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다는 것은 내가 주체라는 말일뿐입니다.

내가 무엇이다.는 것을 자기정체성(Identity)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간에 ID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다'라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임을 알수 있습니다.
'나'는 主體를 의미하는데 '무엇이다.'는 對相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이다'는 '주체는 대상이다.'가 되어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주체는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고
대상은 주체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므로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주체라는 것을 즉, 자기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기준점은 (2,3)이다는 문장이 있다면
기준점이 다른 점을 규정하는 것이지 (2,3)으로 규정되어진 것이 기준점은 아니므로
다른점이 기준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문장이 됩니다.
'나는 무엇이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모순인 문장인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듣고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의식하는 것은 모두 '인식의 대상'입니다.

어떻게 생겼고 목소리가 어떠하고 성격이 어떠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하는 말들은 '認識對相'에 대한 기술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認識主體이지 인식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겼다. 내 목소리가 어떠하다. 내 성격이 어떠하다. 등등'의 기술은
논리적으로 모순인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났다. 내가 늙었다. 내가 병들었다. 내가 죽었다. 하는 것은
인식의 결과로서 인식대상에 대한 기술일뿐 인식주체에 대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 모순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식주체임을 자각함으로써 생노병사의 사고를 벗어날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겼다고 인식하는 그 주체가 바로 나인 것이지
어떻게 생긴 그것은 인식대상이지 인식주체인 내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즉, 자기정체성이 있는 사람은
그 자기정체성에 따라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선택할수 있는 행위의 가능성은 제한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행위와 결과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주체인 나에게 자유가 없는 것이 되어서 모순이 됩니다.

내가 서쪽으로 걸어가는데 동쪽으로 가지기도 하고 남쪽으로 가지기도 한다면
나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주체라는 것과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주체이므로 아무런 제한도 없이 어떤 행위든 선택할수 있고
그 행위와 결과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어야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정수기의 파란꼭지를 누르면 찬물이 나오고 빨간꼭지를 누르면 더운물이 나오고하는
행위(業)와 결과(報)사이의 인과관계가 있어야만 내가 먹고싶은 물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키보드로 이글을 올릴수 있는 것도 자판에서 'ㄱ'을 치면(業) 화면에 'ㄱ'자가 나타나는 행위와 결과사이 인과관계 즉 業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고장난 컴퓨터라고 하고 이글을 올리고 싶어도 올릴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業報의 법칙으로 인해 원하는 글을 마음대로 네이버에 올릴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대의 자유를 해탈이라고 합니다.
행위와 결과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을 業報라고 합니다.
業(행위)와 報(결과)는 인과관계가 있고 나는 어떤 행위든 마음대로 선택해서
원하는 결과는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경지가 解脫 즉, 자기정체성(identity)를 벗어난 상태입니다.

내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뺨을 한대 맞고 싶으면 (願)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따귀를 한대 때려주면 (業)
그 사람이 내 뺨을 때려줄 것입니다. (報)

이렇게 해탈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 뺨을 때린 것은(報) 순전히 나 때문(業)인데
이것을 모든 것이 나로 부터 말미암는다고 해서 自由라고 합니다.
天地從容之事도 自我由之하고
天地紛亂之事도 自我由之하므로 自由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을 벗으면(解脫) 自由를 얻는데 그것을 다른말로 業報라고 하는 것입니다.

해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나 해탈을 이룬 사람이나 이러한 絶對自由는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이 동일합니다.
노숙자가 노숙자가 되는 것도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고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을 一體唯心條라고도 하는데 自由,業報와 동일한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절대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존엄성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중생이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 바로 業報로 인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을 하는 가에 따라서(業) 그 결과로 나에 대한 인식(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 업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는 본시 없는데 업의 결과로서 나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내가 있는 것이라면 어떤 行을 하든 간에
나는 동일할 것이니 報를 받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내가 이러한 사람이니 숙명적으로 이러한 행을 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해탈한 사람은 내가 이러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이러한 행을 한 까닭이니
다른 행을 하면 내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我가 있다면 業報는 없는 것입니다.
我가 없기때문에 業報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