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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세르비아계 프랑스 영화감독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Aleksandar Petrovici)는

세르비아에 사는 집시들의 집단생활을 필름에 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의 한 집시촌에서 그들과 함께 몇 달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자유와 음악에 대한 집시들의 영원한 감수성에 흠뻑 빠졌고 그런 다음 그는 영화 「나는 행복한 집시를만났네(I Eyen Met Happy Gypsies)」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영화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는 1967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집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변화시켜 줄-이 변화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상호 이해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는 그가 알게 된 집시들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에서 자신을 위해 자유를 얼마나 획득할 수 있는가에 인간성의 진정한 기준을 둔다면, 집시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롬(Rom)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시들도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금화 몇 닢 때문에 눈앞에 놓인 즐거움-강렬한 순간-을 희생하는 법이 없다. 그들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들은 뼛속 깊이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즐거움과 고통이 섞인 그들의 암담한 삶에 한줄기 빛을 비춰 준다.
 
집시들과 함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면서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과장 없이

그리고 힘차게 기록한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가 쓴 다음과 같은 짧은 시

집시 에 매혹된 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주여,내세에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면
     집시로 태어나게 해주소서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길을
     택하게 하소서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어서 당신을
     다시 만나렵니다

 
     

실로 오랫동안 집시의 기원과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신비,혹은 무지의 너울에 가려 있었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떠돌아다니는, 거무튀튀한 살갗에 이상한 언어와 습관을 가진 집시의 무리를보면서 사람들은 많은 호기심을 가졌고 그들의 수수께끼를 푸느라 갖가지 억지스러운 생각을 짜내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에 힘입어 그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렸지만그래도 여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나도는 형편이다.

집시들의 영혼의 고향은 방랑이다. 인도에서 비롯되어 늘 위험을 안은 채 미지를 향해 끝없이 떠도는 그들의 사연을전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신의 노여움을 샀으며 신은 사나운 바람을 보내 인간과 말과 마차들을 모조리 흩날려 버렸다. 폭풍이 멎자 주위를 들러본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들은 낯선 땅,낮선 이들 틈에 섞여 있었고 고향이 어디였는지 또는 당초 고향이란 게 있기나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집시의 기원이 인도라는 점에는 의문을 갖고 있지 않지만 '집시족 선사시대' 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집시의 언어인 로마니(Romany)는 금세기 이전까지 아무런 표기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인더스 강중류에서 상류, 바꾸어 말한다면 서북부 찬디가르를 포함하는 펀자브에서 카슈미르 일대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하층민들이 전쟁이나 기근과 같은 어떤 이유로 서쪽으로 집단적인 이주를 한 것은 5~6세기경이라고한다.


집시들이 서쪽으로 이주한 뒤부터 집시에 대한 다소 신빙성 있는 기록이 전설과 역사가 뒤전인 두 권의 페르시아 문헌에 처음으로 약간씩 나타나고 있다 10세기경 이스파한의 역사가 함자는페르시아에 1만2,000명의 '조트 악사들이 들어왔다고기록하고있다. 반세기 뒤 페르시아 최대의 민족 시인 페르도우시도 그의 서사시 「제왕기」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부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머리에 꽃을 장식하고 악기 소리에 둘러싸여 있어서 음악도 꽃도 없는 우리 가난한 사람의 일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 이런 백성의 불평을 들은 왕은 인도에서 류트(lute)에 능한 루르족 남녀 1만 명을 불러들여 음악 부족으로 정착시키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보니, 각자에게 소와 당나귀 1마리씩과 당나귀 1,000마리 분의 밀을 주었는데도 영양 결핍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대신에 소도 씨앗도 먹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왕은 말했다. "남은 당나귀에 짐을 싣고 악기를 가지고 비단 현(絃)을 매고 나가라." 이리하여 그들은 지금도 개나 이리를 벗 삼고 거리에서 도둑질을 하면서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그 당시 페르시아엔 인도에서 온,음악에 아주 재주가 뛰어난 집시들이 많이 있었다는사실과,그들이 이미 농경생활을 싫어하고 유랑을즐기는 악사로서 때로는 도둑질도 했음을 보여 준다.


오랫동안 페르시아,터키,그리스등지에서 악사,점쟁이,대장장이 등을하며 지내고 있던 그들이 또다시 행동을개시한 것이 14세기 중엽이었다.  1348년 세르비아근처에 첸가리에라고 불리던 제철공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발칸 반도를 북상할 때의 그들의 이동은 매우 신속해서, 북으로는 1418년경 보헤미아와 함부르크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1427년 파리에, 그리고 1440년경에는 어느새 영국에 건너가 있었다. 그때부터 유럽에는 집시들이 등장하는 문헌이 아주 많아지는데, 세익스피어의 몇몇 작품속에 집시와 관계있는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오셀로(OtHello)』에는 오셀로가 애정의 표시로 장차 비극의 씨앗이 될 손수건을 데스데모나에게 주면서, "이 손수건은 옛날에 한 '이집트사람이 어머니에게 주었던 것인데 어머니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소."라고 말을 한다. 세익스피어도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피부가 검었던 집시들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믿었다.


집시라는 영어 호칭은 에스파냐어의 '히따노(Gitano)', 프랑스어의 '지땅(Gitan)', 이탈리아의 '징가로(Tingaγo)'와마찬가지로 '이집트인 에서 온말이다. 즉 'Egyptian(이집트인)'의 두음소실에 의한 변형 'Gicyan'이 'Gipcy'가 되고 이것이 다시 'Gypsy' 혹은 'Gipsy'가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발칸~터키 일대에서는 그들을 '찌간(Tzigane)'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밑바닥 천민' 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싱가노이(Acinganoi)' 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집시 자신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롬(로마어로 사람이라는 뜻)' 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사응하는 '로마니어' 가 저 멀리 동쪽에 있는 코카서스나 서아시아, 그리고 북부 인도의 산스크리트 계통의 언어와 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이집트나 그리스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1427년 8월 집시들은 당시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호기심에 찬 군중들에게 에워싸여 3주 동안 성 드니 성당에서 천막을 치고살았다. 그러자 곧 그들을 둘러싸고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용한 집시 점쟁이들에게 손금을 보는사이에 지값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에 파리 주교는 속기 쉽고 미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꾸짖었으며, 집시들은 어쩔 수 없이 파리에서 쫓겨나 퐁투아즈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자 온 프랑스 땅에 집시들의 발길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에스파냐의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 가는 듯 가장하여 아라곤과 카탈루니아를 거쳐 카스티야를 지나 안달루시아에 도착했다.

