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였습니다. 같은 재단에 속한 학교들이 공설 운동장에 모여 노년의 이사장님을 모셔놓고 일 년에 한 번 씩 창립 기념 행사를 가졌었죠.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그 기념 행사 중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매스게임(mass game)과 카드섹션(card section)을 매년 맡아서 해왔습니다. 아마 지금 학생들을 그렇게 혹사시킨다면 학생들도 못 버틸 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가만 있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그 당시는 학교에서 이사장 눈에 잘 보이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햇볕 따가운 여름날에 흙먼지를 덮어쓰면서 잘 못하면 맞아가며, 지칠 때까지 수업도 빼먹으면서 연습을 시켰었습니다. 해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일 밑에 대여섯 명 엎드리고, 그 위에 올라가고, 그 위로 또 올라가 엎드리고 마지막에 정상에 올라간 학생이 일어나 두 손을 번쩍드는... 조금만 균형이 안 맞아도 우르르 쓰러지곤 했었죠.

  체육복 뒤를 하얀 헝겊을 대서 앞과 색깔이 다른 상태로 만든 후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고 음악에 맞춰 자리를 이동합니다. 물론, 저희들은 이게 어떤 글자나 모양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인지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어느 시간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될지 외우게 됩니다. 이 음악이 나올 때는 이 위치에 서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음악이 멈추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는 한 학생의 구령에 맞춰 자리를 찾아 이동합니다. 땅에 박혀 있는 솔 같은 것이 위치를 찾는데 도움을 줍니다. 솔직히 매스게임이나 카드섹션을 할 때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굽혔다 폈다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처럼 동영상을 쉽게 촬영할 수 있었던 시절도 아니니 나중에 행사에 참가한 부모님들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거나 해야 우리가 했던 동작이 전체적으로 이런 글자와 모양을 만들었구나 알게 됩니다.

  한 번은 몸이 아파 연습에 나가질 못하고 3층 교실에서 창밖으로 연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안에 있을 때는 힘들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고 정신없기만 했던 것이 멋있게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제가 있는 위치는 무슨무슨학원에서 ‘학’이라는 글자의 동그라미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등을 굽혔다 폈다하는 단순 동작은 옆 친구들 동작과 어우러져 파도, 횃불, 태양 등 다양한 모양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먼지로 뒤덮힌 아이들의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구령소리,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들로 가득하지만 멀리서는 그저 아름다울 뿐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진행시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시받은 대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일종의 예술 행위가 완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처음 이 광경을 보는 사람은 탄성만 연발할 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좀 구잡스럽기도 한 여러 복잡한 과정들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예: 카드섹션 동영상에서
(학생들 참 열심히 잘 합니다. 호랑이가 뛰어가고 있는 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근접 촬영을 하니 어떻게 호랑이가 움직이는지 원리를 알 수 있겠군요. 학생 하나하나가 자기 맡은 자리에서 정해진 시간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카드섹션을 구경하는 관객처럼 멀리 떨어져서 현재의 생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멀리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보되 우리 눈의 해상능 때문에 더 세밀한 부분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망막에 있는 시세포 크기가 1.5um로 이론상 최대한 두점이 1.5um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한 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는 광학적 문제로 100um이하는 눈으로는 관찰이 잘 되지 않습니다. 즉, ‘생명’이라는 공연을 펼치는 카드섹션은 구경이 가능하되 그 카드를 움직이는 존재(공연단원)들에 대해서는 관찰의 대상에서 벗어나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 가장 작은 것은 곤충으로 여겨졌습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리를 가공함으로써 관찰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렌즈가 개발되었고 이 렌즈를 이용한 현미경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단위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65년 로버트 훅이 처음으로 카드섹션 공연당원의 흔적을 관찰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작은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빌어 '세포'(Cell)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레벤후크는 고배율의 렌즈를 만들어서 카드섹션 공연단에 한 발짝 더 다가갔습니다. 공연단원 개개인을 흐릿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죠(그가 본 것은 원생생물과 세균들이었는데 물 속을 헤엄쳐 돌아다니는 그냥 눈에는 보이지도 않던 엄청난 수의 미생물이라는 존재는 당시 큰 충격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안팎의 유명 인사들이 이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려고 레벤후크에게로 모여들었다고 하죠).

