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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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귀한 회억
작자: 장춘 대법제자 일심(一心)
【정견망 2010년 5월 9일】
1. 99년 ‘7.20’ 전 장춘에서 대법이 널리 전해지다
나는 1998년 법을 얻은 제자로 당시 15살이었다. 당시 막 법을 얻은 후 어머니를 따라 장춘에 있는 작은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다. 법공부 하는 사람이 많아서 매일 약 20-30명이었고 가장 많을 때는 100여 명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6-8시까지 두 시간 동안 법을 공부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을 통독한 후 교류했다.
새벽에는 단체 연공을 했다. 보도원이 매일 새벽 녹음기를 들고 왔고 먼저 도착한 수련생들이 연공장소를 깨끗이 쓸었으며 시간이 되면 5가지 공법을 연마했다. 어떤 노수련생은 전적으로 신수련생의 동작을 고쳐주었다. 그때 단체 법공부에 참가한 동수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으며 우리 팀에서 어린이 제자는 4명이었다. 가장 어린 수련생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고 중등 전문학교에 다니는 언니도 매우 정진했다.
나중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나는 법학습 팀을 바꿔 장춘의 한 중학교 부근으로 나갔다. 토, 일요일 휴식 때 사람들은 중학교 옆 길가에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 연공과 홍법을 했다.
당시 장춘의 각 구(區)에서는 모두 대형 심득 교류회를 열었다. 98년에 엄마도 체험을 썼으며 법공부를 책임진 한 동수가 교정을 도와주었고 총보도소에 제출했다. 보도소 책임자는 우수 원고로 선발해 발언하게 했다.
98년 장춘 세무 전문학교에서 개최한 파룬따파 심득 교류회에는 나도 참가했는데 당시 참가한 사람이 약 1-2천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당시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사람이 12명이었는데 그중에는 6살 난 어린제자, 연세가 많은 동수, 간부도 있고 학생도 있었다. 각계각층의 동수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수련 후 심성을 승화한 체험을 이야기해 유력하게 대법을 실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99년 새해 장춘 총보도소에서는 지질궁 광장(지금의 문화광장)에서 만인 아침 연공을 조직해 대법을 널리 알렸다. 당시 중국 북방의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사람들은 가지런히 서서 광장을 가득 메웠다. 심지어 광장 남측에 있는 해방대로 동서 양측의 길에도 동수들로 가득 찼다. 당시 어떤 사람이 전문적으로 이번 홍법을 촬영했으며 많은 진귀한 역사자료를 찍었다.
내 기억으로는 장춘 텔레비전 기자가 와서 취재했고 파룬따파가 장춘에서 널리 전해져 성황을 이룬 것을 보도했다. 어떤 동수는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자신이 수련 후 심성을 제고한 체험을 말했다. 동수들의 표현은 매우 안정되었고 상화 평화롭고 선량했다. 세상과 다투지 않는 수련자의 풍모를 취재하는 여기자도 매우 부러워하고 탄복했다. 당시 취재에는 군인, 원로 교수, 박사과정 학생 등 법에서 이익을 본 많은 동수들이 있었다.
당시 장춘에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 장춘의 온 거리에 대법제자들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법공부에 매우 정진했고 홍법활동도 많았다. 매번 나가서 홍법을 했는데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로 연공하며 인연 있는 사람이 보면 즉시 들어와 법을 얻었다. 지금도 당시 단체 법공부하며 홍법하던 날들이 그립다. 그 잊지 못할 날들에 대법은 내 생명 깊이 뿌리 박혔으며 이후 힘겨운 세월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내 생명의 진귀한 회억이다.
2. 99년 7.20 장춘 상방
1999년 4.25 이후 날로 점점 긴장되어 갔다. 99년 7월 21일 오전 우리는 정부가 파룬궁에 대한 부실한 보도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성위원회를 찾아가 정부 측에 정황을 설명하려 했다. 몇몇 동수들이 차를 타고 함께 위원회에 갔다. 그곳에 가보니 많은 대법제자들이 남녀노소 참가해 인민대가(人民大街) 양쪽 길이 전부 가득찼다.
우리 몇 명이 위원회 좌측 길에 서서 동수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몇몇 제자들이 들어가서 정부 지도자에게 정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들의 생각은 매우 간단했다. 그저 정부를 향해 파룬궁에 대한 잘못된 보도만 깨끗이 하고 우리의 법공부 환경이 느슨해지게 하면 그만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파룬궁에 대해 강택민이 독단적으로 꾸민 잔혹한 탄압 음모는 이미 조용하 실시되고 있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중에 많은 차량이 길옆에 정차한 것을 본 많은 사복경찰들이 대법제자들을 난폭하게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많은 동수들이 경찰차로 끌려갔다.
성위원회 양측에 있던 대법제자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 차에 실려 멀리 끌려갔다. 나와 많은 동수들은 장춘에서 50리(기억이 확실치 않음) 정도 떨어진 경찰학교로 끌려갔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대법제자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마당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수백 명이나 되었다. 차량마다 대법제자들이 하차한 후 스스로 줄지어 앉았다.
7월 장춘의 뙤약볕은 불처럼 뜨거워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다. 동수들은 땅에 앉아 누구도 떠들거나 왁자지껄하지 않았으며 비록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모두들 평화롭고 탄연하게 단체로 <전법륜>을 외웠다.
어떤 제자는 이곳에서 우리를 단속하는 책임자에게 정황을 설명하러 찾아갔는데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정부에서는 실탄을 장전한 무장경찰을 보내 마당 입구에서 우리를 지켰고 문밖에는 사복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떤 제자는 매우 일찍 와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저녁에 어떤 동수가 돈을 내어 부근의 식품점에 가서 물과 빵을 사왔지만 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떤 동수는 굶으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음식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우리는 그곳에 한참동안 갇혀 있었다. 약 밤 10시쯤 되자 동수들은 여기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다고 느껴서 사람들은 길을 잘 아는 제자의 인도 하에 어둠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장춘 시내로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은 대낮에 뜨거운 태양아래 하루 종일 앉아 있었기에 많은 동수들은 물이나 밥을 먹지 못했으니 상식대로라면 우리들은 매우 피곤해야 했으며 근본적으로 걸어서 갈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지난 후 사람들의 기억에 그날 밤 동수들은 매우 정신이 좋았으며 신체도 매우 가볍고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으며 밤바람이 서서히 불어오자 매우 편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어 두 시간여 만에 장춘으로 돌아왔다. 성위원회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 중이었다. 같이 간 몇몇 동수들이 상의해 먼저 어느 동수의 집에 가서 휴식하고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다음날은 바로 7월 22일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우리는 위원회에 도착했는데 나와 같이 온 동수는 두 어린제자는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 온 후 밤중에 달려온 외지 동수를 보았다. 우리는 부근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7월 22일 대낮에 위원회 주위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외지에서 온 동수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우 질서 있게 도로 양측의 보도에 서 있었으며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의 교통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 무장경찰이 성위원회 앞의 찻길에 경계선을 그었으며 그날은 경찰도 전날보다 훨씬 많았다.
사복경찰이 큰길에서 무전기를 들고 지휘하며 분위기가 단번에 긴장되었다. 대개 오전 8,9시 경 경찰은 또 어제처럼 대법제자를 끌고 차에 태우려 했다. 어떤 동수들은 어제의 경험이 있으므로 누구도 차에 오르려 하지 않았고 손을 잡아당겼다. 경찰은 동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잡아당기기도 했고 차고 때리고 하나씩 강제로 차에 태웠다.
