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란 무엇인가? (What is Compassion?)
                      
by Jelaila Starr,  Written October 10, 2001,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깊이 빠져 있었던 낡은 사회적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므로
내가 써야 할 가장 도전적인 기사 중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패러다임은 어떻게 우리가 연민을 이해하고 사용할 것인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명확성을 위해서, 사회로부터 배워온 연민(3차원 연민)과 연민의 고차원 판(5차원 연민) 사이의 차이성을 두고자 합니다.

웹스터 사전은 연민(Compassi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는 바램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인식. 불쌍히 여김(동정). 이것은 우리가 배워왔던 연민의 종류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들이 알 수 있듯이 연민은 하나의 감정-동작하는 하나의 느낌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하나의 느낌이 활동하면 그것은 도구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도구로서 그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연민을 정의할 때 웹스터 사전은 불쌍히 여김(동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주시  하세요. 웹스터 사전은 동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누군가를 돕거나 인정을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슬픔의 감정. 인정(mercy)은 자주 고통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해내기 위한 동기로서 사용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정이 좋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고차원적 관점에서는 동정과 인정은 어떤 사람을 창조자 신/여신으로가 아닌 희생자로서의 정의하는 단어들처럼 보입니다.

나는 동정이 나쁜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사람의 고통을 의욕적인 형태의 판단이라고 이해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동정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흠....우리가 보통 놀라운 어떤 것을 느끼는 누군가를 구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나쁘다라고 느끼는 고통의 느낌 속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기를 원합니다.
  
슬픔과 고통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해 동정할 때면 우리는 그들의 경험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마음속에서는 웹스터 사전에 정의된 것처럼 3차원 연민은 판단의 도구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배워온 이런 형태의 연민은 모든 분야의 게임이며, 우리가 힘을 약화시키도록 계획하고 영혼으로서의 우리가 힘이 약화된 상태로 빠지고, 우리가 힘이 약화된 상태임을 깨닫고, 그리고는 다시 우리의 힘을 회복시키는 단계를 밟아 가는 것임을 아세요. 다시 말해 영혼의 진화의 게임의 일부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습니다.  

고차원적인 5차원 연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누군가를 구제할 필요가 없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의 가치에 대한 완전한 감상(감사)의 느낌, 비판단의 상태.

아시다시피, 5차원 연민의 정의는 우리에게 아주 낯 설은 다른 사람의 관점을 포용하기 위해 마음을 뻗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다소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 세계에서는 평범한 생각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이 그러하다󰡒라고 배워온 생각의 종류입니다. 󰡓신은 자비롭다. 신은 무한히 사랑한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들었지만 어떻게 그런 의식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단계는 무엇인가. 아주 짧게 말하면 우리는 연민의 관점을 바꾸고 우리가 배워왔던 것을 넘어서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동정을 뒤로 떠나보내고 비판단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5차원 연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모든 판단을 중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행동과, 그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는지에 대하여 의식해야 하며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는 영혼으로서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한 역할에 관련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교사들은 우리가 육체적 경험을 하고 있는 영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성장을 위한 거대한 기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구에 온 영혼입니다. 그것은 왜 거대한 기회일까요? 지구는 빛과 어둠의 창조적인 표현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유의지 지역입니다. 우리는 창조자 신/여신이며 우리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창조자 신/여신인 영혼이고 우리가 창조한 것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지구에 육신을 입고 왔다면, 지구는 창조자 신/여신들의 궁극적인 놀이터임에 틀림없습니다. 맞지요?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나요?

지금 우리의 어둠의 창조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진화해온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우리는 우리의 고통스런 경험으로부터 최대로 배웁니다. 사실상 그것은 우리가 키워온 빛의 표현이 아닌 우리의 어둠의 표현으로부터입니다. 빛의 표현은 어둠의 표현으로부터 창조하고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창조한 대가입니다.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고 우리 세계에서의 모든 표현은 빛과 어둠을 드러내며 그것들은 우리가 배워야 할 방식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로써 세계무역센터(WTC)/국방부 공격에 대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3차원 관점에서(사회가 생각하는 방식) WTC/국방부 공격은 무서운 고통스런 사건입니다. 3차원 관점으로는 그 사건에 대한 어떤 좋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차원적 관점에서 그 사건들은 거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 우리를 극성 통합(빛과 어둠이 통합)이라 불리는 이 영혼 진화의 게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갔으며 2) 우리에게 빛의 일꾼으로서 어둠에 의한 대응조치를 창조하기 위해 지구의 집단의식을 더 높은 단계로 이동시켰음을 나타내며 3) 그 공격이 빛의 일꾼에게 지구에서 그들의 더 큰 임무(5차원 파동으로 이끌어줄 지구주위에 5차원 연민의 그리드를 창조하는 것)를 시작하게 하기 위한 각성을 제공했습니다. 이 경우에서처럼, 항상 무서운 고통은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그런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희생이 비행기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하나의 사건이 새로운 단계의 지구 상승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나는 그런 사건은 어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빛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행성적인 상승에서 항상 균형과 균형을 맞추는 대응 세력이 있습니다.  

빛의 세력이 지구를 더 높은 파동으로 옮겨갈 때 어둠의 세력은 대응세력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의 힘을 반영해주는 우리의 창조입니다. 어둠은 그들을 맞서는 행동을 하지 않은 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영적이고 창조자 신/여신의 수준에서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집합의식의 힘으로 행성을 전환시키는 진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공격은 게임의 내기가 더욱 커진 수준으로 이동된 완전히 새로운 게임에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단의식(사람들의 집단적인 마음)을 더 높은 상태로 이동시킬 때, 말하자면, 어항 밖으로 나온 것처럼 요. 어둠의 세력은 지금 우리를 다시 어항으로 넣기 위해 행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감금하기 위해 싸웠던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금하기 위한 게임입니다. 왜냐구요? 왜냐하면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집단적 마음을 어항 밖으로 가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이런 전환을 만들어 낼만큼  깨어나지 못해서 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합니다.