 

 

1501년 무렵 일부의 집시 무리가 남부 러시아로 이동했으며 다른 일부는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갔다. 1721년 그들은 드디어 시베리아의 수도 토볼스크에 다다랐다. 그들은 중국에까지 들어가려 했으나 총독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못했다.


이리하여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집시들의 발길은 유럽의 거의 모든나라에 닿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중세 파리의 혼잡한 군중들 틈에서 자신의 인생처럼 짧고 격정적인 춤을 추는 에스메랄다(「노뜨르담의 꼽추」)와 투우사와 눈이 맞아 첫 애인을 버리고 끝내는 자신이버린 애인의 손에 죽고 마는,라틴어로 '시' , '노래' ,'예언' 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정열적인 여인 까르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유랑하는 민족' 이라고 하지만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의 경우처럼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정주하고 있는 집시들도 적지 않다. 집시 사회에서는그들을 '께렝게(정착 집시들)' 라고부르며 께렝게는 유랑 집시들(드로멩게)을 얕본다. 프랑스에서는 집시의 절반이상이 아직도 유랑생활을 하고 있으나 1,000~l,200만으로 추산되는 집시 전체를 놓고볼 때 드로멩게는 현재 유럽의 집시들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방랑을하고 있는 집시의 생활 단위는가족이며 그것이 몇 개 모인 꿈빠니아라는 집단으로 이동한다. 특히 발칸 일대에서 지중해 연안에 걸친 지역을 여행해 보면 지금 이곳저곳에서 집시 특유의 마차 행렬이나 텐트촌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하여 서구권에서는 반정착화한 상당수의 집시들이 마차 대신에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그 중에는 비행기로 가축 등의 거래를 위해 돌아다니는사람도 있다고 설명한다.


몇 세기 전에 인도를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된 집시들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집시 의식' 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의식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된 본고장 토박이들의 태도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 이다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집시와 유대인은 같은 신세였다. 가난한 유랑민으로서 정착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질병, 전쟁 등 재앙이 있으면 악역을 뒤집어쓰는 희생양 노릇을 하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17세기 이후 교육을 받으며 정착 사회에 동화할 뿐만 아니라 산업 사회로의 전환에 앞장서는 역할을 많이 맡은 반면 집시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화를 거부하고 있다.


집시들은 스스로를 '롬'이라 부르며 외부인은 '가조스(Gadjos 혹은 갓제)'로 구분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집시들은 가조스와의 접촉을 극히 두려워한다. 가조스는 '불순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념은 청결성을 기준으로한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가조스와 접촉하면 '오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집시의 속성으로 보아 인도의 하층민(하리잔)출신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무사계급(크샤트리아)이라 주장하며 유난히 청결성을 강조하는 집시들의 자존심도 그럴싸한 면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2차 대전 후 집시 문화가 외부에 소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폴란드 집시,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파푸사바로 가조스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했다는사실 때문에 집단에서 추방당해 30여년간 '죽음보다 못한 고독' 속의 삶을 살아야 했다. 파푸사의 노래가 집시에 대한 일부 가조스의 이해를 얻어 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산 정권의 강제적 동화 정책에도 공헌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파푸사의 '유죄'를 수긍할 수 없는 것도아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집시들은 구걸하거나 도둑질을 함으로씨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방랑자들,또는그저 일만 하다가 죽어가기에 꼭 알맞은노예들 정도로 취급받았다. 아닌게 아니라 유럽 쪽의 규범으로 따질 때 집시의 행동은 '범죄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태반은 유럽 정주민과 이동하는 민족으로서의 집시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 체계생활 감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거기에 몇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가해진 박해의 역사가 그들 간의 틈을 더욱 벌어지게 했다. 말하자면 집시의 범죄와 그들 사회의 폐쇄성은,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가조스에 대한 자기방어인 것이다.


집시들의 좀도둑질은 가난과 궁핍 때문이었는데, 그날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획득해 온다는 행위는 설혹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범죄' 로 간주되는 일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허응될 수 있는 생계 수단이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발달한 사적 소유 개념과는 달리,각지를 돌아다니는 그들의 감각에서 볼 때 사회 전체는 공공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시들은 필요 이상의 것을 굳이 구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유럽 사회보다도 훨씬 엄격한 척도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알렌산다르 페트로비치는 말한다.
 
집시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개인적인 이익에 덜 집착하고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어쩌면 덜 '합리적' 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부름-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에 더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집시들이 어느누구보다도 세상의 아름다움과 고통에 대해 더 예민하고 불행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다

 

결코 꺾이지 않는 인내심에 힘입집시들은 기나긴 유랑생활속에서도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랑생활을 통해 가지각색의 민족들과 접촉했지만 결코 '집시다움 을 잃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집시들이 물질,곧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이나 사회적, 인간적인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집시들은 끊임없이 자기 모습 그대로의 유랑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집시들은유럽에 나타난 뒤 600년 동안 대체로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직업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아왔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파급되고 자동차와 농기구의 사용이 늘어나자 많은 집시들이 자기의 전통적인 직업을 포기한 채 공장노동자가 되거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철새마냥 계절에 따른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집시들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으나 그 대부분은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라우따리(음악가들), 아르긴따리(보석상들), 볼데니 (꽃장수들), 그라스타리(말 거래꾼들),우르사리(곰 조련사들)등이다. 일반적으로 집시 사회에서는 라우따리와 아르긴따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직업이다.


그렇다면 '집시 바이올린'의 전설은 언제 생겨났으며, 어떻게 발전해 온 것일까?