차에 끌려간 동수들 중 어떤 사람은 차문을 열고 뛰어 내렸고 어떤 사람은 차문을 붙잡고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경찰 서너 명이 강제로 제자들을 차에 태웠다. 경찰의 폭력에 대해 동수들은 맞아도 저항하지 않았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앞에 있던 동수들은 뒤에 있는 동수를 보호했으며 사람들은 손과 어깨를 잡고 층층 인의 장막을 형성해 큰소리로 경찰의 야만적인 폭행을 제지했다.
나중에 경찰이 차에 강제로 태운 제자들을 끌고 갔다. 동수들은 급한 상황에 경찰의 경계선을 넘었고 길위에서 인산(人山)을 이뤄 차 앞을 가로막았다. 당시 장면은 아주 장관이었으며 경찰조차도 진감했다.
나중 동수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쫓겨 차에 올랐다. 이번에 우리는 남령(南嶺)체육관으로 보내졌다. 차에서 내려 보니 체육관(장춘에서 가장 큰 체육관이다)안에는 사람이 가득 찼는데 얼마나 많은 제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수들은 여전히 어제처럼 조금도 떠들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전날 나와 함께 있었던 동수를 많이 보았다. 아마 정오쯤 되어 대학생 같은 청년 남자동수가 빙그레 웃으며 걸어가면서 말했다.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세요?” 우리는 갑자기 머리를 들었고 많은 동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사부님!” 그날 7월 22일 많은 남령체육관의 동수들은 장춘의 푸른 만리 창공에 사부님의 법신이 하늘에 계신 것을 보았다. 한동안 사람들은 감정이 고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후 나와 함께 간 어린제자 하나는 당시 사부님의 법신이 연꽃에 앉아 아래에 있던 제자들을 보고 계셨다고 했다. 오후가 되자 우리는 경찰에 이끌려 인민광장 부근의 초등학교로 갔다. 한 교실 안에서 지도자처럼 보이는 중년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건성으로 우리를 진정시키고 간단히 몇 개 문제를 물어보고 동수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총총히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은 운동장에 앉았는데 이때 하늘에서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온유하고 편안했다. 천목이 열린 동수는 나중에 말하기를 그날 천상의 뭇신들이 대법제자의 참된 호법을 위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7.20 이후 대륙의 풍운이 돌변하여 중공은 대법제자에 대해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다. 대법서적은 불태워지고 파룬궁은 불법으로 단속되었으며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불법으로 투옥당하고 혹형으로 시달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박해치사 당하고 심지어 산채 장기를 적출당했다. 그러나 이 일체의 잔혹한 박해에 대법제자의 견정한 신념을 가로막지 못했고 더욱이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지금 파룬궁은 전세계 140여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졌고 대법제자들은 오대양 육대주에 퍼져있으며 파룬궁 창시인은 각국의 표창장을 받았다. 이 한 차례 바른 믿음에 대한 후안무치한 박해도 머지않아 곧 끝날 것이다. 역사는 이 한 페이지를 지나왔고 세인들은 대법의 위대함을 볼 것이며 영원히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위대한 시각을 기억할 것이다.
발표시간:2010년 5월 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5/9/66032.html
작자: 장춘 대법제자 일심(一心)
【정견망 2010년 5월 9일】
1. 99년 ‘7.20’ 전 장춘에서 대법이 널리 전해지다
나는 1998년 법을 얻은 제자로 당시 15살이었다. 당시 막 법을 얻은 후 어머니를 따라 장춘에 있는 작은 단체 법공부에 참가했다. 법공부 하는 사람이 많아서 매일 약 20-30명이었고 가장 많을 때는 100여 명이었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6-8시까지 두 시간 동안 법을 공부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을 통독한 후 교류했다.
새벽에는 단체 연공을 했다. 보도원이 매일 새벽 녹음기를 들고 왔고 먼저 도착한 수련생들이 연공장소를 깨끗이 쓸었으며 시간이 되면 5가지 공법을 연마했다. 어떤 노수련생은 전적으로 신수련생의 동작을 고쳐주었다. 그때 단체 법공부에 참가한 동수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있었으며 우리 팀에서 어린이 제자는 4명이었다. 가장 어린 수련생은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고 중등 전문학교에 다니는 언니도 매우 정진했다.
나중에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나는 법학습 팀을 바꿔 장춘의 한 중학교 부근으로 나갔다. 토, 일요일 휴식 때 사람들은 중학교 옆 길가에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 연공과 홍법을 했다.
당시 장춘의 각 구(區)에서는 모두 대형 심득 교류회를 열었다. 98년에 엄마도 체험을 썼으며 법공부를 책임진 한 동수가 교정을 도와주었고 총보도소에 제출했다. 보도소 책임자는 우수 원고로 선발해 발언하게 했다.
98년 장춘 세무 전문학교에서 개최한 파룬따파 심득 교류회에는 나도 참가했는데 당시 참가한 사람이 약 1-2천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당시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사람이 12명이었는데 그중에는 6살 난 어린제자, 연세가 많은 동수, 간부도 있고 학생도 있었다. 각계각층의 동수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수련 후 심성을 승화한 체험을 이야기해 유력하게 대법을 실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99년 새해 장춘 총보도소에서는 지질궁 광장(지금의 문화광장)에서 만인 아침 연공을 조직해 대법을 널리 알렸다. 당시 중국 북방의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사람들은 가지런히 서서 광장을 가득 메웠다. 심지어 광장 남측에 있는 해방대로 동서 양측의 길에도 동수들로 가득 찼다. 당시 어떤 사람이 전문적으로 이번 홍법을 촬영했으며 많은 진귀한 역사자료를 찍었다.
내 기억으로는 장춘 텔레비전 기자가 와서 취재했고 파룬따파가 장춘에서 널리 전해져 성황을 이룬 것을 보도했다. 어떤 동수는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자신이 수련 후 심성을 제고한 체험을 말했다. 동수들의 표현은 매우 안정되었고 상화 평화롭고 선량했다. 세상과 다투지 않는 수련자의 풍모를 취재하는 여기자도 매우 부러워하고 탄복했다. 당시 취재에는 군인, 원로 교수, 박사과정 학생 등 법에서 이익을 본 많은 동수들이 있었다.
당시 장춘에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 장춘의 온 거리에 대법제자들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법공부에 매우 정진했고 홍법활동도 많았다. 매번 나가서 홍법을 했는데 현수막을 걸어놓고 단체로 연공하며 인연 있는 사람이 보면 즉시 들어와 법을 얻었다. 지금도 당시 단체 법공부하며 홍법하던 날들이 그립다. 그 잊지 못할 날들에 대법은 내 생명 깊이 뿌리 박혔으며 이후 힘겨운 세월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내 생명의 진귀한 회억이다.
2. 99년 7.20 장춘 상방
1999년 4.25 이후 날로 점점 긴장되어 갔다. 99년 7월 21일 오전 우리는 정부가 파룬궁에 대한 부실한 보도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성위원회를 찾아가 정부 측에 정황을 설명하려 했다. 몇몇 동수들이 차를 타고 함께 위원회에 갔다. 그곳에 가보니 많은 대법제자들이 남녀노소 참가해 인민대가(人民大街) 양쪽 길이 전부 가득찼다.
