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눈 열기 수련
이 글도 100여년전 히말라야에서 드왈 쿨 대사의 말씀 입니다.
먼저 각 인체의 에너지 센터를 각성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처음에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격수련을 먼저 공부한 후에 자신과 주변의 에너지에 대해 인식해야 함을 말하고 있군요. 명상도 선한 심성으로 봉사에 대한 마음가짐이 결여 되어 있을때는 위험 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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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센터들의 각성(The Awakening of the Centers)
어떻게 이러한 각성과 통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 세 개의 센터들을 이렇게 활성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통합적으로 활동하게 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따라야 할 순서에 따라서, 그리고 동시에 그 중요도에 따라서(일반적인 구도자에게 있어서)
1. 인격수련, 가장 첫번째이자 근본적인 필요조건
2. 올바른 동기
3. 봉사
4. 명상
5. 에너지센터들의 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6. 호흡수련
7. 의지의 테크닉을 배움
8. 시간을 활용하는 힘의 발달
9.쿤달리니 불을 일깨움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세번째 혹은 네번째 지점에 있으며 이제 막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9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진리가 안전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이미 전달된 진리가 매일의 삶 속에 실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대는 깨닫고 있는가?
1. 인격수련(Character building)
이들 아홉 가지 요점들은 그것이 가진 힘의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윤리적이거나 영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입문자가 들어가는 것은 바로 힘의 세계(the world of force)이며, 그러한 진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그가 구도자로서 받게 되는 훈련이다. 우리들 각자는 – 과거 삶들에서의 노력과 경험의 산물인 –어떤 장비를 가지고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 장비는 그 안에 어떤 결점들 혹은 부족함들을 가지고 있으며, 잘 균형이 잡혀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들 사이의 다양성은 헤아릴 수가 없다. 하지만, 각각의 삶에는 그의 본성의 모든 에너지가 향하게 되는 지배적인 경향이 있다. 기억해야만 할 점은 영혼으로서 우리가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몸들은 무엇보다도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에너지 단위들, 즉 끊임없는 흐름과 운동의 상태에 있는 원자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비슷한 속성을 가진 환경에서 자리를 잡는다. 영혼은 이들 에너지 몸들 안에서 양성의 핵(positive nucleus)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정적인 상태이다. 그것은 아직은 자신의 껍질들에 대해 작은 힘밖에는 발휘하지 못하며, 자신을 그것들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임시적으로 그 자신의 본래의 생명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이 그 상황을 지배하고 그 자신의 권위를 주장해야 할 필요성에 눈뜨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처음에는 간헐적이지만) 점차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그의 일상의 경험에서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우세하며, 무엇이 동기를 이루는 힘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이것을 발견했다면, 그는 그의 몸들을 재조정하고 재설정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이 가르침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악덕과 미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악덕(Vice)은 그것이 삶의 행위들을 통제하고 영혼을 껍질들과 하위 자아의 충동과 성향들에 종속시킬 때에 작용하는 하위 인격 안에 있는 개별적인 혹은 통합되어 있는 껍질들의 에너지이다.
미덕(Virtue)은 새로운 리듬과 새로운 에너지들을 불러들여서, 영혼이 적극적인
지배 요소가 되고, 영혼의 힘들이 몸들의 힘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바로 인격수련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짜증을 쉽게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에게 그는 침작하고 평화스러워질 필요가 있으며, 초연함을 기르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부하고 하나도 흥미롭지 않을 것이지만 실재로 말하고 있는 것은,
요동하는 자기 중심적인 감성적 본성과 태양신경총 센터의 활동(강력한 아스트럴계의 힘들을 운반하는) 대신에, 안정적이고 초연하며 조화로운 영혼, 즉 상위자아의 리듬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위의 진동을 하위에 부과하는 작업이
예비의 길에서의 첫번째 요구조건인 인격수양이다.
성실한 학도라면, 이제 자신의 에너지 자산들을 요약하고 정리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지배한다고 느끼는 힘들을 정리하고, 그럼으로써 정복해야 할 힘들과 강화되어야 할 힘들에 대한 이성적이고 진실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2. 올바른 동기.
우리는 지혜의 대사들은 “한 세대의 구도자들에서 피어나는 귀한 꽃”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의 열망과 노력을 지배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나의 영혼을 일깨우고 있는가?
올바른 동기의 계발은 진행형의 노력이며, 빛이 점점 더 견실하게 길 위에 비추고 끊임없이 더 새롭고 더 높은 동기가 등장하면서, 구도자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동기의 초점을 옮겨간다. 다시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4. 명상.
명상은 이 목록중의 4번째에 놓여졌다. 그 이유는, 명상은 청정한 생활과 선한 심성이라는 기반이 없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하고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잡초로 가득한 정원에 비료를 주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약하고 작은 꽃들을 밀어내 버리듯이, 그러한 명상은 그들의 삶의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만을 자극하는 에너지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개인적인 성장이나 영적인 힘들을 추구하는 욕망과 같은 옳지 못한 동기가 있다면, 명상은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은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오직 미망의 골짜기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기적 욕망의 계곡에 숨어있는 자만심이라는 뱀만을 온전히 길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봉사하려는 욕망이 결여되어 있을 때, 명상은 위험한 것이다. 봉사라는 말은 공동체의 선(행복)을 위하여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봉사하려는) 충동이 없더라도, 에너지는 여러체들(육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등등)에 쏟아져 들어오겠지만, - 쓸모가 없고 출구를 찾지 못할 것이기에 - 에너지 센터(차크라)들을 과도히 자극하고, 초심자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히게 될 조건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소화와 배출은 육체적 삶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삶의 법칙이기도 하며, 이러한 단순한 법칙이 무시되었을 때, 육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과들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5. 에너지 센터들에 대한 연구.