이 물음에 짧은 말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듣는 바이을린과 침발롬(Cimbalom) 중심의 집시 앙상블의 전형적인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무렵으로 짐작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스와 인접한 루마니아 공국,세르비아 등지에서 오랫동안 머문 후 많은 집시들이 서쪽으로 이동을 개시한 것은 1400년경이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서로 뺏고 빼앗기던 전쟁지역에서 집시들의 안전이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속을 빠져나온 대규모 집시들 무리가 헝가리와 보헤미아 지역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1418년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예술가,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보헤미안(Bohemian)' 이란 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다. 보헤미안은 보헤미아 지역에 살던 집시들을가리키는말이었다.


그런데 어느사이엔가 '찌간 또는 '시가니'라는 이름 을가진 가문에 귀족 칭호가 주어졌다는 것은 약삭빠르게도 집시 개개인이 그 지역의 권력층에 완전히 통합되었거나 밀착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집시는 음악,보석 세공,사금 채취,말 사육과 같은 활동을 좋아했는데 그로 말미암아그들은 봉건 영주,집시아닌 마을,군대 및 그밖의 다른사회, 문화적 조직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강력하고 잠재력 있는 집시들의 직업을 보호하고 문화,경제,사회적으로 실현성 있는 일을 이용하려는 욕망과 어우러진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차츰 동화되어 간 것이다. 특히 헝가리는 일찍부터 이방인 자유 정착을 허용, 집시들에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현재 헝가리는 인구 1,300만 명 중 10분의 1인 100여만 명이 외국인이고그 중 80만이 집시다.


 

 

**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한 현()의 떨림이 듣는 이의 영혼을 매혹시킨다 특히 집시 앙상블이 연주하는 「찌고이네르바이젠 Zigoeunerweisen)」은 집시 음악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Andras Farkas jr & Ensemble, "Beliebte Jngarische Zigeunerweisen Famous Hunggrian Gipsy Tunesy (EUCDl133, USA)
 
** 집시들은 어떤 나라도 자기들의 모국이 아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악기를 사용하여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인 음악 언어를 만들어 냈다 터키에 뿌리내린 집시 앙상블을 통해서 집시 음악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The Erkose Ensemble「Tzigana」 The Gypsy Muslc of Turkey (CMP Records CD 3010, Turkey)



자손이 많고 생명력 또한 끈질긴 역사 오랜 민족 집시. 이들은 죽음에 맞서 싸웠으나, 원수의 잔인함과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경에 처할 때마다 음악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각지에 흩어진 그들에게 공통된 음악적 유산은 즉흥성이라든지 템포 잡기와 같은 기법을 빼놓고는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다. 마치 그들은 본래의 민족 의상이 없어-여자들은 원래 실을잣지도 길쌈을 하지도 않았다-각지에서 적당히 헌옷을 조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각지에서 그 고장 사람들의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기네들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창조 능력은 부족해도 차용과 재창조의 명수라는 점에서 다른 민족은 도저히 따르지 못할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전형적인 예가 집시들의 음악과 악기이다


그리스를 거쳐 동유럽으로 갓들어갔을 무렵의 집시들은 오스만제국의 지배 내지 영향 아래 있던 발칸에서 그 고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관악기주르나 (Zuma: 차르멜라 계통의 피리), 타악기인 다불(Davul)과 같은 기본적인 편성에 의한 앙상블을 조직하여 악사로 활동했다


어느 기록에는 헝가리의 왕 마티아스 1세의 궁정이 15세기 말에 독일,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음악가를 초빙했을 때 류트(터키의 우드) 연주자 중 몇 사람의 찌간이 참가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 당시 헝가리의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해 있었으므로 헝가리의 집시 음악은 모두 동방 기원인 오스만,마자르(헝가리 민족)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 전에는 아랍음악의 영향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 이외의 것,즉 악기, 기법,관현 악법,화성 붙임 등은 그들이 토착화해 가기 위해 고용주의 마음에 들도록 서양에서 차용해 온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유럽에서 집시들에 의해 처음 선보인 악기가 현재 집시 앙상블에서 바이올린과 함께 빠뜨릴 수 없는 존재가 된 침발롬(덜시머, 양금)이다. 1543년 헝가리를 여행했던 한 여행자의 기록은 "파라오의 자손들. 즉 찌간들이 현을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고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나무로 만든 가느다란 막대기를 써서 연주한다. "고 전한다. 집시들이 이란에서 '산투르(Santur)'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산투르는 원래는 그리스의 현악기 '프살테리온(Psalterion)' 이 변형된 것인데, 이것이 집시와 함께 비잔틴 제국에 들어와 '산투리(SanTuri)' 라고 불렸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중앙 유럽으로 이동한 후 어째서 이 악기의 이름을 쳄발로(Cembalo)와 같은 라틴어 기원의 침발롬으로 바꾸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침발롬은 그후 1870년대에 부다페스트의 요제프 슌다가 대형 에다 크로매틱(chromatic: 반음계식)하며 페달까지 달린 형태로 개량하였다. 이것이 급속하게 보급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바이올린이 집시 앙상블의 주역이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유럽 일대를 지배하게 될 무렵부터 이다. 그때까지 현악기를 거의 구경하지 못했던 집시들도 비로소 이것을 애용하게 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헝가리 귀족들은 바이올린을 천한 악기라 하여 자신의 손으로는 이것을 연주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궁중의 집시 악사에게 맡겨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집시 바이올린의 전설을 낳게 된 것이다


이미 17,18세기 무렵 헝가리무도회,축제,농가의 결혼식 ,마을의 선술집(차르다)에서 찌간의 존재는 왕의 궁중이나 영주들의 저택에서와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바이을린은 집시 앙상블의 주역이 되었는데 집시 앙상블은 원칙적으로 두 대의 바이올린과 베이스 하나,침발롬 하나로 구성된다

 

