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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금본위제의 숨은 함정은 무엇인가 ?

금본위제에 대한 전망과 1929년 일본의 역사적 파국에서 금본위제
  
폴권  
  
달러 화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일각에서는 금본위제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금본위제도 완전치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세계경제의 규모가 금본위제를 재도입하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세계의 모든 GDP는 1년에 44조 달러입니다. 세계 인구를 60억으로 잡고, 나누면 1년에 세계의 1인당 GDP는 약 7300달러입니다.
  
그런데 1년에 생산되는 금의 양은 약 5천만 온스, 즉 약 1400톤입니다. 1온스를 600달러로 계산하면, 1년에 생산되는 전세계의 금의 총가치는 300억 달러, 이를 다시 60억으로 나누면 세계의 1인당 금생산량은 5달러 어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 역사상 지금까지 생산된 모든 금의 양은 대략 43억 온스, 즉 약 12만 톤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즉 전세계의 모든 금을 합해도, 현재의 가치로 2조 5천억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금본위제를 시행하려면, 금의 가격이 현재의 수십 배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경제규모가 현재의 수십분의 일로 줄어들어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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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미 1차대전 때에 금본위제를 실질적으로 포기했으나, 1929년에 일본에서 이를 뒤집으려 한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한번 쓰겠습니다.
  


이노우에 준노스케
출처 : "http://www.grips.ac.jp/teacher/oono/hp/image_j2/lec07_3inoue.jpg"
  


타카하시 코레키요
출처 : http://www.grips.ac.jp/teacher/oono/hp/image_j2/lec09_4takah.jpg
  
1차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전비가 소요되어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이미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를 포기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금본위제를 유지했으나 유명무실화된 경우가 많았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만,
  
1929년 7월 들어선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던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마구치 내각은 작은 정부와 자유경쟁을 주장하던 도시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하마구치 내각의 대장상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모든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 1차대전 이후 금에 대한 가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던 엔화의 가치를 다시 1차대전 이전의 가치로 복귀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금 수출 해금, 즉 금본위제를 부활시켰습니다.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라디오 등으로 선전을 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에는 몇 번의 금융공황이 있었기 때문에 1단계 공작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본은행장 출신인 이노우에가 생각해 낸 금본위제의 이득은, 이러하였습니다.
  
수입이 초과되면 금화가 유출되고, 이로 인해 통화가 감소하여 금리가 상승하므로, 국내 물가가 하락되어 수입이 줄어들 것이고, 수출이 늘어나면 반대의 결과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금본위제를 성공시키기 위해 이노우에는 긴축재정을 주장했고, 하마구치 내각은 중국과의 평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군비까지도 감축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결과, 1929년 7월 당시 43달러에 100엔 하던 엔화가 절상되어, 1930년 초에는 49.85달러에 100엔까지 가치가 올라가, 14%의 절상효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0월에 일어난 뉴욕증시 대폭락과 이로 인한 공황의 파도가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통화축소로 소비는 줄어들었고, 기업들은 그로 인한 매출의 감소를 막기 위해 생산을 늘렸으며, 이는 그대로 재고로 연결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여러 원자재의 가격이 거의 30% 정도 빠졌습니다.
  
1929년 일본의 쌀값지수는 28.9이었는데, 1930년 쌀값지수는 18.3까지 하락했습니다.이로 인하여 조선에서 가져오는 쌀의 양이 감소하여, 조선 경제에까지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긴축정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원래의 목적은 비대해지고 비효율적이 된 기업들을 퇴출시키고 자유시장 정책을 펴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피해는 지방 농가들 등 서민들에게 주로 미쳤습니다. 그래서 공공연히 자식을 내다 파는 등의 중세적인 상황이 재현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반발로 1930년 10월 하마구치 수상이 저격되었고 다음해에 사망하였으나,  이노우에는 새 수상 와카츠키 레이지로 밑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금본위제 정책을 계속했습니다.
  
이노우에는 무한경쟁과 세계를 상대로 하는 경제전략으로 효율을 추구했고, 대공황으로 신음하는 세계의 상황을 무시했습니다.
  
우익단체와 군부는 서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세력을 불려 나갔고, 마침내 만주에 있던 관동군들이 독단으로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즉 더 이상 군부가 정부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군인들 중 상당수는 이노우에의 정책으로 피폐해진 농촌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만주를 약탈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습니다.
  
이미 불만이 극도에 달한 서민들은 관동군의 연전연승에 열광했고, 군비를 늘리라는 압력이 거세어졌습니다. 그렇게 되면 통화량을 늘려야 하므로 금본위제는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침내 만주사변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와카츠키 내각이 1931년 12월 사직하면서 이노우에도 대장상 직을 내놓았으며,
  
새 내각이 들어서자마자 여러 차례 대장상을 했던 다카하시 코레키요가 다시 대장상으로 컴백하여, 제일 먼저 금본위제부터 폐지했습니다.
  
금본위제를 주장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는 다음 해 2월 암살되지만, 그는 달러에 투기하여 막대한 재물을 챙긴 후였습니다.
  
실권을 장악한 군부는 금본위제 실패와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을 중국 침략으로 갚으려 기도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15년전쟁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본에서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 시작됩니다.
  
즉 금본위제의 끝은 제국주의와 약탈에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자국내의 경제가 어려워지면 외국을 침략하는 것으로 불만을 돌리려 하지요.
  
지금의 경제상황은 30년대보다 훨씬 더 금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다시 금과 연결시키려면, 엄청난 혼란이 도래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폴권, 시대소리 국제정치경제 전문위원/ 미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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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3 [12:10] ⓒ 시대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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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수첩으로 유명한 이노님이 최근 제작한 UCC '동네수첩-금융편'이 최근 많이 나돌고 있는데, 금본위제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네사라'를 약간 언급했다고 합니다.
그 이론이 주로 이 사이트를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출입하시는 분들 중에서 경제 분야에 해박하신 분이 계시다면 위의 시대소리의 문제제기에 대해 논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