이것은 이제 우리가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서구에서는 태생기에 있는 연구분야이며, 동양에서도 거의 응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은 다소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들과 위치, 그리고 센터들간의 관계들에 익숙해 질 것이지만, 그것들에 집중해서 명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진동과 그들의 음조와 색깔, 그리고 점성학적인 의미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척주 아래쪽의 센터들과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투시나 투청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이용하려는 목표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학도들이 하는 모든 작업은 반드시 전적으로 머리 속에서 그리고 머리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머리에는 영혼을 통해 작용하는 의지, 혹은 영적인 측면(Spirit aspect)의 자리가 있다. 또한 하위 인격의 통합적 표현이 자리하고 있으며, 두 개의 머리쪽 센터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로부터 점차 영혼에 의한 하위인격의 지배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다른 다섯 개의 센터들의 활동을 인도할 것이다. 이들 다섯 센터들의 작용은 결국에는 육체의 심장과 허파의 작용처럼 자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양 미간 사이의 옥좌에 앉아 있으며 머리 속의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는 ” 주재하는 지성, 자아(the Self)는 영혼에 대한 관심에 눈뜨게 될 것이며, 보통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나’라는 의식 만큼이나 또렷하게 될 것이다.
6. 호흡수련.
매일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어떤 호흡수련도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두 가지는 반드시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호흡수련들의 효과는 다양하다.
a. 산소화 작용. 혈류는 정화되고 혈압이 경감된다. 피가 산소로 충전되듯이, 수련자의 삶에는 영적인 에너지가 스며든다.
b. 호흡의 들숨과 멈춤, 그리고 날숨의 특정한 간격과 시간에 의해 일어나는 특정한 리듬의 부여.
c. 프라나의 미묘한 작용. 이것은 프라나로 이루어진 몸인 에텔체 혹은 활기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학도들은 앞서 설명한 육체적 효과보다 이 미묘한 작용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두 방향의 결과를 낳는다. 육체와 에텔체에… 활력체 전체는 호흡수련에 따라서 특정한 리듬을 취하게 된다.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육체에 대해서 분해시키거나 응집시키는 효과를 내게 되며, 그것과 상응하여 에텔체를 활성화하거나 비활성화 시키게 된다.
(프라나: 우주에 충만하여 모든 원소를 관류하고 있다. 모든 세포의 성장을 자극 확대하여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의 육체까지도 구성케 하는 원동력이며 모든 종류의 생명체의 성장과 함께 흡입되는 생명 유지 원소이다. 그런가 하면 생명을 흡수하는 활동에도 프라나는 작용한다. )
d. 에너지 센터들에 대한 효과. 이것은 가장 효과가 크며, 구도자의 사고의 경향을 따른다. 그가 태양신경총을 생각한다면, 그 센터는 필연적으로 활성화되고, 그의 감성적 본성은 강화된다. 따라서 학도들은 그들의 명상을 언제나 꾸준히 머리 속에 집중해야 하며, 그래서 머리 센터를 일깨워야 할 것이다.
호흡수련이 활력체(에텔체)에 미치는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먹고 마시는 것이 육체를 강화시키거나 망쳐버리는 것 만큼, 그리고 그 올바른 작용을 돕거나 방해하는 것 만큼 확실하게,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호흡수련은 강력한 효과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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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LE SIX
The devas of the lower four feel the force when the eye opens; they are driven forth and lose their master.
눈이 열릴 때, 하위 넷의 데바들은 그 힘을 느낀다. 그들은 쫒겨나며 그들의 주인을 잃어버린다.
눈의 작용 The Work of the Eye
이제 우리는 마법의 규칙들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실질적이고 모든 마법적 사역의 전체적인 성공여부가 달려있는 규칙을 고려할 차례이다.
이 규칙에서 묘사된 상황에 대한 열쇠는 이전 규칙에서 찾을 수 있는 “관조(contemplation)”라는 단어에 있다. 관조한다는 것은 특정한 목적을 향해서 하나에 집중하여 꾸준히 바라보는 것을 포함한다. 영혼, 즉 태양천사는 세가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1. 천상의 빛을 향하여. 자신 안에 모든 존재들이 지향하는 목적과 계획을 품고 있는 그 중심의 생명 혹은 에너지를 향하여. 그 지향성 있는 힘이 무엇인지, 존재 자체의 비밀이 무엇인지는 오직 보다 발전된 입문식에서만 계시되며, 오직 원인체 그 자체가 해체되고 최후의 한계가 사라져 버릴 때에만 마침내 이해될 수 있다..
