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진리를 증거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이원성적인 믿음들을 노출시켜, 도전에 직면하도록 해야 할 권리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고에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지구에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원성적인 투쟁을 부채질하지 않고, 이렇게 해야 하며, 따라서 개인적으로 이원성적인 투쟁에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타인들이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이원성적인 반응에 끌려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늘 그렇듯이, 이원성적인 반응에도 두 가지가 있으며, 하나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뒤로 물러나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개인이 얼마나 깊숙이 이원성에 갇혀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환상으로부터 그 개인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을 행하기 위해, 여러분은 두 가지의 반응 모두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부드럽고, 이해를 증진시켜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열정적이고, 고무적인 것이 가장 좋을 수가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직접적이지만,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일깨우는 한 가지 방법은 그 개인의 마음 둘레에 에고가 견고한 벽을 쌓아 왔으므로, 벽을 뚫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 벽을 뚫고 들어가,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적인 자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적인 자아는 대개 동화 속에 나오는 잠자는 공주와 같습니다. 이 의식적인 자아는 못된 새어머니, 즉 에고에 의해 잠이 들어 있으며, 가시덤불, 즉 이원성적인 환상들과 심리적인 상처들 뒤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의식적인 자아가 종종 이원성적인 정체성과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잠에서 스스로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호벽을 관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며, 이원성에 대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적인 자아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원성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우 직접적이고, 아주 단호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어야 하며,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여러분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들을 통제하려는 에고 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이들에게 이의(異議)를 제기하면, 무의식적으로 이들은 여러분을 통제하려고 들게 됩니다. 여러분이 - 아마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이러한 통제에 굴복하게 된다면, 이들은 에고의 환상 속에서 단지 자신들의 믿음만을 강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우월성에 빠져 있다면, 그들에게 굴복함으로써, 그들이 우월하다는 환상은 분명히 더욱 공고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며, 여러분을 침묵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이원성적인 투쟁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여러분을 침묵하게 하려는 그들의 시도에 마땅히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절대로 그들이 잘못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단지 여러분의 진실을 계속 반복해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 그대로 철저하게 에고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반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언제나 효과가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은 타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선택하도록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란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회를 제공할 때, 타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든 관계없이, 여러분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에고에 갇힌 정도가 덜한 사람들에게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비-이원성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함으로써, 에고의 허를 찌르는 것으로 충분할 수가 있습니다. 에고는 이원성적인 논리를 사용하여, 어떠한 도전이든 능수능란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으며, 자신의 믿음과 행위들을 정당화할 수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분석적인 혹은 이성적인 사고(思考)로는, 절대로 에고를 압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원성적인 논쟁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이원성에 의해 지배당하자마자, 영적인 목적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원성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서, 비-이원성적인 형태의 논리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의 영적인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화두를 제공함으로써, 가르치게 되는 것이며, 이 화두는 분석적인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입니다.


실생활과 관련된 현실적인 화두를 제공해줌으로써,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여러분이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과 삶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어느 정도 성취하고, 이원성과 비-이원성 간에 차이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나면, 이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가 않습니다.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제거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환상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이원성은 언제나 두 개의 반대되는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원성적인 관점은 전혀 독립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일관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믿음이 논리적인 극단으로 흐르게 됨으로써, 대개 이러한 믿음이 지닌 결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일부의 사람들은 이원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영감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말없이 절망과 침체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정말로 이곳에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낙천적이고, 불타는 열정으로, 온갖 핑곗거리에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항상 노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나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러한 영적인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동의하겠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인 길과 관련하여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동적인 자세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데에는, 커다란 인내심과 단호함이 필요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뜨겁거나, 차가운 사람과 일하는 것이 보다 더 쉬우며, 반면에 미지근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16)


에고가 숨어서, 에고 게임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에고와 에고의 습성에 대해 실제로 공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때, 이러한 환경은 촉매제가 되어, 더 큰 영적인 조직으로 퍼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참된 친절에 기초하여, 세계적인 종교 논쟁의 분위기(tone)도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절은 사랑스럽지만, 에고가 뒤에 숨어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에 전념하고, 자신들의 삶을 비인격화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될 때, 많은 영성인이 동경하고 있는 것, 즉 상승한 호스트들이 지구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가 있으며, 그것은 진정한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및 종교적인 운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정확히 말해, 이것은 이들이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기억의 일부를 내면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공동체는 오로지 개인들이 하나가 되는 길을 따를 때에만, 달성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근원과, 그리고 자신의 상위 존재와 어느 정도 하나가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도 참된 하나됨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인해, 공동체라는 개념도 왜곡될 수가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거짓된 욕망이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아주 많은 경우에, 영적 및 종교적인 운동들이 잘못된 공동체를 구현했으며,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 리더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 엘리트층을 형성했으며, 구성원들은 맹목적으로 이들을 따르는 형태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역학관계를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종교적인 공동체는 종종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이러한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는 권력 게임과 기타 에고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형적으로 이러한 공동체들은 매우 경직화되며, 외적인 규율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상적인 숫자가 얼마인지에 대해 정신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되며, 그런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모형에 맞추도록 강요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다 성숙한 영적인 구도자들은 맞춰지기 위해, 마치 구속복(straightjacket : 정신 이상자와 같이 폭력적인 사람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입히는 것)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며, 빠져나오고 싶어 하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개체성을 억압해서는,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상위 존재들과 접촉할 수 있는 옷을 입게 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들이 지닌 신성한 개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일부의 영성인들 사이에는, 집단적인 구원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이 어떠한 외적인 공동체의 회원이 되어, 규정을 잘 따르기만 하면, 구원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 얼마나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지 와는 관계없이, - 절대로 실현될 수 없으며, 자동적인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에고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에고의 꿈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원은 세속적인(지구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가 되는 길은 개인주의에 입각한 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영적인 개체성을 발견해 감에 따라, 어떠한 공동체에 함께 하고, 타인들과 함께 일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위협을 느끼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보병궁 시대는 공동체의 시대이며, 지금은 영적인 사람이 홀로 세상을 배회하고, 산속 동굴에 혼자 앉아 있는 이미지는 불식시켜야 할 때입니다. 영성인들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일하면서, 자신들의 개성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과제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개별적인 존재들이지만, 진정으로 공동체의 정신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부의 영성인들이 혼자 있고 싶어 함으로써, 거리감을 두려는 교묘한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는 에고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영성인들에게 공동체가 필요한, 두 가지의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여러 차례 설명했던 것처럼, 간단한 사실은 타인들을 돕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공동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관념의 틀 속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타인들이 도울 수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가 되는 길을 따르고자 적극적으로 애쓰고 있는 사람들과 서로 교류함으로써, 여러분은 서로가 이원성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모델은 붓다와 예수님께서 설립하셨던 것이 될 수 있으며, 하지만 보병궁 시대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붓다께서는 자신들을 따랐던 어떤 추종자들보다 훨씬 더 앞서 가셨으며, 따라서 이 두 분께서는 분명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두 분께서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셨으며, 그 외의 모든 구성원들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다가서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각자가 독립적으로,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닌 채, 모두가 함께 일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이 지구에 복제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공동체는 높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리더와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상적인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 즉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요한복음 5: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한복음 14:10)”이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영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특히 영적으로 가장 진보해 있는 구성원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을 통해 일하고 있는 것은 성령이며, 성령은 임의로 불어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