챤을 만들기 때문에 그 특징이나 모양에서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각각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필요에 딱 맞는 것이다.
우리를 데봐챤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바로 카마-루파와 전체 욕망의 성질을 벗어버려서 그렇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는 선한 것, 비이기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만 남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는 상위 삼위일체와 무엇이든 과거 생에서 가지고 온 선한 것뿐이다. 이제 우리는 “하위”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결과 이기적인 감정이나 느낌에 대한 기억조차 없게 된다. 지구에서의 삶에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되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상위 열망들을 개발하고 확장 시킬 수 있고 그것들의 본질을 우리의 붓디에 만들 수 있게 된다. [씨크릿 독트린(vol 1, p.243-4)]에서 발췌한 것을 보면 이 과정에 대해서 더 밝게 비춰줄 것이다.
1. 마나스는 영원 불멸하다. 왜냐하면 매번 새로운 윤회 때마다 아트마-붓디에 자신의 어떤 것을 추가한다. 이렇게 해서 모나드에 자신을 동화함으로써 영원불멸을 공유하게 된다.
2. 붓디는 매번 새로운 윤회를 하고 난 후에 마나스로부터 얻어오는 추가적인 것에 의해서 의식적인 상태로 되어간다.
3. 아트마는 진보하지도 않고 망각하지도 않으며 기억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빛의 광선으로 물질이 원하면 물질의 심연을 통해서 그리고 그 위를 비춘다.
우리는 서로 상충되는 압력들에 의해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혼을 위한 휴식이 여기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위 본성은 비이기적인 행위를 하거나 비이기적인 생각들을 함으로써 휴식을 얻는다. [신지학의 대양](p.110)에서 졋지 씨는 말한다:
이제 자아(Ego)는 육체와 카마(kama)가 없으며 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어떤 수단 혹은 매개체를 입고 데봐챤 속에 있으며 순전히 마인드와 혼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 속에서의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그렇듯이 실재적이다. 이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상태는 마치 색깔의 배치나 글의 구성에 매혹되어 있는 예술가나 시인 같은 상태로 사물들이나 시간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외부 세계인 객관적인 세계와 내면의 세계인 주관적인 세계에서 동시에 원인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내면의 혹은 심령적인 충동들, 혼의 높은 열망들과 배움들은 객관적인 세계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주관적인 세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만 한다. 졋지 씨에 의하면 그것들은 “데봐챤 상태를 위한 근본이자 원인이며 토대이고 기둥임에 틀림없다고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자아(Ego)가 갈구한 선하고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것, 이상적인 존재로써 품었던 개인적인 혹은 영적인 희망들과 높은 열망들, 그것들은 이곳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 그것들은 그가 창조하려는 것의 물질로 그 물질을 가지고 이제는 활동적이며 영적인 상상력의 힘에 의해서 진정한 존재들과 진정한 삶이 가득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또 창조할 것이다.그것은 꿈과 같은 존재상태이지만 너무나 실재적이어서 어느 것도 그 누구도 그것이 스스로 만든 것이고 스스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며 존재의 주기에서 지나가는 단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지각하도록 일깨울 수가 없다. 데봐챤의 환경 너머에 있는 존재들을 제외하고는 구 누구도 일깨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존재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지복에서 혼을 일깨우지 않을 만큼 지혜로운 존재들이다. 결국 그는 진정으로 지복속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당부간이지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각들에 반응하는 어떤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데봐챤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데봐챤은 우리 자신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일상 생활 만큼이나 개개인 마다 다르다. 방금 살았던 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데봐챤은 개인적이고 개인의 신념, 지식 그리고 철학에 따라 다르다. 스승들께서 지적하시길,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이고, 힌두인은 힌두인이, 사후 생을 믿지 않는 물질주의자는 잠시동안 뒤척이다가 다시 윤회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서 세울 상태를 위한 심령적인 충동들을 만들지 못했다.
또 다른 끝을 보면 고귀하고 비이기적인 생각들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들의 에너지를 그냥 안이한 소원을 하면서 낭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데봐챤은 짧을 수 있다. 그리고 물질의 미혹을 간파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태가 필요 없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휴식은 그들이 하는 일 속에 있다. 이 두 가지 예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다양한 경우들과 그 조합들이 있다.
