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0%의 사람들이 실현해야 할 몇 가지의 구체적인 변화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은 외적인 교회가 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가 지닌 주요한 목표는 언제나 의식의 변형이었으며, 이 시대에서는 자기계발 운동(self-help movement)을 통해 이러한 실례(實例)를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상위 10%의 대다수는 이미 이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의식을 변형시키고 있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통적인 혹은 주류의 종교들이 이러한 개념에 그토록 저항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상위 10% 중에서 대다수는 아주 명확하게 영적인 진리를 보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여러분에게는 명백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하기에 앞서, 그들이 눈이 멀어 있으며, 눈이 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명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원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여러분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필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변형시키도록 돕는 거라는 개념은 눈먼 리더들과 이들을 따르는 추종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개념이 열등감과 우월감의 토대가 되는, 깨어지기 쉬운 환상에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원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면, 눈먼 추종자들의 입장에서는 리더들이 자신들을 더 이상 구원해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지 않을 구실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리더들의 입장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했던 우월감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 개의 그룹들은 개인적인 변형이라는 개념과 종교가 자기변형을 위한 도구라는 것에 대해 거세게 저항하게 되는 이유를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외적인 종교와 종교의 리더들이 필요하다는 개념을 고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위협적이지 않고(non-threatening), 또한 이들이 지닌 기본적인 환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이유로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으로 들어가야만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으며(마태복음 7:5),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는 인간의 에고와 에고가 지닌 추론의 능력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석될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이원성적인 추론의 능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온몸을 빛으로 채우게 하는 바른 눈(single eye), 즉 비-이원성적인 그리스도의 비전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눈먼 추종자가 되지 말라고(마태복음 15:14) 말씀하셨으며, 자신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게 될 거짓된 리더들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24)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들 속에는 개인적인 변형을 이루기 위해,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길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노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분야는 모든 교회에서 여성들에게도 동등한 지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성들의 추락에 대해, 여성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이 추락으로 이어지는 선택을 자기 스스로 했던 것입니다. 이브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체 존재 중에서 여성성, 즉 하위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영적인 자아는 남성의 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하위와 상위 존재라는 여성과 남성의 극성은 이번의 생에서 여러분이 입고 있는 육체의 성(性)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생에서, 여러분은 남성과 여성의 몸, 모두의 성으로 육화했으며, 따라서 추락에 대해 여성을 비난하고, 교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를 떨어뜨리는(secondary positions)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은 성경에 언급된 말에 기초하고 있지만, 이러한 말이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남성 지배의 문화가 만들어낸 왜곡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적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또한 지금이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모든 교회에서 여성들도 어떠한 직책이든, 가질 수 있게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사실, 두 개의 성(性)들 간에 불평등, 심지어 갈등은 이원성적인 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추락한 존재들이 사용하는 책략은 언제나 사람들을 나누는 것이었으며, 다시 말해 사람들이 서로에게 맞서 나뉜 집이 되게 하고, 그룹들을 서로 적대시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서로 적대시하게 함으로써,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에고 게임에 불과한 것이며, 황금시대가 구현되기 이전에, 반드시 중단되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일할 때에만, 비로소 이들과 이들의 사회가 지닌 잠재력이 최대로 발휘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여성들이 억압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종교를 포함하여, 사회에서 보다 중요한 요직에 중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역할을 바꾸어서, 그동안 남성이 누려왔던 우월한 역할을 여성이 차지하거나, 아니면 여성이 남성을 억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모든 면에서 여성이 완전히 동등한,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며, 그래야 인간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극성 간에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여성은 여성이 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남성 우위 문화에 순응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인 척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지닌 독특한 특성들을 존중하고, 이러한 특성들이 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러한 사회입니다.


종교에서 경전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 경전에 들어 있는 많은 이원성적인 믿음들을 조사하여, 이러한 것들은 비-이원성적인 개념으로 대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이미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가 있지만, 간략하게 요약하기에 앞서, 모든 종교의 경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경전은 단지 이러한 사람들의 의식 상태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인도해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전을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경전에 접근하는 방식은 실제로 하나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사실상 “오케이, 하나님, 당신께서는 성경을 주셨지만, 우리는 절대로 당신께서 어떠한 추가적인 계시(啓示)도 전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우리와 관련해서는, 인류에게 두 번 다시 말씀하시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이러한 사고방식은 추락한 의식에서 뻗어 나온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며, 하나님과 이 세상을 차단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 세상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일하실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열린 마음과 가슴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 상승한 호스트들이 언제든지 새로운 계시를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이 세상 속으로 흐를 수 있는 열린 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경전을 태어나게 하셨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로지 한 번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논리인가요? 글쎄요,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추락한 존재들이 이 행성에서의 종교적인 삶을 떠맡음으로써, 하나님과 상승한 호스트들을 방해하여, 인류가 이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이 경전을 필사적으로 고수하려고 하는 데에는 현재의 상황을 뒤집어엎을 새로운 계시가 내려오지 못하게 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고수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은 추락한 존재들과 거짓된 신들뿐입니다.


