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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과 꿈에 대하여
시작
꿈에 대한 주제는 놀랍고 흥분되는 주제이며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고 상위 마나스의 지각과 지식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역사를 통해서 꿈과 꿈을 꾸는 과정에 대해서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며 신지학은 이런 상태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한 이해를 통해서 인간의 진화 과정들과 다른 기능들에 대해 많은 통찰력을 제공해 줌으로써 많은 도움을 얻는다고 한다.
깨어나고, 잠자고 그리고 꿈꾸는 것은 매일 밤 경험하는 주기로 진화의 전체 주기를 복사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꿈이 무엇이고 누가 꿈을 꾸는지 그리고 꿈꾸는 동안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삶의 많은 신비들을 푸는 열쇠와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갖게 될 것이다.
성경의 욥기에서 인용하면, “꿈들과 비전 속에서 인간은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H.P.B. 의사록 78 페이지에서 말하길, “’꿈꾸기’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투시력을 개발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롭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 밤 우리들 모두가 상위 성질인 영원한 신성한 본성이 있는 세계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렴풋이 알게 될 수도 있다.
꿈에 대해서 과학에서 말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해 준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어떤 꿈들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면 깨어 있는 동안 회복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회고적인 꿈. 꿈 속에서 본 사건들, 사람들, 장면들 등이 깨어있을 때 마주친 것과 사소한 부분까지 동일한 선견지명의 꿈. 수학적인 문제들, 추상적인 문제들 혹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깨어 있는 동안에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으나 꿈 속에서 해결 책이 제시된 그런 꿈. 꿈 꾼 사람 혹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꿈으로 깨어 났을 때 사소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그런 인상을 남기는 꿈. 그리고 꿈 속에서 꾸는 꿈들, 반복되는 꿈들 그리고 꿈 꾸는 사람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꾸는 꿈들 및 비유적으로 불길한 꿈 등등 많이 있다. 꿈이라는 주제에 대한 고대인들의 광대한 지혜 없이는 우리들은 도움과 영감이라는 매우 가치 있는 근원과 단절되어 있다. “진정한 자아”인 “우리”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고 신지학은 우리들에게 환기시킨다. 그러면 누가 잠자는 것일까?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4시간 동안 깨어 있고 잠자는 두 가지 상태를 누구나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지학은 한걸음 더 나가 잠자는 시간이 스바푸나(Swapna) 그리고 수슙티(Sushupti) 혹은 꿈 꾸는 상태와 꿈이 없는 수면 상태라고 부르는 두 가지 상태로 나누어진다고 가르친다. 수슙티를 번역한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졋지 씨는 말한다. 그가 [인간의 세 가지 의식 상태]에서 말하길;
“꿈이 없는 수면 상태”로 번역된 것은 부정확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꿈이 없지만 또한 심지어 범죄자들도 자신의 높은 본성을 통해서 영적인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상태이며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대한 영적인 저수지로 그것에 의해서 사악한 삶으로 향하는 것을 제지하는 엄청난 힘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그 영향은 계속해서 유익하게 작용한다.
이 글에서 말한 세 번째 상태는 자그라타(Jagrata)로 깨어 있는 상태이며 그가 말하길, “깨어 있는 상태인 자그라타에서 꼭 재생해야 한다. 바로 그 상태에서 내면의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길, “자그라타는 스바푸나에 영향을 주어서 꿈과 암시들을 만들어 내고, 상위 상태로부터 내려 오는 가르침들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혹은 꿈 속 생활에서 겪은 정신적 경험들의 뒤틀림을 줄여주는 침착함과 집중을 통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거나 한다. 그러면 스바푸나는 꿈 속에 있었던 좋은 암시나 혹은 나쁜 암시를 통해서 깨어 있는 상태인 자그라타에 영향을 준다.”
이 글은 잠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을 말한 글이기 때문이 더 많이 인용하겠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이 잠들어서 꿈을 꾸고 그리고 나서 수슙티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외적인 감각들이 무뎌지면서 두뇌는 이미지들, 즉 깨어 있을 때의 생각들과 행위들을 재생한 이미지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다가 이내 곧 잠이 든다. 방금 떠난 것과 실제적인 경험의 세계로 들어 갔으며, 단지 다른 종류의 경험일 뿐이다. 깨어 있는 상태와 수슙티 상태가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까지 이 영역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동요나 방해도 두뇌 활동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자신의 본성이 허락하는 정도까지 “신들의 향연”에 참여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깨어 있는 상태로 되돌아와야 하며 처음 왔던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왜냐하면 수슙티 상태는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그 밑에 있는 스바푸나도 마찬가지이므로 수슙티에서 자그라타 상태로 바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 꿈에 대한 어떤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다양하고 혼란한 생각으로 초점이 없는 보통 사람은 자신의 스바푸나 영역 혹은 상태를 혼란스러운 상태로 만들어서 그 의식 상태를 지나갈 때 수슙티의 유용하고 고양된 경험들이 섞이고 뒤틀리게 되어 깨어나면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으며 갖는 것이 의무인 어떤 이로움도 없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 깨어있을 때 가진 편견이나 그 반대의 생각들과 행위들의 지속적인 영향을 보게 된다.
※ 기본 자료실에 [인간의 세 가지 의식상태에 대하여]라는 글 참고.
그러면 꿈은 무엇인가
꿈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개개인마다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에 꿈이란 무엇인지 전체적인 정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꿈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꿈에 대한 어떤 것들을 언급해야겠다.
꿈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은 꿈이란 육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것이 무엇이든 경험하고 본 것을 깨어나면서 두뇌가 기억하는 것이다. 두뇌가 기억할 것, 두뇌를 통해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등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중에 하나가 개성인 비물질적인 선을 따라서 개발되는 것이다. 다른 요인은 잠자리 들기 바로 직전의 마음의 상태이다. 세 번째 인자는 윤회하는 자아의 영적인 발전 정도이다.
