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지금까지 이 책에서 이 행성에 전해진 어떠한 영적인 가르침들에서도 제대로 설명된 적이 없는 진실, 즉 이 행성에는 추락한 의식으로 인해 눈이 완전히 멀어 있는 존재들 그리고 이원성적인 의식,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 중에서 많은 숫자는 대중문화 속에서 악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 고정관념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시다시피, 삶은 옛날 서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쁜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좋은 사람은 흰말을 탄 왕자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원성적인 의식의 본질은 속임수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은 겉으로 보이는 것 뒤에 어떤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설명한 것처럼, 추락한 의식은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번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석양이 질 때에는, 사물이 원래의 모습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눈이 가장 심하게 멀어 있는 사람들은 겉모습을 선하게 보이게 하는데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와 사업 분야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복음 10:16)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일부의 이리들이 기독교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지닌 힘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들을 왜곡시켜 왔다는 사실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비-이원성적인 방식으로 종교에 접근해갈 사람들로 여러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노력에 반대할 사람들이 종교계와 사회의 여러 분야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물질 우주 혹은 적어도 지구 행성은 말 그대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악마들에게 주셨다고 믿고 있거나, 악마들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가 설명한 것처럼,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상황들은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인류가 지닌 불완전한 의식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구에 존재하는 상황들은 악마와 악마를 대신하는 존재들, 즉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존재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우주가 악마에 의해 창조되었거나, 아니면 악마를 위해 창조되었거나, 악마와 악마의 대리인들이 이 세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세상은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혀 있는 존재들을 위해 마련된 일시적인 학습장입니다. 이 세상은 이원성적인 환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이러한 존재들은 삶에서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체험하고 난 후,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 큰 것에 대한 그러한 갈망을 인식하게 될 때,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는 어떠한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의식으로는 어떠한 단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겉으로 보이는 이원성적인 것들, 즉 높고 낮은,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보다 더 큰 것을 갈망한다면, 이들은 자신들을 창조주의 의식으로 데려다줄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드시 갈구하려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이 밖으로 나가, 종교에 대한 비-이원성적인 진실을 전파할 때, 이원성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반대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여러분을 반대할 것입니다. 한 가지 방법은 이들은 여러분의 주장과 가르침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수준을 뛰어넘어, 일부는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게 될 거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여러분을 침묵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러분을 제거하려고도 할 것입니다.


이들은 사생결단 식으로 이렇게 할 것이며, 만약 여러분을 침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사실은 거짓된 신들 및 이원성적인 의식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는 존재의 에고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을 지구에서 침묵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이들은 뛰어놀 운동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들에게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들은 에너지가 고갈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분은 내가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보냈던 세상보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문명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고, 자신들이 가진 종교나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실이라는 비-이원성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죽임을 당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일반 범죄자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서는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육체적으로 여러분을 죽일 수 없다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여러분을 죽이려고 하는 존재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주의를 환기시켜주고자 합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여러분의 자존감, 즉 여러분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을 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도전할 권리가 없다고 반박할 것이며, 이들의 이원성적인 믿음과 이원성의 토대 위에 구축해온 기구와 조직들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도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시다시피, 이러한 존재들 가운데 일부는 오랫동안 육화해 왔으며, 정교한 성을 쌓아왔습니다. 이러한 성들은 그리스도의 바위가 아니라, 이원성적인 의식이라는 흔들리는 모래 위에 쌓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성들은 성령의 바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던 것처럼, 성령의 바람은 반드시 육화해 있는 누군가를 통해서 흘러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성령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진실과 성령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열린 문이 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 즉 성령의 바람이 인간이 만든 기구와 조직들을 산산조각 낸다고 하더라도, 열린 문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을 걷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성취해 감에 따라, 여러분은 이 행성에서 추락한 존재들이 만든 환상과 거짓말 그리고 조직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자신이 하지 않으셨다면, 이 행성은 자멸로 이어질 수 있는 하향 나선 속으로 일시적으로 들어갔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신성을 온전히 성취한 한 개인이 지구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상향 나선을 충분히 가속화시킬 수 있었으며, 지구가 반대 방향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10,000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온전히 성취하고, 수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신성을 달성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예언, 즉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한복음 14:12)”라는 예언도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따를 수 있는 길도 벌써 개척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추락한 의식과 추락한 의식을 지구에서 구현하고 있는 존재들에게 도전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진리와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는 열린 문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순식간에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역시도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을 따랐으며, 육화해 있는 추락한 존재들에게 과감하게 맞서고, 그들을 마귀의 아들들(sons of the devil)이라고 부르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실험 및 두려움을 체험해야 했었습니다.