프랑스의 집시 학자 프랑수아 드 보 드 포르띠에(Francois de vaux de Foletier)의 『집시 천년사(Les Bohemiens eu France au Xixe)』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성악, 기악을 불문하고 집시 음악이 여러 사회 환경 속에서 가장 충실하고도 열렬한 청중을 계속해서 획득하고 있는 곳은 중부 및 동부 유럽이다 " 실제로 유럽에서 집시 앙상블의 인기는 대단했다. 헝가리 태생의 음악가 리스트루마니아를 방문하고 당시 그 지역에서 일인자로 알려진 집시 바이올린 연주자 발브 라우따르를 만나 그의 천재적인 기억력과 초절적인 연주력에 크게 놀랐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는 1846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밖에도 여성인 칭카 판나(Czinka Panna)를 비롯해 야노슈 비하리(Janos Bihari), 야노슈 라보타, 안탈 체르마크, 에두아르드 레메니 등의 밴드 리드 겸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빈이나 파리 등 유럽 각지의 도시에 초대되어 큰 환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집시 앙상블의 원형을 확립하여 그 지위를 높임과 동시에 헝가리 민속음악으로서의 차르다시(Csardas)와 베르분코시(Verbunkos) 등의 무곡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야노슈 비하리였다. 국내외를 통한 그의 초인적인 활약과 그 누구도 재현할 수 없는 초절적인 기교에 대하여 헝가리의 황제가 귀족의 칭호를 내리려 하자 그는 "악단원들에게 함께 주시는 것이 아니면 사양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한다. 연대감이 강한 집시의 기질을보여 주는 예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집시 음악이야말로 헝가리의 음악이라는 서양 음악사의 이른바 '기념비적인 오류' 가 비롯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이다. 헝가리 태생인 리스트조차도헝가리안 랩소디(Hungarian Rhapsody)」를 쓰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집시풍의 음계(증2도를 갖는 동양풍의 음계)나 속도법,강약법을 채용했으니까. 실제로 리스트가 죽기 전부터 헝가리 음악계는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한 무리는 집시풍의 차르다시나 베르분코시를 벗어나지 못한 궁정 음악 작곡가들이었고, 나머지 한 무리는 스스로 위대한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었다.

 


** 차르다시 헝가리 농민들의 선술집 자르다에서 발전해 온 4분의 2박자의 무곡으로 혈식은 대징적인 성격을 지니는 느린 라슈(lassu)와 빠른 프리슈카(friska)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베르분코시 18세기에 들어와 탄생한 신병 모집응 이벤트에서 연주되던 무곡이다.

 

이러한 음악계의 갈등은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와 코다이(Zoltan Kodaly)에게 민속 음악이 갖는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집시가 들어오기 이전의 고대 마자르 민족이 아시아로부터 보존한 유산을 찾아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전역을 누비고 다녔던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해 순수한 마자르의 민속 음악이 헝가리의 문화생활에서 되살아났다.


원래 집시들은 음악을 순수하게 오락만을 위해서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반드시 그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어떤 분명한 의미가담겨 있었다. 이에 반하여 그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가조스를 즐겁게 해주고 보수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볼 수 있다. 집시들은 의외로 바이올린도 기타도, 악기다운 악기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농촌에서 방랑하는집시들중 일부는 악기 없이,그러니까 반주도 없이 집시 본래의 언어(로마니)로 단선율의 노래를 부른다. 가사에는 의미 없는 음절이 많이 사용되고 악기 대신에 입,손,발을 사용하여 내는 각종 음을 반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도시에 사는 집시는 독자적인 언어를 상실하고 바이올린, 침발롬,클라리넷 등의 서양 악기를 쓰며 노래나 기악도 거의 가조스의 기호에 맞추어서 연주한다. 대개는 레스토랑이나술집에서 악사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자기네의 문화 양식을 그런대로 충실하게 지켜 온 집시들은 거의 예외 없이 문맹자들이다. 물론 읽고 쓰기를 배워 자유 직종 가운데 직업을 얻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집시들도 있고,지난해 우리나라를 다녀간 로비 라카토쉬처럼 집시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은 음악가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집시 음악가들처럼 전설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나 집시 킹스(Gipsy Kings), 로비 라카토쉬(Roby Lakatos)에게 음악은 빈곤과 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유일한 탈출구이자 가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시들은 예외 없이 자신이 사는 사회를 훨씬 초월하려는 욕구,곧 집시 사회가 아닌 곳에서 집시가 되고자 하는 욕구, 집시로서의 특수성을 드러내 보이는 욕구들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 같은 문화적인 특수성이 거주국이나 거주지에 관계없이 그들을 집시 아닌 사회와 떼어 놓고 있는 것이다.

 

아마 로비 라카토쉬의 공연을 본사람이라면 그네들이 머물던 천막과 마차로 부터 걸어 나와 바로 예술의전당 무대 위로 올라온 집시들을 만날수 있었으리라. 음반을 통해 익숙한 음악이었지만 앙상블의 리더인 로비 라카토쉬를 중심으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일사불란하고 완벽한 연주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정형화된 그들의 무곡 차르다시에서, 전반의 느릿한 템포 라슈로 정서가 풍부하면서도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는가 하면,후반에는 일전(一轉)해서 급속한 프리슈카로 들어가 격렬하고 열정적인 리듬이 숨도 쉴 수 없는 박력으로 다가오는,완급자재(緩急自在)의 기술적 정확함을 갖는 연주는 하나의 경이 였다고나 할까. 더구나 그들은 다른 대부분의 집시 음악가들처럼 악보를 쓰지 않고 그때그때의 장소와 분위기에 맞추어 모든 정열과 모든 감정을 담은 그들 나름의 즉흥 언어로 말할줄 알았다. '헝가리의 집시는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태어난다.' 는 말은 음악적 천재에 대한 절대적인 본보기를 제공하는 말이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는 천재를 이렇게 규정했다. "힘과 풍부함,그 어떤 무례함,불규칙성,숭고함, 비장감, 이런 것들이 예술에서 천재의 특성을 이룬다. 그는미약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놀라게 하면서 다가온다. " 그렇다면 음악적 천재들에게 악보라는 선택된 땅을 지정해 주는 것은 천재성을 강제로 한정하는 것일 따름이다.


