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중심의 삶"의 제1장은 위의 제목과 같이 "내 영혼의 열정에 내맡기기"입니다.

"내맡김(surrender)"이라는 주제는 영성을 공부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맡김은 제1광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또한 작게는 자신의 상위 자아, 크게는 하나님(삼라만상)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추가로, 이 내용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텔로스(TELOS) Ⅱ권(본인번역)에 소개되어 있으며,

이를 발췌하여 게제가 끝나고 난 다음날(2017. 1. 6 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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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 의식의 중심으로부터,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아입니다. 하지만 나는 2000년 전에 지구에 살았던 한 사람의 특정한 개인이 결코 아닙니다. 나는 여기에서,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존재보다 더 큰 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며, 진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에너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는 여러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와 진동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진심 어린 열망이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방에서 말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강의를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며, 함께 모여 새 시대를 축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로는 새로운 의식에 대한 각성이 아직도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실제로 아주 많은 부조화와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각성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바로 지금도 지구에서 태어나고 있으며, 오랜 준비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발판을 구축하고, 깨달음의 물결이 지구 전체로 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현재 지구를 에워싸고 있는 새로운 의식의 각성이라는 이러한 물결에 참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러분은 그러한 에너지의 물결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의 과정에서, 가슴의 부름에 순응할 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문제들과 종종 대면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고, 가슴으로부터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매우 어렵습니다. 정치는 가슴의 부름에 순응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에 존재하고 있는 커다란 분쟁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가슴의 지혜에 내맡기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분쟁들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세계 평화의 초석이 되는 것은 인종과 종교 혹은 문화가 아주 다른 사람들을 이어줄 수 있는 보편적인 유대감과 일체감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세계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성향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렇게 된 데에는 현대의 정보 기술이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 덕분에 시공간 상의 거리도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서로간의 이해의 증진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두려움에 기초한 구시대의 낡은 사고(思考)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우리와 그들”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해묵은 적대감을 영속화시키고, 많은 감정적인 혼란만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인들은 분열을 초래하는 이러한 개념들을 아직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즉 개인입니다. 정치는 대다수의 개인들이 지닌 의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많은 독립된 개인들의 각성에 의해,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깊이 있게 검토하는 것 보다는, 나는 여러분 모두가 가슴의 에너지를 자신의 삶 속에 접목하여, 내맡김과 통제라는 주제로 취급하고 있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잠시, 오늘 여기에 모여, 여러분의 가슴으로부터 흐르고 있는, 내맡김의 에너지를 그냥 느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맡김, 즉 놓아주는 것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해방감과 신뢰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대개 이러한 에너지를 자신의 일상적인 삶 속에 접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을 통제하려는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내가 의미하는 통제란 삶을 지배하기 위해 힘을 행사하고자 하며, 자신이 옳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욕망에 따라 그 힘이 흐르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삶을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지속적인 긴장감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통제하려는 이유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여러분의 생활체계 속에, 즉 양육, 교육 그리고 사회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습니다. 통제 장치들(메커니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통제 장치들이 좋은 습관이라고 여러분은 배우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삶을 통제하여, 거기에 맞게 삶을 체계화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이 겉으로는 양식 있고, 합리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내맡김과 예측불가능으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게 됩니다. 여러분은 내맡긴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 즉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감정적인 동요나 혼란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내맡김을 아주 제약적으로 해석하는 개념이며, 두려움과 에고에 기초한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맡김은 훨씬 더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통제나 강요 혹은 조종할 필요도 없이, 신뢰 속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생활방식, 즉 존재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고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통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로부터 제공되는 이미지들과 에고는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에고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든, 가정주부든, 아니면 능력이 있는 치유사든 자신의 자아상(self-image)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에고는 자신에 대한 타인들의 생각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에고가 실패하는 순간이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과로하여 병이 나거나, 관계들이 깨어지게 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에고는 그러한 위기상황들을 치명적인 타격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상황으로 인해, 어느 시점이 되면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순리에 맡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고는 내맡기는 것을 위기상황으로 여기게 됩니다. 에고는 통제와 위기가 지속적으로 번갈아 찾아오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정한 위기의 순간 속에서, 여러분은 그러한 위기 속에 감춰진 보물을 살펴보도록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위기상황 속에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고 손짓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비록 에고의 지시에 따라 살아간다 하더라고, 삶은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즉 자신의 내면의 앎과 지혜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움직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안 있어 내맡기도록 촉구하는 상황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항상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생활방식으로서, 내맡김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을 언제나 여러분에게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위기 후에 내맡김의 순간, 즉 명료함과 각성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있으며, 그 순간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숨결에 이끌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신성한 흐름은 여러분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하며, 비록 기대했던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신성한 흐름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동경하고 있는 것은 보다 더 영구적으로 이러한 고차원적인 의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존재 방식을 일상의 삶 속에 접목시킴으로써, 심각한 위기상황이나, 깊은 절망감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맡김을 생활방식으로 동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전사(戰士)들입니다. 여러분은 머나먼 길을 걸어 왔습니다. 때로는 내면적으로 노쇠하고, 지쳤다고 느끼지만, 낡은 것들에 대해서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증이 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들지 않는 존재방식, 즉 고무적이면서도, 가볍게 흘러갈 수 있는 존재방식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산산이 부서져, 위기상황에 내몰려, 내맡기도록 강요받을 때까지, 관계들이나 직장 혹은 기타의 목적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신뢰와 내맡김으로 상징되는 삶의 방식에 항상 초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내맡김이란 싸우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에 따르며,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삶이 정확하게 제공해줄 거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은 알려지게 되고, 충족될 거라는 사실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현재 존재하며, 삶과 함께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세요. 나는 여러분이 간절하고도, 진지하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동경으로서, 여러분의 영혼, 즉 내면의 신성한 흐름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내맡기는 길에서의 장애들 : 세 가지의 거짓된 신(神)들


또 한편으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영혼에 대한 당초의 청사진에 따라, 여러분은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진지함, 솔직함, 사랑 그리고 유대감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믿음들과 체계들을 지닌 채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이로 인해 영혼과의 연결이 계속해서 장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는 세 가지의 우상, 혹은 거짓된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며, 대개의 경우 안내를 받기 위해 이러한 우상들에 다가가게 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우상들은 모든 것을 참된 자신에게 내맡기고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즉 균형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