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 출처 ◈
『자기로부터의 혁명』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著
범우사·出版


Ⅵ. 신념(B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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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라는 존재는 무(無)이고 공허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안이나 공포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신념이든 거기에 의존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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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지식은 욕망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두가지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욕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 욕망의 복잡성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받아들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중의
한가지로 신념(Belief)이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나는 여기에서 신념이라는 것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시도해보려고 하는 것은, 왜 우리가 신념을 받아들
이는가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념을 받아들이는 동기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그 문제로부터
해방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종교적 신념이나 민족적 혹은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
의 신념이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대립과 혼란과 적의를 낳게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 같은 신념을 좀처럼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힌두교·기독교·불교의 신념이나 그 밖의 수많은 종파나,
민족적인 신념이나, 또는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따위가 서로 항쟁
하고 상대방을 자기들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신념이라는 것이 인간을 분리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좁게 만들
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념을 갖지 않고는 살수 없을까요?
(이른바 신념이라는 것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것에 의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세계에서 신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 불가능할까요?
신념을 바꾸기도 하고 다른 신념과 대체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순간 순간 새로이 만나기 위하여 모든 신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할까요?
올바른 해답은 이렇습니다!

『 모든 것에 대해서 시시각각으로 신선하게 접촉해 나갈 능력을
갖는 것! 그것은 과거의 가치판단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모든 반응
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나 자신'과 '나의 신변에 있는 것'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입니다.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과거에 축적된 여러가지 영향을 배제
하는 것입니다.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지금 하나의 신념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 『그 욕구가 왜 생겼
는가, 그 이유는 무언인가? ━그 이유의 하나로써 불안을 들 수도 있
다.━』라고 이와 같이 당신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무엇인가의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오늘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우리는 대단히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이 어떤 신념에 바탕을 둔 행동의 유형 ━예를 들면 신(神)·
공산주의·사회주의·제국주의 또는 어떤 종교적 신조나 교리같이
우리를 조건지우는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자신의 존재는 무(無)이고 공허
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안이나 공포를 감추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신념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컵이라는 것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념·교의(敎義)·주의(主義)·인용구 같은 것으로
꽉 차 있는 정신은 실제로는 비창조적인 정신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을 반복하는 정신에 불과합니다.
공허와 고독에 대한 불안, 정체되어 있는 것에 대한 불안, 무엇에
성공한다든가 도달한다든가 이룰 수 없는 데 대한 불안, 인간다운
인간도 아니고 또한 그런 인간이 될 수도 없다는 데 대한 공포…….
이와 같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를 이처럼 열심히
탐욕스럽게 신념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신념을 갖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기는 커녕, 혹은 정치적 신념은 분명히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방해되는 것입니다.
신념은 마치 스크린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됩
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념을 갖지 않고 자신을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신념이나 그 밖의 모든 신념을 제거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뒤에 무언가 보아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자기의 정신과 일정한 신념을 동일화하지 않는다면, 그때
대상과 동일화되지 않는 정신은 정신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
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신념과 지식에 관한 이 문제는 사실 대단히 재미있는 문제입니다.
신념과 지식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얼마나 터무니없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념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나 지적이고, 교양이 높고, 또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즉
정신적일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그 사람의 이해력은 감소되는 것입니
다. 이 현대 사회에 있어서조차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많은 미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중하고 주의 깊고 민감한 인간일수록 쉽게 사물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신념은 인간을 속박하며 고립시킵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정치나 경제세계뿐 아니라 모든 정신 세계에
있어서도 사정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신(神)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지 않습니다.
또 '당신'은 국가가 하는 일이나 모든 개인의 완벽한 통제를 믿고
있는 데 대해서, '나'는 개인 기업이나 그 밖의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유일한 구세주가 있어서 그를 통하여 자기의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당신'과 '나'는 서로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평화·인류의 통일, 또는 공동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신념 자체가 '분리화 작용'을 하기 때문
입니다. '당신'은 브라만교도이며 '나'는 비(非) 브라만교도라든가,
'당신'은 기독교도이며 '나'는 회교도라고 하는 식입니다.
'당신'은 동포애를 말하고, '나'도 같은 동포애나 사랑이나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며 새롭고 행복한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인간
은 어떠한 신념에 의해서도 자기를 결코 고립시키지 않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말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의미의 중요성과 정당성, 그리고 진리를 이해할 때,
이것은 스스로 명확해 질 것입니다.
욕망의 과정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에
의하여 그 사람의 고립화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경제적·정신적·내면적인… 안정을 얻기 위하여
무언인가를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무엇인가를 믿는 사람들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
은 일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일이 있는 동안에만
카돌릭교라든가, 힌두교도라든가, 그 밖의 교도로서 신앙을 갖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편의를 위하여 신념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편의상 우리는 어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경제적인 이유는 무시하고, 우리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사회적 또는 정신적인
무언가를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 신념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안전하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까요?