2. 태양 천사가 주권을 가지고 지배하는 왕국 위로. 즉 영혼의 세계위로. 또는 하이어라키의 사역과 순수한 사고의 세계위로. 이것은 신의 왕국이며 천상의 존재의 세계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점점 분명히 인식해가고 있는 의식의 수준이며, 입문자들이 활동하는 수준이고, 마스터들이 지구의 진화과정을 지도하는 곳이다. 이들 영혼이 바라보는 두 가지 방향들은 영혼의 영적인 경험의 세계이며 동시에 영혼 자신이 열망하는 대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영적인 인간, 즉 태양천사 역시 그 나름의 노력의 목표를 가지고 있음과 더불어,
일단 하위 삼계에서의 활동체(몸)가 복종하게 되면 그의 목표가 주도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완전히 지성적인 인간만이 영혼으로서 의식적으로 활동하고, 영혼의 왕국을 접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오직 완전히 활동적이고 주도적인 영혼만이 – 붓디 원리가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영혼 – 모나드 혹은 영(Spirit)이 영원히 안식하고 있는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접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의 발달은 그가 완전한 영혼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구도의 길을 밟기에 적합함을 나타낸다. 태양천사의 붓디 혹은 지혜-사랑 측면의 발달은 그가 순수한 존재의 상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보다 진보하기에 적합함을 증명한다.
3. 영혼이 바라보고, 관조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세 번째 방향은 하위삼계에서의 자신의 반영을 향해서이다. 상위인간과 하위인간 사이의 오랜 갈등의 목표는, 영혼이 자신의 삼중의 도구를 관조하면서 영혼으로부터 방사되는 힘들에 대해 하위의 인간이 반응하고 민감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관조의 방향들과 세 개의 주요 센터들의 각성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관 관계가 있다. 그 주제의 심원함으로 인해 더 이상의 힌트는 전달하기 힘들다. 이런 일깨움에는 너무나 많은 요소가 관계되며, 각각의 구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깨어남의 순서와 방법을 결정해야만 한다.
제 삼의 눈에 대해서
흔히 제 삼의 눈이라 불리는 미간 사이의 센터는 독특한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학도들은 제 삼의 눈과 송과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은 연관되어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제 삼의 눈은 송과선을 통해 작용하는 영혼의 힘들과 뇌하수체를 통해서 작용하는 하위 인격의 힘 사이의 진동적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들 음과 양의 힘들은 상호작용하고, 충분히 강력해 지면 머리 속에 빛을 만들어 낸다. 육체의 눈이 태양 빛에 반응하여 만들어졌듯이, 영적인 눈은 영적인 태양의 빛에 반응하여 만들어진다.
구도자가 진보해 감에 따라, 그는 그 빛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구도자 자신의 내면의 빛 뿐만 아니라 모든 형상의 안에 있는 빛, 겉껍질에 의해 가려져 있고 신성한 생명의 표현인 빛을 말하고 있다.
이 빛에 대한 그의 인식이 점점 커감에 따라 그 새로운 시각의 기관도 발달하며,
영적인 빛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에텔체 안에 만들어지게 된다.
(송과선 : 이미지 참조)
이것이 바로 쉬바의 눈이다. 모나드의 상, 즉 의지의 측면이 지배적일 때에만, 마법적 사역에서 그것이 온전히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삼의 눈을 통해 영혼은 세가지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1. 그것은 통찰하는 눈(the eye of vision)이다. 그것을 이용해서, 영적인 인간은 신성한 표현이 만들어내는 모든 형상들의 이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의 빛을 인식하게 되며, 모든 형상들의 내면에 있는 영혼과 만나게 된다. 육체의 눈이 형상을 인식하는 것처럼, 영적인 눈은 그 형상들의 내면에 있는 빛을 인식한다. 그것은 광휘의 세계를 열어준다.
2. 그것은 마법적 사역의 지배적인 요소이다. 모든 백마법적 사역은 명확하게 건설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며, 지적인 의지의 사용을 통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하면, 영혼은 계획을 알고 있으며, 하위 자아가 영혼과 올바르게 정렬되어 있고, 올바른 태도를 가진다면, 신성한 인간의 의지적 측면은 하위 삼계에서 작용하여 의도된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 이 때 사용되는 기관이 바로 제 삼의 눈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다른 인간들이나 동물들을 시선을 통해 다스릴 때의 인간의 눈이 가진 힘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집중된 인간의 눈을 통해서 힘이 흐른다. 마찬가지로 제 삼의 눈을 통해서 또 다른 힘이 흐른다.
3. 그것은 파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제 삼의 눈을 통해서 흐르는 에너지는 분해하고 파괴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그 집중된 의도를 통해서 이성적 의지에 의해서, 물리적 질료를 몰아낼 수 있다. 그것은 정화 작업에 있어서 영혼의 대행자이다.
여기서, 하위 삼계의 각각의 정묘한 몸들에는 상응하는 초점이 존재하며, 미간 사이의 센터는 단지 내적인 상응 센터들의 물질적인(에테르 역시 물질이므로) 대응부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이번 규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영혼의 세번째 작업, 즉 낡은 형상을 제거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물질들을 몸 밖으로 떨궈내며, 진정한 영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하고 가로막는 것들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작업이다.
제 삼의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세가지 영혼의 활동들은 세가지 측면에 상응한다.
(영적인 빛인 머리 속의 빛을 깨달음으로써 생겨난) 제 삼의 눈을 통해 모든 형상들의 내면의 빛을 본다는 것은 물리적인 태양의 빛 속에서 형상들을 드러내는 물리적인 눈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위인격에 상응한다.
마법적 사역의 지배적인 요소인, 자기적인 에너지와 영적인 눈의 견인력을 통해 지배하는 측면은 영혼에 해당한다. 가장 신비로운 의미에서, 영혼은 모나드의 눈이며, 순수한 존재인 모나드가 보고 알고 접하고 일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나드 : 순수 스피리트, 하늘의 성부 (pure Spirit, the Father in Heaven)
파괴의 측면은 모나드 혹은 의지의 측면에 상응한다.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해방을 가져오고 모든 형상을 파괴하며, 자신을 현현으로부터 철수시키며, 창조적 작업의 주기를 끝내는 것은 바로 모나드이다.
