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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美 잡지 ‘이것이 사과라면 한국은 국가 기능 더 이상 힘들어’
(뉴스프로 / 카운터펀치 / 2016-01-07)



美 잡지 ‘이것이 사과라면 한국은 국가 기능 더 이상 힘들어’


– 카운터펀치, 위안부 합의, 사과가 아니라 완전한 항복
–‘위안부 제도’ 홀로코스트 살인과 같은 규모
–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의 걸림돌 치워버려
– 박정희는 일제 관동군 근무 일본 식민주의 부역자
– 박근혜, 반대자에 박정희식 폭력적 탄압 가능


이런 것이 국가냐는 물음이 외국 언론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한국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치욕적이 지적이 나왔다.


미국의 진보적인 월간지인 ‘카운터펀치’는 이번 위안부 문제 해결을 두고 ‘이보다 완전한 항복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만약 이것이 사과라면 – 그래서 한국 정부가 피해보상 요구를 중단해야 한다면 -이와 비슷한 사과를 몇 번 더 받으면 한국은 국가로서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카운터펀치는 구랍 31일 ‘South Korea’s Betrayal of the “Comfort Women”-‘위안부’ 피해자 배신한 한국 정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배경과 실상에 대해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보도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기사는 이번 문제에 한국이 치욕적인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합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 미국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에 있어 한일 동맹국의 걸림돌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 미국의 막강한 압력이 있었음을 폭로했다.


카운터펀치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 ‘아버지가 나서서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라고 말해줘야 할, 서로 다툰 두 형제’처럼 ‘이번 합의는 그 꾸짖음의 최종 결과물로서, 두 아이는 자기들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에 필요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협조했다’고 표현했다.


이 기사는 미국이 뒤에 있음을 이해한다면 ‘대한민국 정치의 부조리하고, 자멸적인 행동, 자기학대적 무역 협정, 자기 파괴적 경제 정책, 엄청난 환경, 사회, 경제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부조리한 군사기지 건설, 최근 체결된 협약 등이 모두 분명하고, 예측 가능해진다’고 분석했다. 즉 말도 안되는 모든 결정의 뒤에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 있다는 이야기다.


카운터펀치는 기사 시작에서 위안부 역사에 대해 설명한 뒤 일본의 위안부 성범죄가 국가 규모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뒤 “위안부” 제도의 전시 매춘은 홀로코스트의 살인과 그 규모와 같다고 평가했다. ‘산업적 규모의 공장식으로 사육화한 강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이며 조직화되고 정당화된 인적 조달, 감금, 고문, 잔혹 행위, 성노예화, 그리고 폭력적 탄압이 행해졌다’고 일제의 전쟁 성범죄를 지적한 카운터펀치는 ‘전체적으로 성노예 여성들 4명 중 1명만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며, 이 사망률은 최전방 전투병사의 사망률 혹은 대서양을 횡단하던 노예무역 최절정 시기에 항해 중 사망한 아프리카 노예들의 사망률보다 더 높다’고 일제의 잔혹한 전쟁범죄를 폭로했다.


카운터펀치는 생존 위안부 할머니들의 요구 중 어떠한 것도 이번 합의에서 (또는 그 이전의 사과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며 군이 “관여된” 이라는 모호한 진술만이 있을 뿐 그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고 인정하는 부분은 없다고 지적했다.


기사는 나아가 아베 정부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위안부 여성들의 자발적인 매춘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해, 고노 담화에 있던 “강제적”이라는 진술을 삭제했으며 직접적인 법적 배상금 대신 (하찮은 금액의) 돈을 기금에 기부한다고 했다며 이번 합의에 대해 ‘이보다 완전한 항복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이것이 사과라면 – 그래서 한국 정부가 피해보상 요구를 중단해야 한다면 -이와 비슷한 사과를 몇 번 더 받으면 한국은 국가로서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카운터펀치의 기사 중 주목되는 부분은 한국에서 이번 합의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국민적 반발에 대해 박정희 시대의 폭력진압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폭력적 진압사태가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내다본 점이다.