우리 몇 명이 위원회 좌측 길에 서서 동수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몇몇 제자들이 들어가서 정부 지도자에게 정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들의 생각은 매우 간단했다. 그저 정부를 향해 파룬궁에 대한 잘못된 보도만 깨끗이 하고 우리의 법공부 환경이 느슨해지게 하면 그만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파룬궁에 대해 강택민이 독단적으로 꾸민 잔혹한 탄압 음모는 이미 조용하 실시되고 있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중에 많은 차량이 길옆에 정차한 것을 본 많은 사복경찰들이 대법제자들을 난폭하게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많은 동수들이 경찰차로 끌려갔다.
성위원회 양측에 있던 대법제자들은 모두 그들에 의해 차에 실려 멀리 끌려갔다. 나와 많은 동수들은 장춘에서 50리(기억이 확실치 않음) 정도 떨어진 경찰학교로 끌려갔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대법제자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마당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수백 명이나 되었다. 차량마다 대법제자들이 하차한 후 스스로 줄지어 앉았다.
7월 장춘의 뙤약볕은 불처럼 뜨거워 견디기가 매우 힘들었다. 동수들은 땅에 앉아 누구도 떠들거나 왁자지껄하지 않았으며 비록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모두들 평화롭고 탄연하게 단체로 <전법륜>을 외웠다.
어떤 제자는 이곳에서 우리를 단속하는 책임자에게 정황을 설명하러 찾아갔는데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정부에서는 실탄을 장전한 무장경찰을 보내 마당 입구에서 우리를 지켰고 문밖에는 사복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떤 제자는 매우 일찍 와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저녁에 어떤 동수가 돈을 내어 부근의 식품점에 가서 물과 빵을 사왔지만 수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떤 동수는 굶으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음식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우리는 그곳에 한참동안 갇혀 있었다. 약 밤 10시쯤 되자 동수들은 여기에서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 없다고 느껴서 사람들은 길을 잘 아는 제자의 인도 하에 어둠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장춘 시내로 돌아왔다. 당시 사람들은 대낮에 뜨거운 태양아래 하루 종일 앉아 있었기에 많은 동수들은 물이나 밥을 먹지 못했으니 상식대로라면 우리들은 매우 피곤해야 했으며 근본적으로 걸어서 갈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지난 후 사람들의 기억에 그날 밤 동수들은 매우 정신이 좋았으며 신체도 매우 가볍고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으며 밤바람이 서서히 불어오자 매우 편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어 두 시간여 만에 장춘으로 돌아왔다. 성위원회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 중이었다. 같이 간 몇몇 동수들이 상의해 먼저 어느 동수의 집에 가서 휴식하고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다음날은 바로 7월 22일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우리는 위원회에 도착했는데 나와 같이 온 동수는 두 어린제자는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우리는 성위원회에 온 후 밤중에 달려온 외지 동수를 보았다. 우리는 부근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7월 22일 대낮에 위원회 주위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외지에서 온 동수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우 질서 있게 도로 양측의 보도에 서 있었으며 길을 지나는 행인들에게의 교통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경찰 무장경찰이 성위원회 앞의 찻길에 경계선을 그었으며 그날은 경찰도 전날보다 훨씬 많았다.
사복경찰이 큰길에서 무전기를 들고 지휘하며 분위기가 단번에 긴장되었다. 대개 오전 8,9시 경 경찰은 또 어제처럼 대법제자를 끌고 차에 태우려 했다. 어떤 동수들은 어제의 경험이 있으므로 누구도 차에 오르려 하지 않았고 손을 잡아당겼다. 경찰은 동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잡아당기기도 했고 차고 때리고 하나씩 강제로 차에 태웠다.
차에 끌려간 동수들 중 어떤 사람은 차문을 열고 뛰어 내렸고 어떤 사람은 차문을 붙잡고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경찰 서너 명이 강제로 제자들을 차에 태웠다. 경찰의 폭력에 대해 동수들은 맞아도 저항하지 않았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앞에 있던 동수들은 뒤에 있는 동수를 보호했으며 사람들은 손과 어깨를 잡고 층층 인의 장막을 형성해 큰소리로 경찰의 야만적인 폭행을 제지했다.
나중에 경찰이 차에 강제로 태운 제자들을 끌고 갔다. 동수들은 급한 상황에 경찰의 경계선을 넘었고 길위에서 인산(人山)을 이뤄 차 앞을 가로막았다. 당시 장면은 아주 장관이었으며 경찰조차도 진감했다.
나중 동수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쫓겨 차에 올랐다. 이번에 우리는 남령(南嶺)체육관으로 보내졌다. 차에서 내려 보니 체육관(장춘에서 가장 큰 체육관이다)안에는 사람이 가득 찼는데 얼마나 많은 제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수들은 여전히 어제처럼 조금도 떠들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전날 나와 함께 있었던 동수를 많이 보았다. 아마 정오쯤 되어 대학생 같은 청년 남자동수가 빙그레 웃으며 걸어가면서 말했다.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세요?” 우리는 갑자기 머리를 들었고 많은 동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사부님!” 그날 7월 22일 많은 남령체육관의 동수들은 장춘의 푸른 만리 창공에 사부님의 법신이 하늘에 계신 것을 보았다. 한동안 사람들은 감정이 고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후 나와 함께 간 어린제자 하나는 당시 사부님의 법신이 연꽃에 앉아 아래에 있던 제자들을 보고 계셨다고 했다. 오후가 되자 우리는 경찰에 이끌려 인민광장 부근의 초등학교로 갔다. 한 교실 안에서 지도자처럼 보이는 중년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그는 건성으로 우리를 진정시키고 간단히 몇 개 문제를 물어보고 동수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총총히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은 운동장에 앉았는데 이때 하늘에서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온유하고 편안했다. 천목이 열린 동수는 나중에 말하기를 그날 천상의 뭇신들이 대법제자의 참된 호법을 위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7.20 이후 대륙의 풍운이 돌변하여 중공은 대법제자에 대해 잔혹한 진압을 시작했다. 대법서적은 불태워지고 파룬궁은 불법으로 단속되었으며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불법으로 투옥당하고 혹형으로 시달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박해치사 당하고 심지어 산채 장기를 적출당했다. 그러나 이 일체의 잔혹한 박해에 대법제자의 견정한 신념을 가로막지 못했고 더욱이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지금 파룬궁은 전세계 140여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졌고 대법제자들은 오대양 육대주에 퍼져있으며 파룬궁 창시인은 각국의 표창장을 받았다. 이 한 차례 바른 믿음에 대한 후안무치한 박해도 머지않아 곧 끝날 것이다. 역사는 이 한 페이지를 지나왔고 세인들은 대법의 위대함을 볼 것이며 영원히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위대한 시각을 기억할 것이다.
발표시간:2010년 5월 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5/9/66032.html
2011.04.29 11:49:54 (*.125.184.85)
2기 학습반 수련생이 사부님과 함께 했던 날들을 회상
작자:장춘 대법제자
【정견망 2010년 5월 12일】
나는 사부님을 20년 전부터 알았는데 수년간 동료로 지낸 연분이 있다.