  계속적인 다가감으로 결국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작은 미생물들이 엄청난 수로 존재하며, 이들은 세포로 되어 있고, 눈에 보이는 큰 생명체도 실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포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크고 복잡한 생명체도 결국 세포->세포가 모인 조직->조직이 모인 기관->개체라는 층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다양한 세포들이 기능적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어찌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생명은 실로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복잡성과 난해함에 오히려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OTL..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모든 존재에 통용되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한국인의 세포와 미국인의 세포는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간세포와 쥐의 간세포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세포와 근육세포는 형태와 기능면에서 다르지만 기본형에서의 변이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며 본질적으로 발생 과정에서 같은 세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대장균은 원핵세포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획득한 분자생물학 정보는 어느 정도 변형을 시키면 미생물, 식물, 동물 모두에게 적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세계의 분자의 법칙과 원리에 일반적인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포들이 펼치는 일종의 대형 카드섹션 공연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수가 대략 100조개이니 어느 정도의 대규모 공연인지는 OTL.. 이 카드섹션은 그 크기가 방대할 뿐 아니라 구조도 독특해 일부 카드섹션 공연자는 솟아오른 스탠드에서 다른 공연자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공연을 펼칩니다. 즉 이들은 공연도 하면서 자기가 공연하는 카드섹션을 관람할 수도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이 된다는 거죠^^)

  그러나, 세포를 발견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의문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원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세포라는 어찌보면 볼품없고 어리석게 보이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단위들이 어떻게 이리 훌륭한 대규모 카드섹션 공연을 멋들어지게 해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등을 보여줄 때와 가슴을 보여줄 때를 알며 이 시기에는 파란 카드를 들고 있고, 그 다음에는 하얀 카드를 들어야 될 지를 알며 자신이 움직여야 될 때와 가만히 있어야 될 때를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포는 어떻게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일까?

  세포가 발견된 이후 수백년이 지나서야 이 문제에 해답을 줄만한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1833년 세포 내에 핵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1842년에는 염색을 통해 핵 안에 존재하는 이상한 물질들에 대한 기술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생명현상이 시작된지 40억년 만에 우리를 여기에 이렇게 있게 한 존재들의 면상을 들춰내보는 역사적인 순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59년 생물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종의 기원’을 발표했던 다윈조차도 유전자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1885년 유전이 완전히 핵에 의해 일어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888년 핵 안에 또아리 틀고 룰루랄라 하고 있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염색체(chromosome)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1866년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표되었지만 유전이 어떤 입자, 어떤 단위를 부여할 수 있는 개체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었기에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전자들이 염색체 위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이 관찰과 실험 결과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 1944년 DNA가 바로 그 유전물질임이 밝혀졌고, 1953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규명되었습니다. 유전물질의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유전자가 어떻게 복제되며 그 기능이 무엇인지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인간의 유전체 염기서열이 모두 해독되었습니다. 하지만 파면 팔수록 어렵다고 아직도 유전자들의 발현과 조절, 상호 작용 등은 모르는 부분이 태반입니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제는 당당히 유전자들과 마주해서 그들이 관여한 현재 우리의 형성 과정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포는 어떻게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단백질에 있습니다. 세포의 성장 및 발생, 기능을 조절하는 것은 단백질입니다. 단백질은 세포의 생존에 필수이며 세포 내 모든 구조물의 기본틀을 마련합니다. 또한 에너지 공급이나 분자 합성 같은 세포 내 대부분의 화학 반응은 단백질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단백질은 세포에게 특수한 성질을 부여합니다. 간세포는 알부민을, 췌장의 β세포에서는 인슐린을 만들며, 적혈구에서 헤모글로빈은 산소를 운반합니다.

  세포에 존재하는 이런 특이적, 비특이적 단백질들은 모두 세포의 핵 안에 있는 유전자의 지령에 의해서 합성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유전자가 하는 일은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낼지 결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세포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처음 염색체를 발견했을 때 세포 소기관의 하나 정도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속물의 하나 정도로 여겨졌던 이 물질이 바로 생명의 마스터(master)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본주의 사상이 넘쳐나던 그 시절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전자의 수렴청정은 매우 용의주도하며, 그 손길은 세포의 행동 뿐 아니라 개체의 행동, 새로운 종의 탄생을 가져오는 진화, 그리고 자연선택의 단위 문제까지 뻗쳐져 있습니다. 현재 진화에 대한 정의는 고전적인 다위니즘을 넘어서 ‘한 집단에서 유전자 풀을 구성하는 대립 유전자 빈도의 변화’로 기술되고 있으며, 자연선택의 단위 역시 종이나 그룹, 개체가 아닌 유전자로 기술되면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억년 동안 꽁꽁 숨겨져왔던, 어찌보면 생명체의 마스터일 수 있는 유전자의 발견과 그에 대한 이해 및 해석, 그리고 그 이용이 향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사뭇 궁금한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