지금 고려하고 있는 규칙(6번)과 관련하여 이 개념들을 실질적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들 세가지 행위들이 모두 이번 규칙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제 삼의 눈은 의식적인 발달과 올바른 정렬, 그리고 영혼의 생명의 유입의 결과로서 열린다. 그러면, 그 자체의 자기적인 지배력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하위 몸들의 생명체들을 다스리면서, (지수화풍의) 네 가지 하위 엘리멘탈들을 몰아내고, 달의 지배자들 물러나게 한다. 이제까지 주인이었던 하위 인격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영혼이 삼계에서 완전한 권세를 얻게 된다.
(지수화풍 네가지 하위 엘레멘탈 :
불교에서는 삼라만상 또는 우리의 육체를 의미하는 네가지 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사대(四大)라고 합니다. 그 의미로,
地(지)는 몸을 지탱하는 뼈와 살을 말하며, 만물을 소생시키는 원천이며,
水(수)는 몸의 피와 수분을 의미하며, 만물을 성장시키는 물과 습기이며,
火(화)는 곡기에 의한 몸의 기운과 체온이며,만물을 성숙시키는 힘이며,
風(풍)은 호흡 등이며, 만물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말합니다.)
(달의 지배자 : lunar lords-역주: 하위 체들의 집합의식)
육체를 구성하는 많은 생명체들의 총합체인, 지(地)의 엘리멘탈이 다스려지고,
그 위에 (머리속의 유일한 주인인) 주인의 눈길을 느낀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조잡한 원소들은 “쫒겨나고” 더 좋고 적합한 원자들 혹은 생명체들이 채워진다.
아스트럴체의 엘리멘탈 또는 물의 몸은 비슷한 활동을 겪으면서, 거기에 더해서, 이제까지 그것을 특징지워 왔던 늘 들떠있고 유동적인 소란스러움을 끝내는 안정화하는 효과가 부과된다.
영적인 눈의 주도적인 자기적 힘을 통해, 영혼은 아스트럴체를 재구성하며, 자신의 집중된 주의력을 통해서 그것을 침착하고 명료하도록 유지시킨다.
다시, 유사한 과정이 멘탈체(불의 엘리멘탈)에도 진행된다. 낡은 형상들은 영적인 인간이 작업하고 있는 명료한 빛 앞에서 사라진다.
상징적으로, 바람(風air)의 엘리멘탈은 에텔체라는 형상을 통해 작용하는 에너지의 토대이다. 이 에텔체는 호흡을 통해 다뤄지며, 프라나야마의 과학을 통해 조종된다. 이 엘리멘탈 형상은 복잡한 에텔 구조로서, 에너지 센터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제 삼의 눈의 지점에 집중되어 있고, 머리 센터를 통해 작용하는 관조의 상태에 있는 영혼의 집중된 주의력에 의해서 조절되고, 의지의 작용에 의해서 올바르고 특정한 활동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앞의 문장은 물질계에서의 모든 마법적 사역을 위한 집중된 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마법적 작업을 실행하는 것은 바로 몇 가지 에너지 센터들을 통해서 조절되는 힘과 에텔체를 통해서이다.
그것은 머리 속에 의도를 강하게 집중함을 통해서, 그리고 그 주의력을 제 삼의 눈을 통해 사용할 센터를 향해 돌림으로써, 힘이 올바른 출구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 힘은 에너지를 부여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지성적인 의지에 의해서 강화된다.
A Treatise on Cosmic Fire - Section Two - Division D - Thought Elementals and Fire Elementals
b. Five Rules for the Astral Plane
마법사의 눈에 대해서
모든 마법 작업의 배후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규칙들 중의 하나는
제 삼의 눈이 열려 있거나 열리는 과정에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백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념체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조종하며, 하위건설자들 또는 힘들을 특별한 방향의 행위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눈의 사용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제 삼의 눈은 쉬바의 눈이라고 불리는 데, 쉬바는 위대한 신성의 첫번째 상에 대한 이름들 중 하나이다.
쉬바는 의지의 측면, 영(Spirit)의 측면, 천상의 아버지, 방향을 부여하는 목적, 의식적 에너지, 역동적인 의도를 의미한다. 이 말들을 잘 생각해 보면 제 삼의 눈이 가진 기능들이 분명해 질 것이다.
쉬바의 눈은 두 눈 사이에 이마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송과선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송과선은 분명 물질적인 센터 혹은 분비샘이기 때문이다. 제 삼의 눈은 에테르 물질로 존재하며, 에테르 힘의 센터이다. 하지만, 송과선은 “쉬바의 눈”이 어느 정도 활동하게 되기 전에 어느 정도는 활동하고 있어야 한다.
제 삼의 눈은 다음의 세가지 요소들의 활동을 통해 생성된다.
1. 자신의 계에 머물고 있는 자아의 직접적인 자극에 의해서.
