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宇先人의 風水地理 思想 및 豫

趙 成 宅
출처 : http://www.bongwoo.org/data01.html

1. 서언(序言)

어려서부터의 꿈인 도인(道人)과의 만남은 1984년 소설《단(丹)》의 출간과 함께 출입했던 수요모임을 통해 이루어 졌다.

당시 결혼이 임박했을 때라 처음부터 입산을 생각하고 봉우선생을 찾아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매주 수요일 한번씩 찾아 뵙고 질의 응답식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횟수를 더할수록 선생의 사상과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 진리의 말씀은 나의 인생항로를 바꾸어 놓았다.

이듬해 4월 직장에 사표를 내고 결혼도 포기한채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오대산 월정사를 지나 남한강 발원지인 두로봉 아래 신선골 계곡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년이면 초계(初階)에 갈 수 있다는 봉우선생의 말씀에 속아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 하늘을 날것만 같았다.

죽자살자 밤을 새가면서 용맹정진한지 3년 후에야 속은 것을 알았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다.

입산 10년이 지나서야 선생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 또한 뒷사람들을 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죽어서는 나를 원망할 수 없다는 봉우선생의 말씀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모든 것을 단기간으로 보지 않고 길게 생각하시고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것 같다.

한때나마 봉우선생을 원망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월 탓인 것 같다.

이번 소주제(小主題)인 풍수지리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수련중 잠깐이나마 외도를 하고 싶었던 분야인 풍수지리.

무조건 수련만 하라는 선생의 말씀에 곁눈질 한번 못하고 미련하게 질문 한번 못한게 후회되기도 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잡은 물고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호구지책(糊口之策)이 되어버린 풍수지리.

봉우선생은 개인의 길흉화복보다는 크게 대승적 차원에서 평생을 사셨다.

한때 십대 후반에는 부친을 좋은 명당에 모셔 가문의 후대에 제왕(帝王)을 얻고자 백두산, 한라산, 고령(高靈), 계룡산 등지를 다니면서 어떻게든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부친을 모시려 했다.

선생의 부친께서 동학군 30만명의 목숨을 고종황제께 주청(奏請)하여 살리셨던 공으로 어떻게 안될까 하여 욕심을 부리셨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안동권씨 세도정치라는 과보 때문에 앞으로 200년은 가문에서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천기(天機)를 알고 모든 욕심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풍수사상과는 멀리하며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다.

그럼 봉우선생의 말씀과 사상을 가지고 풍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2.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 대하여

사람이 땅을 떠나서는 계속 살수가 없다.

개인적인 사욕을 가지고 선생을 찾으면 풍수지리란 쓸데없는 학문이요 가짜다 하고 한마디로 매장한다.

행여 수련에 방해가 될까하여 될 수 있으면 언급을 회피했다.

제자였던 설초(雪樵) 김용기(金鎔基)씨에 대한 실망으로 더욱 더 말씀을 아꼈다.

머리는 하늘이요 배는 땅이다.

머리를 밝히는 학문은 호흡공부요 배를 살찌게 하는 학문은 풍수지리 공부다.

모든 땅의 기운은 음식물을 통하여 배에 들어가게 된다.

음택(陰宅:山所)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고 양택(陽宅:집)은 형이하학(形而下學)이다.

음택은 천기를 많이 받아야 좋기 때문에 산능선이 좋고 양택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므로 낮고 평평한 곳이 좋다.

명당을 구하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덕을 베푸는 것이다.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되 남을 위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베풀어야 좋은 길지(吉地)를 만날 수 있다.

풍수지리의 시원(始原)을 중국으로 보지 않고 우리나라로 보았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수도에 와서 과거 시험에 응한 뒤 합격하지 못하고 고향집에 한번 다녀오려면 1년정도 걸린다.

그러므로 고향집에 가지 않고 몇몇 동지들이 모여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망라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어 팔아서 다음 과거때까지 먹고 살았는데 제일 만만한 것이 지가서(地家書:풍수지리책)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대국으로 섬길 때 중국에 가면 제일먼저 사들이는 것이 지가서였고 고국에 돌아오면 비싼값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수많은 지가서가 들여오게 되었는데 각 가정에 가보로 대물림하여 배우게 하였다.

