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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들의 잔치




몸을 가지고 온 신들이 모일 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온 신들이 하는 일은 천기누설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할 시기와 때가 온 것입니다.




  근원적 측면에서 보면 이 우주에는 선과 악,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이란 구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오로지 인간의 마음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으로 인간이 근원적 세상의 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는 세상의 이분법적인 틀에 갇혀 분리된 세상만을 고집하여 집착한다면 업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과보에 따른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늘 자신과 분리된 상대방이라는 생각을 의식함으로서 항상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으로 그 마음을 힘들게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의식수준이 상승하면 남에게 대하는 것이 곧 나에게 대함이요, 남을 해치는 것이 곧 나를 해치는 것임을 알겠기에... 자신이 그 어느 것과도 분리되어 따로 떨어져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상승은 이전에 바라보던 세상의 틀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시야가 넓어져서 어쩌면 틀 자체가 사라지는 전혀 새로운 의식의 열림으로서 새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초석이 됩니다. 고정된 생각의 틀이 사라지고 마음이 열리게 되면 포용력과 수용력이 확대되어 이원적 사고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분별심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세상의 현상을 그냥 바라보게 되고,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조화로움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내 생각이나 판단이 더 보태어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고 그냥 살아가는 것~ 있는 자리에서 최선의 마음으로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도(道) 그 자체입니다. 만일 무엇인가에 도달하려 애쓰고, 따로 배워 알고자 마음을 긴장하려든다면 더욱 더 멀어지는 길이 도(道)인 것이니 따로 얻고 구하려는 ‘내가 없음’을 아는데서 바로 의식이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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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만 본래의 성품에 따라 삶의 순간순간에 몰입이라는 오직 ‘하나의 움직임’을 실천하면서 일체와 하나가 되며, 이 길에서는 정해진 방법이나 틀이 따로 없을 뿐입니다. 있다면 ‘자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환상의 틀에서 벗어남으로서 겉치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라도 ‘내가 있음’에서 비롯한다면 모두가 망상이고, 진실을 떠난 것입니다.

  항상 구별하는 나! 좋고 싫고를 가리는 관성의 마음! 그리고 이것에 집착되어진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일체와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얻고 가지는 모든 것이 허공속의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므로 우리가 어찌 이 큰 허공(대우주)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본래 티 없는 천진스런 본성에 의하면 온 허공이 하나의 본체이며, 모든 현상은 이 안에서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작용일 뿐이어서 아무리 내 것이라는 집착에 몸부림친다 해도 나라는 분리된 생각은 다 허공 속의 일이고, 이 허공을 벗어날 수 없음입니다.

  본래의 마음은 밝고 또 밝기 때문에 또한 본래 스스로 공적(空寂)하여 어떤 법이나 틀에도 매이거나 멈춰서 머무르지 않기에 다만 흐를 뿐입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깨우쳐서 알았다면 본래 비어있어 ‘무심(無心)’인 것을 안 것이며,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그 스승은 나는 본래 없음인 ‘무아성(無我性)’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천진스러운 어린아이와 같은 본래의 맑은 마음인 본성(本性)을 회복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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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불경에서 전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나라도 또한 다 비었다.”라고 한 것이며, 중국의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친견하여 자신의 불법진리의 업적을 인정받고자 했을 때도 달마대사가 “도(道)에는 공덕(功德)이 없다.”라고 한 것이며, 현대의 영적 스승인 간디 또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공(空)으로 돌아간다.” 했고, 그의 제자인 비노바 바베도 스스로의 애칭을 ‘비냐(無:없음)’ 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나는 능히 세계를 건립 한다’라고 말하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 했습니다. 이는 비록 세계를 만든다 해도 마음속에 주관과 객관의 분리된 상을 가지고 있으면 보살이 아닌 것이므로 이는 곧 그 마음에 ‘나’가 있고, ‘너’가 있으면 일체인 하나의 진리로부터 분리가 되어 천측 만측으로 멀어지게 된다는 이치입니다. 모든 진리에 깃들어있는 무아성(無我性)~ 이는 바로 나라는 마음을 내는 데서부터 모든 악이 시작되어 독이 뿜어져 나왔음을 알게 하는 중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마음조차 없는 자리~ 티 없이 맑은 마음이 공적(허공)이고, 본래의 자리이자 하느님의 세계입니다. 우주적 하모니인 이 전체성의 ‘조화로움’속에 살기 위해서는 ‘서로 하나가 된다.’는 공통분모가 진정으로 실현되어져야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자각(自覺)’하는 것입니다. 왜냐, 내 존재의 행위가 바로 ‘위대한 영혼(전체성)’과의 일치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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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의식에 소란한 내용물이 비워지면 우리는 그 순간에 완전히 하나가 되어 몰입된 상태가 됩니다. 매일의 아침을 빈 그릇으로 출발하며, 매순간을 비워두면 그 빈 그릇에 심리적 갈등이 채워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한 번에 하루만 사는 삶’으로서 우주적 하모니인 지혜의 삶입니다.