해와 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영원히 갈 수 있는 자유인 집시들은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귀를 기울여 주기만하면 언제 어디서든그들이 지닌 비범한 능력을 통해 세계 여러 민족들의 무한히 다양한 언어, 관습을 초월하, 공통된 인간성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

 

 

http://blog.daum.net/soonryeja/44

<집시의 시간> 소외된 자들의 삶의 점철 (에밀 쿠스트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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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201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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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jangsburg/150118972609세상은 아이러니한 게 1

세상은 아이러니한 게 1|작성자 Godigisel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있는데 말이여 

예를 들어 비인도적인 행위를 말해보자구

 

오늘날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거에는 세간은 미친듯이 집중포화를 하고 부각시킨다.

그러나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집시족에 대해서는 한 마디 불쌍함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유대인 학살 스코어에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나, 확실한 건 종족 절멸 위기까지 안 왔다는 거지.

그 당시 유대인 인구가 600만 명 정도고,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럽 유대인들을 죽였다면서 1950년도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유대인이 600만 명이라는 아이러니.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도 안 가르쳐준다.

유대인이 그렇게 번식력이 뛰어났나?

아님 그놈들은 전 세계 모든 유대인들과 네트워크를 지녔냐?

일반 농민들도 노동자들도 그런 네트워크에 참여가 가능했냐?

 

아니, 그것보다는 집시족이 유대인 다음으로 죽었고, 걔네들은 종족 절멸 위기까지 몰렸다는데

(독일 동맹국들, 특히 동유럽권은 유대인보다 집시를 더 혐오해서 집시 처리를 나치에게 부탁)

 더군다나 집시는 최근까지 동유럽에서 천대받고 강제 추방당했는데도

어느 누구도 관심을 안 가지고 그냥 더럽거나 낭만의 민족으로만 아네?

 

또한 전후 즉시 나온 기록에는 나치독일인의 유대인 학살보다는

폴란드인 탄압(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동유럽 수용소 기준)을 더 즐겼다는데,

왜 50년대 이후부터는 그런 기록이 사라졌는강?

 

 안네의 일기(안네의 일기는 2차 대전 말기 수용소의 모습을 묘사)가 나오면서부터 

동유럽 수용소에서의 폴란드인 탄압은 언급을 거의 안 하드라?

해봤자 폴란드계 유대인이지? 초창기 유대인 기록보면 나치 수용소 병사들이 폴란드인하고 유대인이 싸우면

유대인 편들어주거나 유대인들에게 빵 하나 더 준다고 그랬는데, 그런 기록들이 언제부터인가 세간에 지워지더라.

 

완전히 유대인들만 피해자로 보고, 나머지 민족은 유대인보다 '덜' 피해입은 민족으로 묘사된다네.

그래서인지 동유럽애들이 유대인들을 싫어하는 거냐?

폴란드는 나치가 정복한 지역 중에 유일하게 황폐화된 걸로 묘사될 정도로 독일애들에게 얻어터졌는데도 모두들 기억 안 함요.

 

참 더러운 아이러니지.

미국의 지속적인 인디언 탄압과 학살(오늘날에도 지속되는 듯이 주장하는 반미주의자들이 있다)에 대해서는

한 마디 안하고(도리어 미국 자체에서 뭐라고 하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소련의 세계대전 이후 갑작스러운 유대인 대학살과 타민족 탄압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거의 신성불가침영역처럼 묘사하는 놈들도 더러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도 없다.

좋다. 미국은 오늘날의 패자고, 소련은 과거의 넘버 투였고,

중국은 오늘날의 넘버 투이며 터키는 우리의 혈맹이라고 치자. 뭐, 현실을 가혹한 거니깐.

그래도 좀 아는 사람들이라도 세상의 아이러니를 알면서 이들을 상대하지.

 

글구 어쨌거나 말이야

왜 세상은 현재진행형으로 진행 중인 소수민족 및 자국민 탄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하냐

맨날 인디언 학살, 유대인 학살, 유고슬라비아 인종 학살 같은 옛날 일만 언급하지

오늘날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뭐이리 말을 아끼냐?

그래, 국제관계가 무섭다면 이해라도 하지. 말 잘못했다가는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만

 

그렇다고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지는 북괴니스탄 인권 상황과 핵돼지 가문의 븅신 짓을 말이야

누구처럼 같은 핏줄이라고 역대 자국민 학살 스코어 넘버 원을 향해 다가가는 미치광이 古핵돼지父와 現핵돼지子,

글구 그놈의 꼬마 핵돼지를 옹호하고 비호하는 미치광이들은 또 뭐냐.

왜 우린 같은 핏줄이라고  유전학적으로 증명됐냐? 그냥 풍습 비슷하고 말이 비슷하니 형제로 쳐주잖아.

그럼 독일인들은 같은 핏줄인 히틀러 욕하면 안 되겄다?  히틀러면 고조부, 증조부 이상은 되니!!!

뭐? 히틀러는 오늘날 독일인하고 핏줄이 달라? 오스트리아인은 독일인 아니라고?

멍청아, 그 두 국가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말을 쓰며 풍습도 같다는 걸 누가 모르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인과 북괴니스탄인은 핏줄이 다르지 않냐?

뭐? 그건 그거라고? 히틀러 시대 때는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이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쇼를 해라이-_-*

베릭

2012.05.20
18:03:21
(*.135.10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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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부엉이바위의 눈물뿐이랴.

멀게는 일제와 미군정 지배하에서 희생됐던 민간인들,

가깝게는 민주화운동이나 생존권 투쟁을 벌이다 스러져간 무명씨들.

그들의 절규가 잊혀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는 지난 5월 22일부터 이틀간 ‘글로컬 평화인문학’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폭력·기억·사회정의’를 제1세션 주제로 다뤘다.

여기서 ‘기억투쟁’으로 주제 발표를 한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의 발제문과

이와 관련된 종합토론 내용을 간추려 싣는다. 편집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기억투쟁’

발표/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
 
한국은 서양 근대사와 관련해 에릭 홉스봄이 언급한 ‘이중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국가에 해당한다.

민주화에 성공했고, 산업화도 이뤘다. 하지만 그 경제성장이 불안정성을 내포한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화도 정치적 이념을 둘러싼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정체성의 중심에 놓인 것이 과거 청산 문제다.