진화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아는 자신의 반영인 물질계의 인간과 정수리의 센터를 통해서 접촉하지만, 인간이 고도로 진보하게 되고 도의 길에 가깝거나 그 길을 걷게 되면, 내재하는 자아는 자신의 하위 몸을 보다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이마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지점까지 내려오게 된다. 이것이 영혼에게는 가장 낮은 접촉점이다. 이렇게 될 때 제 삼의 눈이 열리게 되고 송과선이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 시야는 어둡고, 송과선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진동에 반응한다. 하지만 점차 그 눈은 완전하게 열리게 되고, 송과선은 완전하게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는 “완전히 깨어난” 사람이 된다. 이 경우, 알타 메이져 센터(the alta major center)가 진동하며, 그렇게 되면 물질 두뇌의 세가지 센터들이 모두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알타 메이저 센터 alta major center,역주: 척수가 위쪽으로 끝나는 지점, 척수와 뇌와의 연결부위 근처)
2. 정수리에 있는 천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 즉 머리의 중심센터의 통합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 센터는 직접적으로 송과선에 영향을 주며, 이 둘 사이의 힘의 상호작용 (작은 의미에서 영과 물질의 상응이라고 할 수 있는)은 위대한 의식의 기관인 쉬바의 눈을 형성한다. 그것은 지혜의 도구이다. 제 삼의 눈은 에너지 혹은 힘의 지휘자이며, 따라서 의지 혹은 영(Spirit)의 도구이다. 그것은 아들의 측면, 인간과 신의 사랑-지혜의 본성의 계시자인 영혼의 통제를 받는 의지에만 반응하며, 따라서 그것은 백바법사의 징표이다.
3. 송과선 그 자체의 반사작용에의 해서
이 세가지 종류의 에너지, 혹은 세가지 센터들의 진동이 서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분명한 상호작용이 생겨난다. 이 삼중의 상호작용은 조만간 이마의 가운데에 힘의 센터 혹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데, 궁극적으로는 다른 두 개의 눈 사이에서 밖을 내다보는 눈을 닮은 모습을 취한다. 그것은 내적 통찰(vision)의 눈이며, 그것을 연 자는 물질의 에너지를 통제하고 다스를 수 있으며, 모든 것들을 영원한 현재에서 볼 수 있고, 따라서 결과들이 아니라 원인들과 접할 수 있으며, 아카식 레코드를 읽고, 투시하여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의 가진 자는 낮은 등급의 일꾼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쉬바의 눈”은 완전해 지게 되면, 푸른 색을 띄게 되는데, 마치 우리의 태양 로고스가 “푸른 로고스”인 것처럼, 그의 눈도 비의적으로 그를 담는 것이다.
아데프트가 언제라도 먼 곳에 있는 제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보는 눈”을 통해서이다. 또한 그는 그 눈을 통해 에너지를 인도하여, 일꾼들을 통제하고 지도할 수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상념체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둘 수 있고, 그것이 수행해야 할 일에 배치시킬 수 있다.
(아데프트 : 완전한 앎과 관찰력을 얻기 위한 내적인 힘을 개발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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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과선은 두 가지 방향의 자극을 받게 된다.
1. 영혼(the Ego) 그 자체로부터 에테르 힘의 센터들을 통해 방사되는 자극. 이 영혼의 에너지의 하강( 명상과 영적인 삶을 통해 센터들이 각성된 결과인)은 송과선에 강한 영향을 주고, 몇 년의 과정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그것의 분비량을 늘리고, 크기를 키우며, 그것이 새로운 주기의 활동을 시작하도록 만든다.
2. 육체의 수련과 영적인 발달의 법칙들에 육체를 순응시킴에 의한 결과로서 생기는 자극.
제자가 절제된 생활을 하며, 육식과 담배, 술을 피하고, 금욕하게 되면,
송과선은 더 이상 퇴화된 상태로 남아있지 않고, 본래의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다.
명상중에, 말씀(OM)을 발성함에 의해서, 학도는 머리의 주센터의 반응을 일깨우고, 그것과 물질적 머리의 센터(송과선) 사이에 상호 진동을 유발시키며, 점차적으로 머리속의 힘들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시각화의 힘을 수련함에 의해서, 제 삼의 눈은 발달된다
윤회에 대하여
서구 세계에서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신지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윤회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그럴만한 유일한 설명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윤회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오해와 오류가 스며들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오래되고 폭 넓은 법칙의 기본적인 가정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은 너무도 적은 것이 현실이다.
1875년에 뉴욕에서 설립된 신지학 운동의 공동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블라바츠키 여사는 윤회는 초기 기독교 가르침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으나, 그 이후로 기독교에서 “잃어버린 열쇠”들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서기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혼의 전생 교리를 반대함으로써 윤회의 가르침을 파문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많은 논쟁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유럽 문화가 붕괴하고 암흑의 시대가 도래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이 원리와 쌍둥이격인 카르마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의 부활을 통하여 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비참함의 추세가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이 원리의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이 두 원리를 희망과 책임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다.
1) 인간의 본성중 어느 부분이 윤회하는가?
지난 100년 동안 학교나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물질주의가 팽배하다 보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진짜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 왔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의 육체가 곧 우리 자신이라고 받아들임으로써 윤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바로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진짜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에 사용하는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태어 나고 죽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실체에 의해 재사용되기 위하여 물질의 저장소로 되돌아 간다.
우리는 또한 어느 특정한 시간에 경험하는 감정들도 아니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각들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들이나 감정들도 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평가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한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경험에서 경험으로 옮겨가는 의식은 어떤 다른 무엇, 즉 이러한 육체나 뇌 감정 등을 사용하지만 이러한 도구들과는 전혀 다른 보다 우수한 것임에 틀림없다. ULT의 창시자인 크로스비씨는 [보편 신지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24쪽)
“개개인 안에는 모든 육화를 통하여 지속되는 동일한 정체성인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 신지학은 보다 큰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다. 몸도 환경도 변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불변이며 앞으로도 육체나 정신 또는 환경의 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실재이다.”
