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라이온넷에 seagull님이 올리신 글이 있어 퍼왔어요 **********




오늘 눈에 들어온 글이 있어  올립니다

가끔씩 혼란스러울 때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 중에서



- 지금 여기로 들어가라 -


질문자  :  나는 언제나 진정한 깨달음이란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충족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런 경험을 했나요?


질문자  :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핵심적인 잘못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구원은 다른 장소나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질문자  :  ‘구원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구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즐거움이나 여러 가지 심리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 것들이  두려움이나 결핍감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육체적인 괘락을 통해 얻어지는 생동감이나 심리적인 만족을 통해 얻어지는 좀 더 안전하고 완전한 자의식입니다.  불만족스럽거나 불충분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만족은 필연적으로 단명할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만족이나 충족의 조건을 자꾸만 ‘지금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상상의 지점에 갖다놓게 됩니다.
‘이런 것을 얻고 저런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때가 되면 나는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은 무의식적인 마음이 미래의 어딘가에 구원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완성이고 평화이며 충만한 상태에 있는 생명 자체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며, 당신 안에서 대립이 없는 선善,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기쁨입니다.  잠깐 스치는 경험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현존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당신 바깥이 아닌 당신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의 신을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당신 자신이 삼라만상의 근원이며, 시간과 형상을 초월한 하나의 생명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두려움, 고통, 결핍감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모든 갈망과 욕구와 욕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것은 편집증적인 생각과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심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에게 지금 여기서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려면, 그래서 자유롭고 만족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러저러하게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구분하고, 분류하고, 실행하고, 성취하고, 달성하고, 무언가를 이해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시간을 구원으로 가는 수단으로 보고 있지만, 실은 시간이야말로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리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이 그곳에 갈 수 있는 지점은 ‘지금 여기’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거기에 도달합니다.  당신이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당신은 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조건도 이용할 수 있지만, 특별한 조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접근하는 지점은  오로지 ‘지금’뿐입니다.
이 순간으로부터 멀어지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동반자가 필요한가요?  그 자리에서 ‘지금’으로 들어가십시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지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순간보다 당신을 구원에 더 가까이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미래에 있다’는 생각에 익숙한 마음으로는  이것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당신이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지금’에 주의를 깊이 기울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래에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 사랑과 증오 -


당신이 의식적인 현존에 자주 접근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손상되다가 끝내는 부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잠시 동안은  그 관계가 완벽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완벽해 보였던 겉모습이 어김없이 붕괴되면서 말다툼, 갈등, 불만이 생기고 감정적인폭력, 심지어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인 관계는 오래지 않아 애증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사랑은 맹렬한 공격과 적대감으로 변하거나 한순간에 애정이 완전히 식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 관계는 잠시, 몇 달 또는 몇 년간, 사랑과 증오의 양극 사이를 오가면서 즐거움만큼이나 고통을 주게 됩니다.  
부부들이 이러한 주기에 중독되는 것도 흔한 현상입니다.  부부싸움은 그들에게 활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다가 긍정과 부정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대립의 균형이 깨지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주기가  점점 자주 강하게 일어나면  그 관계는 오래지 않아 깨지고 맙니다.

당신이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주기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지고  그 관계가 아름답게 꽃필 것 같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양극은 서로서로 의존합니다.  이것 없이는 저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긍정적 주기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정적 주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둘 다 똑같은 부작용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흔히들 연인 관계라고 부르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 너머에서 생기기 때문에 대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우친 사람이 드문 만큼 지속적인 사랑도 매우 드뭅니다.  다만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가 생길 때마다 잠깐씩 사랑을 느낄 뿐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긍정적인 측면보다 더 쉽게 눈에 띕니다.  당신 자신보다는 당신의 파트너에게서 흠집을 잡아내기가 더 쉽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소유욕, 질투, 지배, 회피, 말 못할 원망, 자기주장, 무감각, 자아도취, 애정결핍, 속임수, 말다툼, 비판, 판단, 책망, 공격, 부모에게 입은 과거의 고통에 대한 무의식적 분풀이, 분노, 폭력 등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신은 연인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만족스럽고 아주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하며, 특별하게 느끼게 해주고, 나 역시 상대방에게 똑같이 해주면서  당신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중요해집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느껴집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한 강렬한 감정 속에는 욕망과 집착이 있다는 것 또한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중독됩니다.  상대방은 당신에게 마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구할 수 있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상대방이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생각만으로도 질투와 소유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정적인 협박이나 비난, 책망 등의 온갖 술수를 동원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상대방이 떠나면 험악한 적개심으로 발전하거나 깊은 절망감과 비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애정은 한 순간에 잔인한 공격성을 낳거나 지독한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이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이 어떻게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느낀 사랑은 단지 습관적인 소유욕과 집착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요?




