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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27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나
김갑수 | 2014-10-16 13:50:2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김일성은 어떻게 해서 집권할 수 있었나

 

1948년 8월 15일 남에서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약 3주 후인 9월 9일 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분단은 확정되었다. 이승만이 1875년생인데 비해 김일성은 1912년생,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37살이나 되었다.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개최된 평양군중대회에서 첫 모습을 나타냈을 때 나이는 불과 33세, 시쳇말로 그는 새파란 젊은이였다.

 

‘김일성 장군’ 하면 으레 백발이 성성한 노 혁명가를 연상했던 순진한 사람들에게 바리캉을 사용하여 깎아지른 것 같은 헤어스타일의 청년 김일성은 도무지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이것은 유격투쟁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당시 남측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60, 70대 고령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33세 청년 지도자의 모습은 낯선 것이 사실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역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김일성이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김일성은 한인들이 갈망하는 단결을 꾀하고자 시도하면서 민족주의와 혁명을 결합시키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고, 둘째 김일성은 그의 많은 선배나 동료들이 일제에 죽음을 당하거나 체포된 데 반해 자기 보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며, 셋째 김일성은 이미 1945년 이전에 전쟁 이후 한국 정치에 관련된 모든 주요한 세력들, 즉 일본인, 한국인, 소련인, 미 국무성까지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러 김일성은 중요하고 인정받은 항일 한인 게릴라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71쪽)

 

 

하지만 집권 투쟁은 독립운동과 또 다른 성격을 갖는다. 나는 이승만의 집권은 물론 김일성의 집권에서도 외세와의 함수관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오히려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지원보다 더 명료했고 능률적이었다.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연구센타 소장 선즈화(沈志華) 교수가 집필한 『조선전쟁의 재탐구』에서는 8.15 이후 김일성이 북의 최고 지도자로 올라서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기술되어 있다. 미국이 이승만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련도 김일성을 처음부터 지도자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승만과 김일성은 공히 약소국의 지도자였지만 강대국 앞에서 결코 호락호락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다만 이승만이 사용한 무기는 미국 인맥과 로비 그리고 권모술수와 영어 실력이었다면 김일성의 무기는 명분과 정치력과 러시아어 실력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일성은 1941년 러시아에 들어간 이후 러시아어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초 소련 태평양함대 푸카초프호에 탑승해 원산으로 입북했다. 10월 10일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기관지에는, “반동분자들이 두려워하는 김일성 동지가 돌아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이 돌아온 것은 조선 혁명사업의 크나큰 역량임은 의심할 바 없다”고 보도했다.

 

김일성은 10월 14일 평양군중대회에서 조만식과 함께 연설했다. 그러나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지와 지도로 설립된 조선중앙관리기구인 북방5도 행정지도국 지도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위원장은 조만식이었고 당시 김일성의 공식 직책은 평양경비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소련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정책을 고수하려 했다. 그래서 자산계급 정부를 수립하여 미국과의 협조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소련이 처음에 조만식을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시기에 미국이 소련과의 협력보다는 반공냉전정책으로 급격히 변환한 데에 있었다.

 

조만식은 모스크바의 권고를 듣지 않고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심지어 남측 이승만과 김구가 벌이는 반탁운동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에 소련은 조만식을 실각시키고 연금 조치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자 조만식 역시 남측의 김구처럼 민족의 자존심만을 세울 줄 알았지 강대국 힘의 역학관계를 읽는 안목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소련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는 조만식 대신 김일성을 추천했다.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면서, “조선은 젊은 나라이니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당시까지 제1서기였던 김용범을 제2서기로 강등시키고 김일성을 제1서기로 선출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집권기반을 공고하게 다질 수가 있었다.

 

결국 이승만과 김일성의 집권은 남북분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은 이들이 집권했기 때문에 분단된 것이 아니라 미소가 조선을 분단시키기 위해 이들의 집권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유일한 핵보유국이 된 미국의 유일패권주의가 먼저 작동했다. 미국의 패권주의는 소련과의 협력 대신 공산권과의 냉전을 지향했고 이를 알게 된 소련도 냉전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 결과 우리 민족은 두 동강이 나고 만 것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나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세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이승만, 나 그리고 김두한이야.”

 

이것은 8.15 정국에서 ‘빨갱이’ 소탕의 주역이었던 당시 수도경창청장 장택상이 즐겨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이승만은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1인자이다. 그리고 그의 건국 사업에는 극우 파시스트 장택상과 깡패 김두한이 있었다.

 

요즘 뉴라이트와 조선일보와 일베들에 의하면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다. 조갑제 같은 이는 "이승만 대통령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세운 위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은 이승만동상·이승만기념관·이승만거리·이승만 공원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사실 이승만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좌·우에 따라 갈라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좌파는 이승만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파 내부에서도 갈라진다. 일찍이 우익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이승만을 가리켜 '희대의 협잡꾼이자 정치적 악한'이라고 한 반면, 김활란은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 가지 주제로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나?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알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독립유공자 최고 순위인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은 10,000명이 넘는 유공자 중 29명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안중근과 김좌진·김구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문창범이 주도한 노령정부 역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는 가장 허술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만든 한성임시정부 역시 이승만을 제1서열인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한민국 프레지던트’라는 명함을 만들고 집정관총재 집무실을 개설한다. 그리고 그는 한성임시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각료로 참여한 안창호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단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임시정부들이 독립운동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이승만을 왜 국가원수로 추대했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미스터리에 속하는 일이다.

 

구한말 과거에 다섯 번 낙방한 이승만은 뒤늦게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 개화파로 돌변한다. 그는 김옥균·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조교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정부전복죄로 투옥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나 도미한 후 학업에만 열중한다. 그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나라가 완전히 망한 1910년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기독교청년회(YMCA)와 감리교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되는 일을 한 기록은 없다.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두둔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의 재판에 통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장 의사의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등에도 거부감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그가 임시정부들에서 일제히 국가원수로 추대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송건호·이이화 등 이승만 연구학자들은 대체로 연장자를 우대했다는 점,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진단한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총장을 지낸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가까운 제자임을 은연 중 과시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증언이 많다.

 

이이화가 쓴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규식이 파견된 파리회의에 자신이 가려고 했다. 그가 파리회의의 한국대표를 자임하고 나서자 대한민국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한국 대표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의 제자라던 이승만은 끝내 파리행 여권도 받지 못했다.

 

파리회의 참석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난데없이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위임통치’를 건의한다. 1919년 3월 19일 자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것이다. 이 청원의 제출자는 이승만과 정한경으로 되어 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불신임되고 급기야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위임통치론이 빌미가 된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를 외면하던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가지게 되자 대통령 직함을 전제로 상해로 건너가 부임한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신채호)”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이동휘)”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팽개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임시정부로서도 현장에 근무하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교과서를 바꾸겠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내 공산주의 세력의 비토를 받아 탄핵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8·15까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랬던 그가 조국이 해방되자 74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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