하나의 주요한 입문과정은 광야에서 금식을 마친 후, 마귀에 의한 유혹이었으며, 마귀는 광야에서 심지어 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예수님에게 주어, 이를 다스리도록 하겠다(마태복음 4:8)고 제의함으로써, 예수님을 꺾으려고 했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대리인에게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자제(自制) 하셨다면, 이 행성의 종교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이상(理想)에 따라 이에 맞는 조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하며, 조직에 의해 강요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의 오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길로 가도록 강요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으며, 내면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습니다(마태복음 7:13).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비-이원성적인 진리를 증거하고, 자신이 지닌 빛을 비추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단호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바위 위에 서야 하며, 그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던진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바위에서 내려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가르쳐준 무-집착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는 또한 붓다의 사례를 통해 여러분이 배우기를 바랍니다. 보리수나무 아래 고타마께서 어떻게 앉아 계셨는지 살펴보기 바라며, 붓다께서는 니르바나(열반)에 들 준비가 되자, 마지막의 입문과정을 통과해야 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마라(Mara)라는 악마들, 즉 이 세상의 세력들, 이원성적인 의식의 대리인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붓다를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유혹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붓다께서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되었다면 붓다께서는 이원성적인 게임에 갇히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타마께서는 유혹을 거부하고, 최종적으로 지구에서 붓다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한 손을 땅에 대고, “바즈라(Vajra)”라고 명령을 외쳤으며, 이것은 이원성 속에서 비-이원성적인 의식 상태를 구현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고타마께서 지구에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붓다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증거하기 위해, 땅 자체가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바즈라 : 원래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인드라)의 무기이다.

            금강저의 원어는 바즈라(금강저金剛杵, Vajra)로 번개나 벼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열반에 드신 이후에도, 붓다께서는 또 다른 입문과정, 즉 또 다른 유혹에 직면해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높은 의식 상태는 성취했지만, 또다시, 이원성적인 의식은 다른 사람들이 비-이원성을 이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믿도록 유혹했습니다. 따라서 붓다께서는 지구를 남겨둔 채, 영적 세계로 들어가셔야 하셨으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구는 이원성적인 세력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깨닫게 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님으로써, 이러한 입문과정을 통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모든 것이 붓다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마음속에 확고하게 지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구에서 될 수 있는 권리를 이원성에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이 말살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비-이원성적인 진리를 증거하고, 자신의 빛을 비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을 걸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지구에서 그리스도나 붓다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벽을 쌓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여러분 속에는 이원성에 저항하거나, 자기 초월에 저항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위해, 완벽한 무집착의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이원성적인 세력들에게 투명하게 보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여러분을 공격할 거란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어야 하며, 예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인간의 에고가 지닌 본질은 생명의 강에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항함으로써, 여러분은 생명의 강이라는 흐름에 장애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며, 이원성적인 세력들은 이러한 장애물을 여러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데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항하는 것은 표적(target)이 될 것이며, 이들이 표적을 공격함에 따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분은 더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더 강한 저항의 벽을 쌓게 되고, 그들은 더 심하게 여러분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벽을 더 두껍고, 더 높이 쌓아야 하며, 이로 인해 여러분은 이원성적인 세력들에게 저항하는 끝없는 이원성적인 게임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이원성에 저항함으로써, 또한 여러분은 삶에 저항하게 되며, 따라서 이원성적인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벽들이 실제로는 여러분을 이원성적인 마음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출구, 유일한 출구가 어떤 것일까요? 글쎄요, 그것은 생명의 강과 자기 초월에 저항하지 않은 것이며, 그 대신에,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 즉 영속적이며, 영원한 자기 초월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원성에 저항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 초월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왜냐하면 이원성적인 세력들은 이원성의 세계, 즉 이원성적인 진동수를 뛰어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여러분을 해칠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존재 속에 이원성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분을 해칠 때, 그들의 공격에 벽을 쌓은 것은 낮은 반응입니다. 하지만 높은 반응은 여러분을 취약하게 만드는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찾아내서,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생명의 강과 함께 흐르게 될 것이며, 영적인 빛을 기원하고, 이원성적인 환상들을 버림으로써, 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장애물들도 점차적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위로 올라가는 길에 있게 될 것이며,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이원성적인 세력들에게는 점점 더 투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러분과 관계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왕, 즉 이원성적인 세력들이 오나, 여러분과 관계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이들은 어떤 식으로도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30)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그들의 공격과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감과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의식을 말살하려는 이들의 기도에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동정하거나, 혹은 그들이 쌓아온 조직들을 제거함으로써. 여러분이 가치 있는 것을 훼손하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려는 이들의 시도에 넘어가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출처] KEY 33 :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온전한(non-dualistic) 복음 설교 (2/4)|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