이 욕구 후에는 반드시 안전 상태를 지속하겠다는 욕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안전의 지속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단지 믿으려고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나 부단한 충동에 대하
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종교(無宗敎)룰 설득하고 있다고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전혀 나의 주안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욕망의 작용이 신념이란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반드시 경쟁이 있고, 투쟁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한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 서로 적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욕망의 작용이 신념이란 형태를 취한 것이며, 또한 그 신념이 내면적
인 마음의 안전에 대한 소망의 표현임을 느끼고 자각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어느
쪽의 신념을 택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고,━ 안전하고 싶다는 욕망
으로부터 내 자신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는다든가 어느 정도로 믿는가 하는 이런 심리는 세계의 모든
일이 이처럼 불확실할 때 심리적으로 안전하고 싶다, 또는 확신을 갖고
싶다라는 내면적인 소망의 단순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서나 의식, 또는 인격은 안전하고 싶다는 이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안전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토지나
재산, 가족 같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신념이라는 벽을 몇 겹이고 쌓아서 내면적·정신적으로 안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벽 자체가 무사했으면 하는 소망을 나타
내는 징후가 바로 그것입니다.
개인으로서 당신은 안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과 소망━이것은 무엇인
가를 믿고 싶다는 욕구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으
면, 우리자신이 투쟁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화해할 마음도 없고, 마음속에서 사랑이 없게 됩
니다. 신념은 파과자입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욕망의 작용 ━그것은 신념에 매달리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과연 '나'와 '자신'을 볼 수 있을까요?
또한 정신이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신념과
대체되는 것을 찾아본다든가 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까요? 당신은 이에 대하여 '예'라든가 '아니오'라든가 말로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의도가 신념으로부터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면,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필연적으로 안전하고 싶다는 충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수단을 구하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지속하리라고 믿고 싶어하
는 안전은 분명히 마음속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하찮은 물건을 지켜준다든가, 당신이
누구를 만나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따위의 일상적인 일까지 보살펴주며 가르쳐주는 신(神)과 같은 존재를
믿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한 생각입니다.
당신은 위대한 아버지인 신(神)이 우리 인간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자신의 개인적 희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것이 진리가아님은 물론입니다.
진리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제 다음은 지식(Knowledge)의 문제입니다.
지식은 진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일까요?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 포함된 의미는 지식이 있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참된 실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
를 연구하고 탐구할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가 대단히 자랑으로 생각
하는 『알고 있다』라는 말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알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일까요?
확실히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조건·기억, 그리고 능력을 기초로 한 정보나 경험을 우리
는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는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이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나 어떤 정보를 인식했다든가, 혹은 당신이 체험한 경험
이 어느 쪽인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단한 정보의 축적이나 여러가지 형식의 지식 획득이
『나는 알고 있다』라는 주장의 내용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놓여 있는 생활 배경이나 욕망, 또는 경험에 따라
당신이 읽은 것을 번역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지식의 경우도 앞에서 말한 욕망의 움직임과 유사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념 대신에 지식을 대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체험했다. 따라서 논박의 여지가 없다.
내 체험은 이런 것이며, 나는 그 체험을 신용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지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지식의 배후에 들어가서 그것을 분석하고 더욱
이지적으로 주의 깊게 보았을 때, 당신의 『나는 알고 있다』라는
주장 자체가 '당신'과 '나'를 분리시키는 또 하나의 장벽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벽의 해부로 피난해서 위안과 안전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지식이라는 무거운 짐을 많이 지게 될수록
정신은 더욱더 이해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지식을 획득한다는 이런 문제를 비롯하여, 『지식은 궁극적으로 우리
가 서로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우리 마음속의
갈등이나 이웃과의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데 더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혹은 『지식이 정신을 야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따위의 문제에 대하여 당신은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야심이란 것은 결국 인간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이 서로 적대
하도록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살려는 생각이 있다면 아무튼 이 야심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욱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야심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복잡하고 유해한 정신적인 야심, 즉 뛰
어난 인간이 되려는 야심도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정신은 이러한 지식을 축적해가는 과정이나 알고 싶다는 욕망
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지식과 신념이라는 이 두가지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을 관찰한다면 대단히 흥미 있는 일입니다.
광범위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을 우리는 대단히 존경하
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의 상상을 투영하지 않은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
거나 체험하고 싶다면, 정신이 자유로워져야만 합니다.
정신은 그 새로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어떤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나 지식이나 기억을 거기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당신은 과거의 낡은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
을 본다든가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제발 이 문제를 일상적으로 흔한 일에다 맞춰가며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어떻게 하면 집을 돌아갈지를 모른
다고 한다면, 나는 방황하겠지요? 또한 기계를 조작할 줄 모른다면,
나는 거의 쓸모 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 내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과 이런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다음 문제는, 우리가 신념이나 지식에 속박되어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즉, 정신은 '어제(yesterday)'
라는 과거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된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까 없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당신은 이 문제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습니까?