진정한 “나” 또는 “자아”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며, 수많은 육화 또는 개성들을 거치면서 계속 살아 있게 된다. 이 육화와 개성들은 모두 다르지만 영적인 진화를 위하여 모두 중요하다. 경험의 정수를 한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보존하여 갖고 다니는 것이 바로 영속하는 정체성인 자의식이다. 일반적으로 재능이나 천재성 또는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수많은 삶을 통하여 얻은 경험의 과실이다. 한편 힘과 지혜와 영감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개성이라는 끈질긴 믿음이다. 이 개성은 카르마를 통하여 우리 자신들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성격은 그러한 기회들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를 나타낸다.
2) 그렇다면 인간 전체는 무엇인가?
신지학은 이점에 대해 심리학과 종교에서 일어나는 의혹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혼란스러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 불멸하는 상위 자아와 상위 자아의 임시적인 매체이자 도구로써 다른 모든 매체들처럼 결국엔 죽음으로 붕괴되는 하위 자아 혹은 개성으로 구성된 이중구조라고 답한다. 이를 좀더 살펴보자.
상위 자아는 영, 영적 혼, 마인드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마, 붓디 마나스이다) 이 3중체가 삶에서 삶으로 무한한 지식과 힘을 계속해서 확장해나가기 위해 화신하는 진짜 인간이다. 아트마는 정의할 수 없는 만물의 초월적 근원이다. 즉 인격적이고 유한한 ‘신’이 아니라 ‘보편적인 신성 실재’이다. 아트마는 경계 없이 영원하며 언제 어디에나 편재해있으며 무한한 성장력, 인식력, 생성력을 의미한다. 우리들 각자는 본질적으로 그것이다.
붓디는 졋지씨에 의하면 분별하고 판단하는 가장 높은 지성을 의미한다. 붓디는 우주심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획득한 신성 혹은 신성한 지성으로 인식된다. 마나스는 생각, 의지, 감정, 기억, 그리고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도구이며, 붓디 혹은 상위 본성을 위하여 사용되거나 카마 혹은 하위 본성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일시적인 하위 자아는 육체, 아스트랄체, 생명원리 그리고 열정과 욕망의 원리 4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각기 루파, 링가 샤리라, 프라나, 카마로 명명된다. 루파(육체)는 이러한 하위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외피에 해당된다. 링가 샤리라는 복잡한 자기장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물질 분자들이 적절한 기능을 하도록 유지하고 있는 전자기적 형체이다. 이것은 육체보다 먼저 나타나고 더 오래 생존하는데, 감각들을 담고있는 실질적인 매체이며, 사실 진실한 의미의 육체이다. 아스트랄 물질은 육체보다 더욱 미세한 성질의 물질이다.
프라나는 생명 에너지이다. 이를 [신지학의 대해]에서 인용하면 “프라나는 보편적으로 스며있는 본질로, 지구가 떠다니는 대양과 같다. 그것은 지구와 지구 상의 모든 만물 속에 깃 들어 있으며 쉼 없이 영원히 우리 주변에서 맥동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단지 프라나나 지바(jiva)를 다루기 위해 더 특화된 도구를 사용한다. 지바는 보편적인 생명이다. 프라나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환생한 동안 살아있게 하는 개체화된 생명이다.
카마는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본질일 것이다. 이것은 열정과 욕구의 본질을 뜻하며 7중 구조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균형의 원리”로 불려진다. 일반적으로 카마는 가장 개발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기저를 형성하는 원리로 이것을 중심으로 성장하거나 퇴보하는 길이 있는 균형점이다.
졋지씨는 [신지학의 대해]에서 하위 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네 개의 하위 물질은 서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스스로 붕괴되기도 한다. 서로 분리될 시간이 되면, 결합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육체는 죽으며 4중체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들은 각각 분리되기 시작하여, 뿔뿔이 흩어진 전체 집합체는 이제 더 이상 진정한 인간의 매체로서 사용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죽음이라 불리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죽지 않는 영원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약해보자. 진정한 인간은 아트마-붓디-마나스의 3중체 혹은 영과 마인드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연과 접촉하는데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도구들은 4중체에서 발견되며 각각의 본질은 그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특별한 경험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 중 육체는 가장 하위이며, 가장 일시적인 매체이다.
3) 왜 윤회해야 하는가?
