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내 안에 있는 이여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2.<길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나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3.<나  비>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가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4.<누구든 떠나 갈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더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5.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만났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리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이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6.목숨을 다해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7.들   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라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재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시인   류시화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