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자들의 일상적인 질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과학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지만, 질문들의 내용은 "해 봐야 니들이 아는 것이 우주 전체의 지식에 비하면 새발의 피의 헤모글로빈 속에 묶여있는 철원자의 원자핵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데 왜 그러고 사냐"는 얘깁니다.

우선 전제부터 틀렸다는 얘기를 하고 싶군요. 인류가 쌓은 지식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합니다. 단순히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등등에 이르기까지 말이지요. 물론 이런 방대한 지식도 인간과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일 겁니다. 하지만, 분명 1000년 전의 인류보다 현재의 인류는 인간과 우주에 대해 보다 나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이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전보다 많이' 이해하고 있지요.

두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혹은 고의로 구분짓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의 바탕에는 이른바 불가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 수는 없다. 모든 지식에는 오류가 있다." 이게 불가지론이지요. 사실 불가지론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대개 논리적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은 거기서 한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이란 별게 아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들이 깨뜨릴 수 없는 논리적 법칙이라도 발견한 양 뻐기지요.

"우주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별 볼일 없다"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정 반대의 태도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주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도 똑같은 불가지론에서 나오는 태도입니다. 까뮈는 돌이 굴러내려올 줄 알지만 다시 굴려올라가는 시지포스의 얘기를 했습니다. 학자들의 태도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돌을 산 정상에 올려놓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이상, 노력하려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무슨 거창한 철학논리를 가지고 올 것도 없이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조금 아는 것과 많이 아는 것은, 비록 둘 다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닌 경우라고 하더라도, 구분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덧셈 뺄셈도 못하는 유치원생의 수학수준과 위튼의 수학수준을, "우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동일하다고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봐서는 똑같은 수준의 지식"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궤변이고, 만일 본인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어리석음의 소산이요, 본인이 그렇게 믿지 않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본인보다 지적으로 덜 뛰어난 사람들을 그릇된 쪽으로 유도하려는 못된 노력입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서 불가지론('인간의 앎은 완전할 수 없다')은 종종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마비시키려고 하는 고약한 목적하에 의도적으로 퍼뜨려졌습니다. 많은 경우 불가지론은 종교적 도그마와 결합하였고 수많은 자칭 선지자 혹은 깨달은 자들을 양산해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진리를 절대 알 수 없다'라는 관념을 '인간이 아닌 존재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기묘한 명제로 바꾸어서 그들을 따르는 인간들의 합리와 이성을 마비시키고, 답도 없는 '초월'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자신들이 하는 '초월'에 대한 말을 믿도록 했습니다. 라엘리안도 그런 부류의 하나지요. '왜'라는 질문은 금지되고, 초월적 존재의 말씀에 대한 해석만이 존재하며 그렇게 해석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인간의 소명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것이지요.

불가지론은 그렇게 합리적인 사고의 적이 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적은 인류가 노력으로 만든 빛의 문명의 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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