환생은 우리로서는 매우 혜택이 많은 과정이다. 그것은 각자에게 그의 내면에 이루지 못한 채 남아있는 모든 열망들을 꽃피울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몸과 두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한편, 환생의 사이의 기간에 혼은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과 동화를 취할 시간을 갖는다. 환생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지난 생에서 그가 취했던 행동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와 환경도 제공한다. 환생을 통하여 대자연을 구성하며 자신들의 진화를 위하여 인간에게 의존하는, 의식을 가진 많은 “생명체들”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환생은 자연 안의 모든 생명체들과의 관계를 주기적으로 쇄신하기 위하여 윤회서 필요하고 그러한 상호의존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은 바로 모든 생명의 근저에 있는 신의 실재 즉 신성과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지학에서 “보편적 형제애는 자연계에서 하나의 사실이다.”라는 명제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똑같은 두뇌와 인식 그리고 감정을 가진 신체 속에 언제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주위의 삶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진보함에 따라 새롭고 보다 나은 건물들과 도구들 그리고 사회들을 건설하며, 옛 것들은 재활용을 위하여 해체한다. 자연의 여러 가지 차원에 존재하는 생명과 접촉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똑같은 인격들이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때마다 우리의 인식을 보다 더 넓히고 더 많은 효과를 주는 더욱 개선된 도구들을 만드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그 도구들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에게 보다 높은 충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적인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진정으로 실제적인 삶을 사는 방법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과 행위들을 가능한 한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윤회를 통한 발전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식하는 존재이다. 우리 존재의 뿌리에는 무한한 인지 능력과 탐구력 그리고 성장력인 아트마(혹은 영)가 있다. 이 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전능한 힘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진정한 자아로서 지식과 이해력을 끝임 없이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는 또한 붓디이다. 그것은 모든 과거 경험들의 총합 혹은 정수로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붓디는 직관과 영감 양심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는 마나스이다. 마나스는 행위의 실제 영역인 멘탈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이것이 아트마-붓디-마나스 혹은 인식자 혹은 윤회하는 자아의 3 가지 측면이며, 모든 진실되고 영속적인 진보가 기록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삼위일체의 내면이다. 그리고 진정한 성장은 이 내적 자아의 지혜를 현상계에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천재>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떠한 자아든 원초의 본질과 본성에서 다른 자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떤 한 인간을 위대한 성인으로 만들거나 또는 강도나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외피인 신체의 특질과 구성 및 두뇌와 육체가 진정한 내적 인간의 빛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데 적합한가 부적합 한가에 달려있다. 그런데 이러한 적합성 혹은 부적합성은 카르마의 결과이다”
크로스비는 [신지학의 대해에 대한 질의응답]에서 이를 더욱 깊이 설명한다.
“인식하는 자는 인식력과 인식범위에 대한 확장능력을 갖고 있다. 인식하고자 하는 힘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인식들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인식의 영역을 계속 확장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식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인상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증대하는 지성과 더욱 나아지는 형태가 바로 진화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외적인 모습 안에는 언제나 더 큰 잠재력이 있다는 느낌을 경험해 왔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원하는 생각이 아니다. 이 느낌 속에는 거대한 진리가 담겨져 있다. 신지학은 모든 과거의 체험과 지식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잠겨져 있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따라서 올바른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캐내어 활용할 수 있다고 신지학은 가르친다. 진정한 진보는 수련에 의해서 그러한 지식을 다시 사영하는 것이다. 즉 하위 자아의 도구들을 훈련시켜서 완벽하게 조절함으로써 내면의 자아가 지닌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러한 도구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번 생애에서라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보편적인 진정한 토대를 선택해서 확립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올바르고 효과적인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진실되며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 생명의 법칙들에 어긋난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그만큼의 실수로 아로 새겨지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전체 본질을 이해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들, 즉 우주에서의 자신의 목적과 운명을 알게 하는 영원 불멸한 생명의 법칙들에 대한 지식이다. 현현해 있는 모든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윤회의 보편적 법칙은 우리의 사고와 인식의 기본 토대들 중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져야 할 근원적인 법칙들 중에 하나이다.
5) 왜 이런 내면의 지혜를 사용하지 못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내면의 지식과 능력의 저장고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만이 삶의 전부이며 혼이나 영은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라야 비로소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 생각의 대부분이 거의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차원, 즉 이기적이며 육체적인 성질과 관계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삶을 통해서 계속 이렇게 훈련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두뇌는 이러한 성격을 갖는 인상이나 메세지들에만 반응을 보이게 된다. 크로스비씨는 말하길, “사람들에게 장벽이 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삶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있다.” 그렇지만 굳은 결심과 위대한 스승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고집해온 스스로를 제한하는 생각들을 내면의 존재의 세계와 조화를 더 잘 이루는 생각들로 대체할 수 있다.
이것 없이는 나머지 모두가 물거품에 불과한 가장 중요한 단계이자 첫걸음은 우리는 육체나 두뇌 혹은 인격이 아니라 윤회하는 자아, 즉 아트마-붓디-마나스로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위하여 다양한 인격들을 사용하는 영속적인 정체성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규칙적인 사고와 배움을 통하여 근본적인 본성에서 초월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자애적인 진정한 본성에 관한 내면의 기억을 일깨워야 한다. 결국에는 비이기적인 삶만이 유일한 실용적인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그러한 성질을 띄게 될 것이고, 우리의 두뇌는 혼의 지시에 순응하게 되어 상위 자아로부터 오는 영감에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6) 과거의 삶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의 이원성, 즉 인간은 윤회하는 자아와 개성적 일시적 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과거 생들을 기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고쳐 말할 수 있겠다. 지금 현재의 인격과 두뇌는 전생의 행위와 생각들을 기억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생과 다른 생 사이의 갭을 연결해주는 또 다른 기억이 있는가?
