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이라는 것은 유한한 의식체가 창조한 개념입니다.
   유한이 성립되기 위한 바탕화면이죠.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중간에 새 한마리를 그려 넣습니다.
  
   그러면 하늘과 새가 동시에 창조됩니다.
   새는 때가 되면 죽는, 의식적으로 유한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남은 여백 - 하늘은 무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 다른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누구도 이것을 보고 그림과 도화지의 일체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한 장]의
   그림이니까요.

   유한이 의식하는 무한은 완전한 무한이 아닙니다.
   이것은 있음이 의식하는 없음과도 같습니다.
   있고 없음이 초월된 세계를 우주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표현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며, 이 느낌 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있고, 없고]의 개념은 이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영혼이란 있는가, 없는가?]

   우주에서 이 주제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A라는 별에 살고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B라는 별에
   살고 있다면, 우주는 C라는 별에 이 두 별을 흡수하여
   의식성장을 위해 처리해야 하는
   있고, 없음의 환상을 더욱 깊이 다루게 할 것입니다.

   지금 앞에,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닿기까지 필요한 것은
   [비어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 무엇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영혼에 대해 [있고, 없고]를 따진다는 것은
   이 [비어있는 곳]을 없는 것으로 치냐, 있는 것으로 치냐,
   이것이죠.

   친구는 지금 내 방에 없습니다.
   누군가 지금 그 친구가 있느냐고 물으면
   저는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딘가엔 있겠죠.
   달이 지구에게 그 친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구는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있다, 없다의 개념은 무엇이든 [명확히 있거나 없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습관에게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기껏 하는 일이란 A별로 모일 것인지 B별로 모일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죠.
   이것이 의식상승에 도움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의 이해와 영혼의 이해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함께 창조됐다는(된다는)
   이해의 영역에서 이 연구는 출발해야 합니다.
   침묵이 없다면 소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리가 없다면 침묵은 자신을 성립시킬 수 없습니다.
  
   [있다, 없다]는 생각처럼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영혼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영혼을 부정한다는 말이 가능한 지역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그들이 창조에 대한 학습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선택했다고 해서,
   새가 그려진 도화지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영혼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혼에 대한 이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란 것을 자기 안에 깃들어 있는 무엇으로
   생각하지요. 영혼에 대한 비유로 도화지를 끌어들인 것이
   초라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영혼에 대해 초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죠.

   우리는 영혼을 상처입을 수 있고, 다칠 수 있는
   마음과 동일시 하기를 좋아합니다.
   영혼이 마음의 원리를 이용하고, 감정을 선택하며 활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고의 영역이 확장을 반대하고 계속 지속되면,
   영혼은 나약하게 생각되는 자신과 동일화가 됩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유도하지요.
   불안성을 조성시키며, 두려움을 강요합니다.
  
   지구상에서 우리의 영혼에 대한 개념은 이렇게 흘러왔습니다.
   예수가 [너희 영혼이 잘 됨같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어도
   그의 손가락 끝만을 열심히 관찰했을 뿐입니다.
   종교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놔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약하고 죄 지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열쇠를
   그 종교가 소유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이 모두가 영혼을 자신과 동일시 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동일시가
   도화지와 새 한마리는 하나이다라는 것이면 좋겠지만,
   이것은 그 새 한마리에 해당되는 영역을 칼로 도려낸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혼이 만약 상처를 입는다면, 이 [도려냄] 때문일 것입니다.      

   영혼은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안팎 모든 것에 걸쳐 깃들어 있습니다.
   도화지가 새의 안과 밖을 모두 채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들이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까 하는 염려때문입니다.
   나 보다 큰 영혼으로 죽어서 돌아간다면,
   마치 지금의 나에 대한 의식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생각 때문이죠.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으며,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말이
   이럴 때 도움을 주면 좋겠지만, 이 말도 별로 안심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순환]이라는 것 역시 매우 불안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년전의 육체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변했지요. 생각도 변했고, 성격도 취향도 조금 변했습니다.
   그렇다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안심하십시오. 1이라는 숫자가 쓰임은 끝없으나
   근본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에 걸쳐서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영혼은 그 모든 시간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얼마나 수많은 나의 조각들이 존재하겠습니까.
   그것을 지금 전부 꺼내놓는다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자신이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영혼을 빛에 비유하여, 깨달음과 밝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내면으로 잦아들어가, 정신을 놓고, 현실을 잊고
   진정한 나와 만나는 일은 바로 이 모든 것의 영혼과 조율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부정이 점차 줄어들고 밝음을 찾아가는 것의 이유는
   [이미 잘된]영혼의 본질과의 잦은 만남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별의 테마에
   [다른 것으로 같다는 것을 배워가는....]이라는 말머리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같을 수 가 있다는 것을,
   하나임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한다면,

   왜 이렇게 모호한 개념과
   복잡한 여러 갈래의 사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이해함으로
   모든 [다른 것들]과의 접촉을 시작할 것입니다.

   무한한 당신 영혼의 창고에서
   밝은 미래의 당신을 마음대로 꺼내오십시오.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으며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사랑과 평화는 영원히 보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