이 기사는 ‘과거 한국 역사는 이 합의가 미국의 영향을 받거나 미국의 손에 놀아나는 우익 정부가 추진한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이고, 평판이 좋지 않은 조약들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경우 이러한 협약들은 유혈사태와 폭력을 이용해서만 이행되고 관리될 수 있었다.’고 상기 시킨 뒤 ‘군사독재자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 관동군에 근무한 일본 식민주의 부역자였으며 1965년 6월 이 한일협정을 통과시켰고 이와 함께 한국의 모든 보상 요구를 포기했다. 한국인들은 저항과 분노로 폭발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협정을 비준하고 이행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 명의 시민을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고문했다. 딸 박근혜는 지금 똑같은 암울한 역사를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카운터펀치는 ‘아베 정부는 위안부 여성 동상 주변에서 탭 댄스를 추며 무기고로 향하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는 약간의 푼돈 외에는 준 것도 없고 사과하거나 체면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노 선언으로부터 사과 수위를 약간 내렸으며 그러면서 마침내 한국 정부를 침묵하게 만들었고, 한국 정부는 한국 국민을 입 다물게 할 것이다’며 ‘그 결과 일본은 지난 반세기에 걸친 평화주의자로서의 무기력과 나약함을 청산하고 파시스트 부활과 군재무장을 위한 전초 기지를 명확히 했다’고 이번 위안부문제 해결을 평가했다.


또한 미국이 ‘아시아로의 선회를 하든 하지 않든 일본의 지니를 불러내는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며 ‘중국과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사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광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났다고 경악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경고했다.


이제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위안부 문제합의라는 국가적 치욕은 외국 언론의 눈에도 국가적 존재이유를 찾지 못하는 단계에 까지 온 것으로 보이는 것이 확실하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이번 합의의 본질적인 성격과 배경, 미국의 속내와 일본의 야합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이 기사는 지금까지 나온 위안부 합의 기사 중 가장 빛나는 기사로 평가받고 있어 일독을 권한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카운터펀치의 기사전문이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PAJh1n



                  ‘위안부’ 피해자 배신한 한국 정부


외교적 담합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 장관들은 갑자기 서둘러서 2차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서 인신매매되고 착취당한 여성들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안”을 발표했다. 이 해결안에는 일본 총리의 사과와 배상금 기금 조성이 포함됐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 당국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일본 외무상은 말했다. 또한 10억 엔(830만 달러)이 46명의 생존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약속되었다.


그러나 전 위안부 여성들과 활동가들은 그 합의는 “배신”, “졸속”, “허위”라고 부르며 그 합의를 거부했다. 그들 몇몇은 공개적으로 울기까지 했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국 외교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한국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주요 활동 단체들 중 하나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월요일의 합의가 “충격적”이라고 말하며 “한국의 굴욕적 외교다…그 합의는 위안부 여성들과 한국인들의 바램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다..그 합의는 지난 25년간 쌓아온 것을 헛되게 만든다”고 했다.


전 위안부이자 잘 알려진 활동가인 이용수 할머니 또한 그 합의를 비난했다. “이 합의는 희생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루어졌다. 나는 그 합의를 전부 무시한다”고 이 할머니는 말했고 한국 외무부 장관을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왜 여전히 만족하지 않는가? 세계 언론은 칭찬하고 미 국무부는 신속하게 그 합의를 환영했고 홍보했다. 표면적으로 위자료 혹은 보상금과 사과의 편지를 포함한 그 합의는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그 합의가 7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늦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위안부 여성들이 도대체 무엇을 더 원한단 말인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감춰진 세계가 열리다


이른바 “위안부 여성”은 1932-1945년 사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아시아 전역, 주로 11개의 일본 식민지 국가로부터 수십만 명의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사전 계획되고, 조직되고 제도적으로 실행된 인신매매와 성노예 제도였다. 그 제도가 진행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첫 시작은 일부 직업 윤락녀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곧 여성에 대한 성착취의 산업적 시스템으로 발전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커지면서 근대사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성적 잔혹 행위가 수반됐다. “위안부” 제도의 전시 매춘은 홀로코스트의 살인과 그 규모와 같다: 산업적 규모의 공장식으로 사육화한 강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이며 조직화되고 정당화된 인적 조달, 감금, 고문, 잔혹 행위, 성노예화, 그리고 폭력적 탄압이 행해졌다.