나는 일하다가 부상을 당해 어깨에 줄곧 통증이 있었다. 어떤 동료가 사부님이 대단하고 기공을 할 줄 알며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사부님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사부님께서 내 어깨를 몇 번 잡아당기시자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통증이 가벼워졌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과 접촉한 것이었으며 나는 사부님께서 기공을 할 줄 알고 공(功)을 내보내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때부터 나는 새로 온 이 젊은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체격기 크셨고 늘 낡은 회색운동복을 입고 다니셨다. 직장에서는 평범했으며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하는데도 두드러지거나 뒤떨어지지 않았다. 직장에서 프로그램을 연습하는데 사부님은 삼림경찰 옛 전우들을 모두 초대해 대부대를 이루었다.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소집하여 연습했으며 아래에 돌아가 소속 단위에서 연주했다. 사부님은 공력이 높았으나 괴상한 것을 표현하거나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셨다.
우리 직장에서는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부님께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 병이 있어 사부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병을 고쳐주셨다. 어떤 동수는 손이 마비되어 사부님이 조정해주셨는데 손을 대기도 전에 주사로 찌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의 병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신체를 여러 곳으로 나누어 한군데씩 치료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사부님의 능력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박해 이후 공산당이 사부님에 대한 거짓말을 날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불법(佛法)이나 수련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사부님께서 사당(邪黨)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건강이 나빠 폐결핵, 심장, 위장병, 관절염, 두통 등을 앓고 있었다. 병치료를 위해 기공을 연마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경우 사부님을 찾아갔다. 사부님께서는 늘 평화롭고 화기애애하게 말씀하셨다.
기공을 연마하려면 먼저 노궁혈을 열어야만 기를 받아들이거나 내보낼 수 있고 신체의 경락을 열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내 손에서 노궁혈 위치를 한번 비틀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만큼 열겠습니다. 너무 크게 열면 좋은 점이 없고 이정도면 됩니다. 당신은 삼년을 연마해도 열지 못했는데 이번에 해보세요.”
나는 사부님께 우리 아들도 기공을 연마한다고 하면서 시간이 있으시면 아들에게도 한번 열어달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응낙하셨다. 2기 학습반 때 주천법을 연마할 때의 일이다. 사부님께서 아들 앞에 다가오시더니 그의 손을 들고는 손가락으로 노궁혈을 가리키시며 한번 비트셨다. 아들은 손바닥이 녹두알만큼 시원했다고 했다. 그는 아주 둔감한 편인데도 사부님께서 혈을 열어주시자 체험할 수 있었다면서 매우 격동했다.
기공을 연마하던 많은 사람들이 천목이 열렸다. 사부님께서는 내 이마를 가로로 한번 긋고 또 정수리에서 세로로 코까지 한번 그으셨다. 그러자 나는 앞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는 산근(山根)부위를 쳐다보는 천목 연마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한동안 연마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는 연마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기 전에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해 주셨다. 태국에 있는 누이동생을 만나러 가셨을 때 한 노인이 사부님께 병치료를 부탁하셨다고 한다. 당시 집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사부님을 찾으며 바로 수염이 매우 길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긴 수염을 한 사람이 말했다. “내가 아니라 이 젊은 분입니다.”
그가 보니 사부님이 너무 젊어서 의심이 생겼다. ‘공력이 있을까?’
하지만 사부님은 그의 병을 조정해주었다.
그날 사부님 사무실에 가자 사부님께서는 원고를 쓰고 계셨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올 거라고 하셨다. 그때가 91년 겨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카드와 입문증을 만드는 등 전수반을 열 준비를 하고 계셨다.
사부님께서는 늘 기공협회에 가서 일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천목이 열려 이런저런 것들을 보았다. 사부님께서 손을 뻗어 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묻자 어떤 할머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다가 사부님 손에 부처를 받치고 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 나는 부처님이 사부님 손에 있다면 사부님은 반드시 일반 부처보다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조상대대로 부처님을 믿었기 때문에 수불(修佛)수도(修道)에 관한 일을 알고 있었는데 불도(佛道)는 본래 사람들 사이에서 닦는 것이니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평소 사부님 사무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다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에너지가 일체를 제약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건물이 모두 이득을 보며 다 좋은 점이 있지만 그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때는 기공을 연마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제고가 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기는 바로 기입니다. 제약작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사부님께서도 그런 것을 연마하지 말고 자기의 것을 연마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본래 연마하여 신체가 다 열렸는데 어째서 다시 닫혔습니까?”
그래서 나는 사부님께 다시 한 번 열어주십사 부탁하려 했다. 사부님께서는 한참 걸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습반에 참가하세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 그래서 나는 사부님의 제2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1992년 5월 25일 저녁 6시 사부님께서 장춘시 제5중학 계단강의실에서 2기 학습반을 여셨다. 당시 200여 명이 참가했다. 2기반 수련생들은 앞쪽과 계단 위쪽에 앉았고 1기 반의 어떤 수련생들은 강의를 들으면서 연공했다.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은 노년 부인들이 대다수였다. 대개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고 다른 기공을 연마했던 사람도 있었으며 불교 거사도 많았다. 사부님께서는 두 시간 중 우선 한 시간 이상 법을 강의하셨고 그 후 공법을 가르치셨다.
관건적인 곳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흑판에 글자를 쓰기도 하셨다. 당시 전반적인 기공형세는 모두 병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 사부님은 기공이라는 형식으로 법을 강의하셨다.
깊이 강의 하시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일꾼이 작은 책을 주었는데 바로 사부님께서 연필로 연공 동작도를 그리신 것이다. 연공동작 앞에 공리공법을 소개한 것이 있었는데 <중국법륜공(수정본)>에서 말한 것보다 더 얕은 것이었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기제(機制)를 넣어주셨는데 매 사람의 신체 소질이 같지 않기 때문에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넣어준 사람도 있고 넣어주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많이 넣어준 사람, 적게 넣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뒤쪽에 앉아서 자신이 어느 정황에 속하는지 몰라 사부님께 여쭤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왜 안 넣어주겠습니까? 가장 많이 넣어주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내가 당신들의 원신을 크게 조정해주었습니다. 5,6세 어린이만큼 크게 조정해주었으니 위험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게 잡혀 먹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좋지 않은 것을 만나면 파룬으로 그것을 친다고 알려주셨다.
어느 날 강의하기 전 어느 수련생의 몸에 나쁜 것이 있어서 비정상적으로 표현되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직장의 한 사람이 물 한 병을 들고 오자 사부님께서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의 몸에 안개처럼 뿜으셨다. 내가 바로 그 앞에 있었는데 내 몸까지 안개가 뿜어졌다. 그리고 나서 사부님께선 그녀의 몸을 “팍팍” 쳐서 청리해주셨다.
전에 물을 뿜어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절에 가서 물어본 적이 있다. 노스님은 물을 일백일 동안 보존했다가 뿜어야 하며 방금 가져온 물을 뿜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나는 사부님의 공력이 정말 보통이 아님을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법륜주천법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제 손 자세를 봤습니까?” 나는 주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위에서 많은 부처들이 나를 돕기 위해 내려오려고 했는데 내가 그들에게 손짓하며 필요 없으며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 일을 하는데 도와주는 부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나는 두통이 있어서 일이 없으면 곧 잠을 잤다. 강의를 들을 때도 들으면서 한편으로 잠을 잤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이 잠을 자지만 원신은 정신이 또렷합니다. 모두 머리를 내밀고 듣고 있습니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대뇌를 청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마취상태에 처하게 하셨는데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어떻게 수련했는지 아직도 똑똑히 알지 못한다. 내 아들은 감각이 매우 좋았지만 어떻게 좋은지 말하지 못했다. 강의가 끝나자 사부님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셨고 그는 말했다. “사부님 강의가 정말 좋았습니다!” 사부님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9일 강의가 끝난 후 열흘째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수련생의 질문에 대해 사부님께서 해답 해주셨다. 한 가지를 묻자 “또 불교의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다른 것을 묻자 “아, 또 불교의 것이다” 고 하셨다. 그때 많은 불교도들이 이때부터 대법수련으로 걸어 들어왔다.