지금 집권 여당은 의회에서 과거사 청산 관련 법안 수정을 기도하고 있다.

권력의 망각 시도에 맞선 ‘기억 문화’

 민주화가 타협의 결과로 달성되면서, 과거 청산은 불완전한 형태로 진행됐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국가권력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고,

이것은 국민들 속에 공식적인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권력은 특정한 기억을 보존하고, 특정한 기억을 망각 속으로 묻어버리려는 집요한 시도를 했다.

국가가 만들어낸 공식적인 기억에 저항하고 이를 민주화운동이 간직해온 비공식적인 기억으로 대체하려는

본격적인 노력이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의해 지난 10년간 적극적으로 추진돼온 이런 움직임은 ‘기억투쟁’ 담론으로 불린다.
 

2001년 결성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제 과거 청산 작업이 진실 규명과 배상을 넘어 정당한

‘기억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본격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이런 제도화 과정은 과거 청산과 기억투쟁이 좀더 본격적인 발전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를 둘러싼 많은 갈등과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선 기억투쟁이 제도화되고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념사업이 관료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또한 국가나 지방정부와 민간단체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누구의 기억이 공적 영역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벌어지게 된다.

 

광주 민중항쟁의 경우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이룬 큰 사건이지만

광주에 대한 기억투쟁은 그 지역민의 축제로 남은 채, 국가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군부독재가 의도적으로 확산시킨 지역갈등의 메커니즘에 의해

기억투쟁 자체가 그 왜곡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제도화 단계 이후에 생긴 또 다른 문제점은 피해자 집단과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민주화운동을 ‘희생자 및 그를 둘러싼 과거 기억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

보다 보편적인 국민의 기억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사이의 미묘한 각축전이었다. .

국가주의로 왜곡된 기념 공간 구성

 기억투쟁은 정치운동일뿐 아니라 문화운동이기도 하다.

아직도 진실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들을 국가정보원이나 경찰과 같은 정보기관이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고,

피해자나 참여자의 증언 채록도 더 필요한 실정이다.

 

그렇더라도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기억문화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

민주화운동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

즉 과거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의 표준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표준화에 맞서 대항기억을 표현하고, 대안적인 상징을 형상화하려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증언, 의례, 기념일 제정, 기념물 조성 등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기억투쟁의 방식은 개인적 실존의 의미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기억을 재현할 것인지가 중요한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문화가

어떻게 좀더 국민에게 가까이 갈 것인가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 외에도

그동안 부산, 광주 등에서 건립된 기념물이나 기념문화가 지닌 문제점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미 건립된 민주화운동의 기념공간,

예를 들면 4·19 묘지, 부마항쟁 기념공원 그리고 5·18 광주항쟁의 기념공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국가권력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기념물이지만

군부독재 치하에서 건립한 국가주의적 기념관의 구성 원리를

그대로 반복해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의 거대한 기념탑과 좌우 대칭형의 공간 구성, 제단의 위계적 배열 등이 그대로 드러나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거대주의, 국가주의, 과도한 민족주의, 남성주의, 획일주의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독재에 대한 침묵 환기 시켜야

 우리의 기억투쟁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기억문화는 세 가지 차원을 포괄해야 한다.

첫 번째는 독재와 억압의 역사다. 과거의 지배세력이 만들어낸 기억 속에서

지도자의 학살과 부패는 주변화되고, 독재자는 미화됐다.

독재와 억압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독재자의 잔혹성과 피해자의 고통을 알려야 한다.

 

둘째는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투쟁과 아름다운 희생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셋째는 독재와 억압에 대한 침묵을 환기하는 일이다.

독재와 인권 탄압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침묵과 방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문화는 대중이 방관의 역사적 책임을 공유하게 해야 한다.

기념의 핵심은 계승이다. 한국의 기념사업은

교육사업과 세대 간 경험의 계승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기억투쟁을 주도하는 조직들은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화운동 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종합토론 요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하고 미래와 관련시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역사 교육을 통해 과거 세대의 억눌렀던 경험을 되살리는 기억의 정치화 작업이 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과거의 중요한 문제라고 하지만,

현재의 문제보다 중요하진 않기 때문이다. 공감의 문제다.

과거의 기억을 과거의 일만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면,

현재와 미래와 어떻게 관계돼 있는지 연결해주는 것이 공감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문제는 모든 문제를 개인화·현재화한다.

현재의 문제와 과거의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차단하고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공감이다.

경험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공동 경험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

과거에 있었던 폭력이 현재 되살아나고 있는 상황이다.

폭력의 희생자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과 같은 과거의 경험을,

지금 진행되는 폭력의 문제를 경험하는 속에서 기억하고 연결하며 공감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교사와 역사학자들의 임무다.


 

청중: 비주류의 기억, 개인적인 기억을 끌어올리고 교육현장으로 옮겨놓으면,

결국 그것은 주류의 기억이 되면서 의미를 상실하고 획일화되는 것 아닌가?

동아공동체라는 것이 결국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 공동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김동춘 교수: 기억이 정치화·독점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광주의 기억이 광주에서 주류가 되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

기억이 주류가 되면서 생기는 폭력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기억의 인간화·보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미래를 말하면서 과거의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이다.

평화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관계와 소통 방법을 좀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의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라스 람브레히트 함부르크대 교수: 기억 문제에 관한 제안을 하겠다.

한 가지 종류의 획일적인 기억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기억의 내용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승자와 패자, 다수자와 소수자의 기억이 다르다.

 

베를린의회 앞에 홀로코스트 기념물이 세워졌다.

그러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던 집시족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동성애자들도 자신들의 기념물을 세우겠다는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폴란드 지역에서 독일로 추방됐던 사람들이 실향민으로서

자신들을 기억하는 기념관을 세워달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기억이 각 그룹의 투쟁으로 전화된 경험이 있다.