“진주로 된 천국의 문들”이라는 생각을 믿는 사람들은 이 상태 속에서 그들의 창조물을 그렇게 만들어 낸다. 사는 동안 가장 큰 소원이 동료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은 이런 기회들이 제약 없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일 것이다. H.P.B.는 “삶과 죽음”이라는 글에서 “죽음은 잠이다. 사후에 우리가 사는 동안 배웠던 것들을 영적인 눈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종종 우리가 발명한 것도 있고 우리들이 만들어낸 착각들과 진정한 신념들을 실천한 것들을 보여준다.” 사후 상태에서는 과거 생에서 가져온 믿음들과 지식들 그리고 경험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다.
사후 생을 믿어야 하는가
“무덤의 다른 쪽 세계에서 의식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H.P.B는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후 생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경험을 의식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후 생의 신비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녀가 말하길, “자아는 항상 받을 만큼 보상을 받는다. 육체의 붕괴이후 완전하고 가득찬 의식이나 혼란스러운 꿈들의 상태 혹은 거의 절멸과 구분할 수 없는 완전히 꿈이 없는 꿈의 상태를 시작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세 가지 의식 상태들이다.
의식적 불멸은 개개인이 만들어 가야 할 상태이며 육체 속에 있는 동안에 쌓아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천국”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진실로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완전히 물질주의자 이지만 의식이 그냥 빛처럼 그렇게 꺼져버릴 것이라는 내면의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두 가지 모두 다 데봐챤 상태를 채색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면의 믿음이다. 우리들의 사후 생의 상태들은 우리 손에 있으며 그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목적과 어떤 법칙이 작용하며 일상 생활에서 하는 행동과 생각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가
크로스비 씨는 이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말하길, “데봐챤 상태 속에서는 존재들 사이에 어떤 접촉도 없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존재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인 존재 상태일 것이다. 또한 우리들이 경험한 대부분의 문제들이 다른 존재들과 접촉으로 인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만약 다른 존재들과 그런 접촉이 가능하다면 혼이 천국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H.P.B의 [신지학의 열쇠]를 보면 이것이 완전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H.P.B.가 말하길, “데봐챤의 거주자들의 지복은 자신들은 지구를 떠나지 않았으며 죽음과 같은 것은 결코 없다는 완전한 확신이다. 사후 어머니의 영적인 의식을 보면 자신은 자녀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어떤 틈이나 연결고리도 육체가 없는 상태를 가장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행복한 상태로 만들 수가 없다.” 이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아직 오점이 없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가장 최고의 빛 속에서 볼 것이고 그럼으로써 혼을 위한 행복과 휴식을 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문젯거리 혹은 슬픔을 완전하게 망각하며 심지어 그런 상태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비애와 같은 것이 있다는 인식 조차도 이 상태의 목적과 얻은 휴식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PB 는 [신지학의 열쇠]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물질적인 형체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가까이 그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데봐챤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상상 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그렇다. 왜냐하면 순수한 신성한 사랑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개화할 뿐만 아니라 영원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신성한 사랑은 영원불멸하며 카르마는 서로 영적인 애정을 가지고 사랑한 사람들을 같은 가족 그룹으로 환생하도록 한다. 무덤을 넘어선 사랑,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착각이라고 부르지만, 그 사랑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마술적인 신성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 옆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상상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어머니의 자아(Ego)는 지구에서 살아 있을 때만큼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 육체 속에 살고 있는 자식은 그 사랑을 항상 느낄 것이다. 그것은 꿈 속이나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신의 섭리 같은 보호나 비상구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력한 보호막이고 공간이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래 지속되며 그 기간의 결정요인은
모든 데봐챤 상태를 적합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상태 속에서 머무르는 정확한 기간을 설명해 줄 수 없다. 그 기간은 자아(Ego)의 삶 동안 일으킨 원인들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 그 기간은 몇 년 혹은 몇 개월처럼 매우 짧을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경우 수 천년 까지 길어질 수도 있다. [신지학의 열쇠] 145 페이지에서 HPB는 말한다: “그것은 영성의 정도와 전생의 공과에 따라 다르다고 배웠다. 보통 사람의 평균 기간은 10년에서 1500년까지 있다.” 졋지 씨는 이것이 평균 기간이며 확실하게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간 그 자체는 우리가 지구 상에서 느끼는 시간과 같은 상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데봐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없다. 단지 일련의 사건들과 경험들이 지나가는 것을 인식할 뿐이다.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데봐챤 속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이나 불안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다.