2기 학습반이 끝난 후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강의하는 이 건물에 기제를 넣었는데 네 귀퉁이에 다 넣었습니다. 현재 기제의 붉은 빛이 밖으로 비치고 있는데 공능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볼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 그것을 회수하실 수 있는지 묻자 사부님께서는 “회수하지 않고 여기에 두겠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돌아오신 후 손으로 어디를 만지면 그곳에 에너지가 있게 되며 남겨서 좋은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문제는 나중에 각지에서 학습반을 할 때도 사부님께서 늘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후 사부님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 아주 구식인 낡은 자전거였다. 장춘시를 한바퀴 돌면서 전체 장춘시를 한번 청리하시고 기제를 놓으셨다. “장춘시에 모두 놓았으니 어디서 연공해도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는 다른 기공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파룬궁을 수련했으며 점점 무엇이 수련인지 깨닫게 되었다. 반년이 안 되어 원래 병이 다 나았다.
장공(長空)클럽
8월 9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사부님께서 장공 클럽에서 보고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주셨다.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했으며 친척, 친구들 누구든 병이 있는 사람은 다 갈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갔다.
그날 사부님께서 도착하신 후 들것에 실려 온 병자를 강단 위에 올려놓게 하셨는데 손도 움직이지 않고 들것에서 내려오게 하셨다. 그녀를 일어나게 하신 후 한 바퀴 돌고 또 강단에서 몇 바퀴 뛰게 하셨다. 불과 몇분만에 반신불수의 환자가 나아버렸으니 장내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내 딸은 당시 천목이 열렸는데 사부님께서 강단에 앉아 계셨고 아래에 많은 큰부처들이 사부님을 대면하고 있었다고 한다. 밖에도 큰 부처가 있었는데 건물보다 더 큰 부처였다. 사부님께서 강의를 하신 후 이어서 공을 내보내 사람들에게 병을 조정해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당장 효과를 보았다. 우리 온 가족의 신체는 모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나는 가족 중에서 조상을 “신선”을 모셨는데 알고 보니 내가 특별히 그런 나쁜 것을 불러왔고 잠잘 때 너구리가 내 코를 물어 출혈이 났다. 가족들은 모두 심장에 병이 있었다. 고향에서는 뿔이 자란 여우가 있어 그것이 뿔을 땅에 한번 비비면 사람들이 속이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내가 제일 심했다.
내가 사부님 댁에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처리해주십사 부탁드렸다. 사부님께서 응낙하셨다. 나중에 여동생의 말을 들어보니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 여우를 쫓았고 여우는 쫓겨서 셋째 여동생의 부뚜막으로 도망간 후 독수리가 물고 날아갔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그 나쁜 것을 청리해주셨다. 그때 이후 우리 가족의 심장병은 다 나았고 나중에 가족들은 대부분 대법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몇 년간 기공을 연마했는데 그저 동작만 공을 들여 그다지 진보가 없었다. 점차 파룬궁은 기타 기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 특성 진선인에 동화되어야 하며 심성수련을 중시하고 연공인은 매우 높은 덕을 가져야 하며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우선 뜻이 성실해야 한다.
이후 사부님께서 장춘에서 설법하시면 나는 모두 참가해 며칠 강의를 들었지만 다 듣지는 못했다. 한동안 늘 어떤 것이 눈꺼풀 위에서 뛰는 것 같았고 두 눈동자를 휘감고 돌았으며 다시 콧등 위로 기어올라 뚫고 들어가더니 콧구멍에 매달려 있었다.
사부님께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는데 사부님이 자세히 보시더니 나의 어깨를 툭툭 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 작은 용을 연마해냈군요.”
파룬궁을 반년 정도 연마하여 이 짧은 시간 내에 생명체를 연마해내자 사부님께서 기뻐하셨고 나도 기뻤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 속에 온데를 쑤시고 다녀 아픈 것도 아니고 간지러운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진정 수련으로 걸어 들어와 수련하므로 사람들은 각종 상태가 다 있었으며 그때마다 사람들은 사부님께 가서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장춘 보도원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이런 생명체는 더욱 고층차에도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수련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연환경에서 생기는 것이다. 고층차에서 수련하는 사람의 신체에서 산생되는 용 등의 생명체는 당연히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원만을 따라 고층으로 간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아시며 무엇이든 똑똑히 말씀하실 수 있다.
길림대학정문(해방대로)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가 저번에 길림(吉林)대학에서 학습반을 열 때에, 한 수련생이 길림대학 정문에서 나와 자전거를 밀고 막 길 가운데까지 갔는데 승용차 두 대가 단번에 그를 가운데 끼워 넣어 당장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들에 부딪혀도 모두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차가 멈췄으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이 사건에서 말씀하신 인물이 바로 나였다. 그때는 1994년 5월 장춘 7기 반(주간반)이 끝나고 내가 맨 나중에 명방궁을 나와 길림대학 정문에 도착했는데 사부님께서 입구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나는 해방대로 차도의 쾌속차선을 건넜는데 마침 자전거를 밀고 중간에 갔을 때 동서 양쪽에서 온 두 대의 차량 사이에 끼였다. 막 부딪칠 뻔했는데 차가 단번에 멈췄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천천히 인도로 가서 고개를 들어보니 사부님께서 대문 동쪽 인도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당시 나는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했는데 95년 초 <전법륜>이 출판되어 책을 보자 그것이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임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주셨으며 나는 목숨의 빚을 한번 갚게 되었다.
93년 이후 사부님께서는 전국 각지에서 법을 전하셨는데 직장에 하루 종일 출근하실 수 없어 월급을 정지하는 수속을 하셨다.
95년 사부님께서 외국에 나가 법을 전하신 후로는 더는 사부님을 뵙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외국에서 돌아오셔서 지질궁(地質宮)에서 수련생들을 만나셨는데 내 아들에게 말씀하셨다.
“자네 부친에게 안부 전해주게나.”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 하신 후 “부친에게 안부를 전해주게” 이렇게 세 번을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염려하셨고 고향 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가까운 분들을 염려해주셨다.
십여 년이 지났고 나는 사부님이 매우 염려된다. 사부님의 모든 소식을 들으면서 박해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며 사부님께서 하루 빨리 돌아오시길 기다린다.
(明慧網)
발표시간 : 2010년 5월 12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5/12/66087.html
작자:장춘 대법제자
【정견망 2010년 5월 12일】
나는 사부님을 20년 전부터 알았는데 수년간 동료로 지낸 연분이 있다.
나는 일하다가 부상을 당해 어깨에 줄곧 통증이 있었다. 어떤 동료가 사부님이 대단하고 기공을 할 줄 알며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사부님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사부님께서 내 어깨를 몇 번 잡아당기시자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통증이 가벼워졌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과 접촉한 것이었으며 나는 사부님께서 기공을 할 줄 알고 공(功)을 내보내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때부터 나는 새로 온 이 젊은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는 체격기 크셨고 늘 낡은 회색운동복을 입고 다니셨다. 직장에서는 평범했으며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하는데도 두드러지거나 뒤떨어지지 않았다. 직장에서 프로그램을 연습하는데 사부님은 삼림경찰 옛 전우들을 모두 초대해 대부대를 이루었다.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소집하여 연습했으며 아래에 돌아가 소속 단위에서 연주했다. 사부님은 공력이 높았으나 괴상한 것을 표현하거나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셨다.