[신지학의 대양]에서 졋지 씨는 “한 사람의 카르마가 또한 꿈의 의미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왕은 자신의 왕국과 관련된 꿈을 꿀 것이고, 시민은 중요하지 않은 일시적인 것과 관련된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호두 껍질 속의 우주]라는 글에서 H.P.B.는 내면의 인간이 영적인 선을 따라서 발달되는 것이 명확하고 의미 있는 꿈들을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녀가 말하길;
외부의 두뇌에 순전히 영적인 혹은 비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각을 외부 두뇌에 어느 정도는 생생하게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자아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준 영적인 두뇌가 지각하는 장면들의 인상과 듣고 느끼는 말들을 잠자고 있는 외부 인간의 두뇌로 전달하는 것은 내적의 자아의 정신적인 감정들의 민감함과 그 기능들의 영적인 정도에 달려 있다. 그 기능들의 영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아가 잠자고 있는 대뇌 반구를 깨워서 감각 중추와 소뇌를 활동시켜서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충분하게 휴식을 하면서 활동하지 않는 대뇌 반구에 생생한 그림으로 인상을 주는 것이 더욱 더 쉬울 것이다.
그래서 어떤 꿈은 전혀 쓸모 없고 무의미한 사건들과 그림들의 쓰레기일 수도 있고 혹은 종종 이해할 수 없지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아가 있는 세계에서 자아의 활동을 섬광처럼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꿈의 선명도와 성격은 두 가지 방향에서 오는 힘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나는 상위 마나스인 자아의 발전과 영적인 의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성이 “혼의 언어”를 읽고 본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 정도이다.
[블라바츠키 롯지 회의록]에서 H.P.B.는 한 장을 꿈에 대해서 할애했다. 그녀가 말하길,
만약 육체와는 독립적인,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 속에 불멸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꿈의 성질과 기능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면 중에는 독자적인 사고력이 마비된, 생기를 가진 형체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주제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속에 있는 영구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영구 자아를 우리들이 고급아(Higher Self)라고 말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일반적으로 헛된 공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은 내면의 인간의 삶과 경험들에서 찢어진 페이지이며, 깨어나는 순간에 우리들의 육체적 기억에 의해서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왜곡된 희미한 기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기억은 내면의 인간이 완전하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 내면의 인간이 행했던 행동들과 목격한 사실들이나 생각들의 일부분의 인상들을 기계적으로 잡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아는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마다, 즉 육체 인간이 잠을 자는 동안에 육체라는 감옥 안에서 별개의 삶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의 종류
많은 종류의 꿈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H,P.B.는 [블라바츠키 롯지 회의록]에서 대략 일곱 가지 부류로 나눈다. 그 리스트를 보면,
1. 예언적인 꿈들. 상위 자아(Higher Self)에 의해서 기억에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간단 명료하다. 목소리가 들리던가 혹은 일어날 사건을 보는 것.
2. 우화적인 꿈들 혹은 두뇌에 의해서 붙잡혀서 공상에 의해서 왜곡된 실재를 희미하게 흘깃 본 것. 이런 꿈들은 일반적으로 전체가 아니라 반 정도만 진실한 꿈이다.
3. 초인들이 보낸 꿈들 혹은 선하건 나쁜 꿈으로 최면술사가 보낸 꿈 혹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매우 강력한 정신이 만들어낸 생각들에 의한 꿈.
4. 회고적인 꿈. 과거 생에 속하는 사건들에 대한 꿈들.
5. 인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고의 꿈들.
6. 혼란스러운 꿈들로 원인들은 앞에서 말했다.
7. 소화나 정신적인 문제 혹은 그런 외적인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혼돈스러운 그림들과 단순한 공상들에 대한 꿈들.
수 년간 [신지학 메거진]의 “전망대” 섹션은 다양한 출판물에 인쇄된 예언적인 꿈들의 예를 모았다. 물론 아브라함 링컨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꿈도 소개했다. 또한 1964년 5월24일에 예언들과 꿈들에 대해서 말한 루이스 멈포드의 흥미 있는 글을 소개한다.
무의식에 의한 예언적인 계시들 중에 1913년 10월에 있었던 압도적인 계시였다. 거대한 노란 파도가 익사한 육체들과 문명의 부스러기들로 가득 찬 채, 전 유럽을 휩쓸고 가는 재앙의 계시. 머지 않아서 그 사건에 의해서 입증된 틀림없는 이 꿈은 블라바츠키 여사가 훨씬 이전에 꾼 전체 도시가 핵폭발로 파괴되는 생생한 계시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전망대”는 마크 트웨인이 꾼 꿈에 대해서 말한다. 미시시피에서 폭발한 보트에 있던 자신의 형의 죽음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사건은 그가 꿈에서 본 정확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많은 꿈들과 사건들을 열거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에서 언급한 예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세이스(Sayce) 교수로 꿈 속에서 바빌로니아 승려의 출현으로 바빌로니안 원통을 해석할 수 있었다. 존 보가스티스 부인은 군부에서 남동생이 죽었다고 분류했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는 꿈을 꾸었다. 꿈에 확신을 가지고 경찰에 수색을 요청하여 그의 위치를 찾았다. 많은 예의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꿈의 예들이 있으며 나중에 그 세부사항까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흥미로운 것들 중에 어떤 것은 경고를 주는 꿈들이다. 어떤 경우는 당사자에게 직접 오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 경고의 꿈을 쉽게 받아서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는 경우도 있었다.
1941년에 [코로넷(Coronet)]은 많은 예의 경고의 꿈들을 발간했다. 그 중의 한 예가 1812년 5월3일에 당시 국무총리인 스펜서 퍼시발이 하원 휴게실에서 총격을 당하는 꿈을 꾼 존 윌리엄이라는 영국인의 예이다. 세 번이나 그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가 그 꿈을 비웃어서 영국으로 갈 수 없었고 단순히 기록만 해두었다. 5월11일 그 사건이 꿈에서 본대로 일어났다.