다시 연민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이런 최근의 창조자의 신적 경험에 대해 반응하기 위해 3차원 형태의 연민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다시 어항으로 넣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고통이 멈추어지기 원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희생자로서 이런 경험을 바라보도록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했을 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가장 높은 잠재성 즉, 창조자 신/여신으로부터 우리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이런 창조를 다른 사람의 창조로서 봅니다. 우리는 어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3차원 연민을 사용할 때, 우리는 힘이 없어서 다른 경험을 창조할 수 없으며,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없으며, 이런 최근의 고통스런 창조를 치유하고 균형을 유지시킬 수 없다는 행동들을 말하여 줍니다.  

우리가 3차원 연민을 사용할 때 우리는 동정을 느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동정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경험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부정적이다라는 행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으로서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극성의 표현이며 모든 표현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자 신/여신은 동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비판단 상태를 유지하고 단지 존재하는 창조의 모든 표현을 수용합니다. 지금 그것은 신이 비판단적이며 수용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식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처럼 존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WTC/국방부 공격의 예에서처럼 3차원 연민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어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만약 우리가 5차원 연민을 사용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인 마음을 어항에서 꺼내올 수 있으며, 경계를 벗어난 훨씬 높고 멀리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합니까?

우리는 3개의 창조자 신/여신의 단계를 성취함으로써 합니다.
1. 이 삶의 경험에서 어둠의 행동의 한계를 보고 배우는 것
2. 그런 에너지를 연민으로 느끼고 변형시키는 것
3. 우리 세계를 감쌀 정도로 확장된 새로운 현실이나 의식의 격자로 그런 연민을 집중하는    것.  그래서 우리를 어항 밖으로 훨씬 멀리 이동시키는 것

연민의 성취 3단계

1. 어둠의 행동의 한계를 배우고 현실 도피자처럼 있지 말라

이 단계는 우리가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우리의 창조물의 깊이를 탐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한 것으로부터 숨거나 뛰어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창조한 것이 어둡고, 추하고, 구역질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전체존재의 일부이므로 우리가 책임져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배울 기회로서 그것의 가치를 찾습니다.

나는 많은 빛의 일꾼들이 이렇게 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을 바라보지 않고, 언론매체를 통해 주어진 공식적인 이야기를 연구하고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분노로 반응하고 복수의 필요를 느낌으로써 불에 연료를 더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그들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 사건의 평형균형을 유지할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WTC/국방부 공격에 대한 대응 현실을 창조하지도 연료를 공급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선의의 빛의 일꾼들로부터 그들이 사랑의 중심에 머물면서 어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정보를 담은 수많은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에서 그것은 테러리스트 즉 지구엘리트 우주적 수준의 렙틸리언(파충류형 외계인)의 행동들을 의미합니다.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나는 그들이 어둠을 바라보는 것을 피하고 있으며 그들이 현실 도피자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전부 머리를 고정시키고 만약 그들이 그 나쁘고 추잡한 이들을 알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그것이 그렇게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하는 선상에서 첫 번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요 나의 친구들이여 첫 단계는 아무리 명백하게 보일지라도 어두운 면의 행동들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즐겁지 않고 사실상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연구한 것 중에 어떤 것은 나를 역겹게 하고 악몽을 꾸게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이 부족하여 잘 속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지식은 힘입니다. 우리가 저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선택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에너지 변형시키기

한번 우리가 어둠의 행동의 한계를 알게 되면 우리는 다음 단계인 변형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더 높은 차원/창조자 신의 도구가 사용되는 곳입니다. 그것의 가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통, 분노, 격변, 혐오를 연민으로  변형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이 시기는 우리가 이런 도구를 활용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DNA안에 그 도구가 저장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성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없이 이시기에 지구에서 존재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구를 연민의 공식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연민의 번역판입니다.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우리는 이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어둠의 창조에너지를 변형시킵니다.
우리는 화냄, 분노, 증오, 감정의 격분 등을 느끼고 표현합니다. 낮은 차크라로부터 그것들을 변형시킬 우리의 심장과 깊은 마음속으로 이동시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가치를 찾는 동안 깊은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잡고 위에서 말한 WTC/국방부의 공격에서 경우처럼 우리가 각각의 가치를 발견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제공하는 가르침에 대한 감사로 옮겨갑니다. 동시에 우리내부에서 그런 감정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며 그것들은 놓아줍니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연민을 느끼고 자비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지구에 와서 하고자한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드 창조하기

5차원 연민을 사용하는 것은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우리가 지금 이전의 것과 교차하는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둠과 균형을 이루는 평형 균형을 유지하고 배움의 다음 단계로 우리를 데려갈 현실을 창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창조로부터 모든 어둠 에너지를 변형시키고 우리의 새로운 현실과 다음 단계에 에너지를 제공할 연료로서 사용할 모든 어둠덩어리를 비틀어 짜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우리는 연민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3차원 판 연민을 사용하여 더 좋은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중화시키는 어항 속에 남아있을 수 도 있고 , 5차원 판을 사용하여 훨씬 더 높은 의식의 상태로 우리세계를 이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판을 사용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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