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관악산(冠岳山) 산신은 얼마전까지 정몽주(鄭夢周)선생 이었다가 1990년대 들어와 강감찬 장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관악구의 강감찬장군 탄생지인 낙성대(落星臺) 주변에 동상도 새로 세우고, 구청에서 장군을 기념하는 거리 가장 행렬 축제도 신설하는등 여러 모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듯 하다.

정몽주 선생이 산주로 계실 적에는 극히 엄하여 역시 무당들이나 잔술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고약(?)하게 대했다고 한다.

관악산은 서울의 조산(朝山)으로서 주산(主山)인 북한산 및 도봉산 등을 감시, 관리하는 위치에 있다.

새로운 산주(山主) 강감찬 장군의 탄생에 얽힌 얘기를 소개한다.

장군의 아버지는 당시 고려에서 천하의 난봉꾼 내지 채정꾼(採精-古代 房中術의 행법)의 대가였는데, 역시 도인인 어머니를 만나 하룻밤만에, 그 많은 여인들의 정기(精氣)를 모아놓은 것을 쫙 빨려서  그 기운 그대로 타고 강감찬 장군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봉우선생의 얘기를 빌리면 "이건 우리 선가(仙家)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야."

다음으로 삼남(三南)의 명산 지리산(智異山)이다.

지리산 산주는 신라의 도인 최고은(崔孤隱:최치원) 선생이었는데 역시 90년대 들어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역사에 가리워진 남명선생의 실체를 찾기위해 80년대 후반부터 남명학 연구원이 생기고, 연구 논문들이 모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1995년에는 최초로 선생의 저작집인『남명집(南冥集)』이 경상대학 남명학(南冥學) 연구소에 의해 국역, 출간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그 사상과 존재의 역사적 의의가 조명되고 있다.

남명 조식은 조선조의 거물급 선비요 학자였으며 정신수련에도 조예가 깊어 선계(仙界)의 고단자이다.

현실적으로 불운하였으나, 임진왜란 등 미래를 예지하고 다가올 국난에 대비하여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다.

경상도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을 일으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이들은 거개가 다 남명의 문하제자들이었다.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정기룡(鄭起龍), 손제자(孫弟子) 김덕령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생전에 교유하던 인물들은 송구봉(宋龜峯), 서고청(徐孤靑), 이율곡(李栗谷), 이토정(李土亭), 성대곡(成大谷) 등이었는데, 특히 송구봉, 서고청과는 계룡산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송구봉은 당대 제일의 도인이었으므로 나이차를 넘어 심법(心法)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사후에도 선계(仙界)에서 교유하며 계룡산에서 만나던 도인들-이토정, 성우계, 영규대사, 조중봉 등-과 일년에 한번 칠월 칠석날 전후로 3일간을 계룡산에서 만나 회포를 풀며 노닌다는 전설이 있다.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금산(錦山)의 서대산은 산주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列:1607~1689)이다.

우암선생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조 효종, 숙종대의 학자이며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대정치가였다.

당대의 대도인(大道人)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의 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했다.

우암은 어렸을 때부터 힘이 장사였는데, 집이 있는 신탄진(회덕)에서 스승 사계댁이 있는 연산까지 왕복 80리를 매일 걸어다녔다.

성격이 매우 우악스럽고, 자기 힘을 믿고 방자한 태도가 지나쳤다.

사계 김장생 선생이 어린 우암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제자로 키우기 위해 기를 꺾어 놓느라 몇번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그 하나가 목침사건으로, 하루는 사계가 방안에 누워있다 우암을 부르며 네가 힘 좀 쓴다 하니 내가 베고 잇는 이 목침을 한번 빼내 보아라 하였다.

이때 우암은 웃으며 선생님 무슨 장난이십니까 하며 몇 번 사양하다가 실제로 빼어보려 하니 꿈쩍도 않더라는 얘기다.

또 하나 책상사건 얘기도 있다.

사계가 늘 방안의 책상(書案)을 한손으로 들고 그 밑을 빗자루로 쓸곤 하였는데, 한번은 우암더러 쓸으라 해서 우암이 그 책상을 사계처럼 한손으로 번쩍 들으려 했으나 책상이 바닥에 붙은 듯 전혀 요지부동이라 식은 땀만 흘렸다는 일화이다.

이후로 우암이 스승의 분부에 절대 복종했음은 물론이다.

봉우선생이 젊었을 적에 서대산을 방문했다.

서대산 꼭대기 폭포 근처에 우암이 젊었을 때 정신수련하던 자리가 있었다.

그 바위 틈새에서 우암이 쓰던 명검 한 자루를 발견하고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우암은 문(文)과 아울러 무학(武學)에도 수련을 많이 쌓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선비였다 한다.

봉우선생이 이후 중국에 들어가 독립군 활동을 하며 다닐 때 이 검을 갖고 다녔는데, 어느 객잔(客棧:여관)에서 동행1인과 함께 투숙하여 그 복도를 걷다가 복도 가운데가 갑자기 푹 껴져 둘이 밑으로 빠졌는데, 무슨 소설에 나오는 인육만두집 같은 곳으로서 낯선 나그네들을 이런 식으로 잡아먹는 것이었다.

밑이 깊어서 뛰어오를 수는 없어서 마침 지니고 있던 검을 빼어 옆의 벽을 한번 치니, 대번에 벽이 착 갈라지며 무너져 버리는 것이라, 덕분에 빠져 나왔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보검이었다는 얘기이다.

우암은 생전에 노론의 영수로서 거물급 정치가요, 주자(朱子)를 자기 조상처럼 받들던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관계로 평소 수많은 제자, 문인(門人)들을 길러 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산주(山主)로 있으면서도 그때 따르던 제자들이 지금도 서대산에 득실득실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