  집중된 상태에서는 어떤 일을 해도 함이 없는 것이고, 여러 가지 일을 했어도 매번 한 번에 한 가지의 일만 한 것일 뿐으로 이 집중된 상태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종식되고,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초월한 새로운 세상을 사는 셈입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배웠던 최초의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한 번에 하루씩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루’를 연도나 날짜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만 오늘이 생(生)의 마지막인양 그 마음가짐으로 살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시간이라는 틀에 생을 짜 맞추지 않는다는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였습니다.

  겉으로 보여 지는 삶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속의 일이 중요한 것이니 우리 속에 무엇이 있건 그건 전체성속에서의 일이기에 바로 신(神)에게 이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삶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많이 있지만 위대한 영혼은 ‘하나’일 뿐으로 전체성 안에서 모든 만물에는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무아성’에 깃든 이 영혼의 위대성을 결코 져버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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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정신활동 자체가 의식을 이루고, 이 의식의 활동이 ‘자아(自我)’를 형성합니다. 이 ‘자아’ 속에는 언제나 남과 비교하려드는 경쟁심이 있고, 뭔가 되려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욕망을 바탕으로 ‘자기의 상(像)’을 만들어가며 그 지어진 모습에 다시 욕망을 투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삶의 내용 대부분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가 ‘에고’를 강화하는 경험인 셈인데 이 경험들은 존재했다 사라지는 점과 같아 허공 속에서 잠시 산재하여 존재했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성질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걸음! 성큼~ 내딛어 ‘자신의 무아성’을 알고 움직이면 그때 비로소 참된 삶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큰 사랑 속에 하나로 녹아들면서 ‘나’라는 개체적 자아가 사라지는 온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아(自我)는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큰 사랑의 가르침은 어떠한 형상을 지니지 않으므로 ‘무위(無爲)의 법’에는 따로 찾고 구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마음’ 안에서의 일이며, 전체성의 작용일 뿐입니다. 언제나 ‘내가 있다!’는 분리된 생각에서, 그 그릇된 믿음에서 모든 망념이 헤아릴 수도 없이 가지를 쳐온 것이니 ‘본래 없는 나’를 받아들여 단순함 속에서 단순함을 알고, 단순함을 믿고, 단순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그리고 또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 항상 내가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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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오직 제 발밑을 살피고, 정성껏 소중한 생(生)의 발자국을 띄움으로서 자신의 삶에서의 모든 걸음이 하나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개체적인 나는 환영일 뿐이며, ‘무아성’은 언제나 더 높은 힘과 이어지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더 높은 힘’에서 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느낌의 비밀은 ‘겸손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낮추면 자연과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참된 것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며, ‘낮춤’에서 오는 배움은 작은 것이면서도 곧 큰 것이 되는 우주적 접촉을 의미합니다. 특정 종교의 교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음으로 느끼고, 서로를 이롭게 하면서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서로 소통되는 직접적인 실천인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감싸 안아 치료하는 ‘우주적 힘’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분리도 없으며, 이 우주적 힘은 위대한 사랑의 신(神)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왜 그토록 ‘위대한 사랑’이 자기 안을 흐르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있다는 생각에 가리어져 더 큰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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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의 인간의 문명이 오만성을 바탕으로 내적 겸손함을 잃게 하여 모든 부정성들을 불러들여왔던 것이므로 존재하는 것들에 드리워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게 하는 눈을 멀게 하여왔으며, 자신의 무아성에 내재된 ‘신(神)의 빛’을 밝히지 못하고 계속하여 어둠으로 이끌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우리는 어떠한 분리도 없는 ‘본래의 우주적 조화로움’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문명은 바벨탑처럼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기에...

  지구는 지금~ 큰 사랑의 힘에 의해 모든 분리를 넘어서서 하나로 합류할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본래의 세상인 선의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이 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그 자신의 색을 띄우듯이 사람들도 자신의 생에서의 빛깔을 가지고 나름의 아름다운 빛(오로라~)들을 지어낼 일입니다.

  

나를 버리고, 그 어떤 누구와도 비교하지 마십시오.

죽고 사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한 순간, 매 순간 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상대방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상대방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도가 아닙니다.




* 日蓮(날마다 피어나는 연꽃) 스승님께서 앞으로는 더 이상 예언은 안 하시고 글만 나간다고 하십니다. *




2006년 5월 1일 새벽




추신 :

꽃향기와 더불어 5월의 '물빛원고'를 전해 드립니다.




예측불허의 변덕스러운 기후와 몇 차례의 황사 속에서도

신록의 푸른빛은 변함없이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냈습니다.




햇살을 받은 신록은 천국의 입구를 상징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활짝 핀 꽃이 주변으로 만발해있습니다.




꽃향기와 더불어∼

사람에게서도 향기로운 마음들이 주변으로 퍼져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