- 중독된 사랑과 완전함에 대한 추구  -


질문자  :  우리는 왜 다른 사람에게 중독되는 걸까요?


낭만적인 연인 관계는 짜릿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 관계를 갈망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런 관계가 두려움, 욕구, 결핍, 불만족 상태에서 벗어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인 차원에서 당신은 분명 완전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은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전체의 반쪽입니다.  완전함에 대한 추구로 인해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반대쪽 극성과 결합하려는 저항하기 힘든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육체적 충동의 뿌리는 영적인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갈망은 이중성을 끝내고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려는 갈망이기도 합니다.  
성적인 합일은 가장 근접하게 육체적 차원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성교가 육체의 영역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교는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완전함, 순간적인 은총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거기서 구원의 수단을 찾으며  이중성을 끝내려고 하지만, 형상을 입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신은 잠시 잠깐 감칠나게 천국을 맛보지만  거기 있도록 허락되지 않으며, 다시 분리된 육체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불완전함이나 결핍감이 육체의 차원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마음과 동화되어 있는 한 당신은 외부에서 자의식을 끌어옵니다.  사회적 지위, 소유, 외모, 성공과 실패, 믿음 체계 등  궁극적으로는 당신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러한 거짓 자아인 에고는  불안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존재하는 느낌을 갖기 위해 언제나 자신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지속적인 충족감을 주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여전히 그대로 남습니다.  결핍감과 욕구도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한 관계가 생깁니다.  그것은 에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듯합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이  이젠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대신해 주고, 당신의 삶에 의미를 주고, 당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단 하나의 초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우주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조각이 아닙니다.  당신의 세상에는 이제 하나의 중심,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그 중심은 당신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직도 외부에 의해 자신을 인식한다는 사실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 두려움, 결핍과 불만족의 느낌들이 깔려 있는 에고의 상태가 더 이상 거기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느낌들이 용해되었을까요?  아니면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표면적인 현실 아래쪽에 계속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만일 당신이 어떤 관계에서 사랑과 그 반대 감정인 공격성, 감정적인 폭력 등을 함께 경험한다면  당신은 에고의 집착과 중독을 사랑과 혼동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한 순간엔 상대를 사랑하고, 다음 순간에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요?  

진정한 사랑에는 대립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느끼는 사랑이  그 반대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좀 더 완전하고 확실한 자의식을 필요로 하는 에고의 강한 욕구일 뿐이고,  상대방은 일시적으로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에고가 구원 대신 선택한 것으로, 짧은 기간 동안만 구원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행동 방식이 당신의 에고가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러면 에고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두려움, 고통, 결핍과 같은 느낌들이 그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 덮여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듭니다.  다른 모든 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약이 효력을 발휘할 때는 기분이 최고조에 달하지만, 약효가 더 이상 없을 때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이 다시 나타나면, 당신은 예전보다 더 심각하게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이제는 그런 고통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잔인한 폭력성으로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은 상대방의 고통을 일깨워서  그도 반격을 하게 만듭니다.  이 시점에서 에고는 무의식적으로 아직도 그러한 공격이나 처벌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중독은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모든 중독은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납니다.  중독은 당신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인 관계는 처음의 행복감이 지나간 후에  더 많은 불행과 고통을 납깁니다.  하지만 고통과 불행이 그 관계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있던 고통과 불행을 끌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중독이 그렇습니다.  중독은 더 이상 효과가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고, 그때의 고통은 전보다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상 현재의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미래에서 구원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에 주의력을 집중함으로써  맨 처음 만나게 될 자신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속에서 현존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과거와 과거가 주는 고통을 용해하기는 얼마나 쉽습니까!  참된 현실이란 것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 존재인지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말이죠.