중국사람들이 본래 음흉하여 제대로 된 책을 만들지 않는데 조금 맛만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로 지어낸 것이라,

그것을 모르는 우리 백성들은 아주 귀중한 책으로 여겨 혹세무민하여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또한 좋은 길지에, 제대로 된 집에 살지 못하니 인재가 많이 나지 못하였다 한다.

요즘에 와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 거기에 대한 반성과 토속(土俗) 전통풍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3. 우리나라는 왜 명당인가?


여기서 우리나라는 한반도와 만주일대 동북삼성(東北三省)을 합한 곳을 의미한다.
북극은 북극성(北極星)과 일치하여 북극성의 기운을 바로 받는 곳인데 북극성은 자미성(紫微星)을 말한다.

북극성은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주라고 볼 때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를 주관하는 곳이다.

북극에서 산맥이 출발하여 시베리아에 상륙하여 바다위로 나와서 계속 남쪽으로 달려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과 소흥안령(小興安嶺)산맥이 갈라지는 곳까지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주산(主山)인데 그 중에서 장백산(長白山)을 제일 중요한 곳으로 보아야 한다.

즉 대·소흥안령 분기점이 장백산이되며, 장백산은 산지조종(山之祖宗)이다. 대흥안령은 중국 곤륜산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 유럽에까지 이어진다.

또한 소흥안령은 남쪽으로 산맥이 달려 내려가서 백두산에 이르러 성산(聖山)을 이루고 한반도를 종주(縱走)하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이룬다. 북극에서 소흥안령으로 백두산과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심축이다.

북극과 대·소흥안령으로 내려오는 산맥이 북현무(北玄武)요 주산이고 소흥안령과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이 내청룡(內靑龍)이고 일본열도도 내청룡에 속한다.

크게보면 북남아메리카 대륙을 외청룡(外靑龍)으로 볼 수 있다.

대흥안령에서 발해만(渤海灣)에 이르는 산맥이 내백호(內白虎)요 몽고고원에서 중국 남부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산맥이 내백호다.

크게보면 인도지나반도와 인도아프리카 대륙이 외백호(外白虎)에 해당된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가 남주작(南朱雀)이다.

더 멀리 보면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와 뉴질랜드가 안산(案山)이며 더 나아가 남극(南極)이 조산(祖山)이 된다.

우주에 나가서 지구를 보면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모든 대륙과 섬들이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옛 고조선(古朝鮮)의 첫 도읍인 장춘(長春)을 중심점으로 원을 그린다면 딱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흥안령과 소흥안령이 어머니가 양팔로 감싸안듯 안아주는 만주 동북삼성-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녕성(遼寧省)-과 한반도는 이 세상에서 한곳밖에 없는 천하대지(天下大地), 대명당(大明堂)인 것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쪽은 청(淸)하고 서쪽은 탁(濁)하다.

반도를 중심으로 청탁이 교차되는 곳이다.

동해와 태평양은 너무 맑아 어족이 풍부하지 못하고 사할린섬에서 일본에 이르는 땅은 청하여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옛부터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도적질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학문을 추구하고 명예를 중시한다.

또한 중국과 황해는 탁하여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돼서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수많은 사람이 번성하여 인구가 밀집하여도 넉넉히 먹고살았다.

그러나 기운이 탁하여 생수를 먹는 곳이 극소수요 항상 물을 끓여 먹으니 생수는 짐승들이나 먹는 물인 줄 안다.

음식과 재물을 탐한다. 청탁이 교차하면 모든 기운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좋은 기운이 생성된다.  

물이 흐르지 않고 있으면 썩는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공기도 탁해진다.

북쪽은 냉하고 남쪽은 온화하다.

청탁과 냉온이 겹쳐지는 곳 그곳은 만주와 한반도이다.

북쪽은 대륙이요 남쪽은 바다이다.

동극(東極)은 인도양(기운이 나오는 곳, 수면이 높음)이요,

서극(西極)은 사해(死海:버뮤다 해역, 기운이 사라지는 곳, 물결이 낮음)이다.