위험한 항해라는 친숙한 경고의 꿈이 소이어(Sawyer)씨에게 왔다. 그는 1909년 7월 더반에서 출항하려고 했다. 그는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와 자신 사이에 긴 칼을 한 손에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피로 물들여진 넝마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는 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었기 때문이다. 그 배는 아무 흔적도 없이 바다에서 사라졌다.
1951년 5월26일 토요일 저녁 포스트에서 빅터 고더드(Goddard) 경의 경고의 꿈 이야기를 말한다. 격렬한 비행기 추락 사고에 고더드 경이 있었다는 것을 “본” 낯선 사람에게서 경고의 꿈이 왔다.
또 다른 경고의 꿈의 예는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 박사가 경험한 경우로 그 분에게 인상을 줄 수 없었던 꿈이다. 그는 젊어서 이탈리아 파듀아에 있는 대학교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가 도버 해협에 도착했을 때 그가 도보 해협을 건너기 위해서 정기선에 타는 것을 총독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유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다음날 그 정기선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 정기선이 사라졌다는 뉴스가 왔다. 그러고 나서 그 총독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엄청난 힘이 그 젊은이를 금지하라는 암시를 주는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그 젊은이의 얼굴이 보였고 배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비가 나타났을 때 그는 꿈 속에서 본 그 얼굴을 알아 보았다.
수 년에 걸쳐서 사상가들과 학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발명가들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기대치 않게 꿈 속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들이 수 주간 혹은 많은 날 동안 노력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을 때 해결할 수 없었던 어려운 문제를 말끔하게 하는 혹은 예술 작품의 동기가 되는 해결책을 꿈 속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 경우들이 종종 신문에 나오기도 한다.
그런 경우 중에 하나가 덴마크의 원자 과학자인 닐 보아(Niels Bohr)의 경우이다. 그는 태양과 주위를 도는 행성들 그리고 그 행성들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대한 분명한 꿈을 꾸었으며, 깨어나자 마자 원자 모델을 만들 수 있었고 후에 그것은 원자 분야에서 모든 연구와 발명의 토대가 되었다.
독일의 화학자인 프레드릭 케쿨레(Fredrich Kekule)도 꿈을 통해서 벤젠 분자의 구성 요소가 고리구조라는 이론을 발견했으며 많은 복합물들에 적용되었던 발견이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루이스 아가시(Louis Agassiz)는 자신의 저서인 <화석어류 Recherches sur les poissons fossils>에서 화석판에 보존되어 있는 화석어류의 희미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2주간 노력했지만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분제를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전체 화석을 본 강한 인상을 가지고 깨어났다. 그 후 두 번의 꿈을 더 꾼 후에 그 문제의 정확한 해결책에 다다랐다.
예술의 분야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꿈이나 비전 속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시인들도 그들 시의 일부분의 영감을 “보았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니벨룽의 반지 중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의 서곡 전체를 꿈 속에서 들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수 많은 환생을 경험하였고 보편적인 토대 같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인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진정한 자아가 있다. 이 능력은 우리들 것이며, 만약 하위 정신의 편견과 개성적인 욕망을 통해서 그것을 가져오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내면의 인식 능력에 접근할 수 없을까?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이런 내면의 인식 능력에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양심, 영감, “밝은 생각들”은 모두 이 내면의 존재에게서 온다. 이 존재는 모든 생명의 하나에 대한 지식과 아주 다른 높은 곳에서 온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오겠는가? 그것들은 분명이 육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며 두뇌나 혹은 순전히 행운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꿈을 인식하듯이, 이런 번득이는 통찰력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마음 속에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매일 밤 듣고 목격하는 그림들과 생각들을 표현할 수 없는 사고 방식들을 부추겨왔다. [자아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글에서 졋지 씨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점을 말했다. 그가 말하길,
육체의 구속과 신체 기관들을 통해서 힘들게 살고 일을 하던 자아는 자유로워져서 자신만의 세계에서의 경험들을 즐기게 된다.
그 세계에서 생각의 과정들을 사용하여 육체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적합한 생각들을 인식한다. 자아가 보고 듣는(이런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것은 우리가 있는 세계와는 반대로 보인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모르는 언어이다. 육체로 다시 들어왔을 때 하위 개성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장해가 되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그 의미의 번쩍임을 주워 듣는다. 마치 영어 몇 단어를 아는 사람이 외국 마을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과 단어들을 들으면서 그 중에 아는 몇 단어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아의 언어를 배워서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밤마다 자아가 들어가는 그 세계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두뇌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언어이고 두뇌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항상 번역을 해야 한다. 만약 번역이 틀리면 자아의 경험을 하위 인간에게 완전하게 전달 되지 않을 것이다.
혼의 언어는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들을 통해서 생각들과 경험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언어에서는 소리가 색깔이나 그림으로 표현될 것이고 냄새가 진동하는 선으로 표시될 수도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그림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빛이나 그림자 혹은 구역질 나는 냄새나 기분 좋은 향기로 묘사될 수도 있다. 광대한 광물계가 그 세계 및 각도, 색깔뿐만 아니라 진동들과 빛들을 보여줄 것이다.
