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생과 고통에 슬퍼하지만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 참 곱게 자랐군요.라고 하면,
  심한 사람은 화를 내기도 하죠.
  무슨 소리냐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줄 아느냐고.

  고생 없이 여기에 와 있으면, 아니, 고생 없이 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이 여기는 것이 우리의 습관적 의식입니다.
  평화롭기만 하면, 오히려 불안하죠.
  노력없이 뭔가를 성취하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천국 - 누군가 지구를 처음 방문한다면, 이 말의
  탄생 배경부터 궁금할 것입니다.
   - 을 누군가 말하거나,고도로 진화된 어떤 문명세계를 말하면,
  그 곳은 한없이 무료하고 아무 할 일도 없는 배부른 곳으로
  생각하기도 하죠.

  평화는 마치 음악의 쉼표처럼 생각됩니다.
  전쟁은 이러한 쉼표를 참지 못해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평화란 전쟁에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전쟁이란, 쉼표 없이 겉으로 드러난 커다란
  음의 세기나 멜로디에 해당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전쟁 찬미자들에게 더도 없이
  좋은 비유이겠지만, 전쟁은, 뜻하는 바 그대로,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연주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것은 조화를 추구하는 음들의 대위적 생동감이 아닌.
  그저 그것을 중단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우주의 조화는 영원히 보장된 것이고
  평화는 영원한 그것의 바탕인데,
  이를 위해 마련된 삶을 전쟁으로 해석하는 배경에는
  [차별]이라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전쟁터나 투쟁에 비유를 하죠.
  실로 모든 풍경은 차별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차별을 시켜야지만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사고의 세계가 없는
  생물이어야 하고, 나보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죠.

  위를 보고 질투를 하고 아래를 보고 만족을 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하늘을 보고 질투를 하고
  땅을 짓밟으며 만족을 하죠.
  더욱 놀라운 것은 우주의 모든 세계가 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탄스러운 것은
  우주 공간의 인간은 지구 밖에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그렇지 않더라도 외계인이나 천사들은
  우리를 시험해야 합니다. 한 쪽은 전쟁 투성이인 곳에
  남기고 한 쪽은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다 놓기 위함이죠.
  
  저는 그 시험에 답안지를 제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답안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질투와 차별에 지배당하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추구해야 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조화입니다.
  평등이란 것은 조화라는 의식이 성립돼야 그 활동이
  목적성을 갖고 활발히 움직일 수 있죠.
  조화의식 없는 평등이 차별에 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리듬 악기에 해당하는 음은, 자신이 음악 전체의
  조화를 위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나는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려한 멜로디를 부러워하다 못해 질투하며,비관하고,
  왜 자신을 멜로디로 만들지 않았냐고 한탄하죠. 음악은
  마치 전쟁터로 이해될 뿐입니다.

  작곡가와 연주가와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경이로운
  이해는 낄 틈도 없겠죠.

  우리가 여러 메시지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좀 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려한 선율이 되기 위해서나 긴장된 팀파니의 울림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죠. 연주가가 나를 어디론가 멋진 곳으로
  데려가 주길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나의 확장]입니다. 정확히는
  나를 더듬어 가는 것이죠.    
  
  산책을 하러 산 길을 찾으면, 처음엔 맑은 공기에
  정신이 개운해 지다가도, 자꾸 걷다보면, 무수한 잡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렇 때,
  산의 굵직한 나무들을 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면,
  산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서 개운해지더군요.
  아주 재미있기도 하고요.

  내가 내 머리 속을 걷는다는 것.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고통스러울 때,
  더욱 진화되었거나, 성스러운  다른 존재를 찾는 것은,
  여전한 습관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기대게 되고, 기대
  하게 되고, 자신감을 잃고,
  평화로운 본 마음을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이것을 선택해 보십시오.

  그들이 곧 확장된 `나'라고 생각하며, 좀 더 '나'의 안으로
  심취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은 기쁨을 되찾을 것입니다.
  얼마안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느낄 것입니다.
          
  전쟁과 증오에 얼룩진 지금의 이 때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라고 하는 말의 이유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은,
  고통과 고난을 견딘 내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한 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