북극은 머리요 남극은 항문이다. 동극은 내보내는 곳이요 서극은 흡입하는 곳이다.

순서는 북→동→남→서이다. 머리는 비어있으니 북극해요 항문은 잘 막아야하니 남극대륙이다.

모든 것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응집되는곳 그곳에 우리가 살고 있다.





4. 봉우선생의 성지순례(聖地巡禮)


19세때 봉우선생은 수련중에 자신의 전생(前生)을 보고 또 앞으로 우리나라의 수도가 될 곳인 이른바 북계룡(北鷄龍)을 보았다.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어 먼길을 확인차 도보로 여행을 자청했다.

백두산에 올라 주위를 관망하고 만주를 가로질러 요동반도에 이르는 수천리길 산맥을 따라 걸어서 다다르니 어이없게도 바로 압록강 건너 단동(丹東)부근이었다.

선생은 이곳을 북계룡이라 명명하고 충남 공주에 있는 산을 남계룡(南鷄龍) 이라 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천기(天機)를 누설하니 우리 학인들이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반갑게 여겨 수차 다녀왔다.

압록강을 백호(白虎)로 역수(逆水)하고 신의주를 강남(江南)으로 하고 봉황산(鳳凰山)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계관산(鷄冠山)을 안산(案山)으로 하니 기운이 맑아 생수를 먹고 공기가 맑으니 사람이 살기가 매우 좋다.

왼쪽 백두산에서 득수(得水)하여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황해(黃海)로 들어간다.

세계적으로 장춘(長春)을 제외하면 이만한 명당이 없다.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도 미리 알고 후세를 위하여 한쪽 옆, 서울로 표현하면 인왕산 골짜기쯤에 도읍하니 지금의 동명보자(東明堡子)이다.

봉우선생은 남북통일 이후 서울이 잠시 통일국가의 수도가 되었다가 북계룡으로 천도한 뒤 500년 후에 다시 장춘으로 옮기고 장춘을 북경(北京), 북계룡을 남경(南京)이라 부른다고 예언했다.

또한 봉우선생은 수련중에 더 귀한 곳을 보았으니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하늘, 땅, 사람은 닮아서 하나의 이치라 했다.

백두산이 백회(百會)이면 장백산은 장바구니(머리의 가마가 시작되는 곳으로 머리 뒷면과 윗면이 교차되는 곳)이다.

모든 사람들이 백두산과 장백산을 하나로 본다.

그러나 봉우선생은 별개로 보면서 사람 머리에 비유했다.

사람의 육체는 하늘과 땅을 닮았는데 머리에서 시작하되 머리 중에서도 가마에서 시작되니 그곳이 장바구니다.

그러하니 땅은 장백산이 조종(祖宗)이다.

장바구니에서 내려와서 백회를 이루니 백회에 물이 고이고-뇌수(腦髓)- 백두산 천지(天池)이다.



아주 옛날 12만8천년전 하느님께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백산과 백두산 일대가 사람이 살만했다.

홍익인간(弘益人間)하는 아주 인자한 분이라 직접 사람의 몸을 빌어(곰족 마을 여인) 일반 백성과 똑같이 태어나니 이분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대황조(大皇祖) 한배검님이신데 장백산 아래에서 태어나 장백산에서 보통사람들과 같이 수련하여 성통공완(性通功完)하시고 바이칼호에 가셔서 사람들을 모아 교화(敎化), 이화(理化), 치화(治化)하시고 장춘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곧 조선(朝鮮)이다.

봉우선생은 수련중에 이와같이 보시고 성지순례를 하고 마음속에 숨겨오다 환원(還元)이 얼마남지 않음을 알고 돌아가시기 한달전쯤 처음으로 여러 학인들에게 말씀하셨다.

학인들이 어쩔줄몰라 우왕자왕 하는 중에 환원하시니 누구에게 또다시 의논하여 장백산을 찾겠는가.

천기누설이라 옛 고인들이 누설하지 않았으나 학인들을 위하여 조금 맛만 보여 주었으니 어찌 찾기가 쉽겠는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접근하여 짐작해 보았으나 워낙 넓은 땅이라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대도인이 찾아 알린다고 생각되는데 그전에 짐작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고 중국 군사기지가 있다 하니 중소국경지대에 있는 산으로 매우 험하고 깊은 산으로 추측된다.