데봐챤 속에 있는 시간의 길이는 현생에서 만들어낸 심령적인 충동들을 쓰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에 따라 다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만들어낸 충동들은 그 세계에서 풀어야 한다. 만약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혹은 오랜 시간 동안 휴식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꿈 꾸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아마도 주관적인 상태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무르게 되면서 축복 받은 환상을 즐기면서 그 충동들을 소비할 것이다. 동양에는 지구에서의 삶과 관계없이 개개인들이 오랜 기간 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수련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의 꿈들을 실천하거나 쏟아 내는 사람들 혹은 기꺼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데봐챤은 혼의 휴식을 위해서는 적합하지만 비교적 그 기간이 짧다. 크로스비 씨는 다음과 같이 더 깊이 있게 지적한다. 그가 말하길:
데봐챤에 있는 존재들은 그들의 지복의 상태라는 바로 그 힘에 의해서 그 상태 속에 있다. 그들은 그 속에서 나올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열망들의 힘이 다 소진되었을 때만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만약 강하고 깨끗한 성질을 가진 존재가 신체를 가지고 지구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 상태로 들어간다면 아마도 그런 봉사를 하는 것이 역할인 어떤 초인들에 의해서 신체를 가질 수 있도록 깨워질 수도 있다. 이 초인들은 모든 환영에서 자유로운 존재들이며 그들 자신들은 데봐챤의 상태 속에 있지 않은 존재들이다. 모든 세계에서 의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데봐챤 속에 있는 존재들과 실제 접촉할 수 있다.
위의 인용한 글이 강조하는 것은 어떤 실체가 일단 데봐챤에 있게 되면 혼자 힘으로 객관적인 세계로 돌아올 수가 없으며 객관 세계에 있는 그 어떤 존재나 물체와 의사소통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데봐챤의 전체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죽어 가는 사람이 죽음의 시간에 가까운 사람이나 사랑했던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두 편집자간의 대화]라는 글에서 H.P.B.는 이렇게 설명한다. “죽음의 순간에 매우 보고 싶은 사람이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매우 골똘하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나타날 수도 있다. 생각이 객관화되는 것이다. 마치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사람의 복체 혹은 그림자는 충실하게 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것을 심지어 생각 속에서도 그 복체는 반복한다.” 동정이나 혐오를 통해서 “민감한 사람”이 강력한 생각을 통해서 이런 유령을 일깨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진정한 존재인 자아는 이미 떠나갔고 접촉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떠난 혼을 누가 귀찮게 하고 싶을까?
왜 죽어야 하는가
물질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형체들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고 선한 의도를 곧바로 실행하는 습관을 형성할 때가 오면 그러면 더 이상 데봐챤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같은 시기에 혼은 삶의 투쟁에서 휴식이 필요하다. 일단 육체와 아스트랄체에 의해서 묶여진 구속이 느슨해 지면 마나스는 자신의 본성에 가깝게 확장하고 자유롭게 활동한다. 삶 속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작은 조각도 행동화할 수가 없다. 우리가 일으킨 심령 에너지를 처분해 버릴 수가 없다. 졋지 씨는 [동양에서 온 메아리]에서 “어떤 에너지도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곳이 바로 데봐챤이다. 이런 실현이 혼의 휴식이다.”
죽임이 필요한 과정인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진보할 수 있는, 진보해서 새롭고 더 나은 형체와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현재의 육체와 상황 속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형체는 죽으며 죽음은 항상 진행되고 있고 영의 세계 속에서 살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만을 통해서 가능하다. 현대 언어로 우리는 주기적으로 책임과 역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사후에도 발전하는가
카르마적인 의미에서 사후에는 진보가 없다. 사후에는 자아가 어떤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후 상태들 속에서는 카르마를 갚거나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진보가 있다. 자아가 지난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소화하는 것이 진화의 한 방법이다. 이것이 개인의 영적인 진보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그리고 비록 결과지만 매우 필요한 것이다. 형체는 없어져야 하지만 지성과 생각들, “깨달음”들은 붓디 성질 속에 보관되어져야 한다.
이해해야 할 다른 개념은 데봐챤에서의 사건들이 다음 생의 색깔이나 성격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카르마이며 경제의 법칙이다. 그러나 데봐챤이 끝나갈 무렵에 다음 생과 관계가 있는 것이 있다.
일단 모든 심령적인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그 한계까지 다 써버리면 삶에 대한 욕망인 탄하(Tanha)의 힘들이 자아를 환생하도록 끌어당긴다고 신지학은 가르친다. 그러나 실제로 윤회가 일어나기 전에 모든 개성들로부터 자유로운 채 최상의 상태 속에서 의식하는 자아가 다음 생을 구성할 환경들과 현재의 상태까지 이르도록 만든 모든 원인들을 보게 되는 짧은 시간이 있다. 바로 이 짧은 순간에 자아는 그 앞에 있는 정의를 보고 인류를 위해서 일을 하러 그 길로 기쁘게 다시 들어간다고 우리는 들었다.