고통을 피하기 위해 관계 자체를 피하는 것 역시 해답은 아닙니다.  고통은 어치피 거기 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세 번 실연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사막 위에서 살거나  방안에 틀어박혀서 지낸 것보다는 더 눈을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강한 현존 상태에서 혼자 지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중독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로-


질문자  :  중독 관계를 진실한 관계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지금’속으로 더 깊이 주의를 돌림으로써 현존을 강화하십시오.  혼자 살든 누군가와 함께 살든  열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현존의 빛을 충분히 강화함으로써 생각이나 업장에 의해 점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당신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자로서의 당신 밑바닥에 있는 존재로서, 마음의 잡음 밑바닥에 있는 고요함으로서, 고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랑과 기쁨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요 구원이요 깨달음입니다.  
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 속에서 현존함으로써 고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과 행동을, 특히 에고에 의해 움직이는 반복되는 마음의 패턴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근본적으로 판단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있는 그대로에 저항함으로써 갈등과 사건과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이런 충동적인 성질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판단을 중지하는 순간 당신은 실제로 마음에서 해방됩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그런 다음엔 당신의 파트너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변화를 위한 가장 커다란 촉매는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당신은 에고를 즉각 초월하게 됩니다.  모든 마음의 게임과 중독적인 집착이 일시에 막을 내립니다.  
더 이상 희생자도 가해자도 없으며, 비난하고 비난받는 일도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고, 상대방의 무지에 휘말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도 없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지금’ 속에서 더 깊이 현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사랑은 일종의 존재 상태입니다.  사랑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당신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이나 외부의 어떤 형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현존의 고요함 속에서 당신은 모양도 없고  시간도 없는 당신 자신의 참된 실재를, 당신의 육체적인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현시되지 않은 생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때 다른 모든 사람들과 삼라만상 속에도 동일한 생명력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분리되는 장막 너머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신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생명체의 밑바닥에 흐르는 영원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당신 자신과 삼라만상 속에 깊이 내재한 ‘하나의 생명’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구도 가리거나 선택하지 않습니다.  태양빛이 만물을 가리지 않듯이  사랑은 어느 누구도 특별하게 대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독점은 신의 사랑이 아니라 에고의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강도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좀 더 많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 사람도 당신에 대해 똑같이 느낀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그 사람과 이어주는 결속력은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새, 나무, 꽃과 당신을 이어주는 결속력과 동일한 것입니다.  단지 느끼는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중독적인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중독적인 욕구너머에서 무언가 진정한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서로의 마음이 잠깐 진정이 되면서  업장이 일시적으로 휴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일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행위를 할 때, 함께 탄생의 기적을 목격할 때, 죽음을 맞이했을 때, 누군가가 심각하게 아플 때 마음이 무력해지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평소에는 마음 아래에 묻혀 있었던 당신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진정한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류는 서로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깨우침이요,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의 낡은 방식을 물리칠 만큼 충분히 현존할 수 없다면, 이런 상태는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마음이 돌아오고 당신이 거기에 동화되자마자, 당신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한 마음의 이미지가 되고, 또 다시 에고가 요구하는 게임과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다시 한 인간의 마음이 되어  인간 존재임을 자처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교류하면서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영원히 벗어나 업장을 녹일 만큼 강렬하게 현존하지 않는 한,  적어도 지켜보는 자가 되어 현존하지 않는 한, 사랑을 잠시 잠깐 엿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랑을 꽃피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강력하게 현존하게 되면, 업장이 당신을 사로잡아 사랑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어서 계속되는 이야기는

‘영적 수행자로서의 관계’

‘왜 여자가 깨달음에 더 가까이 있는가’

‘여성의 집단적인 업장 녹이기’

‘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버리라’ 등으로  연결되는데  


이 내용은  - 8장-의  ‘성숙한 인간관계’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