함부로 인간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신성한 산이다.





5.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에 대하여


봉우선생은 평소 학인들에게 현재 나와있는 모든 풍수지리 서적들을 전면 부인하고 정신을 수련하여 머리가 밝아지면 모든 학문을 새로이 정리하라 하였으며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음택은 현대의 과학수준으로는 설명이 부적절하나 세상이치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옛날 부모가 죽으면 내다 버려 짐승과 벌레들이 뜯어먹어 보기에 흉했으므로 매장(埋葬) 풍습이 생겼는데 매장을 하게 되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있으므로 서로 잘 모시려 한 것이 음택풍수(陰宅風水)의 시초(始初)라 하였다.

만약 길흉이 없으면 부모시신을 함부로 할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명당을 찾아 복을 구하는 것도 잘못이나 아예 무시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음택의 근본은 효(孝)와 효성심(孝誠心)에 있다 하였다.

양택은 사람이 살고있는 곳이므로 과학적으로 설명이 될 뿐만 아니라 길흉화복이 직접 상관지어지는 곳이다.

그런데 그 뿌리는 음택에 있고 음택의 뿌리는 선(善)과 악(惡)에 있다.

또한 자기 욕심과 남을 위한 정신적 물리적 베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양택론(陽宅論)에서 봉우선생은 오행(五行)에 준하여 설명하였는바 서로 상생상극(相生相剋)하는 원리를 조화롭게 하여 응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목욕탕, 화장실은 물에 해당하므로 수화상극(水火相剋)하니 남쪽이 화(火)이므로 남쪽에 두고 보일러실은 불에 해당하니 북쪽이 수(水)이므로 북쪽에 보일러실을 두라 하였다.

요즘 풍수학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원리를 가볍게 여겨 물에 물을 더하고 불에 불을 더하니 너무 지나쳐서 좋지 않다.

결론을 말하자면 명당을 구하려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남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홍익인간 원리에 따른다면 저절로 명당이 구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 보는 명안지사(明眼地師)도 사람에 따라서 눈이 가려지고 트이니 평소 바르게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 하겠다.

6. 봉우선생이 살던 양택지(陽宅地) 조명


선생은 서울 재동(齋洞)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정확하게 어디에 어떠한 형태의 집이었는지는 아쉽게도 아는 사람이 없다.

후에 전라도 진도(珍島)와 능주(綾州)에서 부친을 따라서 옮겨 다니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빼앗긴 후 부친을 따라 충북 영동 읍내에 한동안 은거하다.

17세때에 공주시 반포면(反浦面) 상신리(上莘里)에 오경감(吳景鑑)이 살던 곳으로 이사하여 회갑때까지 살면서 중국, 몽고, 시베리아, 일본 등과 전국각처를 유랑하며 잦은 출입을 하면서 반평생을 보낸다.

회갑을 넘긴 후 다시 서울 세검정 지금의 부암동집에 한의원을 내고 94세까지 전국 최고의 한의술을 펴시다가 환원을 한해 남기고 다시 상신리에 돌아와서 이듬해 봄에 환원하였다.

다른곳은 정확히 알수가 없어 논할수 없고 상신리 집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백두대간에서 분기(分岐)한 금남정맥(錦南正脈)이 400여리를 치고 올라와 계룡산에 와서 끝을 맺는데 계룡산 아기봉(牙旗峰:삼불봉)에서 마침내 봉우리를 이루고 그 여맥이 뻗어내려 상신리를 휘돌아 감으면서 금강에서 더 달리지를 못하고 발길을 멈춘다.

상신리에서 좁으나마 들판을 이루는 데 그 가운데 중심에 가는 맥 하나가 내려와 통고재에서 갈길을 멈추고 대명당을 한곳 이루었다.

이곳이 바로 봉우선생의 생애중 반평생을 사신 고향같은 곳이다.