 정리 한광덕 국내 편집장 kdhan@ilemonde.com

 

 

별을계승하는자

2012.05.22
15:55:57
(*.113.21.164)

헐 저에게 딱 필요한 자료입니다!!!안그래도 소설 작업에 집시들이 나와서.....베릭님하 감사.ㅠㅠ

베릭

2012.05.22
18:36:09
(*.135.108.108)
profile

이 자료를 찾아올리면서 별을계승하는자님이 가장 많이 떠올랐습니다. ^  ^

집시들의 자유로운 정신과 열정적 삶의 패턴이 님과 많이 닮았고

특히  현재의 님의 삶은  지적인 보헤미안스타일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상상해보았습니다.

 

**********************************

오늘날에는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예술가,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보헤미안(Bohemian)' 이란 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다. 보헤미안은 보헤미아 지역에 살던 집시들을가리키는말이었다.

별을계승하는자

2012.05.22
18:37:25
(*.113.21.164)

보보스 사상에 심취했던적이있습니다.....너무좋은자료감사합니다 시간을두고두고 숙독해야할거같아요.^^

베릭

2012.05.22
18:47:24
(*.135.108.108)
profile

그랬었군요~~ 보보스!

 

********************************

http://cafe.daum.net/bluelovecbnh/IRuq/6?docid=1O0fk|IRuq|6|20110701230512&q=%BA%B8%BA%B8%BD%BA%20%BB%E7%BB%F3

 

디지털 시대가 양산한 새로운 개념의 부르조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인 "보보스'라는 말이 있다.

보헤미안적인 자유로운 영혼과 상상력에 성실하고 성취욕 강한 부르조아,

 

퓨전시대에 맞게 장점을 조화시켜 부가가치성 있는 문화상품이 된

이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부르조아인 셈이다.

누구의 아내,남편 이라는,매일 일터를 향해 나가야 하는,
누구를 돌봐야 하는 부모라는 사실을 때론 잊고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지금 여기에 붙박이 되어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고..
떠나고 싶어서든,머물 수 없어 떠나는 것이든,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역마살 있는,
거지처럼 세상을 떠 돌아도 왕처럼 많은 것을 얻고 느끼는 집시의 삶..
그런 기질인가,그런 사람을 알고 있던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흘러 부평초 처럼 사는 게
자연스런 인생이라고도 한다.

"내 혈관 속에는 집시의 피가 흐르네.
나는 같은 곳에 머물 수가 없어.그래서 나는 떠돌지.."
'spanish heart' 영원하자던 맹세마저 흘러보내야 하는 인생,
뭔가를 그리워 하는 듯,갈구하는 듯,꿈꾸는 듯한 '제럴드 졸링'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전달 한다.

보헤미안은 궁핍하지만 보보는 물질적 보상을 중시하고 풍요롭다.
졸부 근성을 경멸하고, 대리석으로 집안을 꾸미지는 않지만
원한다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도 하고
전문 산악인용 등산화를 신고 산에 오를 줄 알고
청바지를 입고 주총에 나타나는 빌게이츠처럼,
지위에 맞는 패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의 패션 감각이 있는....

제조업 중심의 시대가 아닌 문화,

정보상품이 부가가치로 떠오르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영화, 광고, 벤처, 작가 등과 같이

아이디어로 승부 하는 시대...

일에, 시간에 매여 내가 움직이고 살아지는게 아니라
그 속에서 더 중요한 건 정신적 여유를 찾으며
육신적인 안목에서 벗어나는 일...
나는 지금 울타리 없는 자유로운 사상과 사고를 의미한다.

험난한 인생쯤 헛헛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자유로움의 보보가 되길~.

 10년이면 강산도 다 변한다는데 이때생각이 지금도 여여

 

 

베릭

2012.05.22
19:07:49
(*.135.10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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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Bobos)

 

 

개념

 

보보스(Bobos)는 정보사회에서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한 그룹

즉 디지털 시대의 신흥엘리트 계층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미국의 언론인 데이비드 브룩스(Davidbrooks)에 의해 새롭게 고안된 단어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1990년대 이후로 미국사회의 새로운 기득권 층으로 자리잡고 있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등장 및 이들의 사회적 특성이

미국 사회의 주류 사회계층이었던 부르주아(Bourgeoise) 계층과

이들에 대한 저항세력으로서의 반문화운동을 전개해왔던 보헤미안(Bohemian) 계층의 정체성 및 문화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1950년대 이후 미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해왔던 주류 지배계층으로서 부르주아 계층의 문화적 특성과

이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반문화 운동을 주도해왔던보헤미안 계층의 반문화적 가치 및 특성들을

조화시키면서 등장한 신흥 엘리트 집단을 정보사회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계층의 등장과 연계시키면서

이들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e Bohemian : Bobos)이라는 신조어를 고안해 냈다.

 

 

발전배경

 

데이비드 브룩스에 의하면 보보스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사회에서의 엘리트 계층의 생성 및 이들간의 갈등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저변의 문화적 변동 등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미국 사회에서 사회의 주도적 엘리트 계층으로서

미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의 주도적 역할을수행해 온 집단은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이들의 사상적 근간은이미 18 세기에 검약 정직 질서중용 근면 인내 등의 청교도적 윤리와 실용주의 문화를 접목시켰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Franklin)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부르주아 계층은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자연적 질서의 존재를 가정하며

이성에 대한 신뢰 및 숫자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은 이러한인식론적 기반 위에서 물질주의 질서 규칙성 자기절제 생산성을 추구하였으며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사업과 시장의 영역에서 활발한 성공을 거두어 미국사회의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반해 보헤미안 계층은

부르주아와 계층의 세속적 성공 및 이로 인한 문화적 변동양태에대한 반발과정에서 등장하였으며

주류의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반문화를 형성하여 또 다른 사회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했다.

이들은 부르주아와 문화의 물질주의적 사고와

그로 인한창의성의 소멸, 시스템과 조직에 압도된 소외된 인간의 삶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전개해나갔다.

 

보헤미안 계층은 현상의 자연적 질서의 존재를 믿지 않고

이성적 사고보다는 직관적이고 유기적인 사고방식을 선호한다.