상승한 호스트들로부터 새로운 계시가 시급하게 내려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로 인해, 많은 문제들, 즉 어떤 계시가 올바른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와 같은 문제들이 - 어떤 계시가 상승한 호스트들로부터 나온 것이고, 어떤 계시가 거짓된 신들로부터 나온 것인지 - 생겨나겠지만, 이러한 것은 핵심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문들에 대해 고심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연마하게 되고,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전들을 소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데 맹목적으로 집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에 더 가까이 다가갔던 존재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구축된 모든 우상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누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없게 하고, 그들이 지닌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성에서 예수님과 같은 또 다른 존재를 절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행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가장 영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증명해야 할 때입니다!


종교가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5000년 전에, 심지어 2000년 전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인간의 마음 상태를 포함하여, 세상과 자신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삶의 영적인 측면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더 좋은 토대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분명히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록된 역사에서, 인류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더 높은 계시를 상승한 호스트들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종교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믿음들 그리고 의식(儀式)에 대해 분명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원성적인 투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도 과학으로 인한 유익한 효과들 가운데 하나는 자연계가 이치에 맞으며,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법칙들에 의해 유도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과학은 어떤 것이 신비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아직까지 사람들이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주었습니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그리고 실험을 통해, 사람들은 이해를 증진시킬 수가 있으며,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현상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삶의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종교인들도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은 과학이나, 대다수의 종교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고차원적인 영적인 법칙들을 사용할 수 있는 의식 상태에 도달했던 개인에 의해 시연된 것이며, 그러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과학이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들을 무력화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삶의 영적인 측면에 대해, 합리적이고, 일관되며, 알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책이 증명해주었기를 바랍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건 수수께끼야!”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의문을 무시함으로써, 자신들의 교리를 고수하려는 태도는 더 이상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는 비밀이 없으며, 자신의 후손들에게 숨겨야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의식을 성취해 감에 따라,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여러분에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의식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원성이라는 베일 너머를 보고자 할 때까지, 하나이신 하나님의 실체를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을까요?


앞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오로지 이원성적인 세력만이 숨겨야 것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종교 속에 신비감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비감은 단지 많은 종교의 교리들이 이원성적이며, 따라서 모순되거나, 아니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숨기기 위한 연막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들을 계속해서 믿게 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종교인들이 질문을 한다고 해서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때입니다. 사실, 질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러분은 사람들이 “삶(life)”이라 부르는 이원성적인 지옥에 남기로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정신적인 틀 속에 갇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을 위해 추락한 존재들이 만들어놓은 정신적인 감옥에 갇히고자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종교가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교리와 문화 그리고 관행에 대해서 일관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아니면 종교가 이치에 맞도록 개혁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들은 이치에 맞으며, 따라서 종교의 교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실체와 일치하지 않거나,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원성적인 세력들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겉모습 뒤에 숨지 못하도록 혹은 완벽한 논리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지옥으로 가게 될 거라는 두려움 뒤에 숨지 못하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과학으로부터 어떠한 교훈들을 배우고, 그러한 교훈들을 종교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체험들을 조사하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체험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심지어 사람들이 그러한 체험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게 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삶에 있어, 그 외의 많은 측면들이 과학에 의해 검증될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공공연하게 싸움(open warfare)을 벌이는 현재의 풍토에서, 과학은 너무 유물론적이어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적인 현상들을 감히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과학계와 종교계에 자리 잡고 있는 거짓된 리더들에게 도전함으로써 바뀌어야만 합니다.


확실하게 말해, 과학 역시도 추락한 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말살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기원(起源)과 잠재력을 부정하도록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잘못을 증명하고자 하는 추락한 존재에게는 유물론적 과학은 가장 강력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이원성(non-duality)이 종교를 개혁하기 시작한 것처럼, 과학도 마찬가지로 개혁될 것입니다. 과학계에는 삶에 대해 영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의 숫자가 임계 수치에 도달하기까지는 단지 시간의 문제이며, 과학에서 유물론적인 속박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내 관심은 종교 분야에 대한 개혁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사회의 기타 모든 측면들을 개혁하게 만드는 진정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여러분은 하나님과 영성(靈性)에 대해 어떠한 의문이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정말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종교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의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다면, 그러한 가르침을 뛰어넘어 보고자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짓된 스승들이 정신적인 틀(mental box) 속에 여러분을 가두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틀로 인해, 여러분은 갖기를 바라는 답만을 얻게 되며, 그러한 답으로는 현재의 상황을 뒤집을 수 없으며, 현재의 상황 속에서 이들은 이 행성에서의 삶을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이해의 문은 여러분에게 열릴 것입니다. (마태복음 7:7) 왜냐하면 감추어져야 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