임종시 바라보는 파노라마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스승들 중에 한 분이 쓴 편지를 인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H.P.B.가 “죽어가는 사람의 기억”이라는 글에 인쇄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전체 생이 우리들 기억 속에 반사되어 잊고 지냈던 모든 구석에서 그림들이 하나 둘 사건 마다 나타난다. 죽어가는 뇌는 강력하지만 최후의 충동으로 기억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두뇌가 활동하는 동안 두뇌에게 맡겨져 왔던 모든 인상을 충실하게 기억으로 회복시킨다. 가장 강력했던 생각이나 인상이 당연히 가장 생생하고 살아 남게 되며 나머지는 모두 영원히 사라지지만 데봐챤에서 다시 출현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사람도 미친 채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죽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미친 사람도 혹은 섬망증의 발작을 하는 사람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완벽한 평정의 순간을 가질 것이다. 그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맥박이 뛰고 마지막 심장이 고동치고 동물 체온의 마지막 불꽃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에 두뇌는 생각하고 자아는 전체 생을 다시 한 번 살게 된다.
이것이 죽어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회고의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시간에 이 회고를 보고하였지만 심리학자들은 아직도 이 현상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위에서 인용한 글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이것이 최소한 몇 초 동안 두 개의 기억들 아니 오히려 두 가지 상태, 의식의 상위 상태와 하위 상태가 합쳐져서 하나를 만들고 죽어 가는 존재가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오직 하나의 현재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기를 바란다.”
임종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명히 임종 시에 죽어가는 사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사이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확실한 지식 혹은 확신이라는 지탱해 주는 힘이 필요하다. 감정적인 위기를 겪는 이런 시기에 남겨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죽음은 집중의 시기이며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떠나는 자아는 할 일이 많고 가능한 한 많은 도움을 얻어야 한다. 죽음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홀로 조용하게 방해 받지 않고 있어야 한다. 모든 표시들이 죽음을 나타낸 후에도 오랫동안 마나스가 바쁘게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육체”는 “최소한” 12시간 이상 방해 받지 말고 있어야 한다고 스승들께서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 현대 과학은 정확하게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마나스에게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또 다른 관심거리는 육체의 처리 문제이다. 신지학자들에 의해서 화장이 서구에 도입되었다. 왜냐하면 육체를 처리하는 가장 깨끗하고 위생적인 방법일 뿐만 아니라 최소의 비용이 들고 떠나는 혼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화장은 자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며 혼의 외피들 어느 것에도 영향이 없다. 그러나 화장의 간접적인 효과는 아스트랄체를 자유롭게 해 주며 더 빨리 분해하게 만들어서 재활용 과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매년 화장을 하는 것이 늘어나고 있으며 언젠가는 고통스럽고 낭비하는 그런 관습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시간은 조용하고 즐거운 시간이며 형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체에게 활기를 불어넣은 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다.
맺음말
[동양에서 온 메아리]에 있는 이 구절들을 보고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여기에 포함해야 한다고 느꼈다.
사람이 죽을 때 뇌가 마지막으로 죽는다. 사람이 죽었다고 했을 때 생명은 여전히 바쁘다. 혼은 모든 과거 사건들을 정리하고 전체를 이해하면 전반적인 성향이 나타나고 지배적인 희망을 보게 된다. 그들의 마지막 아로마가 데봐챤에서의 삶의 주된 골자가 된다. 미적지근한 사람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을 가게 된다. 대자연은 그를 뱉어 낸다. 객관적인 상태든 주관적인 상태든 긍정적인 조건들은 긍정적인 충동을 통해서 다다르게 된다. 데봐챤에서의 구분은 혼의 지배적인 동기에 의해서 정해진다. 혐오자가 어쩌면 반작용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관심한 사람은 성장도 추진도 없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에 이 말들과 다른 글들을 보면 삶과 아무런 쓰임새도 없는 삶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핸리 데이비드 쏘로우의 글을 인용한다.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의심할여지가 없는 인간의 능력보다 더 용기를 주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특정한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조각상을 조각해서 그 사물들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통해서 보는 매개체이자 바로 그 분위기(환경)를 조각하고 그리는 것이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으로 할 수 있다. 하루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술들 중에서 최고의 예술이다. 자신의 삶을 심지어 자세한 세부 사항들까지 최고로 고양된 중요한 시간에 숙고할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