혼의 언어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진화의 사다리를 거슬러 올라가서 자아가 있는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개념들과 사건들이 전체에서 보여지며, 의미와 전체에 대한 관계가 상징, 색깔, 조화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체들로 보여진다. 혼이 개념들을 직접적으로 관찰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개념들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형체들이 아닌 개념들에 집중함으로써 혼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내면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일상 생활의 생각들과 활동들 속으로 가져오면서 생명의 숨겨진 면에 있는 언어를 알게 된다고 신지학에서는 지적한다. 우리는 점점 더 의미와 의도, 관계들과 상응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표면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사물들이나 사건들의 본질적인 성질들을 보거나 느끼기 시작한다. 혼은 사물의 근본적인 성질, 본질, 실재를 다룬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바탕을 근본적인 생각들에 둔다면 혼의 언어가 점점 더 자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꾼 꿈을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일반적으로 우리만이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자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은 개성이 익숙한 용어들로 변환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각의 일부분인 그림들과 개념들로 변형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꿈 속에서 메리(Mary)나 예수(Christ)를 볼 것이다. 반면에 힌두인들은 자신의 신을 볼 것이다. 우리가 자아의 언어를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들의 꿈의 의미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사용해야 한다.
아마도 첫째 조건은 인간의 이중성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즉 내면의 영원한 자아와 죽어서 사라진 개성에 대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육체가 잠을 자는 동안 우리가 있는 세계와는 매우 다른 세계와 다른 의식 상태 속에서 자아가 활동하고 생각하고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자아는 그 세계에서 우리들에게 진리에 대하여 인상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보편적인 세계의 “성질”에 맞추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깨어났을 때, 이런 경험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데 일상 생활에서 생각과 용어 들에서 엄청난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들을 최대한 이롭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위 자아의 영향들이 우리들에게 스며들도록 만드는 것이며 혼의 목적을 가장 잘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방식은 틀림없이 미덕과 지식으로 이끌게 된다. 왜냐하면 악과 욕정들은 자아가 우리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인식하는 데 우리들의 시야를 영원히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미덕을 되풀이하여 가르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만약 악한 자가 자아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며 덕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만 성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깊은 수면 상태에서 오는 이점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르침에서 제시된 실습 방법들 중에 하나는 낮 동안 하는 모든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해서 그것을 목표물로 향하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곳에 고정시키면 꿈 상태 속으로 넘어가는 질서와 목적의 패턴을 만들어 주고 그래서 깊은 꿈 상태 속에서 오는 생각들과 그림들이 깨어날 때 왜곡되거나 뒤틀리지 않은 채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바로 전에 어떤 고귀한 원리이나 목적에 집중하는 것도 꿈의 세계에 있는 욕망의 성질에 의해서 놓여진 위험들을 지나서 오는 길을 곧고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생각들을 회상해보고 그것들을 정신 속에서 하나씩 지나가면서 회상하면서 자연과 이 세계에 조화를 이루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주고 혼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들은 의식적으로 옳게 고치거나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가장 좋은 생각들 중에 하나에 대해서 명상한다면 수슙티 상태로 빠르게 지나갈 것이고 한층 더 영감과 활기를 가지고 깨어나게 될 것이다.
졋지 씨는 우리가 매일 밤 우리가 이 높은 상태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만약 이것을 믿고 상위 자아의 실재를 인정한다면 소위 명상의 신비스러운 힘으로부터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상위 자아에게 도움을 진심으로 요청하는 헌신적인 사람은 수슙티 다음에 오는 꿈의 상태 속에서 요구하는 도움을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최고의 상태에서 받은 꿈의 인상들을 더욱더 명확하게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물어본 질문과 원하는 인상들은 고귀하고 이타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위 자아는 물질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지학에 대해 연구하는 것, 내면의 인간의 구조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 정신과 자연의 이중성, 과거 모든 기억들과 행동들을 간직하고 있는 아스트랄 빛에 대한 연구, 동양 심리학 및 바가바드 기타를 연구하는 등등, 우리들이 하는 모든 연구는 꿈을 더 꾸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서 오는 꿈들로부터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수면과 꿈이 얼마나 중요한가
“잠자는 자를 깨우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고치기 어려우리라.” 이것은 고대 우파니샤드에 있는 교훈으로 연구에 정신의 이중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많은 꿈의 연구자들이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 반 세기 동안 꿈과 수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으며 새롭게 찾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갱신하기 때문에 아직도 나올 것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그 많은 연구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수면 부족 시에 심각한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장시간 동안 강제적으로 깨어 있으면 신경 기능이 분명히 정지하는 것을 보여 주고 짜증이 증가하고 기억 상실과 환영이나 환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깊이 충분히 잠을 자면 그런 징후들이 다 사라졌다.
[동양으로부터 온 메아리]에서 졋지 씨는 육체의 피곤에 대해서 흥미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수면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설명은 육체가 피곤해지고 활기를 잃어서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태는 그 반대라고 신지학은 말한다. 왜냐하면 활기를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육체는 깨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의 파도들이 육체 속으로 격렬하게 몰려들어 온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 이상 그 생명의 파도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고 우리를 압도하여 잠을 자게 된다. 잠을 자는 동안 생명의 파도들은 육체의 분자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균형이 완전할 때 깨어 나서 생명과 다시 싸움을 하게 된다. 이런 주기적인 조정이 없다면 생명의 흐름이 우리를 파괴해 버릴 것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생명의 흐름들은 더 보편적인 상태 속에서 머무르려는 자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산 채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그런 성향에 저항해서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 이것이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저항이다. 생명력을 상실해서가 아니다. 생명은 모든 곳에 있으며 만물 속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으며 자유 상태로 돌려 놓게 된다.
다른 실험을 보면 꿈을 꾸기 시작할 때 깨워서 일정 시간 동안 꿈을 꾸지 못하게 할 때 근심하고 안절부절 하게 되고 종종 실험을 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본다. 아마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배웠다. 개성적인 인간이 진정한 존재와 주기적으로 접촉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혹은 어떤 일이 일러나는지 의식을 하건 못하건 그 신성한 빛의 광선에서 혜택을 매일 밤 받는 것으로 우리를 믿고 계속 시도할 이유가 있다고 믿을 만하지 않을까. 만약 이런 것이 없다면 동물 인간이 동물 인간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이유는 없다.