개인으로서의 '나'와 '당신'이 이 사회에서 함께 살면서 어떤 일정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성장했을 경우, '나'와 '당신'은 그 신념으로
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또한 정신은 모든 지식이나 그에
수반하는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성전(聖典)이나 종교서적을 읽습니다.
거기에는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어떻게 목적을 달성할 것인
가, 목적이란 무엇인가, 신(神)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자상하
게 쓰여져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외워버릴 정도로 숙독하고 그것을
오늘날까지 실천해왔습니다.
즉, 그것이 당신의 지식이고 당신이 획득하거나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러한 방식에 따라서 사물을 추구해 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참된 실재'일까요?
그것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투영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실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과거의 지식의 투영에 의하지 않고 사실(fact)을 내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here & now ) 당장 인식하여 『나는 그 진실
(truth)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나아가 당신의 정신이 상상이나 투영의 작용에 의하여 손상되지 않도
록 지금 인식한 사실을 지금 즉시로 풀어놓을 수 없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정신은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당신을 신념에 매달리게 한 원인이나 당신을 믿도록 하고 있는
의식적 & 무의식적 동기의 내면적 본질에 관하여 당신이 이해했을 때
입니다.

그때에만 당신은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의식적인 수준에서만 기능을 발휘하는 단순한 표면
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무의식적인 마음에게 기회를 준다
면, 우리는 더 한층 깊은 의식적 활동과 무의식적 활동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면 무의식적인 마음은 의식적인 마음보다 반응이
훨씬 민첩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의식적인 마음이 조용히 생각하
고·듣고·보고 있으면, 그때 무의식적인 마음은 한층 더 활발하고
민감하게 작용해서 감수성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은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무언인가를 믿도록 복종이나 협박 또는 강요를 당한
마음에 과연 자유로운 사고가 허용될 수 있을까요?
또한 그런 마음이 신선하게 사물을 본다든가, 당신과 타인의 고립화
과정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신념은 인간을 결합시킨다』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인류역사상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어떠한 기성의 종교도 지금까지 인간을 결합시킨 일은 없었습니다.
당신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각각 여러가지 신념의 신봉자들인데 과연 서로 사이 좋게 협력
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하찮은 당파나 계급으로 분열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수한 차별이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세계
도처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기독교가 같은 기독교도를 파멸시킨다
든가, 아주 사소한 일로 서로 죽이며 국민을 군대로 끌어들여서 세계
는 전쟁의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신념이나 신앙은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자명하고, 진실이며,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진실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그 진상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입
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속의 불안이나 고독감과 정면으로 부딪치
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뭔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것은 국가든, 계급제도든, 민족주의든, 또는 그리스도와 같은 구세
주든, 아무것이나 좋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런 모든 허위를 간파했을 때, 그것이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것일지라도 정신은 그 진실(truth)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정신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었을지라도, 그 정신은 다시 그곳
으로 되돌아갑니다. 일시적으로 보아도 충분합니다. 순간적으로 볼 수
있어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당신은 마음속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설사 의식쪽이 거부를 해도 무의식적인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은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이 전부(All)
입니다. 만일 의식적 마음이 반응하더라도 그 순간은 그 나름의 결과
를 가져옵니다.

여기에서 다음 문제는 정신이 지식과 신념 쌍방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은 지식과 신념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신의 구조는 신념과 지식 그 자체가 아닐까요?
신념과 자식은 다 같은 인식작용 이고 정신의 중핵(中核)입니다.
그리고 그 작용은 자기 자신을 울타리로 둘러싸는 것이며,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이기도 합니다.
이 정신은 스스로의 구조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또한 정신은 소멸하여 없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은 그 배후에 신념이나 안전하고 싶다
는 욕망·충동 또는 지식, 힘의 축적 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정신이 아무리 강력하고 우수한 것이라 해도,
당신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면, 이 세계에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습
니다. 당신은 평화에 대하여 말하거나 정당을 조직하거나, 옥상 위에
서 소리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당신은 평화를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순을 낳는다든가, 고립화한다든가, 분리한다든가 하는
그 자체가 실은 정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인간이나 진지한 인간은 자기를 고립시킬 수도 없고,
또한 동포애나 평화를 말할수도 없습니다. 성공이라든가 야심이라는
감각은 정치 또는 종교상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진지하게 참된 실상을 발견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지식과 신념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야 합니다.
또한 지식이나 신념의 배후로 돌아가서 안전하고 싶다든가, 안심하고
싶다든가하는,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모든 작용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 ━그것은 진리든, 신(神)이든 어떤 식으로 불러도 상관없
습니다.━이 일어나는 상태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을 획득
한다든가,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 천편일률화·공식화 )을 결코 하
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은 모든 지식을 옆으로 치워버려야 합니다!
지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정신이 '참된 실재'를 이해한다는 것
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실재'는 추측으로, 분석(分析)으로, '머리 굴림'
따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