전쟁 후, 이 만행의 역사는 정책, 정치 그리고 편견 등이 한데 어울려 망각을 불러오며 기록에서 사라졌다. 고문, 구타, 신체 훼손 그리고 하루 최고 50차례의 일상적 강간을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들은, 퇴각하는 일본 병사들에 의해, 전쟁 범죄의 증거를 숨기려는 의도로, 종종 총살당하거나 수류탄으로 살상됐다. 다른 40%의 위안부 여성들은 성노예로 착취당하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성노예 여성들 4명 중 1명만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며, 이 사망률은 최전방 전투병사의 사망률 혹은 대서양을 횡단하던 노예무역 최절정 시기에 항해 중 사망한 아프리카 노예들의 사망률보다 더 높다. 이것이 “위안부 여성” 문제를, 공인받지 못하고 배상받지 못한 20세기 최대의 전시 잔혹 행위 중의 하나로 만든다.


사실상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노예로 납치를 당하고, 징발되고, 꼬임에 빠지고 팔려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 대부분의 기록은 응징을 두려워한 관계 당국자들에 의해서 파기됐다 – 그 숫자는 일반적으로 수십만 명에 이른다. (서로 다른 자연감소율은 그 불일치를 설명한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은 위안부 제도가 일본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계획되고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식민지를 멀리 벗어나 여행하기 위해서 군 당국이 발급하는 비자와 여권을 받아야만 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군함과 수송선으로 이동되었다; “위안소”는 주로 군대 (혹은 군대의 하청업체)에 의해 군사기지 내부 혹은 인근에서 운영되고 관리됐다; 그리고 군의관들이 여성들을 “검사”했고 또한 그 여성들을 이용해서 한 여성이 몇 번이나 강간을 당할 수 있는지, 어떻게 성병이 전염되며 예방될 수 있는지 등을 연구하는 실험을 했다.


일본제국 회계 지침은 위안부 여성들을 군사 물품의 일부로서(변질되기 쉬운 상품으로서)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에 대한 훈령을 만들고 장교와 사병들의 성욕구 해결을 조정하기 위한 일정 기록부와 비용계획서를 발행했다. 민간 중개인이나 기업가들이 일본 군대를 위해 자발적이고, 자유시장 원리를 따른, “오락” 사업을 창출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은 전쟁 중 일본 군대의 병참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그리고 쇼와 시대에 일본 정부는 분배와 공급 조달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조달, 분배, 공급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시하고 통제하는 지휘 경제 체제를 갖춘 파시스트 군부 독재였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쌀, 자원, 노동력, 혹은 여성 등의 할당량이 공문으로 주어지고 식민지는 이에 복종해야 했다. 이러한 고도로 통합되고 조정된 착취와 인신매매 제도는, 그리고 무자비한 조립라인식의 강간은 오늘날 “효율적”인 관리와 생산 시스템의 전조였고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인 성매매의 표본과 본보기가 되었다.


70년 동안 일본 정부는(미국의 지원과 원조를 받으며) 위안부 제도의 존재를 부인했다. 소수의 살아남은 여성들은 질병, 악몽 그리고 심신을 허하게 하는 고통과 수치에 시달리며 어둠 속에 몸을 감추었다. 그들 대다수는 극도의 성폭력으로 불임이 되었고 많은 이들은 망가진 육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그런 다음 1991년 한 한국인 여성이 그 침묵을 깨고 자신을 드러냈다.