루돌프 슈타이너
여기서는 영과 혼을 고차적으로 기르기 위한 약간의 실천적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특별한 것은 없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어떤 특별한 규칙 없이 어떤 식으로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면서, 그것으로 인해 영학의 길을 한층 심화시켜 주는 관점이다.
첫째, 특별히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초조감은 우리의 내면에 간직된 고차의 능력을 마비시키고 때로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다. 오늘이나 내일까지 초감각적 세계를 향한 무한한 전망이 열리기를, 하고 바라지 말라. 아무리 하찮은 결실이라 해도 감사해야 할 것이며…만족과 평정심이 우리의 혼을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사고 내용에 거듭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하나로 할 때, 어느 정도의 성공이 기대된다.
“혼과 영의 육성을 위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겠다. 고차원의 존재들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고 내용이 자신의 성격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깊이 마음 속에 작용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올바른 길에 들어서 있다. 그때는 이미 외관상으로 이러한 성격적 특징이 나타난다. 눈길은 안온하고, 몸놀림에 확고함이 더해지며, 결단력이 강해진다. 신경질적인 요소가 없어진다. 이때, 일견 무관해 보이는 사소한 규칙 하나를 지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를 모욕했다고 하자. 수행 이전에는 모욕한 상대에게 적의를 느끼고 분노가 타올랐다. 그러나 이제 수행자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내용이 나타난다.…이런 모욕으로 나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그는 그 모욕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분노로서가 아니라 평정한 마음으로.…물론 모든 모욕을 감수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다른 사람이 모욕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 대신에 그것을 나무랄 수 있는 것처럼…조용히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에 가해진 모욕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면 된다. 수행은…외부에서 보일 정도로 커다란 일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면서도 섬세하게 영위하는 사고와 감정의 과정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차적 인식의 고귀한 내용에 대하여…인내는 공감적으로, 초조감은 반감적으로 작용한다. 존재의 고차적 영역에서는 성급한 태도로는 어떤 것도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이기적인 요구와 욕망을 침묵시켜야 한다. 요구와 욕망은 고차적 인식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의 수치스러운 특성이다. 비록 고차의 인식에 어떤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수행의 과정에서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원하는 자는 결코 구할 수 없다. 이것은, 수행자가 스스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성실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약점, 결점, 무능함을 성실한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어떤 약점을 변호하려는 그 순간…당신은 자신을 고양시켜가는 그 길 위에 하나의 걸림돌을 놓아두는 셈이다.
이러한 걸림돌은 자기 인식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을 넘어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란…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일이다. 모든 가능성은 인간의 혼 속에 잠들어 있다. 단지 그것을 각성시키면 된다. 자신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평정한 오성과 이성의 태도로 해명할 수 있을 때…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가지는 습관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고차적 인식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 길을 걷는 자는 모든 종류의 호기심을 던져버려야 한다. 개인적인 지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알려고 하는 욕구를 버려라.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키고 인류의 진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라. 그렇다고 해서…앎에 대한 기쁨이 마비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상의 실현에 합당한 모든 것에 경건한 마음으로 귀기울이고…그러한 마음과 만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완성시키려면…어떠한 방식으로 바람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배워야 한다. 더 바랄 것 없이 가득 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달성해야만 할 일들은 모두 바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바람의 배후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면…그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 특별한 다음과 같은 올바른 인식에서 생겨난다.
“무엇이 올바른지를 인식할 때까지…어떤 바람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하나의 철학이다. 현자는 우선 세상사 하나하나의 법칙을 배운다. 그 위에 설 때만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누구라도 태어나기 이전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영학 연구를 통하여 영원한 존재의 법칙을, 더욱이 그 법칙의 이를 데 없이 미묘하고 내밀한 성격에 이르기까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바람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성과도 거둘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인식을 획득하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자신의 고양되고 정화된 바람을 통하여 그것을 달성할 것이다.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말이 있다.
“나의 전생을 알고 싶다. 그래서 영학을 배운다.”
그런 의도를 벗어던지라. 아무 의도 없이 배우는 자세를 가지라. 아무런 의도 없이…배움에 대한 기쁨, 그 배움의 내용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귀의하는 마음을 가지라. 그런 자세를 가질 때…어떤 진실한 바람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나는…내 혼의 주위에 벽을 쌓아 영적인 눈을 길러줄 힘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화나게 한다고 하자. 그는 아스트랄적인 흐름을 내 혼의 세계 속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참 화를 내고 있는 나에게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화를 내고 있지 않다고 해서 금방, 이 흔적(아스트랄적)인 흐름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보기 위해서는 혼의 눈이 열려 있어야 한다.
혼의 눈은 그 본성에 따라…모든 사람에 내재해 있다. 늘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이 눈은 활동하지 않는다. 몇 번 화를 억눌렀다고 해서, 그 눈은 뜨이지 않는다. 늘 분노를 극복하면서 참을성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 혼의 눈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분노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오랜 노력 끝에 이윽고 혼의 특성을 조금은 극복하게 되었지만…여전히 견령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데에 초조감을 느끼고 회의에 빠져든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약간의 특성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다른 것들은 제멋대로 창궐하게 내버려두었다. 견령능력은…그것을 잠든 상태로 유지하려는 모든 특성이 극복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영시靈視, 영청靈聽의 징후는 그 이전에도 인지되기는 하지만…그것은 아직 모든 착각의 가능성에도 열려 있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육성하지 않으면 금방 메말라버릴 섬세한 혼의 어린 싹에 지나지 않는다.
분노, 짜증, 공포, 미신,독단,허영심,공명심,호기심,요설…나아가 신분이나 성이나 인종과 같은 외적인 특징으로 인간을 구별하는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들 시대는 이와 같은 혼의 특성을 극복하는 것이 인식능력의 향상과 관련되어 잇다는 것을 믿으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은 지성의 폭을 넓히거나 부자연스러운 수행을 하기보다도…이 같은 특성을 극복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비로소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현상에 겁을 먹는 것은 그 현상을 통찰할 수 없게 하고…어떤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편견은 그 사람의 혼을 볼 수 없게 한다. 이 길을 걷는 자는 특히 이러한 일상체험의 의미를 섬세하면서도 예민한 태도로 파악하여…그것을 내면 속에서 발전시켜야 한다.