우리 직장에서는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부님께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든 병이 있어 사부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병을 고쳐주셨다. 어떤 동수는 손이 마비되어 사부님이 조정해주셨는데 손을 대기도 전에 주사로 찌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의 병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신체를 여러 곳으로 나누어 한군데씩 치료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사부님의 능력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았다. 박해 이후 공산당이 사부님에 대한 거짓말을 날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불법(佛法)이나 수련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사부님께서 사당(邪黨)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건강이 나빠 폐결핵, 심장, 위장병, 관절염, 두통 등을 앓고 있었다. 병치료를 위해 기공을 연마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경우 사부님을 찾아갔다. 사부님께서는 늘 평화롭고 화기애애하게 말씀하셨다.
기공을 연마하려면 먼저 노궁혈을 열어야만 기를 받아들이거나 내보낼 수 있고 신체의 경락을 열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내 손에서 노궁혈 위치를 한번 비틀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만큼 열겠습니다. 너무 크게 열면 좋은 점이 없고 이정도면 됩니다. 당신은 삼년을 연마해도 열지 못했는데 이번에 해보세요.”
나는 사부님께 우리 아들도 기공을 연마한다고 하면서 시간이 있으시면 아들에게도 한번 열어달라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흔쾌히 응낙하셨다. 2기 학습반 때 주천법을 연마할 때의 일이다. 사부님께서 아들 앞에 다가오시더니 그의 손을 들고는 손가락으로 노궁혈을 가리키시며 한번 비트셨다. 아들은 손바닥이 녹두알만큼 시원했다고 했다. 그는 아주 둔감한 편인데도 사부님께서 혈을 열어주시자 체험할 수 있었다면서 매우 격동했다.
기공을 연마하던 많은 사람들이 천목이 열렸다. 사부님께서는 내 이마를 가로로 한번 긋고 또 정수리에서 세로로 코까지 한번 그으셨다. 그러자 나는 앞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께서는 산근(山根)부위를 쳐다보는 천목 연마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한동안 연마하다가 하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는 연마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기 전에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해 주셨다. 태국에 있는 누이동생을 만나러 가셨을 때 한 노인이 사부님께 병치료를 부탁하셨다고 한다. 당시 집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사부님을 찾으며 바로 수염이 매우 길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긴 수염을 한 사람이 말했다. “내가 아니라 이 젊은 분입니다.”
그가 보니 사부님이 너무 젊어서 의심이 생겼다. ‘공력이 있을까?’
하지만 사부님은 그의 병을 조정해주었다.
그날 사부님 사무실에 가자 사부님께서는 원고를 쓰고 계셨는데 나중에 책으로 나올 거라고 하셨다. 그때가 91년 겨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카드와 입문증을 만드는 등 전수반을 열 준비를 하고 계셨다.
사부님께서는 늘 기공협회에 가서 일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천목이 열려 이런저런 것들을 보았다. 사부님께서 손을 뻗어 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묻자 어떤 할머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다가 사부님 손에 부처를 받치고 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 나는 부처님이 사부님 손에 있다면 사부님은 반드시 일반 부처보다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조상대대로 부처님을 믿었기 때문에 수불(修佛)수도(修道)에 관한 일을 알고 있었는데 불도(佛道)는 본래 사람들 사이에서 닦는 것이니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평소 사부님 사무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다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에너지가 일체를 제약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건물이 모두 이득을 보며 다 좋은 점이 있지만 그들은 느끼지 못합니다.”
그때는 기공을 연마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제고가 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기는 바로 기입니다. 제약작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사부님께서도 그런 것을 연마하지 말고 자기의 것을 연마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본래 연마하여 신체가 다 열렸는데 어째서 다시 닫혔습니까?”
그래서 나는 사부님께 다시 한 번 열어주십사 부탁하려 했다. 사부님께서는 한참 걸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습반에 참가하세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 그래서 나는 사부님의 제2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1992년 5월 25일 저녁 6시 사부님께서 장춘시 제5중학 계단강의실에서 2기 학습반을 여셨다. 당시 200여 명이 참가했다. 2기반 수련생들은 앞쪽과 계단 위쪽에 앉았고 1기 반의 어떤 수련생들은 강의를 들으면서 연공했다.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은 노년 부인들이 대다수였다. 대개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고 다른 기공을 연마했던 사람도 있었으며 불교 거사도 많았다. 사부님께서는 두 시간 중 우선 한 시간 이상 법을 강의하셨고 그 후 공법을 가르치셨다.
관건적인 곳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흑판에 글자를 쓰기도 하셨다. 당시 전반적인 기공형세는 모두 병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 사부님은 기공이라는 형식으로 법을 강의하셨다.
깊이 강의 하시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일꾼이 작은 책을 주었는데 바로 사부님께서 연필로 연공 동작도를 그리신 것이다. 연공동작 앞에 공리공법을 소개한 것이 있었는데 <중국법륜공(수정본)>에서 말한 것보다 더 얕은 것이었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기제(機制)를 넣어주셨는데 매 사람의 신체 소질이 같지 않기 때문에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넣어준 사람도 있고 넣어주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많이 넣어준 사람, 적게 넣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뒤쪽에 앉아서 자신이 어느 정황에 속하는지 몰라 사부님께 여쭤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왜 안 넣어주겠습니까? 가장 많이 넣어주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내가 당신들의 원신을 크게 조정해주었습니다. 5,6세 어린이만큼 크게 조정해주었으니 위험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게 잡혀 먹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좋지 않은 것을 만나면 파룬으로 그것을 친다고 알려주셨다.
어느 날 강의하기 전 어느 수련생의 몸에 나쁜 것이 있어서 비정상적으로 표현되어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직장의 한 사람이 물 한 병을 들고 오자 사부님께서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의 몸에 안개처럼 뿜으셨다. 내가 바로 그 앞에 있었는데 내 몸까지 안개가 뿜어졌다. 그리고 나서 사부님께선 그녀의 몸을 “팍팍” 쳐서 청리해주셨다.
전에 물을 뿜어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절에 가서 물어본 적이 있다. 노스님은 물을 일백일 동안 보존했다가 뿜어야 하며 방금 가져온 물을 뿜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 나는 사부님의 공력이 정말 보통이 아님을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법륜주천법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제 손 자세를 봤습니까?” 나는 주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위에서 많은 부처들이 나를 돕기 위해 내려오려고 했는데 내가 그들에게 손짓하며 필요 없으며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 일을 하는데 도와주는 부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나는 두통이 있어서 일이 없으면 곧 잠을 잤다. 강의를 들을 때도 들으면서 한편으로 잠을 잤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이 잠을 자지만 원신은 정신이 또렷합니다. 모두 머리를 내밀고 듣고 있습니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대뇌를 청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마취상태에 처하게 하셨는데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어떻게 수련했는지 아직도 똑똑히 알지 못한다. 내 아들은 감각이 매우 좋았지만 어떻게 좋은지 말하지 못했다. 강의가 끝나자 사부님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셨고 그는 말했다. “사부님 강의가 정말 좋았습니다!” 사부님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9일 강의가 끝난 후 열흘째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수련생의 질문에 대해 사부님께서 해답 해주셨다. 한 가지를 묻자 “또 불교의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다른 것을 묻자 “아, 또 불교의 것이다” 고 하셨다. 그때 많은 불교도들이 이때부터 대법수련으로 걸어 들어왔다.