“한 여성이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세상이 열릴 것이다”고 시인 뮤리얼 루카이저가 말했다. 김학선이 바로 그 여성이었으며,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그녀는 한국과 일본 역사의 폐쇄된 세상을 활짝 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나눌 용기를 주었고 그들은 천천히 머뭇거리며 앞에 나와, 반세기의 수치스러운 침묵과 분노의 짐을 깨고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을 비난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라고 천황에게 말하라”고 한 위안부 여성이 말했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이구동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범행의 증거가 불거지면서 이를 부정하려는 부담감이 시인하는 창피스러움보다 더 커질 때까지 일본 정부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한국 내 친일파들의 방관과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일본 정부가 마침내 한 걸음 물러나서 1993년 모호하고 형식적이며 미약한 사과문을, 그것도 국가원수가 아니라 관방장관, 요헤이 고노가 발표했다.



가짜 사과와 진짜 사과


고노 담화는 일본 의회에서 약속하고 비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적 정당성을 지닌 공식 사과로 간주되지 않았으나 이 문제를 인정한 중요한 첫 단계로서 일부에서 환영받았다.


아무튼 이것은 앞으로 논의를 계속하기 위한 적절한 발판을 제공했다. (고노 담화가 보이는 모호성을 제거하기 원했던 현 아베 정부는 이번 의회에서 매우 선명하고 두드러지게 고노 담화가 공식적인 사과가 아니었음을 명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일본 정부는 또한 아시아 여성 기금이라는 민간 배상 자금이 마련되도록 도와 전쟁 피해자들을 의한 후원금을 모금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위안부의 대부분은 그 사과와 돈 둘 다 거절했다. 그들은 진정한 사과를 계속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매우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다음 방안들을 요구했다:


* 1932년에서 1945년 사이 일본 제국 군대에 의해 군대 성노예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할 것.

* 빈틈없고 완벽한 조사를 통해 범죄의 전면을 연대순으로 온전히 기록할 것

* 일본 의회로부터 정중하고 공식적인 사과.

*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합법적이고 완전한 배상.

* 전면 교육과 이 교육의 지속.

*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기념비 건립.

*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범죄자들의 기소.


이들 요구 중 어떠한 것도 이번 합의에서 (또는 그 이전의 사과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군이 “관여된” 이라는 모호한 진술만이 있을 뿐 그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고 인정하는 부분은 없다;


그 원인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 “아픔과 고통”에 대해 유감이라고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아베 정부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위안부 여성들의 자발적인 매춘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해, 고노 담화에 있던 “강제적”이라는 진술을 삭제했으며 직접적인 법적 배상금 대신 (하찮은 금액의) 돈을 기금에 기부한다고 했다;


(의회에서 상정되고 비준되는) 공식적인 사과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조사와 기소, 범죄에 대한 교육도 먼 이야기이며, “사과”는 한국이 앞으로 일본에 대한 비판을 멈추고 영원히 그만두어야 한다는 함구령을 수반한다; 위안부 소녀상은 철거되어야 하고; 이 쟁점은 일본 외무장관이 지겹게 반복해 말한 것처럼 “불가역적으로 종료”됐다.


이보다 완전한 항복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이것이 사과라면 – 그래서 한국 정부가 피해보상 요구를 중단해야 한다면 -이와 비슷한 사과를 몇 번 더 받으면 한국은 국가로서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이처럼 어이없는 합의를 수락하게 했을까?



광란으로의 선회


태양을 중력의 중심으로 두는 태양중심설을 전제하지 않고 행성의 궤도를 생각할 수 없듯이, 대한민국 정치의 부조리하고, 변덕스러우며 퇴보적인 움직임 또한 미국의 중력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대한민국 정치의 부조리하고, 자멸적인 행동, 자기학대적 무역 협정, 자기 파괴적 경제 정책, 엄청난 환경, 사회, 경제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부조리한 군사기지 건설, 최근 체결된 협약 등이 모두 분명하고, 예측 가능해진다.