철저하게 사고하지 않은 일을 입 밖에 내는 것 또한…수행의 길에 하나의 걸림돌을 놓는 행위이다. 이 점 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내가 거기에 대해 대답할 때를 생각해 보자. 이때 나는 그에 대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서보다 그의 의견이나 감정, 심지어 편견에도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 길을 걷는 자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태도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암시되어 있다.
이 길을 걷는 자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그것이 상대에게 어던 의미를 가지는가를 통찰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을 억제하라는 말은 아니다. 결코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얻은 이해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야 한다. 이 때, 그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상념이 일어나고, 그 상념이 자신의 성격의 일부분으로 녹아 있다면…그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 상념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내가 타인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내가 거기에 무엇을 보태야 그 사람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념과 사고를 통하여…이 길을 걷는 자의 성격과 행위에는 모든 수행의 주요한 지표가 되는 온화함이 나타난다. 엄격한 태도는 영안을 각성시키는 혼적 구성체를 그의 주위로부터 쫓아내버린다. 온화함은 그를 위하여 장애를 제거해주고 그의 영적 기관을 외부로 향해 열리게 해준다.
온화한 태도는…혼의 내부에 또 하나의 특징을 나타나게 할 것이다. 자신의 혼이 말하는 것을 완전히 침묵시키고…주위의 혼이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미묘한 움직임에만 조용히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이다. 이러한 자세와 능력이 몸에 밴 사람은…다른 혼의 운동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마치 식물이 태양의 힘으로 자라듯이 자신의 혼을 분화 발전시킨다. 진실한 의미의 인내로, 자신의 미덕으로 갖추게 된 온화함과 과묵함은…혼을 위해서는 혼계를, 영을 위해서는 영계를 열어준다.
“평정과 고독 속에 머물라. 수행 이전의 감각이 그대에게 부여한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을 정지시키라. 습관화된 사고행위를 일체 정지하라. 내적으로 완벽하게 정숙하고 과묵하라. 그리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 …그러면 고차의 세계가 그대에게 혼의 눈과 영의 귀를 생성시킬 것이다. 곧바로 혼과 영의 세계를 견문하리라는 등의 기대는 하지 마라. 그대의 실천만이 고차적 감각을 육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혼으로 보고 영으로 듣는 능력은 그대가 그것을 손에 넣었을 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평정과 고독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대의 일상에 전념하라. ‘적절한 성숙을 이룩한다면, 언젠가는 그러한 높이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상념을…수행 기간 중에 깊이 마음 속에 새겨두라. 자의적으로 고차의 힘을 끌어오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처음 이 길에 들어선 모든 사람이 스승으로부터 받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는 자만이 진보한다. 이 가르침을 무시하면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일 뿐이다. 이 가르침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인내와 지속력이 없는 자에게만 어렵게 생각될 것이다. 제멋대로 길 속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정말로 피하려면 누구든지 피할 수 있는 것…그것이 수행의 장애물이다. 그 외의 장애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몇 번이고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수행의 어려움에 관해 많은 사람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작은 길의 시작을 통과하는 쪽, 수행 없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보다 한층 쉬운 것이다.
이러한 길들의 진정한 모습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단편적인 것들은 우리의 건강과 행복, 혼의 평화를 방해할 뿐이다. 그 진정한 본성과 유래조차 알 수 없는 암흑의 힘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버릴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과 관계하지 않아야 한다.
각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수행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환경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은…자신의 혼적 기관의 형성이 이러한 환경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혼적 기관의 내적 법칙의 작용이 충분히 성숙되어…이러한 영향들이 그렇게 유해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환경이 나쁘다고 해서 백합이 엉겅퀴로 변할 수 없는 것처럼…영안이 근대 도시의 이기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본래의 목적에 반하는 무엇이 되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영학자는 때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에 의해, 올바른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상당한 신비수행을 쌓아,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릴 바로 그 순간에 도달해 있다고 하자. 그러한 혼의 상태에서…거울처럼 맑은 또는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를 항해할 때, 갑자기 그의 혼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지기도 한다. 그는 견능력을 획득한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경우는…격렬한 운명의 타격이 그의 영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어준다. 만일 그가 수행자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마비시키고 말았을 운명의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깨달음의 계기로 작용한다.
어떤 수행자는 몇 년이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꾸준히 길을 걸어왔다. 조용히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영의 빛에 감싸여 주위의 벽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을 체험한다. 사방이 투명해지면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그리고 그의 영적인 귀에는 현묘한 음이 울려퍼진다.
출처: http://psychicenergy.tistory.com/entry/영과-혼을-고차적으로-기르기-위한-실천적-관점 [Psychic Energy -- 명상, 최면, 주파수 동조(同調)]
멘탈계와 아카샤 원리, 멘탈 메트릭스, 생각의 본질
1)아카샤 원리는 멘탈계에서 어떻게 작용합니까?
멘탈계에서 아카샤 원리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원인적 세계(causal world)로서 작용합니다. 가장 높은 것이며,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힘입니다.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서, 모든 것을 창조했으며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인간의 경우 멘탈계에서 아카샤 원리는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난 통치 원리로 나타납니다. 물론 인간의 멘탈 메트릭스나 의식 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직관‧ 영감‧ 신앙‧ 자기 보존 본능 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양심을 지배하는 신성 원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카샤 원리는 멘탈계에서 생각‧ 영상‧ 심상화를 통해 우리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도 아카샤 원리입니다.