블라바츠키 여사가 육체적 차원의 기억에 대해서 [신지학의 열쇠]에서 말하길, 우리가 과거 생들을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호소력 있는 반박 논리를 제시한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이러한 ‘원리들’은 사후에 그 구성 요소들과 함께 분해되기 때문에, 자아가 다음 생에 환생할 때 소멸된 개성의 소멸된 기억을 기억하거나 기록할 수 없다. 윤회란 자아가 새로운 육체, 새로운 두뇌, 새로운 기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억이 전혀 기록하지도 않은 것을 기억하길 기대한다는 것이 터무니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우리는 전생의 모든 경험의 기억들이 인간 내면 깊숙이 간직 되어 있으며, 하위 본성에 대한 통제력을 습득한 스승들이나 초인들은 언제든지 그러한 기억을 불러올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위치에 도달했다고 배웠다. 블라바츠키 여사는 계속해서 “영적 자아는 인격아가 마비되어있을 때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영적인 나’는 전능하며 그 내면에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격아는 환경의 소산이며 육체적인 기억의 노예입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비되어져야 하는 것은 인격의 매체가 아니라(우리는 그것 없이는 배울 수 없다) 그것이 작동하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토대들이다.
그러나 전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기억들은 우리의 혼 깊은 곳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들의 정수는 임종 시에 혼으로 흡수되어 현생에서 직관이나 느낌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누구든지 전에 결코 만난 적이 없었던 어떤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경험을 하거나 혹은 전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낯선 장소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특출한 재능이나 천재성은 전생에서 익힌 학습이나 기술이 현생으로 이어진 결정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환생할 때 어떤 특정한 가족에게 특별히 이끌리거나 후에 특별히 어떤 사업 동료에게 이끌리거나 심지어 진리를 추구하는 다른 신지학도들과 결합하는 것조차 이 모든 이끌림들은 단지 다른 생에서 맺어진 오랜 관계의 기억들이 혼으로부터 스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여기 저기서 우리는 전생 기억의 사례들을 듣고 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사실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들은 예외적인 환경 속에서의 예외적인 경우들에만 가능하지만 이것은 드물며 좀더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지구 자체의 기억은행은 아스트랄 빛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전생들에 관한 수백만 개의 기억들 중에 하나를 무작위로 읽는 것일 수 있다. 물론 그 중 어떤 것들은 순전히 이익을 얻기 위한 사기이다.
그러나 전생에 관한 분명한 기억을 보여주는 수백 개의 진짜 사례들이 있다. 이것은 이안 스티븐슨 박사에 의해 여러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서 비교적 빨리 환생하여 이전 생애의 기억들을 쉽게 간직할 수 있었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신지학에 의하면 이 사례들의 경우 아스트랄체가 아직 붕괴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게 탄생하여 다시 사용되어져서 그 결과 전생의 육체에서 보냈던 몇 년 간의 기억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본다.
7)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환생하는가?
윤회의 가르침은 ‘모든 것’이 환생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며, 따라서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상황들과 서로가 야기한 원인들 때문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때 과거에 우리가 같이 살았거나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환생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과 과거에 너무도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처리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상황들을 안고 있다. 어떤 생애에서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하고만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부조화를 이루었던 상황들을 그대로 놓아둔 채 버리고 갈 수 없도록 만들며, 환생이 과거의 불화와 부조화를 현재의 조화와 협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셈이다.
“미래의 친구 혹은 적”이라는 칼럼에서 졋지씨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들의 미래의 친구나 적은 지금 우리와 함께 있거나 함께 있게 될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금 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라면 오늘 그들에게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그들과의 화해의 말을 세 생이나 늦출 뿐이며 그만큼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다. 우리가 다음 생을 미리 힐끔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거의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그러한 사람들과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빛을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보자. 그러면 다음 생에서 이 지긋지긋한 사람들, 짜증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의 노력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 바오로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의 경고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푸십시오.”
8)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죽는 순간과 죽고 난 이후에도 우리의 의식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ego)는 인식자로써 어느 계에 있든지 인식 작용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로, 죽고 난 이후에 우리는 결코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 상태”가 바뀌는 것임을 이해해야겠다. 그러나 이 상태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자아는 지금 막 마감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추출하고 간직해야 할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신지학에서는 각각의 매체가 그 동안의 경험의 축적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번의 “죽음들”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졋지 씨는 그 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몸이 차가와 지고 눈이 감겨졌을 때 몸과 마음 안에 있던 모든 힘들은 뇌를 통해 황급히 빠져나가는데, 이때 막 마감한 생애 전체가 그림처럼 펼쳐지면서 전체적인 개략뿐만 아니라 매우 세세한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던 아주 조그마한 인상들까지 모두 다 상세하게 내면의 인간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어진다. 이 순간에 의사는 모든 징후들이 죽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죽었다고 말할지라도 진짜 인간은 뇌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으며 이 작업이 끝나서야 비로서 그 사람은 죽는 것이다.”
홈 스터디 시리즈의 다른 부분에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자아는 겨울에 나무가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잎사귀들은 떨어지고 꽃들은 시들어 죽지만, 그 해에 이룩한 성장의 정수는 응축되어 씨앗에 보존되어진다. 이 기간이 바로 자아가 지난 생을 반성해 보고 다음 생을 위하여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 기간이다. 이것은 혼에게 있어서 필요한 시간이며 또 전 인생의 행로와 과정을 이해하고 휴식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다.
졋지씨는 자아가 다시 화신할 때에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혼의 힘에 의해 주어진 데바챤(사후 상태 중의 하나)에서의 기간이 끝나게 되면 지구와 묶여 있던 자기적인 끈이 힘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때 자아는 꿈에서 깨어나 빠르게 새로운 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탄생하기 바로 전과 데바챤으로 이끌려서 지금 다시 시작할 새로운 삶으로 되돌아오게 된 모든 이유들을 한 순간에 잠시동안 보게 되고 그 모든 것이 정당하며 자신의 과거 삶의 결과로써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어 불평 없이 다시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 그러면 또 다른 혼이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