2기 학습반이 끝난 후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강의하는 이 건물에 기제를 넣었는데 네 귀퉁이에 다 넣었습니다. 현재 기제의 붉은 빛이 밖으로 비치고 있는데 공능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볼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 그것을 회수하실 수 있는지 묻자 사부님께서는 “회수하지 않고 여기에 두겠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돌아오신 후 손으로 어디를 만지면 그곳에 에너지가 있게 되며 남겨서 좋은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문제는 나중에 각지에서 학습반을 할 때도 사부님께서 늘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후 사부님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 아주 구식인 낡은 자전거였다. 장춘시를 한바퀴 돌면서 전체 장춘시를 한번 청리하시고 기제를 놓으셨다. “장춘시에 모두 놓았으니 어디서 연공해도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나는 다른 기공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파룬궁을 수련했으며 점점 무엇이 수련인지 깨닫게 되었다. 반년이 안 되어 원래 병이 다 나았다.
장공(長空)클럽
8월 9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사부님께서 장공 클럽에서 보고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주셨다.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했으며 친척, 친구들 누구든 병이 있는 사람은 다 갈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갔다.
그날 사부님께서 도착하신 후 들것에 실려 온 병자를 강단 위에 올려놓게 하셨는데 손도 움직이지 않고 들것에서 내려오게 하셨다. 그녀를 일어나게 하신 후 한 바퀴 돌고 또 강단에서 몇 바퀴 뛰게 하셨다. 불과 몇분만에 반신불수의 환자가 나아버렸으니 장내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내 딸은 당시 천목이 열렸는데 사부님께서 강단에 앉아 계셨고 아래에 많은 큰부처들이 사부님을 대면하고 있었다고 한다. 밖에도 큰 부처가 있었는데 건물보다 더 큰 부처였다. 사부님께서 강의를 하신 후 이어서 공을 내보내 사람들에게 병을 조정해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당장 효과를 보았다. 우리 온 가족의 신체는 모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나는 가족 중에서 조상을 “신선”을 모셨는데 알고 보니 내가 특별히 그런 나쁜 것을 불러왔고 잠잘 때 너구리가 내 코를 물어 출혈이 났다. 가족들은 모두 심장에 병이 있었다. 고향에서는 뿔이 자란 여우가 있어 그것이 뿔을 땅에 한번 비비면 사람들이 속이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내가 제일 심했다.
내가 사부님 댁에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처리해주십사 부탁드렸다. 사부님께서 응낙하셨다. 나중에 여동생의 말을 들어보니 한 마리의 독수리가 그 여우를 쫓았고 여우는 쫓겨서 셋째 여동생의 부뚜막으로 도망간 후 독수리가 물고 날아갔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그 나쁜 것을 청리해주셨다. 그때 이후 우리 가족의 심장병은 다 나았고 나중에 가족들은 대부분 대법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몇 년간 기공을 연마했는데 그저 동작만 공을 들여 그다지 진보가 없었다. 점차 파룬궁은 기타 기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 특성 진선인에 동화되어야 하며 심성수련을 중시하고 연공인은 매우 높은 덕을 가져야 하며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우선 뜻이 성실해야 한다.
이후 사부님께서 장춘에서 설법하시면 나는 모두 참가해 며칠 강의를 들었지만 다 듣지는 못했다. 한동안 늘 어떤 것이 눈꺼풀 위에서 뛰는 것 같았고 두 눈동자를 휘감고 돌았으며 다시 콧등 위로 기어올라 뚫고 들어가더니 콧구멍에 매달려 있었다.
사부님께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는데 사부님이 자세히 보시더니 나의 어깨를 툭툭 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좋습니다, 작은 용을 연마해냈군요.”
파룬궁을 반년 정도 연마하여 이 짧은 시간 내에 생명체를 연마해내자 사부님께서 기뻐하셨고 나도 기뻤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 속에 온데를 쑤시고 다녀 아픈 것도 아니고 간지러운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진정 수련으로 걸어 들어와 수련하므로 사람들은 각종 상태가 다 있었으며 그때마다 사람들은 사부님께 가서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장춘 보도원 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이런 생명체는 더욱 고층차에도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수련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연환경에서 생기는 것이다. 고층차에서 수련하는 사람의 신체에서 산생되는 용 등의 생명체는 당연히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원만을 따라 고층으로 간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아시며 무엇이든 똑똑히 말씀하실 수 있다.
길림대학정문(해방대로)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가 저번에 길림(吉林)대학에서 학습반을 열 때에, 한 수련생이 길림대학 정문에서 나와 자전거를 밀고 막 길 가운데까지 갔는데 승용차 두 대가 단번에 그를 가운데 끼워 넣어 당장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들에 부딪혀도 모두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차가 멈췄으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이 사건에서 말씀하신 인물이 바로 나였다. 그때는 1994년 5월 장춘 7기 반(주간반)이 끝나고 내가 맨 나중에 명방궁을 나와 길림대학 정문에 도착했는데 사부님께서 입구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나는 해방대로 차도의 쾌속차선을 건넜는데 마침 자전거를 밀고 중간에 갔을 때 동서 양쪽에서 온 두 대의 차량 사이에 끼였다. 막 부딪칠 뻔했는데 차가 단번에 멈췄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천천히 인도로 가서 고개를 들어보니 사부님께서 대문 동쪽 인도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당시 나는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했는데 95년 초 <전법륜>이 출판되어 책을 보자 그것이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임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주셨으며 나는 목숨의 빚을 한번 갚게 되었다.
93년 이후 사부님께서는 전국 각지에서 법을 전하셨는데 직장에 하루 종일 출근하실 수 없어 월급을 정지하는 수속을 하셨다.
95년 사부님께서 외국에 나가 법을 전하신 후로는 더는 사부님을 뵙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외국에서 돌아오셔서 지질궁(地質宮)에서 수련생들을 만나셨는데 내 아들에게 말씀하셨다.
“자네 부친에게 안부 전해주게나.”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 하신 후 “부친에게 안부를 전해주게” 이렇게 세 번을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염려하셨고 고향 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가까운 분들을 염려해주셨다.
십여 년이 지났고 나는 사부님이 매우 염려된다. 사부님의 모든 소식을 들으면서 박해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며 사부님께서 하루 빨리 돌아오시길 기다린다.
(明慧網)
발표시간 : 2010년 5월 12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5/12/66087.html
작자: 치치하얼 대법제자
【정견망】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난 후 중환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나도 모르게 근무시간이 되어 급히 달려가는데 문을 나서고 나서야 방향이 틀렸음을 알았다. 머리를 들어보니 맞은편 건물위에 ‘전기 문화궁’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갑자기 이것이 사존께서 당시 법을 전하던 곳임이 생각나 갑자기 눈물이 솟아나왔다. 평소 이곳을 지나는 일이 드문데 오늘 길을 잘못 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사존께서 제자더러 용맹정진 하여 늘 대법제자의 사명과 책임을 생각하고 시간을 다그쳐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격려하시는 것이었다.
치치하얼시 전기 문화궁. 사존께서는 1993년 7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곳에서 공을 전하셨다.