멘탈 메트릭스는 영적인 아카샤 원리 중에서 가장 미세한 물질(the finest substance)입니다. 멘탈체를 아스트랄체와 연결해 주며…모든 생각과 구체화된 영상, 인상 등을 영으로서의 의식에 전달합니다. 멘탈 안에서 아카샤 원리는 전기적 사고‧ 자기적 사고‧ 중립적인 중성적 사고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통해 우리는 아카샤 원리의 원인적 세계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이데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데아들이 의식과 무의식 안의 생각들을 통해 아카샤 원리를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즉 이 이데아들의 수용‧ 처리‧ 인지‧ 거부 등을 통해 아카샤 원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2)멘탈계에서 운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원인(cause)에 속하는 생각‧ 영상‧ 느낌 등은 모두 멘탈계의 원인적 세계 안에 신중하고 정확하게 스스로를 기록합니다. 그들의 내적 가치에 따라, 그리고 법칙에 따라, 그들 각자에 배속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결과(effect)를 형성하게 됩니다. 물론 이 결과는 각 사람의 특성(속성)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반추(reflection), 즉 결과(effect)는 그 사람에게 되돌려집니다. 긍정적인 경우에는 고귀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부정적인 경우에는 그를 공격하여 잘못과 원인을 바로잡게 할 것입니다.
3)영적으로 성숙과 고도의 발전은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성숙한 영이란…인식(recognition)과 확신(conviction)의 단계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이제 그는 신성 원리의 일부가 되었으며, 지고의 신성 원리와 합일하기 위해 의미와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지요. 고도로 발전한 영이란…이미 신성한 원리와 합일한 상태에서, 최고의 고귀함과 완벽에 이르는 행로 위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4)멘탈 메트릭스와 아스트랄 물질은 영의 감각에 어떤 식으로 작용합니까?
멘탈 및 아스트랄 물질은 영의 감각에 느낌(impression), 지각(perception)의 형태로 작용합니다. 멘탈 매트릭스를 통해, 모든 계로부터 영의 의식으로 전달되는 것이지요. 이때 멘탈 메트릭스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작용하며, 아스트랄계에서는 공간의 범위 안에서 작용합니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에 있는 4극 자석의 원소 기능을 통해, 영은 위의 느낌들을 처리합니다.
5)멘탈 메트릭스는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합니까?
멘탈 메트릭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4극 자석은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미세한 영의 아카샤 질료로서, 영의 기능을 좌우합니다. 멘탈 메트릭스는 사람 몸 속에 있는 가장 미세한 영적 아카샤 질료로서 만들어졌습니다.
멘탈 메트릭스 즉 에테르 원리는 모든 계(planes)의 생각과 영상과 느낌을 영의 의식으로 전달하는 일을 합니다. 이때 육체적 감각과 아스트랄 감각, 그리고 영적인 감각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영은 육체와 아스트랄체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느낌을 처리하는 것이지요.
6)환상을 강화시키는 방법들
환상(fantasy)은 어떤 자극이나 흥분을 통해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 음악‧ 자연‧ 노래‧ 사랑‧ 방향제나 향 등을 통해 생각이나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이지요.
7)멘탈 메트릭스는 어떤 속성을 갖고 있습니까?
멘탈 메트릭스는 4극 자석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아스트랄체 안에서 영의 활동을 지배합니다. 또한 멘탈 메트릭스는 전자기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며, 생각이나 심상화를 영의 의식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멘탈체와 아스트랄체를 연결하는 사실은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8)멘탈 매트릭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4극 자석인 멘탈 메트릭스는 불멸하는 영의 모든 속성과 힘이 집중된 중심부입니다. 아스트랄체 즉 자신의 외피 안에서 이들 속성과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또한 불멸의 영이 육체와 아스트랄체라는 껍데기를 벗어난 다음, 즉 물질적인 지상의 삶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지니고 있던 속성과 능력을 그대로 유지시켜 줍니다. 그대로 멘탈계까지 갖고 가게 해주는 것이지요.
9)멘탈 오라는 무엇입니까?
멘탈 오라는 영이 방사하는 속성으로, 색깔로 나타납니다. 4극 자석, 정확히 말하자면 멘탈 메트릭스가 방출하는 것으로, 양극과 음극이 있습니다.
10)이데아와 생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저절로 이데아를 알게 되기도 하고 수행을 통해 얻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 특정 이데아가 포함된 생각을 기반으로 자신의 발전 및 성숙 단계에 맞게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thought)은 이데아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멘탈 매트릭스가 이것을 영의 의식까지 전달하는 것입니다. 반면 이데아는 원인적 세계에서 기원하는 것입니다.
11)영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영은 멘탈 메트릭스를 통해 모든 생각을 수신합니다. 그러므로 멘탈 메트릭스는 모든 생각과 개념(심상화) 등을 전달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12)멘탈체가 생각을 전송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멘탈체, 즉 영이 생각을 송신하면, 텔레파시가 발생됩니다. 멘탈게에서는 아카샤 원리의 도움을 받아 시간이나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멘탈체가 전송한 생각은 아스트랄계와 물질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러한 생각은 매우 섬세하게 발달된 물리적 투청력(clairaudience,영청력)을 통해 수신됩니다. 하나의 인상으로 받아들인 생각을 아스트랄 투청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생각은 아스트랄 매트릭스라는 통로를 거쳐 영의 의식까지 전달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생각을 자각하게 되고 처리하는 것입니다.
14)응축이란 무엇입니까?
실체가 있는 물체를 심상화하여 그것에 의지‧ 지성‧ 감성‧ 신앙 등의 힘을 활성화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다음에 대립이나 저항을 이용해 그 힘을 활성화하고 증폭시켜 봅시다. 그러면 이때 심상화된 물체는 응축됩니다. 즉 응축을 통해 우리는 의식 안에 있는 4극 자석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텔레파시란 무엇입니까?
텔레파시란 생각의 전달을 말합니다.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명령의 형태로 말하는 것이 규칙입니다. 우리가 멘탈계로 생각을 송신하면, 아카샤 원리 즉 에테르는 시간이나 공간과 상관 없이 그 생각을 대상자의 영의 귀까지 전달합니다.