이들은 또한 인간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창의성 반항 새로움 자기표현 반물질주의 생생한 삶의 경험 등을 추구하는 등의 자아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예술분야를 주된 기점으로 성장한 보헤미안 계층은

미국 사회에서 주류 사회계층으로 자리잡고 있던 부르주아와 계층과 문화적 주도권을 다투며

미국사회의 문화적 지형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보보스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간의 문화전쟁이 극에 달한 상황하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등장한 계층이다.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는 관료주의와 구조가 꽉물린 시스템에 대한 비난을 하는 보헤미안과

보헤미안의 부르주아 가치에 대한 공격 즉 전통과 관습에 대한 공격이 낳은 이혼율의 증가와 같은

자기파괴적 행태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상호비난의도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보보스는 이러한 두 계층간의 극단적인 갈등과 경쟁을 지양하고 조화와 중용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론적 모형(개념적 특질)

 

보보스라는 어구 자체에 담겨있는 것처럼 이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계급적특성은

부르주아와 계층과 보헤미안 계층의 특질을 골고루 대변한다.

보보스 계층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부르주아와

계층과 문화적 자유를 강조하는 보헤미안 계층의 특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서

정보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규범 및 사회적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보보스 계층의 집단적 정체성을 간단히 표현하면 신념의 유연성을 중요시하는 조화로운 개인주의라고 요약해볼 수 있다.

보보스 계층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와 다원성을 존중하되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극단적이해갈등 및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을 지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화와 타협점을 모색한다.

보보스 계층의 이러한 집단적 정체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의 보보스 계층의 집단적 정체성의 발현양태는 개인의 자유와 다원성을 존중하되

그 사회적 부작용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공동체(community)와 개인의 사회적 책임 및

이를 담보하기 위한 시민성(civility)을 강조하는 제 3 의 길로 나타나고 있다.

보보스 계층은이러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권한의 분권화 등을 통해 공동체의 역량을 제고하고 일반 시민들과 정부와의 거리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친밀한 권위(intimate authority)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적 활동양식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의 자본주의 체제의 발달 및 유지에 관한 잠재력을 수용하면서

이들로 인해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노정된 사회적 병리현상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보헤미안적 문화와 가치를 수용하는 형태로 보보스의 계층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보보스들은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기존의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되

자본 주의의 발전단계에서 야기되는 체제의 경직성 및 이로 인한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창의력의 질식상태와 같은 병리현상을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 최대한의 자유 진보적인 실험 등을 특징으로하는 보헤미안적 잠재력을 수용함으로서 치유하고자 한다.

 

이들은 경제적 효율성보다 개인의창의력을 강조하고,

거대한 체제로서의 조직 대신 유연한 네트워크형 조직을 선호하며,

개인의창의력을 억압하는 불가피한 생계수단으로서의 직업 대신

개인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즐거운 놀이로서의 직업관을 선호한다.

 

또한 “비지니스와 사회적 목표는 분리될 수 없다”는 어구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업의 가치창조(value creation)기능을 강조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활동양태와 관련하여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디지털 시대의 신흥 엘리트집단으로서의 보보스의 사회계층적 특수성이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소비행태에 근거해서 규정된다는 점이다.

보보스는 자신들의 계층의 집단적 정체성을 산업사회의 엘리트층과는 달리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의 이미지를 차별화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 성을 새롭게 정립해 나간다는 독자성을 갖는다.


사회적 측면에서의 보보스의 집단적 정체성은 계층의 개방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선호에서 찾을 수 있다.

보보스는 출신가문 등의 개인의 귀속적 특성보다는

교육 등의 후천적 성취를 통해서 형성되는 유동적 사회계층이다.

 

보보스 계층은 계층에의 진입과 탈퇴에 관한 진입장벽이 얕기 때문에

세대간의 계층의 전승 및 유지문제가 극도의 불확실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보보스 계층의 심리적 불안의 요인인 동시에

이들 계층의 사회적 활력의 유지를 통한 보보스 계층의 건강성 유지에 긍정적 기능을 한다.

 

 

평가와 전망

 

보보스 계층은 이처럼 산업사회에서의 사회의 엘리트 계층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적인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

특히 이들이 보여주는 신념의 유연성과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는 조화와 타협의 문화는

이익갈등이 첨예화되어 가는 다원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의

새로운 엘리트 모형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다원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활력과 규범을 강조하고 시민의 덕성을 강조하는 보보스의 제 3의 길에 대한 모색 노력 역시

사회구성원간의 극단적 개인주의의 확산 및 이로 인한 공동체 파괴, 합리적 대화의 부재 등의 문제로 신음하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바가 크다.

 

권한의 분권화를 통한 친밀한 권위의 수립을 강조하는 보보스의 정치적 기획 역시

대규모의 권위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가 팽배한 한국적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고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신념의 유연성은 결국 분명한 선택기준 및 가치판단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고
다원주의적 가치가 강조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지나친 타협과 절충주의에 매몰되어 올바른 방
향을 상실할 개연성이 높다.

 

 

 

 

저 자 : 강성남 (snkang@mail.knou.ac.kr)
작성일 : 2000. 11

별을계승하는자

2012.05.22
21:33:47
(*.106.96.235)

네 이거에요 ㅎㅎ 자유로우면서 풍요로운 보보스에 대학시절 심취했었죵.;;;지금도 그런기질이있는거같아요..ㅎㅎ

베릭

2012.05.22
21:43:16
(*.135.108.108)
profile

맞아요.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유침없이 균형이 잘 잡힌 분입니다.

중도에서 보고 느낄줄 아는 분입니다.

 

님은 남들도 더불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본바탕으로 타고난 분 같아요.

이런 마음을 강력하게 지닌 사람들을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요. 

이런 사이트나 되니까... 님같은 분과 님과 같은 마음을 지닌 또다른 회원분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것이지요.

 

별을계승하는자

2012.05.23
05:07:05
(*.106.96.235)

또한, 개인의 자유와 다원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활력과 규범을 강조하고 시민의 덕성을 강조하는 보보스의 제 3의 길에 대한 모색 노력 역시

사회구성원간의 극단적 개인주의의 확산 및 이로 인한 공동체 파괴, 합리적 대화의 부재 등의 문제로 신음하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바가 크다.


지향하는바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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