지난 십 년간, 미국은 아태지역으로의 선회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미 그전에도 150년에 걸쳐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여기며 태평양 가장자리에 위치한 국가들을 자국의 현실 혹은 상상 속 속국으로 여겨왔다.


1882년 한미 첫 외교조약 체결자인 슈펠트 제독은 그 믿음을 과장되고, 젠더화된 미사여구로 표현했다 “태평양은 미국의 바다 신부이다–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은 신부 들러리들이다….미국인으로서 –신랑의 입장을 도모하자…상업적 라이벌이나 적대국의 국기가 벌을 받지 않고 태평양의 긴 놀을 떠다닐 수 없도록 하자… 이 대양 위에서 서양과 동양이 합쳐지고, 제국을 찾는 여정이 끝나고 인류 권력이 최고조에 이른다.”


(알레드 세이어 매한과 함께) 현대 전략 지정학적 사고의 시조인 헬포드 맥킨더는 비슷한 맥락에서, 하지만 좀 덜 과장된 산문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심장부” 혹은 “중심 국가” 혹은 “세계 섬”의 중심이라 일컬었다.


맥킨더와 매한의 이론은 국토 기반 권력 대 해양 기반 권력 이론으로 대조되지만 두 이론 모두 아시아 대륙의 중심을 전 지구적 지배에 필수적으로 봤다. “심장부를 호령하는 자가 세계 섬을 지휘한다. 세계 섬을 호령하는 자가 세계를 지휘한다”고 맥킨더는 썼다.


정부, 학계, 씽크탱크와 군부의 현대 국제 관계와 전략지정학 사상가들은 스스로 인정하든 않든 모두 맥킨더의 자식 (혹은 서자)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이 상승하고 맥킨더의 유령이 21세기 단일 권력 예측의 꿈을 좇는 가운데,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을 대변인으로 하는 전략지정학 사상가들은 임박한 지정학적 변동을 정찰했고, “아시아의 회귀”를 클린턴의 “미국의 태평양 세기”라는 2011년 글에서 주장했다: 이는 세계 섬의 중심 국가로의 귀환이었다.


“정치의 미래는 아시아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향후 10

년간 미국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외교, 경제, 전략적 그리고 그 외 분야에서의–투자를 현저히 증가하는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은 글로벌 정치의 핵심 동인이 되었다…. 이 지역으로의 전략적 선회는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을 유치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전반적 글로벌 노력에 논리적으로 부합한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 선회는 중국의 지역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미국 군사 세력의 60%를 아태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은 몇 가지 일례로, 최신 군사장비로 무장하고 혁신된 미군기지로 중국을 목걸이처럼 둘러싸는 것, 전쟁/공격 억제의 원칙(항공해상 전투/JAM-GC)을 구현하는 것, 기동 훈련과 군사 합동 훈련을 포함하는 양자, 다자적 군사 협력 조약을 체결하는 것, 그리고 전 지역을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재군사화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또한, 이것은 “항해의 자유”와 “공동 군사 훈련”이라는 명목 아래 이뤄지는 남중국해(중국의 핵심 해상 무역로)에서의 적대적, 공격적 그리고 도발적인 무력 과시적 군사 훈련, 미디어에서 중국을 끊임없이 악마화하는 정보 문화 전투(유엔 해양법협약의 중재에서 필리핀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미국이 후원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사항으로, 이미 제안된 태평양 횡단 파트너십 “무역” 협약을 통한 봉쇄, 고립, 그리고 경제적 전쟁을 포함한다.



속국들의 다툼


이 선회의 핵심은, 중국을 상대로 도전하고 제한하고 위협하며 필요하다면 끌어내릴 수도 있는 한국과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며 한국은 “교두보” 혹은 “연결도로”가 된다. 만일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면 모든 한국 군대와 장비 및 기지들은 군사협정에 의해 미국의 명령하에 들어간다. 일본은 얼마 전 일본의 평화헌법을 무효화하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공격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미국과의 군사합의를 격상시켰다. 공동 정보 공유 및 연계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상호 작전 대공방어 미사일 방어 시스템 또한 앞으로 다가올 급진적인 전략의 부분이다. ‘위안부’ 문제와 같은 마찰은 효율적인 군사협력에 장벽이 되고 있었다. 두 협력자들이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는 사이라면 아시아로의 통합된 중심축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이제 그 문제가 해결됐으니 선회는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다.