16)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멘탈계의 무시간성과 무공간성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멘탈계의 무공간성과 무시간성은 절대 무(absolute void)로 나타납니다. 모든 피조물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지요.
17)멘탈적 관점에서 볼 때 전기적 사고와 자기적 사고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멘탈계에서 전기적 사고는 우리 안에 따뜻한 감정, 그리고 이완과 여유로움을 일깨웁니다. 자기적 사고는 차가움과 수축의 느낌을 가져옵니다.
18)멘탈적 조화와 멘탈적 부조화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멘탈계에서 경험하는 긍정적인 생각‧ 심상화 ‧ 인상 등은 우리 안에 일치감‧ 만족감‧ 아름다움‧ 즐거움‧ 공감 등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즉 우리 내부에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정적인 생각 ‧ 심상화 ‧ 인상 등은 우리 안에 불일치‧ 혐오감‧ 불만족‧ 추함‧ 슬픔 즉 부조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조화와 부조화는 둘 다 절대 법칙의 표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두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법사 프라바토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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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출전 몇 개의 내용을 음미하다 보니… 떠오르는 어렴풋한 상념들이 있습니다.
1)
아스트랄계의 혼魂과 멘탈계의 영靈이 결합하여 사람의 영혼으로 출생한다…?
프라바토의 인터뷰 내용과 <유란시아서>의 내용과 연결해서, 뜬금없는 생각들의 목줄을
놓아 보면…
영과 혼은 둘 다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 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성격자들
(personality)라고도 하는데 끝없이 서로 다른 독특성을 지닌 실체다.…
생에 생을 거듭하면서 카르마를 해결하고 배우고 진화하는 아득히 오랜 동안…
매번 짝지어지는 생의 파트너인 영과 조율하는 가운데,
성격자는 혼의 에고를 순화 복종시키며 진화하다가,
어느 궁극의 생에서 영과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영은 하느님의 분신들로서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불멸의 신성이지만,
인간 몸 안에서 혼과 파트너가 되어 그 혼의 생각조절자(adjuster),
모니터(moniter)로서 체험을 쌓으면서 역시 진화하는 실체이다.…
혼의 경우, 아주 드물게나나 소멸되어서 우주 근원에너지로 되돌려지기도 하지만…
영은 불멸하며, 매번의 생애마다 다른 혼들과 파트너가 된다고 한다.
좀 더 체험을 많이 쌓은 고참 영들은 좀 더 진화된 혼들과 파트너가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어떤 투시 능력자는 어떤 사람을 보고 “당신은 고귀한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2)
“멘탈 메트릭스를 이루는 가장 미세한 영적 아카샤 질료”…예수님이 말씀하신 금강입자(에드민턴)로서 우주의 바탕을 이루는 질료… 예수님은 <끝없는 사랑>에서 사랑으로 지휘한 금강입자들은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고도로 진화할수록 이 금강입자들을 점점 더 흡수하여 점점 더 정묘한 빛이 되는 것인가…?
3)
인간 몸의 “멘탈 메트릭스‘란…
한영(One Spirit), 디바인 메트릭스(Divine Metrix)의 축소 홀로그램인가?…
우리의 내재적 영과 외재적 영(한영)를 연결시키는 통로의 기능도 하지 않을까?…
프라바토님 인터뷰에서
”멘탈 매트릭스는 모든 생각과 개념(심상화)등을 전달하는 통로라고 했으니까…
4)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내면의 대화란”…
몸의 아스트랄 메트릭스를 통하여 영과 혼의 대화 를 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소통의 방식은 프라바토님은 위에서
“멘탈 및 아스트랄 물질은 영의 감각에 느낌 지각의 형태로 작용합니다”라고 했으니,
아마 ‘느낌’이라는 소통방식일 것이다.
아참 그랙 브레이든님도 디바인 메트릭스와의 소통방식을 ‘느낌’이라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혼이 영에게서 받는 전달을 아마 ‘직관’혹은 ‘영감’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혼은 영에게 알게모르게 느낌이나 정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생각 혹은 내적 독백으로 말을 걸고 있으리라.…
혹시 사람의 말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도 자신의 영의 전달이라고 보아도 좋을까?…
빙의된 혼령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법은?…
5)
우리가 내면의 대화(텔레파시)를 할 때는 각자의 아스트랄 메트릭스를 통하여 하고…
타인의 영 ‧ 멘탈계‧ 우주와 대화(텔레파시)를 할 때는 각자의 멘탈 메트릭스을 통하여…
한다는 것이리라.
마음(혼)의 소망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내면의 대화를 통하여 내면의 영과 상의(?)한 다음에 디바인 메트릭스로 보내야 할 것이다.… 자기보존 본능이 강한 혼만의 생각은,
아스트랄 매트릭스에서만 악순환하는, 종종 에고적인 생각 혹은 망상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거나 자신에게나 인류‧ 우주에 해를 끼치거나…
늘 자신의 생각을 살핀다는 것은, 늘 내면(영)과의 대화를 하는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매 번의 생에서 혼은 새로운 영을 파트너로 만나 서로에게 느낌‧ 생각의 전달로 소통한다.
내면에서 늘 대화를 한다는 것은 바로 신성인 영과, 성격자아인 혼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 내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늘 자기 자신인 사랑으로 있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태일 것이다.…
어쨌든…~,*
혼은 자신의 존재적 삶을, 끊임없이 영의 인도에 조율하고 복종시키 는 훈련을 통해…
천천히 그러나 항상 조금 더 완전해지는 혼으로 진화해간다.…
그 과정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음미하고 향유하기…섬세하고 미묘한 현존감!…
출처: http://psychicenergy.tistory.com/18 [Psychic Energy -- 명상, 최면, 주파수 동조(同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