나는 1996년 법을 얻었다. 99년 7.20 이전 단체 학습하고 연공하던 여가에 늘 함께 모여 사존께서 설법반에 참가한 노제자가 사존께서 법을 전하시던 광경을 회상하는 것을 들었다. 오늘 내가 당시 들은 몇 가지 단편을 써내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사부가 도제를 찾다
1993년 7월 16일부터 23일까지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서 치치하얼 기공협회의 초청으로 전기문화궁에서 공을 가르치고 법을 전하셨다.
학습반을 따라 다니던 천목이 열린 노제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사존께서는 치치하얼을 향해 일천여 개의 파룬을 내보내 제자를 찾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500명밖에 찾지 못하셨다. 왜냐하면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이 약 50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여름 무더운 날 사존께서는 수행제자들과 친히 일천여 권의 서적 등 자료를 가지고 오셨지만 학습반이 끝난 후 나머지 500권을 지고 가셨다. 당초 나는 사존께서 왜 제자를 절반밖에 찾지 못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사존의 해외 설법을 공부한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사존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 당시 대법을 전할 때 무엇 때문에 낡은 세력은 제일 처음으로 법을 얻는 사람 수를 죽도록 1억으로 제한하였겠는가? 이 1억은 어디 내가 반드시 요구한 것인가. 그것들은 당시에 제한한 숫자는 7천만이었고, 나는 당시에 2억 인을 요구하였다. 그것들은 제일 처음 법을 얻는 것이 만약 2억 인이라면, 이번의 이른바 사악의 고험(考驗)은 성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죽도록 1억으로 제한하였다.”
법을 전하던 초기에 구세력의 각종 방면의 교란을 받았는데 사존께서는 일체 중생을 구도하시기에 줄곧 구세력에게 기회를 주고 그것들이 청성해져서 더는 정법을 교란하지 말고 구도받기를 희망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세력은 오히려 사존의 무량한 자비를 이용해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했다. 사존께서 법을 전하시던 어려움과 거대한 감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수련생을 위해 신체를 정화하시다
당초 많은 수련생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학습반에 참가했다. 사존께서 아무리 신체 정화와 수련의 관계를 설명하셔도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휴식시간에 사존을 찾아와 병을 치료해 달라고 했다. 사존께서는 줄곧 깨달을 시간과 기회를 주시며 수련생이 법에서 제고해 올라오기를 희망하셨다.
어느 수련생이 병이 난 아이를 데리고 사존께 치료해달라고 했는데 사존은 한번 아이를 보고는 그녀에게 대법은 병을 치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매우 실망하여 했으나 돌아간 후 아이의 병이 기적같이 나았다. 그녀는 사존께서 사실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공을 내보내셨던 것임을 알았다. 병을 고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그녀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친히 보도소장을 선정
사존의 설법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강의가 끝난 후 사존께서는 강단에 서서 밖으로 나가는 수련생들을 보고 계셨다. 한 수련생이 움직이지 않고 줄곧 강단 위의 사존을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존께서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선생님이 누구를 부르시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고 좌우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키며 사존께 여쭤보았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사존께선 고개를 끄덕이시며 강단 위로 올라오라고 하셨다. 그가 올라가자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치치하얼 보도소장을 맡아보세요.” 이리 하여 그는 사존께서 친히 선정한 보도소장이 되었다.
이빨을 뽑던 이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내가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학습반을 열 때, 한 사람이 거리에 노점을 차려 놓고 사람들의 이를 뽑아주는 것을 보았다. 보니 이 사람은 남방에서 왔는데 동북사람과 같은 옷차림이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치치하얼에 있는데 때로는 공원부근에 있고 때로는 공장 숙소 부근에 좌판을 벌여놓는다. 그는 늘 바닥에 한 무더기 이빨을 쌓아놓고는 자신이 만든 약물로 이빨을 뽑아주는 시범을 보이는데 주로 약을 팔기 위해서였다. 어떤 동수는 그가 사람들의 이빨을 뽑아주는 것을 보았는데 사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매우 쉽게 뽑았다. 뽑은 후 주위 사람들이 아픈지 물어보니 그 사람은 아프지 않다고 했다.
사존께서는 우리를 이끌고 세간에 5천년 신전문명을 개창하셨다. 말법시기가 되어 구우주가 부패됨에 따라 관련 업종은 이미 다 하고 극히 일부분만이 남아 민간에서 유전되고 있다. 내 생각에 이빨을 뽑는 이 사람은 신전문명의 증거를 남겨놓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쉬운 작별
학습반에 참가한 수련생 모두 한몫의 심득체험을 바쳤다. 어느 수련생은 자신이 쓴 것이 똑똑하지 못하여 걱정되어 그림을 덧붙였다. 사존께서는 북경으로 법을 전하러 가tu야했으므로 이곳에는 7일만 하고 떠나야 했다. 내가 이 동수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못내 아쉬워 사존을 배웅하려고 몇 근의 복숭아를 사서는 사존의 짐칸에 실었다고 한다. 사존께서는 재차 다그쳐 수련하여 빨리 층차를 제고하라고 당부하셨고 전기 문화궁에서 연공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시면서 그곳의 장을 청리해주셨다.
사존께서 치치하얼에서 법을 전하신지 벌써 17년이 되었다. 다른 공간에는 당시의 정경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이 방면의 중생 역시 영원히 이 날을 기억하며 사존께 감사드릴 것이다. 사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일은 기회가 많지 않고 나 역시 늘 이렇게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전법륜》)
나는 사존의 설법반에 참가했던 동수들이 정말 부럽다. 한때는 자신이 이 얻기 힘든 기연을 놓쳐버린 것에 대해 후회했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사실 학습반에 참가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수(眞修)하기만 하면 사존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삼아 이끄신다. 또한 우리보다 우리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며 단 한 명의 제자도 빠트리지 않으시려 하신다.
만일 사존의 자비하신 보호가 없었다면 나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오늘날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 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내가 매우 좁은 길을 걷고 있는데 커다란 손에 이끌려 몇 걸음을 걷다가 아래로 미끄러지려고 했다. 그런데 즉시 거대한 손이 나를 끌어올렸다. 꿈에서 깬 후에 나는 이것이 사존의 손임을 알았다.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오래 수련했는데 사존께서 손을 떼실 수 없단 말인가. 나란 이 변변치 않은 제자를 위해 사존을 얼마나 걱정하시는지, 사존께서는 내가 빨리 성숙하여 자기의 길을 잘 걷도록 점화하신 것이다. 나는 사존의 손에 이끌려 걷지 않도록 정진해야한다.
사부님 은혜의 호탕함은 보답할 길이 없고 오직 정진하고 또 정진할뿐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사존의 글을 다시 공부하자.
감개(感慨)
10년 비바람 속 연꽃이 정원에 가득하니
등황자록(橙黃紫綠) 하늘 높이 밝구나
금강백련(金剛百煉) 청순(淸純)함 나타내거니
진념(眞念)이 온 하늘 용해하여 맑구나
법도들 자비롭게 세간에서 행하거니
선념(善念)으로 사람을 구도하고 사악한 영(邪靈)을 제거하네
정념으로 걸어온 길 신은 세간에 있거니
큰성취 이루고 돌아오니 뭇신들이 맞이해주네
제자가 사부님께 머리 숙여 인사올립니다.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장발표 : 2010년 7월 14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10/7/14/fastnews.html#fas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