두 정부의 수장은 버락 오바마가 중재한 회의에서 2014년 3월에야 만났다: 아버지가 나서서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라고 말해줘야 할, 서로 다툰 두 형제처럼. 이번 합의는 그 꾸짖음의 최종 결과물로서, 두 아이는 자기들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에 필요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협조했다. 공개적이든 사적이든 미 국무부는 이번 화해를 위해 때로는 성질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말실수도 하며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이를 추진했다. 결국 미국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었지만, 후회할지도 모른다.

편리와 지정학적 자국 이익이 좋은 정책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역사 망각, 도의적 취약함, 그리고 아첨하는 노예적 태도는 재앙을 초래한다. 과거 한국 역사는 이 합의가 미국의 영향을 받거나 미국의 손에 놀아나는 우익 정부가 추진한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이고, 평판이 좋지 않은 조약들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경우 이러한 협약들은 유혈사태와 폭력을 이용해서만 이행되고 관리될 수 있었다.


1961-1979년 대통령이었던 군사독재자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 관동군에 근무한 일본 식민주의 부역자였다. 현재를 어렴풋이 예시해주는 상황으로, 동북아 지역에서의 중국 공산당 영향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로 인해 미국정책기획위원회 월트 로스토 위원장은 한국에 압력을 가해 1965년 한일정상화 협정에 조인하도록 했다. 로스토의 생각(그의 저서 “경제성장의 단계: 반공산당 선언”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은 동북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부상을 막는 보호장벽으로서 한국과 일본(그 외 동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적이고 서로 맞물린 강력한 자본주의 권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독재적 국가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계획으로 지지를 받을 것이며, 이 국가들은 수출지향적 개발양식에 초점을 맞추고 “도약”하여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할 것이고, 또 이런 국가들은 사회주의, 수입 대체, 국내 자생경제를 표방하는 독립운동의 부상과 맞서게 될 것이었다.


현 총리 아베 신조의 조부인 기시 노부수케는 쇼와 시대 산업장관이자 박정희가 일본제국의 부역자였을 당시 박정희의 멘토였다. 한일협정이 통과될 필요가 있자, 기시는 그 협상 과정을 위해 선발됐으며,그는 자신의 충성스런 이전 부하 장교인 박정희에게 협조를 구했고 박정희는 1965년 6월 이 한일협정을 통과시켰으며 이와 함께 한국의 모든 보상 요구를 포기했다. 한국인들은 저항과 분노로 폭발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협정을 비준하고 이행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해 수천 명의 시민을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고문했다. 딸 박근혜는 지금 똑같은 암울한 역사를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아베 정부는 위안부 여성 동상 주변에서 탭 댄스를 추며 무기고로 향하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는 약간의 푼돈 외에는 준 것도 없고 사과하거나 체면도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노 선언으로부터 사과 수위를 약간 내렸으며 그러면서 마침내 한국 정부를 침묵하게 만들었고, 한국 정부는 한국 국민을 입 다물게 할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지난 반세기에 걸친 평화주의자로서의 무기력과 나약함을 청산하고 파시스트 부활과 군재무장을 위한 전초 기지를 명확히 했다. 아베는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극우, 국수주의적,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5억 달러 예산을 들여 일본의 역사를 미화시키려 하며 그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제국의 영광을 꿈꾸는 일본인들의 꿈에 도전하는 어느 누구라도 난처하게 만들거나 겁주기 위해 달려든다.


아시아로의 선회를 하든 하지 않든 일본의 지니를 불러내는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치닫는 것, 그것은 그 어떤 사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광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났다고 경악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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