옛날 백제시대 공주에 도읍할 때 왕이 친히 다니던 국찰(國刹)이 상신리 전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중심이 되는 곳이 봉우선생의 집이며 곧 대웅전이 있던 자리이다.

임진왜란때에 파괴되고 그 후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민가로 시골마을로 유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기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통고재를 뒷산 의지처로 삼아 가마봉을 안산(案山)으로 한다.

백호(白虎)는 시루봉, 장군봉, 임금봉을 지나 온천리에서 합수(合水) 지점을 만나 끝을 맺고 있다. 외백호(外白虎)는 천황봉에서 출맥(出脈)하여 도덕봉(삽재 오른쪽), 우선봉(국립묘지 뒷산)을 지나 금강에 이르러 꼬리를 내리고 청룡(靑龍)은 자미봉(紫微峰)을 지나 시루봉을 만나 안산(案山)을 이루니 수도장(修道場)으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드물 것이다.

느랭이에서 득수(得水)하여 학교앞에서 합수(合水)하여 갈지자로 물이 빠져나가니 자물쇠로 꽉 잠궈놓은 형상으로 첩첩산중 외부와는 아주 단절된 듯 수구(水口)가 교쇄(交鎖)를 잘하였으니 옛날부터 극빈자가 드물고 인심이 좋다.

생가 옆 북쪽에 샘물이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남는 질 좋은 샘물이다.

옛날부터 터가 세다하여 보통사람들은 살기가 어려웠던 곳이다.

국운이 쇠하여 백성들 살림이 어렵던 시절에 봉우선생이 은거하며 와신상담(臥薪嘗膽) 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호서(湖西) 최고의 명당이다.


7. 결어(結語)

어느 학인이 말하기를 아무리 도인이라도 어느 한 분야만 알뿐인데 봉우선생처럼 어찌 모든 분야에 세세히 밝을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십년이 넘도록 배우고 연구하여 보았는데 결론은 도를 밝힌 사람이라면 여러 분야에 밝아서 두루 통할 수 있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와 현대 학문에 이르기까지 보통사람 이상되는 공부, 스스로 깨달아서 알 수 있는 방법을 봉우선생을 통해서 배우고 익힌 것이다.

기초를 배우고 난 다음에 필요한 큰 공부를 우리는 봉우선생을 통하여 배우고 익힌 것이다.

진위(眞僞)를 가리는 마음 밝히는 공부,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공부, 무조건 배우고 외는 공부가 아닌 근본을 알고 발전시키는 공부를 풍수지리학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음택(陰宅)은 주로 산능선에 많고 전통지리학에서 수구(水口)를 중시하는 수법과는 상관이 없는 기혈(騎穴:앞 주작이 솟은 자리)에 많이 소점(所點:혈을 정함)했다.

그리고 양택(陽宅)에서 좋은 곳은 첫째 공기 좋은 곳이라 했다.

아무리 좋은 명당도 공기가 오염되는 곳이면 기운이란 공기를 통해 몸속에 들어오는 것인만큼 양택과 수련장소 또한 공기 좋은 곳이 제일 좋다.

물론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곳은 공기도 좋다 할 수 있다. 좋은 땅에 좋은 기운이 있고 큰 인물이 난다. 건강문제는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수도문제는 남으로 내려 갈수록 국력이 약화되었고 북으로 올라갈수록 국력이 강했다.

수도란 나라의 중앙에 있는 것인데 북(만주쪽)으로 올라가야 강대국이 된다 하셨다.

수도가 압록강을 건너 북계룡으로 갈 때 세계최강대국이 된다 하셨다.

풍수지리학적으로도 타당하다 하겠다.

우선 당장은 서울이 문제다.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청와대가 남향(南向)이니 주산이 왼쪽으로 돌아앉아 있고 가운데 골이 패여있어 뒷사람이 앞사람을 배신하고 당파싸움이 심하여 국론이 분열되었다.

인왕산(仁王山)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東向)으로 경복궁이 자리 잡았다면 임진왜란이 한달 내에 승전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모두 국운이 쇠한탓에 그렇게 됐다고 한다.

청와대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을 하는 날 남북통일과 만주땅 옛 고토를 되찾을 것이다.

봉우선생의 풍수사상,  감사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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